|
IV. 소크라테스 - 플라톤의 정의론 : 국가편을 중심으로
1. 구별의 무화와 정치철학
IV장을 시작하기에 앞서 II장과 III장의 논의를 정리해 보자. II장에서 논의된 쟁점은 두 가지이다; 첫째, 칼리클레스가 소크라테스와 논의하는 과정에서 제기한 퓌시스와 노모스의 불일치 문제, 둘째, 소크라테스와 트라시마코스가 논의하는 과정에서 제기된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문제. 이 두 문제는 발화의 주체는 다르지만 모두 도시 속에서 어떤 삶이 진정으로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라는 공통의 문제 의식 하에 서 있다. III장에서는 플라톤 (정치)철학에 대한 현대적 독해를 시도한 니체, 들뢰즈, 데리다의 사상적 정향이 중대한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반플라톤주의라는 큰 틀로 묶일 수 있으며, 그들 각각이 반플라톤주의 내부의 차이를 대변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했다.
앞서도 지적했지만, 철학이 아테네에 도입된 것은 이방인들에 의해서였다. 철학이란 말을 만든 이는 헤라클레이토스인데, 그는 소아시아의 에페소스 출신이었다. 그 이후 이방인들이 아테네에 모여들기 시작하면서1) 철학자라는 말이 탄생하고 그들은 도시와 철학에 대해 고민을 하게 된다.
우리는 철학이 원 뜻 그대로 지혜에 대한 사랑이라고 알고 있다. 여기서 지혜는 일차적으로 이론적 공간 내에서 사물을 구별 하는 능력이다. 이는 이론적 학문의 등장을 의미한다. 우리가 서양 철학의 시작은 탈레스에 두는 것도 주어진 사물을 그 근원으로 추구해 들어가 아르케를 탐구함으로써, 다른 것과 구별되는 그 자체의 특성을 알아내려는 사유가 시작되었다는 의미에서 그런 것이다. 그러므로 이론적 학문에서는 각각의 사물은 자기 동일성이 확보되어 타자에로 환원됨이 금지된다. 일자가 타자로 환원됨은 일자가 타자로 해체됨을 뜻하고, 각각의 사물의 자기 동일성에 입각해 구별함과 상반된다. 일자가 타자로 환원되고 해체되면, 반복과 보존은 불가능하다. 반복은 일자가 타자로 해체되지 않고 구별되는 경우에만 가능하며, 보존도 역시 동일하다. 플라톤의 철학에서 에이도스는 구별된 종이다. 모든 구별된 종은 저마다 자기 동일성을 지닌 일자이며 모든 타자로부터 독립하고 그러므로 자체성에 접근하여 접촉한다. 자체성에 접근하는 한 모든 에이도스는 동일한 차원에 선다.
그런데 플라톤 이전의 자연 철학자들은 만유를 만유 속에 있는 어떤 일부분으로 해체시킨 사람들이다. 그들은 만유의 내용 모두를 그것들의 자기 동일성에서 탐구하지 않고 그 대신 그것들을 어느 일부분에로 해체시켰다. 탈레스는 만유를 물로 해체시키고, 헤라클레이토스는 불로 해체시켰고, 엠페도클레스는 만유를 물로 해체시켰고, 원자론은 원자에로 해체시켰다.
이런 존재론적 해체뿐만 아니고 인위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의 구별을 해체시키려는 흐름조차 존재했다. 이 해체는 희랍인들이 원천적으로 받아들이던 믿음에 대한 도전을 뜻한다. 이런 흐름이 극단화된 것은 성도덕의 해체에서 찾을 수 있다. 그들은 생식에 대한 본능적인 욕구는 사람이 타고나면서 곧 자연적으로 지니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인위적인 노모스는 성행위에 여러 가지 제약을 가한다. 그러므로 자연으로서의 인간의 참다운 모습은 성행위에 있어서 인간이 가한 제약에 속박되지 않는 데 있다. 동물의 성행위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데, 예를 들자면 개는 노상에서 자연스럽게 성행위를 한다. 키니코스 학파의 디오게네스는 이를 실천했다고 한다.2) 위와 같은 사람들은 사람들을 동물과 같은 상태로 해체하려고 한다.
이런 정황은 국가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개들도 영락없이 속담 그대로 그들의 안주인이 되고, 말들과 당나귀들도 아주 자유롭고 당당하게 길을 가는 버릇을 들여서는, 길에서 언제고 만나게 되는 자가 비켜서지 않을 경우에는, 이 자를 들이받는데, 그 밖의 모든 것도 이런 식으로 자유가 넘치니 말일세.(국가편 563c)3)
이 구문이 얼마나 희극적인가? 당나귀가 길에서 사람을 들이받는 세상은 키니코스 학파의 디오게네스가 노상에서 성행위를 했다는 것만큼이나 인간화된 가치를 배반하는 것이다.
이런 식의 자유는 구별의 무화가 불러온 세상의 소용돌이가 현실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다양한 반응을 불러올 것이라는 것을 예고해 준다. 이들의 문제 의식은 몇 가지로 대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혼란한 폴리스를 어떻게 정비할 것인가? 아니면 폴리스라는 정치적 틀은 사회의 팽창과 다른 문화와의 섞임으로 인해 지금 시대에 적절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정치적 틀을 준비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아니면 폴리스가 나의 삶에 무슨 관련이 있다는 것인가? 나는 나의 삶을 만족시키는 방식을 찾으면 될 뿐이라는 문제 의식 등, 이 중 플라톤은 대응은 어떤 것일까?
앞서 우리는 구별의 무화라는 주제를 플라톤 철학의 출발지점으로 봤다. 이는 구별 자체와 구별할 수 있는 주체는 무엇일까라는 문제를 생각하게 한다. 국가편만을 놓고 본다면, 소크라테스와 트라시마코스는 개인에게 행복을 가져 올 수 있는 방식에서는 대립하지만 현실의 부정의한 상황에서 각 개인이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을 찾는다는 점에서는 공통된다.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이 문제는 궁극적으로 정의를 통해 해결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트라시마코스의 언급을 정의론 측면에서 캐묻고 있고, 트라시마코스는 기본적으로 규정적 정의란 현실적 행복과는 이미 거리가 먼 것이므로 그 엄밀한 정의 규정 논의에 신경을 쓰지 않고 오로지 행복을 가져다주는 현실적 조건 자체에 주목하여 자신의 논의를 진행시켰던 것이다. 트라시마코스의 주장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반론이 길게 진술되었지만, 그들간의 논의가 어떤 합의에 이르지 못한 이유는 트라시마코스는 자신의 체험을 통해 소크라테스의 정의론은 현실적으로 허약한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런 대화적 정황이 국가론 2권 이후의 논의를 하게 했다.
