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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년 된 병자 / 요 5:1-9
힘이 세계를 통치합니다. 힘이 있는 사람이, 힘이 있는 나라가 세계를 지배합니다. 그렇다면 이 힘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1) 육체적인 힘이 있습니다. 근력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이 근력을 기르기 위해 헬스, 조깅, 테니스, 배드민턴 같은 운동을 열심히 합니다. 근력을 키우기 위해 되는대로 운동을 해서는 안 됩니다. 무엇보다 체계적인 훈련이 필요합니다. 2) 돈의 힘이 있습니다. 이는 바로 경제적인 힘입니다. 정치, 교육, 문화 등 삶의 여러 분야들이 돈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기 때문에 이 힘은 그 무엇보다 큰 힘입니다. 3) 경험의 힘이 있습니다. 아무지 지식이 있어도 경험이 없으면 무력할 때가 많습니다. 이론과 현실은 분명히 다릅니다. 경험이 뒷받침되지 않는 이론은 추상적이기 쉽습니다. 이론은 경험을 통해 반드시 조정되어야 합니다. 4) 도덕적인 힘이 있습니다. 도덕이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던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사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고 바르게 사는 것이 중요한 문제이다”라고 말했습니다. 5) 사랑의 힘이 있습니다. 독일의 작가 토마스 만은 “죽음보다 더 강한 것은 이성이 아니라, 사랑이다”고 말하였습니다.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연인들의 사랑이건, 김약연의 민족에 대한 사랑이건, 사랑의 힘은 모든 한계와 제약을 뛰어넘어 위대한 일을 이루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힘들보다 더 큰 힘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영적인 힘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함으로써 생기는 영적인 힘은 이성으로 이해할 때가 아니라 믿음으로 기도할 때 나옵니다. 미국의 32대 대통령 루즈벨트는 소아마비로 몸은 불편했지만 매일 기도하는 영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 그는 많은 어려운 일에 봉착했습니다. 1944년 6월 6일 연합군은 아이젠하워 장군이 총지휘하는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전개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의 노르망디 해안은 험한 절벽으로 상륙작전 전날 밤은 폭우와 안개로 도저히 작전 수행이 불가능했는데 루즈벨트 대통령은 집무실에서 무려 17시간이나 꼼짝 않고 기도하였습니다. 놀랍게도 연합군은 그 엄청난 악조건 속에서도 상륙 작전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인 기도는 엄청난 결과를 거두게 됩니다.
현대인들은 건강하기를 원합니다. 그것은 건강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육적인 건강뿐아니라 영적인 면에서도 건강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영육간에 건강하지 못하기 때문에 따라서 치유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이런 크리스천 유머 퀴즈가 있습니다. 여러분! 인류 최초의 남자인 아담이 최초의 여성인 하와에게 한 최초의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하와 유?"(How are you?)라고 합니다. 그러면 하와는 어떻게 대답했을까요? "하와 유"했을 것입니다.(아마 아담과 하와는 모두 충청도 출신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여러분! 하와 유-평안하십니까? 여러분의 영적 상태는 어떻습니까? 그리고 여러분의 사랑하는 가족, 이웃들은 어떻게 지내십니까? 언제나 강건하기를 바랍니다. 1절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그 후에”는 4장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갈릴리와 사마리아 사역 이후에”란 뜻입니다. 무대는 예루살렘 명절로 옮겨집니다. 수십만이 몰려든 예루살렘은 인산인해를 이루어 서로 인사를 주고받고 축제를 즐기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여러 구경거리와 도시의 황홀경에 넋을 잃고 말았습니다. 이런 잔치 분위기 속에서 예수님은 조용히 그곳을 빠져나와 가장 외롭고 불쌍한 환자를 만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축제를 즐기기보다는 사랑을 베풀고자 하셨습니다. 전도서 7:4에서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는 말씀처럼 모든 사람들이 즐기는 명절의 축제 속에서도 주님은 그 축제 속에 마음을 두지 않으시고 음침하고 괴로운 삶에 지쳐 쓰러져 있는 병자들을 찾아 가셨습니다. 1960년 슈바이처 박사가 노벨 평화상을 타기 위해 잠시 아프리카를 떠나 프랑스 공항에 내린 박사님은 덴마크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세계에서 몰려온 신문 기자들이 기차에 동승을 하게 되었고 슈바이처를 만나기 위해서 특등석을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슈바이처를 찾지 못한 사람은 1등석으로 그리고 2등석으로 가 뒤져 보았지만 슈바이처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마지막 3등석 시골 촌부들과 함께 사과 궤짝을 엎어놓고 슈바이처는 촌로들의 손을 붙들고 맥을 짚고 있었습니다. 슈바이처는 박사 학위가 3개였습니다. 영국황실에서 그에게 백작칭호를 주었고, 노벨상으로 막대한 상금을 손에 쥘 수 있는 분이었습니다. 