2. 정의의 정의(定義)와 세 가지 도시
2권에서는 초반에 트라시마코스의 탈을 쓴 글라우콘이 등장한다. 그는 트라시마코스의 주장을 다시 반복한다. 그는 그 자체 때문에 반기며 갖고자 하는 좋은 것과(국가편 357b), 그 자체 때문에 좋아 할 뿐만 아니라 그것에서 생기는 결과들 때문에도 좋아하는 것(국가편 357c), 또 그것에서 생기는 결과 때문에 좋은 것(국가편 357c) 중 어떤 것이 올바름을 포함하고 있느냐고 소크라테스에게 묻는다. 소크라테스는 두 번째 것이 올바름을 포함하고 있다고 대답한다. 이에 대해 글라우콘은 많은 사람들에겐 그렇게 생각되지가 않고, 올바름은 보수 때문에 그리고 평판 때문에 실천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고 한다. 글라우콘은 올바름이 그 자체로 찬양될 수 있도록 소크라테스에게 얘기해 달라고 요청하면서(국가편 358d) 트라시마코스의 탈을 쓴 글라우콘으로 대화에 출연한다. 그는 정의의 기원이며 본질을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이 집단은 인간 집단 초기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람들은 분명히 이렇게들 말하고 있으니까요. 본디는 올바르지 못한 짓을 저지르는 것이 좋은 것이요, 올바르지 못한 짓을 당하는 것은 나쁜 것이지만, 그걸 당함으로써 입는 나쁨이 그걸 저지름으로써 얻는 좋음보다도 월등하게 커서, 결국 사람들이 서로들 올바르지 못한 짓을 저지르기도 하고 또 당하기도 하며, 그 양쪽 다를 겪어 보게 되었을 때, 한 쪽은 피하되 다른 한쪽을 취하기가 불가능한 사람들로서는 서로간에 올바르지 못한 짓을 저지르거나 당하지 않도록 약정을 하는 것이 이익이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바로 이것이 연유가 되어 사람들은 자신들의 법률과 약정을 제정하기 시작했으며, 이 법에 의한 지시를 합법적이며 올바르다고 한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실로 올바름의 기원이며 본질이란 거죠.(국가편 395a)
이 인용문이 지시하는 집단에는 인간간의 갈등이 내재한다. 이 갈등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대한 그들의 대안은 법률로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정하여 갈등을 조정하자는 것이다. 이 원시 집단의 정의는 국가편에서 묘사되고 있는 정의 중 낮은 차원의 정의이다. 또한 이 인용문은 자연적인 것과 관습적인 것(physis/nomos)의 대립을 그 근원으로 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3장에서 검토한 노모스/ 퓌시스의 대립이 여기서도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국가편을 노모스와 퓌시스로 해명하려는 우리의 의도가 텍스트 내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후 글라우콘은 앞서도 언급했지만 올바름은 그 자체로서는 기피할 성질의 것이지만 그것이 가져다주는 보수나 평판 따위의 결과 때문에 사람들이 좋게 생각할 뿐인 것이며, 올바른 사람보다는 올바르지 못한 사람이 누리는 삶이 더 행복하다고 주장하면서 이 주장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입장을 묻는다.(국가편 364a-b, 367e)
소크라테스의 대답과 함께 본격적으로 국가편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우선 소크라테스는 이 문제는 매우 어려운 문제라는 것을 암시한다.(국가편 368c) 이런 암시는 어쩌면 소크라테스의 주저로도 받아들일 수 있다. 이런 대목은 국가편에서 여러 군데 등장한다. 여자들을 어떻게 교육할 것인가를 묻는 부분이라든가 좋음의 이데아를 검토하는 부분 등이 그런 예이다. 우리는 이 주저를 적극적으로 해석해 보려고 한다. 도대체 문제의 성격이 어떻기에 토론이라면 다른 어떤 것을 제쳐두고 뛰어드는 소크라테스를 주저하게 하는 것일까? 정의라는 주제가 단순히 어떤 규정 하나로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은 우리가 짐작하기에도 분명하다. 또한 정의라는 문제가 개인의 문제를 넘어선 문제라는 것도 분명하다. 개인을 넘어선 지평 위에 있는 문제라 것, 바로 이 점이 소크라테스를 주저하게 한 근본 원인이 아닐까? 이는 소크라테스의 다음과 같은 언급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올바름엔 한 사람의 것도 있지만, 나라 전체의 것도 있다고 아마도 우리는 말한 것 같은데(369e)
분명 앞서 정의라는 토론 주제가 제기된 맥락은 개인의 행복을 묻는 것이었다. 부정의한 인간과 정의로운 인간 중 어떤 인간이 더 행복한가가 트라시마코스나 글라우콘이 제기한 문제였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한 토론에 뛰어든 소크라테스는 문제의 지형을 변화시킨다.
그렇다면 나라는 한 개인보다는 크겠네.
큽니다. 그가 대답했네.
그러니까 어쩌면 올바름은 한결 큰 것에 있어서 더 큰 규모로 있을 것이며, 또 알 아내기도 더 쉬울 걸세, 자네들이 원하기만 한다면, 먼저 나라들에 있어서 올바름이 어떤 것인지를 탐구하도록 하세나, 그런 다음에 한결 작은 형태의 것에 있어서 한결 큰 것과의 유사성을 검토해보면서, 역시 개개인에 있어서의 올바름을 마찬가지로 검 토해 보도록 하세나(국가편 368E-369a)
이러한 탐구 방향의 전환은 국가편에서 행해진 소크라테스의 1차 전환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전환은 플라톤이 정의 문제를 파악하는 관점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그는 정의를 “각자가 자신의 일을 함”(국가편 433a, 435b)이라고 규정한다. 이 定義는 정의로운 폴리스란 어떤 것인가에 대한 물음에 대한 대답이다. 정의로운 폴리스는 각 계급이 자신의 천성에 따라(kata physin) 자신의 일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의로운 폴리스는 정의로운 인간들의 집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의로운 인간이 모였다고 해서 정의로운 폴리스의 필요충분 조건이 다 채워지는 것은 아니다. 폴리스가 정의롭기 위해서는 그 이상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정의로운 폴리스의 필요충분조건은 무엇인가? 플라톤이 정의로운 폴리스를 얘기하는 부분에서 우선 지적할 것은 정의롭다고 얘기되는 일차적 규정 대상은 폴리스의 구성 부분으로서의 개인이 아니라 정의롭게 구조 지워진 폴리스 전체라는 것이다. 또 개인의 영혼이 그 자체로 정의로울 수 있는 것도 개인 영혼의 구성 부분인 절제, 용기, 지혜가 폴리스 내에서 생겨난 다음 계속 존재할 수 있도록 해주는 어떤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정의이다.(국가편 433b-c) 물론 이런 定義는 순환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여기서는 순환 오류의 문제를 밝히려는 것이 아니라 플라톤의 정의론이 제기되는 맥락과 그 해명의 과정을 밝히려는 것이기 떄문에 순환 오류의 문제는 무시하기로 하자.
우리가 소크라테스의 1차 전환이라고 언급한 것, 즉 개인의 정의와 행복의 연관성에 대한 탐구를 정의로운 폴리스에 대한 탐구 이후 하겠다는 것은 발명된 정치라는 개념을 암시해 준다. 우리가 앞서 언급한 원시적 인간집단에는 정치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Politikon)이 2인 이상의 집단에서 서술을 시작한 것을 보면 이런 원시집단도 정치학의 연구 대상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를 바탕으로 원시집단에서 정치라는 것이 있었다고 추론하는 것도 오류이다. 왜냐하면 정치는 희랍 폴리스 속에서 발명된 것이기 때문이다. 개인의 집합을 뛰어넘어 작용되는 힘이 있다는 발견, 그 투쟁과 조화의 변증을 느낀 것이 정치의 발견을 가능케 한 것이다.
원시인간 집단은 필요적 소유를 통해 성립된 사회이다. 그리고 집단간의 갈등이 부족 자체의 종말을 가져올 정도로 전개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정치가 발명된 시대는 이런 상황이 완전히 전변된 사회이다. 플라톤이 국가편 8권에서 고찰하고 있듯이 최선자들의 정체에서 명예정으로 이행이 지시되는 증표는 사유화이다.(국가편 547b-c) 이런 변화는 필요적 소유를 넘어선 어떤 것을 암시한다. 그리고 집단간의 갈등이 해결되는 방식 역시 전변된다. 이제야말로 하나의 집단이 완전히 없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아테네 30인 과두정의 경험이나 펠레폰네소스의 경험은 아테네인들로 하여금 인간들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기술(techne)을 발명하도록 강제했다. 이런 정황으로 정치의 발명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여기에는 또 다른 무엇인가 있다. 그것은 바로 강력한 경쟁심과 우정의 존재이다. 그리스인들이 발명한 아곤(agon)이야말로 이것을 증거 한다. 아곤의 정치는 힘들의 경쟁이 활성화될 수 있도록 이것을 억누를 잠재력이 있는 자를 패각 추방한다.
이는 경쟁하되 증오와 파괴욕의 소름끼치는 야만성의 심연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리스인들은 지속적 경쟁 없이는 명예를 견딜 수 없었으며, 경쟁이 끝났을 때의 행복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4)
이런 모습이야말로 발명된 정치를 증거 하는 것이다. 정치의 영역이 발명되었다는 것은 더 이상 개인의 행복이 개인적인 영역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을 초월한 영역의 문제라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전환은 탐구의 편의를 위한 것임과 동시에 정치의 영역에 대한 인식을 근거로 한 것이다.
이제 소크라테스의 도시 건설은 시작된다. 그는 이 과정에서 세 개의 도시를 제시한다. 세 개의 도시는 건강한 도시, 즉 돼지들의 도시, 정화된 도시, 즉 군대 같은 도시, 그리고 아름다운 도시, 즉 철인에 의해 통치되는 도시이며, 건강한 도시에서 아름다운 도시로의 변화는상승의 성격을 가진다. 이 상승은 국가편 8권에서 묘사된 현실 정체의 퇴락의 과정과 성격상 반대이다.
그럼 먼저 돼지들의 도시(국가편 372d)를 살펴보자. 건강한 도시는 일차적으로 신체적 요구를 만족시키는 도시이다. 이 도시의 필수적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한 사람이 한 가지 일을 한다.(국가편 370c) 한 사람이 한 가지 일을 하기 때문에 교환이 일어나고 자족적 나라가 아니기에 외국과의 교류가 필요하며 이를 대행할 사람이 필요하다. 이래서 수입상이 필요하고, 교역하기 위한 재원을 만들기 위해 더 많은 농부와 목공, 재화공, 대장장이가 필요하다. 교역은 화폐의 탄생을 불러오고, 교환을 전담할 사람들이 등장한다. 소매상과 무역상은 이 일을 전담하는 이들이다. 그러나 이 도시는 필수적 욕구만을 충족시키며 살아가는 도시이기에 가난이나 전쟁을 유념하면서 자기들의 재력을 넘게 아이를 낳지도 않는다. 이들은 주어진 것을 평화롭게 즐기다가 고령이 되면 죽고 그와 같은 또 다른 인생을 후손들에게 물려준다.
건강한 도시에 반대되는 도시는 호사스런 도시(국가편 372e)나 염증이 있는 도시이다. 이도시는 건강한 도시의 생활 방식에 만족하지 못하고 침상이나 식탁, 향료, 기녀 등을 필요로 한다. 즉 이 도시는 집과 옷, 신발 따위만을 필수적인 것으로 취급할 것이 아니라 회화나 자수도 동원해야 하며, 황금이나 상아 그리고 그와 같은 온갖 것을 갖추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이 도시는 더 이상 신체의 일차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시스템으로서의 도시가 아니다. 이 도시는 새로운 욕망이 발견되는 도시로서 시인이니 음송인, 배우, 가무단원들이 필요하고, 자기의 아이조차 다른 이에게 양육을 맡긴다. 그리고 팽창하는 수요를 충족시킬 물질적 재화의 생산을 위해 더 넓은 영토와 영토 획득을 위한 군대, 군인을 충원하기 위해 일인 일기의 노동 분업 원리의 폐기, 그리고 전쟁이 생긴다. 이제 더 이상 건강한 도시는 더 이상 이들의 욕구를 총족시킬 적절한 정치적 틀이 아니다.
국가편이 묘사하고 있는 건강한 도시에서 호사스러운 도시로의 변화를 보면서 우리는 국가편이 가진 정치적 성격이 많이 탈각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우선 지적할 것은 건강한 도시가 완전히 자족적인 성격의 도시가 아니라면- 이는 외국과의 교역을 한다는 표현에서 알 수 있다- 이 교역을 규제하는 어떤 법률이 있었을 것이고, 이는 필연적으로 정치의 개입을 불러올 것임에도 불구하고 국가편은 이런 개입은 대해서도 침묵하고 있다. 그리고 건강한 도시 역시 하나의 도시인 이상 일정한 노모스의 지배 아래 있을 텐데 호사스러운 도시로의 변화 과정에서 나타나게 될 노모스들간의 갈등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는 것이다. 국가편은 이 침묵을 물질적 욕구의 팽창과 이에 따른 도시의 규모의 확대로 대신하고 있다. 이런 성격은 전쟁의 기원을 고찰하는 부분에서도 단지 땅의 부족을 해결하려는 시도로 전쟁을 위치시키고 있는 데서도(국가편 373e-374a) 드러난다. 이런 점은 플라톤이 역사를 정치적으로 쓰려고 했지만 정체의 변동에 대해서는 비정치적인 관점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노출시킨다.
이제 순화된 도시에 대해 보자. 이 도시로 진입하기 해 플라톤이 택한 통로는 수호자이다. 그에게 수호자는 개와 비슷하다.
그들은 자기편에 대해서는 순하지만, 적에 대해서는 사나워야 하네. 그렇지 않고서는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들을 파멸시키기 전에 자기들 자신이 먼저 파멸하고 말걸세.(국가편 375c)
수호자는 예민하고 날렵하고, 용감하며, 온순하면서도 격정적이어야 한다. 이런 수호자 찾기는 자연에 어긋나는 것(para physin)이 아니라 자연과 합치하는 것이다. 그래서 대화자들은 이와 같은 성향을 가진 수호자를 자연과 합치하면서 어떻게 길러낼 것인가를 논의한다. 이 과정은 호사스러운 도시가 정화되는 과정이다. 그러나 이 정화는 위로부터 실행된다. 소크라테스는 왜 수호자 문제에서 정화된 도시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는 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수호자들의 일은 가장 중요한 것이기에, 그만큼 다른 일에 대해서는 최대한의 한가로운 태도를 요구하는 반면에, 그 자체로는 최대의 기술과 관심을 또한 요하는 것일세.(국가편 374d- e)
그러나 본인은 이런 소크라테스의 관점이 타당한가라는 물음을 던지고 싶다. 이 토론을 시작한 이유는 그 자체로 정의로운 인간/정체를 보기 위해서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개인적 정의의 구조적 토대인 도시로 토론의 주제가 전환되었다. 그런데 다시 논의는 도시의 수호자를 어떻게 키울 것인가라는 문제로 옮겨갔다. 정의로운 도시는 각 계급이 자신의 유적 본성을 모두 실현할 때 정의롭다. 도시가 정의로워지기 위해서는 도시 전체를 어떻게 개조할 것인가를 연구해야 한다. 이는 전체 시민의 욕구를 어떻게 조절할 것인가 하는 문제일 것이다. 이제 정리해 보자. 문제는 전체적인 것이다. 그런데 플라톤이 택하고 있는 문제 해결의 통로는 소수적인 것이다. 플라톤은 이런 선택의 이유로 다양한 문제 중 가장 중요한 문제란 무엇인가에 대한 판단을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본인이 생각하기에 가장 중요한 문제는 도시 수호자가 아니라 도시민이다. 도시 수호자는 도시가 있고 난 이후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도시민들은 도시와 동시에 탄생한다. 수호자는 도시민보다 정치 존재론적으로 저열한 것이다. 그렇다면 가장 중요한 문제는 도시민의 문제이다. 플라톤 역시 문제가 수호자를 포함한 도시민의 존재 양식이라는 것을 인식했다. 그러나 그가 택한 선택은 도시민과 수호자의 존재론적 구별이었고, 이제 대화는 플라톤적인 길이라고 명명하는 추상화의 길을 걷게 된다.
도시민과 수호자의 정치 존재론적 구별은 플라톤의 국가 건설이 소수자 운동이기는 하지만 진정한 소수자 운동일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플라톤의 국가는 기존에 존재하는 국가와는 완전히 상이한 국가이다. 완전히 상이한 국가를 건설하려고 한 플라톤은 다르게 생각하기의 정치적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르게 생각하기는 기존의 노모스에 의해 탄압 받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또 지배자 혹은 국가기구를 확립한다고 해서 지배자의 전제적본성이 변화되지도 않는다.
다르게 생각하기를 플라톤이 대변하고 있지만 위로부터 하향하는 운동은 언제나 시민들의 반발을 불러왔다. 20세기 초 초기 레닌과 로자 룩셈부르크의 논쟁은 플라톤적인 소수자와 시민인 다수자의 논쟁의 재판이라고 볼 수 있다. 위로부터의 조직이냐, 대중파업(대중의 존재 양식의 개조)이냐 하는 논쟁을 생각해 보면 이런 점은 더욱 명확해 진다.5) 또 플라톤과 레닌적 길은 위로부터의 변화를 도모하는 정치적 시도인데, 이것이 현실적으로, 또 역사적으로 타당한지도 의문이다. 왜냐하면 위로부터의 혁명은 소수자 혁명이고 소수자 혁명은 외부로부터 규준을 사회에 부과하는 것인데, 이 외부로부터의 부과에 의해서는 질적으로 새로운 사회의 구성이 어렵기 때문이다. 다수 인간의 내적 운동으로부터 발생하는 변화가 사회를 뒤덮을 때 거짓말이 효과 있을 수 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우리는 위의 플라톤적 길에서도 다수자의 운동과 소수자의 운동 사이의 구별이 내재화돼 서술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수호자들에 대한 교육은 시가 교육, 체육 교육, 공동생활을 통한 시험, 선발된 자에 대한 철학 교육 등이 내용을 이루고 있다. 우리가 관심을 기울인 호사스러운 도시는 순화된 도시에 의해 완전히 대치되지 않는다. 순화된 도시는 “화려한 도시의 기본틀인 부자와 빈자의 2계급 구조가 생산계급, 전사계급, 통치계급의 3계급구조로 재편되었다는 점”6)이다. 호사스러운 나라의 노동 분업 원칙이 일인 일기가 아니었던 것과는 달리 순화된 나라는 일인 일기의 원칙이 지켜진다. 이는 올바름이라고 규정되는 “제 일을 하는 것”(국가편 433b)과 관련된다. 각 계급은 “성향에 따라”(kata physin, 국가편 428e) 자신의 일을 한다. 제일을 하는 것이 정의롭다는 것은 바로 상호의존적인 노동분업을 실행하는 도시 내에서 각 계급은 기능적 단위로서의 여럿의 총화임을 말하는 것이며, 국가편에서는 “바로 이러한 여럿의 총화와 그 총화를 구성한 개별자적 본성을 각각 정의롭다고 부른다”7). 그렇다면 정의란 기능으로서의 여럿의 관계의 유기적 총화이다. 이제 우리의 관심은 정의의 定義에서 벗어날 수 있다. 글은 순화된 나라의 특질에 대한 탐구로 옮겨간다.