한 기자가 “선생님, 몸도 피곤하실 터인데 어찌 이런 3등석 자리에 있습니까?” 슈바이처 박사는 한마디 말을 남깁니다. “3등석 아래론 열차가 없어서요. 그리고 나는 내가 즐길 곳을 찾아 살지 않고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찾아다닙니다.” 성경의 예수님은 언제나 기다리고 계시는 분이 아니라 찾아가 만나 주시는 분이라고 말씀합니다. 탕자 비유정도를 빼고 나면 성경 모든 곳에서 언제나 주님은 찾아가시는 분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기다리는 하나님이 아니라 찾아가시는 하나님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누구를 찾아 가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쇼핑 따위는 안하시더라도 당시 권력가들을 찾아가 자기 삶의 보장을 받기위해 안면을 익힌다든지, 선교활동을 잘 할 수 있도록 뒷배경을 요구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속물들과는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명절날 축제 속에서도 그 속에 매몰되어 희희낙락 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이 축제와는 거리가 먼 곳에 절망과 한숨을 끌어안고 신음하는 그늘진 장소가 있음을 잊지 않고 그들을 찾아가셨습니다. 다리 저는 사람, 맹인, 혈기 마른 신체 불구자, 가난에 지쳐 야윈 무리들이 있는 곳, 세상에서 버린바 된 그곳, 중환자들의 수용소를 찾아 가셨습니다. 이 시간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계신 분이 있습니까? 인생의 실패, 고난과 아픔을 안고 오신 분이 있습니까? 마음의 고통과 상처를 안고 계신 분이 있습니까? 몸과 마음 인생 자체가 아프신 분이 계십니까? 오늘 이 시간 우리 주님이 당신을 만나 주실 것입니다.
2-3절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예루살렘성에 들어가는 문이 네 개가 있었습니다. 양문은 제사장들이 속죄의 제사를 드릴 때 제물로 쓰여질 양들을 가지고 통과하는 문이었습니다. 이 문을 통과하면 바로 베데스다 못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이렇게 선포합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구약에 드려졌던 수많은 양들은 장차 오실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어떤 행위와 노력으로도 구원받을 수 없는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 피 흘리심이 있었기에 오늘 여러분의 죄가 용서함을 받은 것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만나는 순간 우리는 놀라운 하늘의 은혜를 누릴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기억하십시오. 어느 누구도 양문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인생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않고서는 결코 새생명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않고서는 절망 가운데 신음하는 인생들이 소망으로 다시 일어나 걸어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이 내 삶의 유일한 소망입니다.
베데스다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베트’ 즉 ‘집’이라는 단어와 ‘헤세드’ ‘은혜’라는 단어가 합해져서 만들어진 단어로 ‘은혜의 집, 자비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양문 옆에 있는 연못을 ‘베데스다’라고 이름을 붙인 이유가 있습니다. 이 연못은 가끔 한 번씩 물이 끓어올랐습니다. 연못이 온천과 연결이 되어 뜨거운 물이 한 번씩 솟구쳐 올랐던 것입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이런 현상을 보면서 천사가 내려와서 물을 움직이게 한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천사가 내려와 물을 끓어오르게 할 때 가장 먼저 물속에 들어가는 사람은 어떤 병이든 낫는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왔습니다. 베데스다 연못 주변에는 행각이 다섯 개가 있었고 그 행각 안에는 많은 병자들이 누워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3절에 보면 행각 안에는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이 움직일 때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중환자들입니다. 그들이 베데스다 연못의 주변에 누워 있는 것은 물이 움직일 때 가장 먼저 들어가 낫기 위해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들은 ‘은혜의 집’이라고 하는 베데스다 연못 주변에 모여 자기에게 은혜의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들이 이 말씀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베데스다라는 ‘은혜의 집’과 그 은혜를 자기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누워있는 병자들의 상황은 매우 모순된다는 것입니다. 각자가 은혜를 입기를 원하지만 그 은혜는 다른 사람들과의 치열한 경쟁에서 이겨서 얻는 은혜입니다. 남의 눈에서 실패와 좌절의 눈물이 흐르는 것을 보면서 얻은 은혜입니다. 다른 사람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진정한 은혜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은혜의 집’이라는 단어와는 전혀 다른 서로를 경계하고 긴장하는 분위기입니다.