이 나라는 우선 지혜로운 나라라고 불린다. 그런데 폴리스의 지혜란 청동에 관한 지식도, 목재에 관한 지식도, 농산물에 관한 지식도 아닌 “이 나라 전체와 관련해서 어떤 방식으로 이 나라가 대내적으로 그리고 다른 나라들과 가장 잘 지낼 수 있을 것인지를 숙의 결정해 주게 될 그런 지식”(국가편 428d)이다. 이런 사무가 도시의 고유한 사무이다. 도시의 고유한 사무는 정치적 사무이다. 그렇다면 정치는 집단과 도시가 다른 지점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정치란 무엇인가? 정치란 주어진 것을 선용하는 차원을 넘은 창조의 과정이다. 정치란 다른 이해 관계를 가진 사람들이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다. 이런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물질적 필요와 함께 정치적 지혜가 있어야 한다.
3. 수호자와 통치자
그런 후 소크라테스는 이 지혜가 무엇이며, 누구에게 있는가 하고 묻는다. 그러자 글라우콘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그건 나라의 수호술이며, 우리가 방금 ‘완벽한 수호자들’로 불렀던 그 통치자들에게 있습니다.”(국가편 428d) 그런데 지혜는 무엇인가를 분별(euboulos, die Weisheit , wisdom)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앞서 구별의 무화를 지적한 것에 대한 인식론적 해답이 바로 지혜이다:
즉 분별은 일종의 앎인 것이 분명하이. 사람들이 분별 있게 되는 것은 무지(amathia)에 의해서가 아니라 앎에 의해서라는 게 확실하겠기 때문일세.(국가편 428b)
여기서 플라톤 국가편의 중심적 사상이 등장한다. 플라톤은 이 대목에서 국가의 첫 번째 특성을 분별에서 찾고, 이런 분별이 앎과 관련되어 있음을 지적함으로써, 국가내의 재화의 구비 상황에 대한 문제와 재화 이외의 것에서부터 오는 문제를 국가 건설과 운영시 고려해야 한다고 말한다. 알란 불룸은 이 지혜를 정치적 조언자의 능력과 동일시된다. “이 단어 에우불로스는 공적 회의(council)에서의 숙고를 반영한다.”8)
공적인 분별력을 가진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도시 내에 도시들간의 내외 문제를 잘 처리할 수 있을 지혜를 가진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는 도시가 지혜로워질 수 없다는 것이다. 즉 도시가 지혜로울 수 있기 위해서는 바로 이같은 소수의 지혜를 가진 사람이 그 도시의 통치가가 되어야 한다. 이는 철인치자의 생각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훌륭한 수호자가 되는 길은 무엇인가?
첫째로, 아무도 전적으로 필요한 것이 아닌 한, 어떤 사유 자산도 가져서는 아니 되네. 그 다음으로는, 누구든 원하는 자가 마음대로 출입할 수 없는 그런 집이나 곳간은 이들 중의 누구에게도 있어서는 아니 되네. 그리고 생활 필수품은, 절제할 줄 알고 용감한 전사들이 필요한 정도만큼의 것을 다른 시민들한테서 이들의 수호에 대한 보수로서 일정하게 정하여 받되, 이는 이들의 연간 소요량을 초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을 정도의 것이어야만 하네. 또한 이들은 공동 식사를 하면서, 마치 야영하는 군인들처럼, 공동으로 생활해야만 하네. 그런가 하면 우리는 이들에게 일러주어야 할 것이니, 이들은 자신의 혼 안에 신들이 준 신성한 금은을 언제나 지니고 있어서, 이에 더하여 속인의 금은이 전혀 필요하지 않으며, 또한 신에게서 받은 그 소유물을 사멸하는 인간의 소유물과 섞음으로써 더럽히는 것은 경건하지 못한 짓인데, 이는 다중의 화폐와 관련해서는 하고많은 불경한 일들이 일어났지만 이들의 것은 오염되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일세. 이 나라에 사는 시민들 중에서도 오직 이들에게 있어서만이 금은을 다루거나 만지는 것이 허용되지 않으며, 또한 금은과는 같은 지붕밑에서 기거해서도 아니 되며, 이를 걸쳐서도 아니 되고, 그리고 또 황금이나 은으로 만든 잔으로 술을 마셔서도 아니 되네. 이렇게 함으로써 이들은 자신도 구하며 나라도 구원할 걸세, 그러나 이들이 개인의 땅과 집 그리고 돈을 소유하게 될 때, 이들은 수호자 대신에 호주와 농부로 될 것이며, 다른 시민들의 협력자 대신 적대적인 주인으로 될 것일세. 그리하여 이들은 미워하며 미움을 받으면서, 음모를 꾸미며 음모의 대상으로 되면서, 또한 외부의 적들보다도 내부의 적들을 오히려 훨씬 더 많이 무서워하면서 한 평생을 보내게 될 것이니, 이런 경우에 이들 자신과 함께 나머지 시민들도 어느 겨를에 파멸의 문턱을 향해 치닫게 될 걸세, 그러므로 이 모든 이유 때문에 우리는 수호자들이 거처 및 그 밖의 것들과 관련해서 이런 식으로 갖추게 되도록 해야만 한다고 말하고 이를 법제화하게 되지 않겠는가?(국가편 416d-417b)
우리는 공동생활과 공동식사를 하는 수호자의 생활이 군대생활과 비슷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사유재산이 없는 자들 ; 수호자의 집단
다음으로 검토할 것은 전사계급의 위치와 성격에 대한 것이다. 전사 계급은 용기를 영혼의 우월한 부분으로 지니고 있는 자들이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그들이 지닌 용기(andreia)의 성격이다. “용기란 일종의 보전(sotheria)”(429c)이다. 용기는 법에 의한 교육을 통해, 두려워할 것들이 무엇이며 또 어떠한 것들인지, 이와 관련해서 생기게 된 소신의 보전이다. 그리고 이를 언제나 보전한다고 함은 고통에 처하여서도, 즐거움에 처하여서도, 그리고 욕망에 처하여서도, 공포에 처하여서도 이를 버리지 않고 끝끝내 보전하여 지님을 의미한다. 또 두려워할 것들과 두려워하지 않을 것들에 관한 “바르고 준법적인 소신”의 지속적인 보전과 그런 능력이 용기이다.
전사 계급은 직접 지성에 참여하도록 요구되는 계급은 아니다. 그들은 지성에 의해 제정된 법률의 명령을 지키도록 위임받은 계급이다. 플라톤이 보기에 그들이 만약 법률을 만들려고 시도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현실의 도시를 지키는 전사들은 다른 모든 도시에 대해 자신의 도시처럼 대할 수는 없다. 이것은 국가편이 말해주는 주요한 원칙이기도 하다. 그래서 전사들에게는 보편적인 자애나 도시들간의 문제를 다루는 정치적 지혜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도시의 명령을 충실히 실행한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이것이 소크라테스가 용기가 보전이라고 정의한 이유이다.
이제 다음으로 절제에 대해 살펴보자. 우선 들어가기에 앞서 절제(sophrosyne)라는 단어의 뜻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리들과 스코트가 편집한 헬라어 사전을 보면, 이 단어는 크게 두 가지 뜻으로 정의된다. 첫째, 마음의 건전함이나 혜안, 둘째, 욕망의 절제9)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sophrosyne는 생산자 계급의 절제와 함께 다른 계급 역시 가져야 할 마음의 건전함이나 혜안을 모두 지시하는 말이다. 이는 다음의 말에서도 확인된다.
절제란 일종의 질서다.(국가편 430e).
절제란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을 받는 자 양쪽에 다 있다.(국가편 431e)
혼은 나은 부분과 한결 못한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런 구성에 불협화음이 생기면 혼이 퇴락하고, 마찬가지로 도시도 구별과 질서에 불협화음이 생기면 새로운 변화의 운동이 생긴다. 그러나 혼이 화성을 닮은 절제에 의해 단련된다면 이런 불협화음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절제와 관련하여 불협화음은 구체적으로 욕망과 쾌락에 의해 산출되는 것이다. 절제 있는 나라나 인간은 욕망과 쾌락을 극복하고 질서 있는 상태에 존재한다. 절제는 협화음 및 화성과 유사하다. 이런 절제는 정치적으로 누가 지배하고 누가 지배받을 것인가를 합의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국가편 432b) 이런 면에서 보면 절제는 지혜나 용기보다 더 넓은 범위를 포괄하는 것이며, 계급적이기보다는 계급 초월적인 가치이다. 플라톤의 국가 건설론이 장점을 가지는 것도 바로 이 절제항목을 통해서이다. 그는 절제를 생산자 계급만의 인내로 이해하지 않고 수호자 계급과 전사 계급, 생산자 계급을 아우르는 보편법칙으로 제시함으로써 국가를 유지할 방법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순화된 나라는 위의 세 가지 아레테에 더해 정의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우리가 찾는 정의는 바로 순화된 나라의 정의라고 할 수 있다. 플라톤은 정의를 힘(dynamis)라고 한다.(국가편 433b) 힘은 무엇인가를 하도록 하며 가능케 하며 현재 있는 것을 보존하는 것이며, 다른 것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정의는 정의가 적용되는 이들에게는 강요적 성격을 갖는다. 이런 정의관은 우선 “제 것의 소유”와 “제 일을 함”이 올바름(dikaiosyne)(국가편 433e)이라는 데서 출발한다. 이는 소유의 문제와 노동분업의 문제에 대한 대안이다. 여기서 정의는 공허한 것이 아니라 매우 현실적인 문제이며 도시민의 삶을 직접 규제하는 원리라는 것이 드러난다. 그런데 끝임 없이 플라톤적 정의를 파괴하려는 흐름이 존재한다. 그것은 농부가 수호자로 전환하려고 하거나 수호자가 자신의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직업의 교환을 강력히 억제한다.
돈벌이를 하는 부류(cherematistikou)와 보조하는 부류(epikourikou), 그리고 수호하는 부류(philakikou), 이들 각각이 나라에 있어서 저마다 제 일을 할 때의 이 ‘자신에게 맞는 일을 함’(oikeiopragia)이 앞에 것과는 반대로 올바름이다.(국가편 434c)
우리는 이런 소크라테스의 견해를 올바름을 찾아 떠나 항해에서 일차적으로 기항한 항구로 본다. 결국 모두가 정의롭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연적 성향에 따라(kata physin) 자신의 일을 해야 한다. 이에 반대되는 것은 해악 중에서 가장 큰 해악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다시 이런 질문을 해봐야 한다. 자연적 성향에 따른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소크라테스의 언설들에 비추어 생각해 보면, 어린이들을 다년간 관찰함에 따라 나온 결과가 자연적 성향의 판정이다. 자연적 성향을 판정하는 것은 통치자의 선발을 위해 필요하다. 통치자는 세 단계를 거쳐 선발된다.
그들로 하여금 그런 신념을 가장 잘 잊어버리게 되거나 가장 잘 속게 될 그런 일들을 하도록 지정 받게 하고서는, 어릴 적부터 줄곧 그들을 지켜보아야 하네, 그리하여 그 신념을 명심하고 있어서 좀처럼 속지 않는 사람을 뽑아 들이되, 그렇지 못한 사람은 가려서 제외시켜야만 되네. 또한 한편으로는 갖가지의 힘든 일과 고통 그리고 경합을 그들에게 부과하여 이런 것에서 앞서와 같은 점들을 지켜보아야만 하네. 젊은 시절의 이들을 어떤 공포의 대상들 속으로 몰고 가는가 하면, 다음 번에는 환락 속으로 옮겨 놓고서는, 황금을 불 속에서 시험 보는 것보다도 더 많이 시험해 보아야 하네. 아이들 사이에서나 청년들 사이에서 그리고 어른들 사이에서 언제나 그런 시험을 거쳐 더럽혀지지 않은 것으로 판명된 사람을 우리는 나라의 통치자( ho archon) 및 수호자(phylax)로 임명해야 하네.(413c-e)
여기서 일단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플라톤이 생산자 계급을 선발하기 위해서 어떤 프로그램을 고안하고 있지는 않다는 점이다. 이는 생산자 계급은 특별한 교육이나 양육이 없이도 길러질 수 있는 부분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플라톤이 보기에, 수호자 계급의 양성은 다른 계급의 교육 및 양성과는 달리 지난한 과정이다. 그들은 정의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며, 절제, 용기, 지혜를 공통으로 갖추고 있어야 한다. 국가편이 수호자에 대한 교육에 많은 부분이 할애된 것을 보면 이것이 국가편의 핵심 테마 중 하나임에 분명하다.
훌륭한 수호자가 되기 위해서는 가능성 있는 자들이 훌륭하게 교육을 받음으로써 절도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며 모든 것을 쉽게 간파할 뿐만 아니라, 아내들의 소유나 혼인 또는 출산 등의 문제에 대해 최대한으로 ‘친구들의 것들은 공동의 것’으로 만들어야만 된다는 것까지도 쉽게 간파해야 한다. 이들을 교육함에 있어 기존의 것을 최대한 활용해야 하며, 새로운 시가의 형식을 도입함으로써 도시 전체에 위험을 초래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 이런 모든 사항은 입법하여 교육받는 자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입법의 문제 이상의 것이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현실 정체에서 이런 것이 가능할 조건을 찾는 문제이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이 바로 철인 치자론이다.
4. 정의와 철인치자의 어려움
소크라테스와 글라우콘이 철인치자론이 등장하기 바로 전에 올바름과 올바른 사람 사이에 완벽한 일치를 꿈꾸는 것이 아니라 “가급적 그것에 가깝다면, 그리고 그것에 다른 어떤 것들보다도 최대한으로 관여한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고 말한다(국가편 473c). 이는 올바름과 올바른 사람 사이에 굉장한 간격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시작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 목표를 가능케 할 무슨 수단을 찾아야 한다. 이를 존재론적인 평면에서 보면, 형상과 형상의 구현물사이에는 구현물이 형상을 닮으려는 노력을 하나 이들 사이의 일치는 매우 어려운 일이라것이 드러난다.
그래서 논의는 이들이 살고 있는 당대에 존재했던 나라들이 어떤 면에서 잘못되고 있는지, 또 무엇 때문에 잘못된 통치가 일어나고 있는지, 또 최소의 것으로 무엇이 변혁을 봄으로써 한 나라가 이런 형태의 정체로 옮겨 갈 수 있는지를 묻는 것으로 전환된다(국가편 473b) 우리는 이를 소크라테스의 2차 전환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변혁의 내용이 바로 철인 치자이다. 소크라테스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철학자들이 나라들에 있어서 군왕들로서 다스리거나, 아니면 현재 이른바 군왕 또는 최고 권력자들로 불리는 이들이 진실로 그리고 충분히 철학을 하게 되지 않는 한, 그리하여 이게 즉 정치 권력과 철학이 한데 합쳐지는 한편으로, 다양한 성향들이 지금처럼 그 둘 중의 어느 한쪽으로 따로따로 향해 가는 상태가 강제적으로나 저지되지 않는 한, 여보게나 글라우콘, 나라들에 있어서, 아니 내 생각으로는, 인류에게 있어서도 나쁜 것들의 종식은 없다네.(국가편 473c-d)
이 진술을 분석해 보면 , 인류에게 나쁜 것이 종식되는 방법은 두 가지 있을 수 있다. 첫째는, 철학자들이 군왕이 되어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다. 둘째, 현재의 군왕들이 철학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방식이 현재 생각할 수 있는 나쁜 것의 종식 방법이다. 그러나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그리고 우리가 불가능한 것들을 말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그런 일들이 일어나기 어려운 것들이라는 것은 우리도 동의하는 바이다( ou gar adunatos genesthai, oud hemeis adunata gegomen. xalepa de kai par hemen homologeita)"(국가편 499d)
철인 치자가 어려운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철학자는 정치를 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국가편 592a) 그들은 진리(aletheia)를 구경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어서 언제나 있으며, 생성과 소멸에 의해 헤매게 되는 일이 없는 존재를 자신들에게 드러내 보여 주는 배움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각각의 실재 자체(auto hekaston to on)를 반기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철학자들은 “진리가 하늘에 본”(592b)으로 바쳐져 있는 나라의 정치를 하지, 다른 어떤 나라의 정치도 하려고 하지 않는다.