베데스다 연못과 그 주위에 누워있는 병자들의 상황은 오늘 우리의 삶의 자리를 보는 것 같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 행복을 얻기 위해 사람들은 전쟁터와 같은 삶의 자리에서 치열하게 생존 경쟁을 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정글의 법칙처럼 강하고 빠른 사람만이 살아남는 세상에서 행복을 말하기 위해서는 매 순간 긴장을 늦출 수가 없습니다. 은혜의 세계, 행복의 세계를 말하지만 항상 그 행복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느끼며 한숨지으며 삽니다. 본문에 나오는 베데스다 연못 주변의 모습은 오늘의 우리의 삶의 모습을 말하고 있습니다. 볼 수 없는 시각장애인, 걸을 수 없었던 지체장애인, 활동할 수 없었던 혈기 마른 자, 이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들 모두가 당시의 의학수준으로는 아니 지금의 발달된 의학수준으로도 거의 치유가 불가능한 환자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에서 3절 괄호에 기록된 말씀을 보면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라고 시작되고 있습니다. 4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아닙니다. 이것은 당시 그렇게 믿고 있었던 일종의 유대인들의 민간 신앙을 그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연못의 물이 움직이기 시작할 때 가장 먼저 그 물 속에 들어가는 사람이 낫는다는 민간 신앙의 속설을 믿고 그 연못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비참한 사람들의 모습을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민간 신앙이 설혹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에게는 희망이 없습니다. 볼 수가 없습니다.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활동할 수가 없습니다. 이들이 어떻게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그 물 속에 뛰어 들어갈 수가 있겠습니까? 저들에게는 애당초 불가능했습니다. 이것은 저들의 절망을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5절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이 베데스다에 38년 된 병자가 있었습니다. 말이 38년이지 얼마나 긴긴 세월입니까? 태어나서 이 병에 걸렸어도 38세가 되었을 것이요, 십대에 걸렸다면 50세가 넘었을 것입니다. 일평생 병에 시달려온 사람입니다. 매일 베데스다에 출근하지만 허탕입니다. 한 달, 두 달, 일 년, 2년, 10년, 20년, 30년이 넘도록 대박이 터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제 병 고치려고 나오기보다 여기 연못에 나오는 것이 습관이 되어 매일 나오는 것이 되었을 것입니다. “아마 이 병은 고칠 수 없어. 하나님도 어쩔 수 없어. 내 병을 고쳐주지 않는 거야.” 라며 자포자기했을 것입니다.
사실 ‘38년’이라는 숫자는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가나안을 정탐하고 온 후 광야를 방랑했던 햇수를 떠올리게 하는 숫자입니다. 이 시기는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의 시간이었습니다. 마치 못가에 누워 있던 38년 된 병자가 혈기마른 자와 같이 고갈되어 버린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러했고, 사탄의 세력이 편만한 종말 시대의 성도들의 파리한 모습도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오늘 이 사람의 문제가 우리 문제입니다. 우리는 병으로 그렇게 오랫동안 고생하지는 않았지만, 오랜 세월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갖고 괴로워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오랜 세월 기도해왔지만 아직 응답받지 못한 분들도 계십니다. 교회를 수십 년 다니고 매일 기도하였지만 아직도 우리의 마음을 짓누르는 것들이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38년 병은 어쩌면 우리의 나쁜 습관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 없이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알고 이런 우리 처지를 주님께 아뢸 때 주님은 지체 없이 자비의 손길을 펴 주십니다. 베데스다의 기적의 은총은 주님의 도움을 가장 필요로 하는 자 위에 임하는 은혜입니다.