둘째, 군왕들이 이런 정치에 관심을 가질지가 문제이다. 현실의 군왕은 보통 참주들인데 참주들은 지혜를 사랑하기보다는 자신의 권력의 확대만을 노리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어려움의 이유는 다른 차원에서도 분석할 수 있다. 우리는 철학과 도시의 만남을 역사와 진리의 만남으로 파악하는 입장을 알고 있다.10) 그런데 여기서 역사와 진리는 전혀 상이한 본성을 가진 것들이다.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historia)는 historeo에서 나온 단어이다. 이 단어는 사물을 탐구하는 것을 뜻한다. 사물을 탐구한다는 것은 시공간 속에 위치한 것을 연구한다는 것을 말한다. 역사는 이미 존재했거나 존재하고 있는 것을 연구하는 것이고 미래적인 것이 아니라 현세적인 것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다. 이는 역사가 한계성 속에서 작업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진리는 어떤 특성을 가지는가? 진리는 알레테이아(aletheia)의 번역어이다. 알레테이아는 lethe(망각)에 대한 부정이다. 알레테이아의 a는 부정격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이 단어는 망각하/되지 않음을 기본적인 뜻으로 한다. 망각하/되지 않기에는 과거와 현재의 연속성이 보장되는 것이고, 이는 과거와 현재의 경계 위/너머에서 활동하는 것이다. 알레테이아는 사물의 영역을 넘어선 영역을 자신의 활동무대로 한다. 이런 것은 플라톤의 언명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플라톤은 철학자의 성격을 규정하면서 그들은 진리를 보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며 언제나(aei) 있는 존재(to on)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이라고 했다. 언제나 있는 존재는 변화하지 않는 것이다. 변화가 없는 것은 운동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운동중이다. 이렇게 본다면 진리는 현세적인 역사와는 달리 초시간적인 활동이다. 이 둘은 이런 면에서 봐도 만나기가 지극히 어려운 것들이다.
그렇다면 이것을 가능하게 할 조건은 무엇인가? 이는 정치 철학의 근본 문제이며, 퓌시스적 세계관에 맞서 싸우며 세운 플라톤주의의 핵심이라할 수 있다. 그러나 플라톤은 이 문제를 해결할 구체적인 대안을 문제 내에서 제출하지는 않는다. 즉 정의로운 도시가 가능할 조건은 무엇인가에 대해 직접 말하지 않는다. 다만 다양한 비평가들이 이 문제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는 대표적인 정치철학자인 스트라우스가 내린 평가를 살펴보자. 스트라우스는 정의로운 도시에 대해
이 도시는 오직 말속에 존재한다. 그것은 오직 한편으로는 정의 그 자체, 즉 본질적으로 옳은 것과 다른 한편으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것이라는 관점에서 이해될 때만 존재한다. 비록 정의로운 도시가 정의 그 자체보다 낮은 곳에 있는 것으로 결정되었지만, 하나의 틀로서 그것은 청사진 그대로 세상에 나타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말속에서가 아닌 실재의 도시는 오직 그것에의 접근이 기대될 뿐이다.11)
이 같은 주장이 의미하는 것은 소크라테스의 ‘말속의 도시’는 지상 위에 존재하는 어떤 도시에도 의존하지 않는 범형(paradeigma)이며, 이는 제도적 배치가 아닌 좋음 자체, 혹은 영혼의 도시라는 것이다.12)
그런데 한편으로는 철인 치자의 가능성에 대한 비관적 전망이 도출되는 것은 플라톤의 사상 속에 내재한 것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 플라톤은 언제나 자신의 주장이 현실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질까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렇기에 정의라는 매우 정치적인 주제를 택해 새로이 전변(轉變)된 아름다운 나라를 건설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수자에게는 플라톤의 주장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 이유는 다수자의 주체성을 변화시킬 방도를 연구하기보다는 소수의 수호자들을 양성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사상이 가진 이런 맹점은 그의 정치적 식견의 탁월함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변혁의 원천이 어디인지에 대해 오해하게 한다. 그래서 플라톤에게 필요한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 아닌가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다수자를 가로지는 새로운 주체성의 탐구, 그들의 생활 세계를 윤택하게 함으로써 그들이 참주의 등장을 막을 수 있도록 하는 교육, 자연의 폭력과 투쟁을 그대로 받아들인 채 이질적인 것을 용납하는 용기, 새로운 유입되는 문화를 어떻게 자신의 문화 속에 융합시킬 것인가 하는 고려.
5. 동굴, 탈주, 자유
이런 점을 확인할 수 있는 지점이 바로 동굴의 비유이다. 이 내용은 이미 다 알고 있기 때문에 플라톤의 비유가 제시하는 통찰력과 한계를 살펴보면서 위의 나의 주장을 검증해보도록 하겠다. 동굴에서 벗어나는 최초의 시점은 언제인가? 이 부분을 국가편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가령 이들 중에서 누군가가 풀려나서는, 갑자기 일어서서 목을 돌리고 걸어가 그 불빛 쪽으로 쳐다보도록 강요당할 경우에.(국가편 516c)
이 부분에서 플라톤은 어떤 계기로 동굴에서 누군가가 풀려났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말하지 않음이 상당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플라톤은 동굴의 비유를 통해 철학자의 임무와 인간의 일반적인 정치적 조건에 대해 말하고 있다. 또 그는 이런 비유를 통해 동굴에서 벗어나서 좋음의 이데아를 상징하는 태양을 보고, 어둠이 볼 수 있는 것의 전부가 아니며 오히려 빛이 모든 것을 볼 수 있게 해주는 원천이라는 것을 인식할 사람이 등장하는 필연성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그는 동굴에서 벗어남이 어떻게 가능한지는 말하고 있지 않다. 아직 태양을 보지 않았기에 동굴 이탈인이 지혜에 의해 이 행동을 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를 동굴로부터 벗어나도록 하는가? 동굴은 고형화된 노모스가 지배하는 곳이다. 그 곳에서 벗어난 것은 이 노모스로부터의 벗어남이다. 누구라고 적시할 수 없이 다수자 중 하나가 이 노모스에 반대해서 탈주하려고 한다. 이들은 규정된 지배를 벗어나려고 하는 자이며, 현실 속에서 탈주하려는 자이다.
플라톤은 “누군가”라고 말하면서 그 수를 말하고 있지 않지만 그 수는 무한하다. 곳곳에서 기존의 질서를 벗어나 다르게 사유하고 다르게 살려는 이들이 나타난다. 이들은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 자신의 깨닮음으로 스스로 행한다. 이 자발성이야말로 아름다운 국가가 건설될 힘의 원천이다. 그리고 이 벗어남은 또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다. 탈주하는 사람들이 무한하다는 것은 그것이 아름다운 나라를 만들 수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문제를 떠나 그들의 운동 자체가 잠재적으로 아름다운 나라를 포함한다. 이 운동이야말로 강요가 아닌 자발적 연대로서의 정치가 운동하는 장이다.
또 동굴의 비유에서 특징적인 것은 동굴에서 벗어난 자가 동굴로 돌아가지 않으려 할 것이기 때문에 돌아감을 강요한다는 부분이다(국가편 519d- 520b) 이 부분은 국가편 중 가장 아름다운 부분 중 하나로서, 도시 일부분의 행복이 아니라 도시 전체의 행복을 위해 인간 자원의 선용을 뜻한다. 자신의 안위를 위해 “모든 위대한 것이 폭풍 속에 있는” 도시로 돌아가지 않고 철학적 활동에 전념하면서 살아갈려는 이들에게 플라톤은 정치적 요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철학자를 포함한 개인의 행복은 궁극적으로 도시 속에서 실현되는 것이며, 도시를 벗어난 개체의 행복은 정치 존재론적으로 가치가 낮은 것이라는 것을 설파하면서 말이다.
우리는 이제까지 플라톤의 국가편에서 정의가 성립되고 확장되고 위기를 맞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플라톤의 생각을 이해하기에는 무엇인가 모자란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 느낌은 원천은 어디일까? 그것은 플라톤 존재론의 가치적 성격을 해명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앞에서 들뢰즈의 플라톤론을 검토하면서 이 문제를 다룬 바 있다. 여기서는 국가편에서 앞서 우리가 말한 것을 다시 조합하면서 존재의 문제를 살펴보도록 하자.
우리는 많은 곳에서 kata physin이라는 말을 접했다. 플라톤이 사물과 인간을 배치하는 원칙을 바로 kata physin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physis의 성격에 대한 일정한 이해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어떤 파악일까? 철학사는 이런 파악법을 가치존재론이라고 부른다. 가치존재론은 physis를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 것인가? 가치존재론에서 kata physin의 퓌시스는 좋은 것이며, 질서 있는 것이며, 고요한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혹시 이때의 퓌시스는 존재하는 자연이 아니라 포획된 자연이 아닐까? 여기서 헤라클레이토스의 단편을 하나 보자
투쟁(polemos)은 모든 있는 것들의 아버지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역시) 다스리며 보존한다. 그것은 어떤 것을 신들처럼, 어떤 것은 인간들처럼, 어떤 것은 노예처럼, 어떤 것은 자유인으로 나타나게 한다.13)
여기서 말하는 투쟁은 있는 것들을 최초로 서로 구분지워주며, 서로 부딪히게 하는 것이며, 그래서 그것들의 위치, 신분, 품위를 그 자리에 있음에 맞추어 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서로서로 구별되어 지는 것 속에서, 갈라진 틈, 간격, 폭, 연결이 그 스스로를 열어 보이는 것이다. 이 투쟁은 결코 통일성을 파괴하는 것도, 분열시키는 것도 아니다.14) 그렇다면 퓌시스는 무엇인가? 그 속에는 고요함만이 아니라 운동도 있으며, 그 스스로를 위해 끊임없이 자기 변화시켜내는 힘이 있다. 퓌시스는 무한정자(apeiron)이다. 퓌시스에는 범형(paradeigma)이 없다. 그렇다면 퓌시스에 따라(kata physin)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무한정한 존재의 운동의 그대로 인정하는 것, 그 속에서 어떤 방책을 찾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플라톤은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퓌시스에서 어떤 범형을 보려고 하며, 변증술을 통과한 범형에 맞춰 도시를 건설하려 한다. 플라톤의 국가편에 대해 쏟아지는 무수한 비판 - 국가가 너무 무미 건조하며, 군대, 수도원, 천문대 같다는 비난 - 의 원천은 바로 이 지점이다.
이런 비판은 좋음의 이데아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좋음의 궁극적 원천은 바로 퓌시스이다. 왜냐하면 존재가 좋은 것이라고 가정되지 때문이다. 그러나 존재하는 것은 무규정적인것이기에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다. 그것은 가치 이전의 영역이다. 그러나 우리는 사물을 인간화해 이론적 공간을 만들어 낸다. 이론적 공간에서 생산된 좋음의 이데아는 모든 이데아를 가능케 하는 것이며, 최고의 이데아이며 그 성격상 무교섭적인 것이다.. 이데아가 고유하게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규정되는 한 이데아들간의 참여와 교섭은 있을 수 없다. 플라톤이 스스로 파르메니데스편과 소피스트편에서 논하는 것은 이런 난관을 염두에 둔 것이다.
인간화된 이론적 공간을 폭력성을 인정하고 없는 것(to me on)을 없다고 할 용기가 필요하다. 그럼으로써 플라톤주의의 전화는 시작될 수 있다.
국가편은 상향의 운동을 끝낸 후에는 다시 하향한다. 이 하향은 중간 단계로서 현실 정체의 타락을 언급하는 8권과 9권을 거쳐 10권에서 마무리된다. 마지막 권에서 소크라테스는 영혼의 불멸을 주장하면서 정의는 그 자체로도 좋은 것임과 아울러 보상 면에서도 좋은 것이라고 결론 짓는다. 그런 후 에르(Er) 신화를 인용한다. 플라톤은 지금까지의 지적 여행을 끝내면서 “훌륭함은 그 주인이 없어서, 저마다 그걸 귀히 여기는가 아니면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가에 따라, 그걸 더 갖게 되거나 덜 갖게 되리라. 그 탓은 선택한 자의 것이지, 신을 탓할 일이 아니리라.”(국가편 617e)라고 말한다. 그렇다. 인간화된 모든 것은 인간의 선택이다. 이 선택을 하는 기술(techne) 바로 정치술이다. 그래서 정치의 영역이 바로 자유의 영역이 되는 것이다.
V. 결론 - 플라톤의 현대적
독해의 함의
1. 전화된 존재와 존재의 사건
우리는 앞에서 다양한 플라톤주의와 반플라톤주의의 입장을 살펴보았다. 이 탐색은 플라톤의 철학이 현대의 정신적 삶과 관련해 어떻게 전화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다. 과연 무엇을 준거로 해서 전화할 것인가? 우리는 앞서 생성과 퓌시스, 파르마콘, 존재 등을 주요한 진입로로 선택했다. 여기서의 통로도 이 말들이다.
앞서의 논의에서 문제의식의 심층에 깔려 있었던 것은 존재가 진리의 목소리와 연결되어 운동이 완전히 생략되어 버렸다는 것이었다. 존재는 단수적이고 진리도 단수적이다. 어떤 알레르기도 이들에게는 용납되지 않는다. 플라톤이 아름다운 국가에서 시인들을 추방하고자 한 것은 바로 시인들이 신과 존재에 알레르기를 불어넣기 때문이다. 이 알레르기에 일단 주목하자.
존재가 알레르기에 감염되면 무슨 일이 생기는가? 가장 먼저 생각할 것은 존재의 통일성에 균열이 온다. 이 알레르기는 컴퓨터 바이러스와 같은 것이다. 바이러스에는 자기의 정체성이 없다. 그것은 무한히 분열한다. 경계 없는 차이의 놀이를 즐기는 바이러스는 하나로의 규정을 거부한다. 존재도 마찬가지이다. 바이러스화 한 존재는 더 이상 전통적인 존재가 아니다. 이 존재는 이제 배수적인 것이다. 존재가 배수적이라고 해서 존재의 본원적 성격인 “있음”의 특성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니다. 존재는 여전히 있다. 그러나 과거의 존재와는 다르게 있다.
전화한 존재는 다름에 의해 규정된다. 우리는 이 균열을 존재의 사건(Ereignis des seins)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사건이란 무엇인가? 사건은 단순한 사고와 다르다. 사고는 일회적이다. 그러나 사건은 사고의 상이한 계열화이다.15) 존재의 고요함에 알레르기가 도입된 것은 사건의 발생을 말하는 것이다. 사건이 일어남으로써, 즉 계열화함으로써 존재는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된다. 의미의 발생은 다른 해석을 불러온다. 존재의 운동이 해석을 추동하는 것이다.
존재의 사건은 시공간을 이탈한 초월적 존재를 배격한다. 존재는 사건의 지평에서 정의된다. 하이데거를 해설한 푀겔러는 존재의 사건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존재의 사건은 마음대로 처분할 수 없이 그때 그때마다 일어나는 하나의 진리의 움직임으로서 존재를 의미한다. 이때의 진리는 스스로를 위해 인간의 사유를 필요로 하고 그래서 인간의 사유와 동일시되고, 그때 그때마다 역사적으로 존재자를 그 존재에 있어 보도록 해주고, 그래서 형이상학적 존재 사유에 대한 근거인 존재와 존재자의 차이를 열어 젖힌다.16)
존재에 알레르기가 도입되는 것은 다른 표현을 쓰자면 “차이의 전달”(하이데거)이라고 할 수 있다. 이질적인 것의 섞임, 이것이 차이의 전달이다. 차이의 전달은 “존재와 사유의 동일성을 존재와 비존재자의 구별에로 열어, 그래서 존재자로서의 존재자가 그의 존재의 비은폐된 것에”17) 이르게 한다. 이제 더 이상 존재는 하나가 아니다. 운동하지 않는 존재는 포착될 수 없다.
2. 차연과 정치적 생성
존재에 차이가 전달된다는 것은 더 극단화시키면 차연(differance)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존재 자체보다 더 오래된 이름인 이 차연은 존재나 본질에 대한 이름이 아니다.18) 차연은 모든 동일자의 규정을 피하면서 연기하는 것이며, 존재의 동일성을 내부로부터 무너트리는 것이다. 존재보다 차연이 오래된 것이라면 존재는 차연의 이질성에 의해 영향받을 수밖에 없다.
서로 상이한 힘이 빚어내는 역동적이고 유동적인 갈등으로서의 차연은, 형이상학의 철학 문법의 전 체계가 문화나 철학 그리고 과학을 관장할 때마다, 이에 맞서 니체가 정립한 것이다.19)
차연에 본질이 없다는 것은 차연이 개입하는 한, 문자 유희에 관한 존재나 진리조차도 없다는 말이다. 존재의 운동이 차연에 의해 규정되면 존재는 단수적 존재로 규정되지 않고 복수적 존재로 규정될 수는 가능성이 탄생한다. 플라톤의 정치 철학에 차연의 운동을 도입한다는 것은 다수자의 운동을 묘사할 수 있게 한다. 다수자의 흐름은 무한한 되기(생성)의 영역이기 때문에 무엇이라고 이름을 붙이는 순간 그것을 벗어난다. 생성의 긍정성은 무한한 차연의 긍정성이다. 무엇이든 차이나게 하며 무슨 규정을 하는 순간 그 규정을 연기하는 차연의 운동은 이 지점에서 빛을 발한다. 플라톤의 정치적 혜안은 다수자의 존재 양식을 변화시키는 운동 속에서 소생할 수 있다. 이는 정치의 확장이라고 할 수 있다. 다수자의 모든 생활 영역이 이제 정치의 영역으로 편입된다. 변화시키기 위한 정치, 그것들 모두가 아름다운 나라의 건설에 참여할 수 있는 정치, 이것이 정치의 확장이다.
차연과 생성의 운동은 진리의 문제에 대해서도 새로운 차원을 개척한다. 존재의 변이 가능성을 첫째 원리로 삼기 때문에 차연과 생성의 운동은 존재를 열린 장소에 존재케 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 사태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존재케 한다- 좀 더 상세히 말하면 존재자를 존재자로서 존재케 한다-는 것은 열린 장소 및 그 개현에 (각각 존재자가 들어가, 이를 스스로 지니는 것이지만) 자신을 개입시킴을 뜻한다. 이 열려있는 것을 서구의 사유는 그 당초에 ‘숨김없는 것’으로 간주했다. 우리는 알레테이아를 진리로 해석하지 않고 비은폐성(unverborgenheit)이라고 번역한다. 이것은 직접적인 번역일 뿐만 아니라 진술이 올바르다는 의미의 진리의 관례적인 개념을 뒤집어, 존재자가 개발되어 있으며, 또 그것을 개발한다는 저 아직 명확하게 해명되지 않은 상태(생성- 필자 주)로 되돌아가 생각해 볼 것을 시사하고 있다.20)
그러나 존재자의 開發은 언제나 그 전체의 은폐의 과정이기도 하다. 은폐는 변이로부터 오는 것이다. 변이하기 때문에 이전의 것과는 다른 것이 생성되는 것이고, 새롭게 생성되는 것은 발견되기 전까지는 은폐된다. 그렇다면 진리란 무엇일까? 바로 은폐된 것으로부터 쟁취된 것, 즉 개현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나오는 힘을 우리는 경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은폐로부터 탈은폐로의 이행, 이것은 사물의 영역과 인간의 영역 모두에 걸치는 것이다. 이 관점은 좋음의 이데아를 도덕적 가치로 생각하게 하는 유인21)이나 진리를 인지나 인식의 올바름이라는 관점으로부터도 벗어나게 한다.22) 이제 이데아는 알레테이아로서의 비은폐성이 나타나는 전경으로 바뀐다.
진리관의 변경과 이데아의 변이는 우리의 눈을 플라톤 이전의 그리스적 본능으로 돌리게 한다. 플라톤 이전의 그리스적 본능은 신들을 교환하며 선과 악의 섞임에 주목했다. 그들은 또한 병존하는 가치 판단의 다수성으로서 도덕을 보기 시작했으며, 개념적 허구보다는 졸렬한 실천을 중요시했다. 그들은 완전성을 경멸했다. 그들은 본능을 중요시했으며, 이 본능의 창조성을 믿었다.23) 그리스적 본능이 우리에게 암시하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누군가가 하기를 기다리기보다는 내가 먼저 하라는 것, 추상적 덕의 완성을 위한 끝없는 손작업인 변증법으로부터 벗어나라는 것, 대지와 자연의 위대함을 배우라는 것, 덕의 철학자가 선전하는 허위의 실상을 보라는 것(에피큐로스, 피론 등) 등이다.
우리는 아직 이 본능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소수자 되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새로운 지적 정치적 횡단의 가능성을 찾아 떠나는 과정에서 그것은 우리 손에 쥐어져 있을지도 모른다.
참고문헌
1. 그리스어 저작
Platon, Gorgias
Politeia
Nomoi
Theatetos
Sophist
(im Werke in acht banden Griechisch und Deutsch Wissenschaftliche Buchgesellschaft, Darmstadt)
2. 번역
Bloom, A, The Republic of Plato, Basic books Inc, 1968
Conford, F. M., The theory of Knowledge, Oxford at the Clarendon Press, 1973
Irwin, T, Gorgias, Oxford at the Clarendon Press, 1972
Talor, A. E, The Laws of Plato, Everyman's Library, 1934
Benardete, S, The Being of The Beautiful,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4
3.해외 이차문헌
Annas, J, An Introduction to Plato's Republic, Oxford at the Clarendon Press, 1980
Bernasconi, R, The Question of Lamguage in Heidegger's History of Being, Humanities Press, 1985; 송석랑 역, 『하이데거의 존재의 역사와 언어의 변형』, 자작나무, 1995
Burnet, J, Greek Philosophy, Macmillan, 1981
Cropsey, J, Plato's World,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5
Deleuze, G, Difference and Repetition , PUF, 1969, tr by Patton, P, The Athlone Press, 1994,
Deleuze, G, Logic of sence, Minuit, 1964, tr by boundas, C, Colunbia University Press, 1990
Deleuze, G, Guattari, F What is the philosophy Mimuit, 1991; 『철학이란 무엇인가』, 이정임 외 역, 현대미학사, 1995
Derrida, J, Dissemination, tr by Jonhson, B,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1
Derrida, J, Grammatology, tr by Spivak, G. C, The Jones Hopkins University Press, 1977; 김성도 역, 『그라마톨로지』, 민음사, 1995
Derrida, J, Margins of Philosophy, tr by Bass, A,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2
Derrida, J, Positions, Paris, Minuit, 1972; 박성창 역, 『입장들』, 솔, 1992
Derrida, J, The Postcard, tr by Bass, A,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7
Gosling, J. C. B., Plato, Routledge, 1973
Goudsblom, J, Nihilism and Culture, Oxford, 1980; 천형균 역, 『니힐리즘과 문화』, 문학과 지성사, 1993
Guthrie, W. K. C. The Sophists,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1
Guthrie, W. K. C., The Greek Philosophers, Harper torchbooks, 1950.
Heidegger, M, Einfuhrung in die Metaphysik, Klostermann, 1953; 박휘근 역, 『형이상학 입문』, 문예출판사, 1995
Heidegger, M, Nietzsche, Klostermann, 1964,
Heidegger, M, Sein und Zeit, Klostermann, 1976
Hyland, D. A, Finitude And Transcendence in the Platonic Dialogue,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1995
Irwin, T, Plato's Ethics, Oxford University Press, 1995
Lycos, K, Plato on Justice and Power, Macmillan, 1987
Moravcsik, J, Plato and Platonism, Blacwell, 1992
Nietzsche, F, Will to power, tr. by, Kaufmann, W, Vintage, 1967
Nietzsche, F, 『비극적 사유의 탄생』, 이진우 역, 문예출판사, 1997 Pappas, N, Plato and the Republic, Routledge, 1995
Planing, Z, Plato's Political Philosophy, University of Missouri Press, 1991
Popper, The Open Society and it's Enemies, vol 1. Plato, Routledge, 1965
Robinson, R, Plato's Earlier Dialectic, Oxford at the Clarendon Press, 1953
Strauss, L, "Plato", in What is Political Phiosophy,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8 ; 김영수 외 역, 『서양정치철학사 I』, 인간사랑, 1992
Strauss, L, Liberalism Ancient and Modern, Cornell University Press, 1988
Strauss, L, Studies in Platonic Political Philosophy,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3
Strauss, L, The city and Man,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64
Stone, I. F, The Trial of Socrates, Anchor books, 1989
Vesey G, Philosophers Ancient and Modern,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6
Zuckert, C. H., Postmodern Platos, Chicago, 1996
3. 국내문헌
기종석, 『플라톤의 테아이테토스편에 나타난 앎의 문제의 대한 연구』, 서울대학교 철학과 박사논문, 1986
김내균, 『소크라테스 이전의 그리스 철학』, 교보문고, 1995
김영국 외,『레오 스트라우스의 정치철학』,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5
김형효, 『데리다의 해체철학』, 민음사, 1994
김홍우, 『서양 정치사 강의』,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1997
라정원, 『플라톤의 정치사상』, 법문사, 1899
박홍규, 『형이상학 강의』, 민음사, 1995
양문흠, “소피스트편에서의 ‘존재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는 기준’의 문제”, 『철학 연구』, 천지, 1992
조요한 외 지음, 『희랍철학연구』, 종로서적, 1988
한국 서양 고전 철학회 편, 『서양 고대 철학의 세계』, 서광사, 1995
한국 철학회 고전 분과 위원회, 『문제를 찾아서』, 종로서적, 19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