6절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그런데 놀라운 소식, 기쁜 소식이 있습니다. 이 베데스다에 예수님께서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 많은 병자 중에서 38년 동안 고생하던 이 병자를 만나주셨습니다. 왜 38년 된 병자를 만나주셨을까? 주님은 큰 고통에 처한 사람일수록 더욱 불쌍히 여기십니다. 자신의 힘으로, 의지로, 실력으로, 도무지 극복하지 못하는 문제에 고통당하는 여러분들을 주님은 더욱 불쌍히 여기셔서 오늘 만나주시러 이 자리에 오셨습니다.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예수님은 우리의 누운 것, 우리의 질병, 우리의 고민을 보십니다.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주님은 우리의 병, 우리의 문제를 잘 아십니다. 아멘. 주님께서 보시고, 주님께서 아십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는 내 딸이 얼마나 괴로워하는지 잘 알고 계시는 주님께서 여러분을 그냥 내버려두시지는 않습니다. 결코 그대로 버려두시지 않습니다. 오늘 이 확신을 갖기를 바랍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어리석은 질문이 아닙니까? 병 낫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 질문은 낫고자 하는 꿈이 있느냐, 희망이 있느냐, 그의 회복의지를 테스트하는 말씀입니다. 모든 문제의 해결은 마음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마음에 간절한 꿈이 있어야 이루어집니다. 마음에 꼭 해결해야 하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해결됩니다. 베데스다 연못에서는 물이 끓어오를 때, 먼저 뛰어든 사람이 나음을 받았다고 하는데, 예수님은 물이 아니라, 마음이 먼저 열정으로 끓어올라야 나음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문제는 반드시 해결하고야 말겠다는 강한 의지, 이 병은 반드시 고침 받을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 주님은 내 문제를 잘 알고 계시므로 반드시 이 문제를 풀어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병이 오래되면 낫고자 하는 의지도 퇴색해버립니다. 그냥 그대로 삽니다. ‘고치면 좋고 못 고치면 그대로 살다가 죽지 뭐.’ 이런 식입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열 번, 스무번 실패하고 넘어지면 이제 좌절합니다. 낙심합니다. 포기합니다. 이게 보통 사람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물으신 것입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제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대답하십시오. 진실로 대답하십시오. 정말 고치고 싶습니까? 정말 해결하고 싶습니까?
7절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이 병자는 뭐라고 대답합니까? 그냥 “네 낫고 싶습니다.”라고 대답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사람은 ‘나를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제발 나를 좀 도와주세요.’ 도와줄 사람이 없어서 문제라는 뜻으로 대답한 것입니다. 자신이 아직까지 낫지 못한 것을 남의 탓으로 돌렸습니다. 긴 병에 효자 없다고 가족도 버렸고 친구도 버렸습니다. 아무도 그를 도와줄 사람이 없습니다. 이게 불만입니다. 문제가 있을 때 환경을 탓하고, 조상 탓하고, 친구 탓하고, 돈이 없다고 탓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장희 씨가 부른 노래 가사가 생각납니다. “그건 너 그건 너 바로 너 때문이야.” 이런 태도가 문제입니다. 이 사람의 대답에서 알 수 있는 또 다른 문제점은 다른 방법을 강구해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직 누군가 자기를 도와주기만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 외에 다른 방법이 얼마든지 많이 있을 수 있는데 말입니다. 어느 마을에 신앙이 독실한 의사가 있었습니다. 이 의사는 하나님께로부터 남다른 은사를 받아서인지 명의로 소문이 나있었습니다. 잠시 진찰만 해도 어디가 아픈지 알아냈고 처방도 잘해서 많은 환자들이 나았습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몸이 아프면 이 의사를 찾아가서 치료를 받곤 했답니다. 그런데 이분이 나이 많아 세상을 떠나게 됐습니다. 목사님과 가족들 그리고 성도들이 임종을 지켜보게 됐습니다. 이분이 모인 사람들에게 유언처럼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보다 훨씬 훌륭한 의사 세 분을 소개하겠습니다. 바로 ‘소식(小食)’, ‘수면’, 그리고 ‘운동’입니다. 음식은 위의 75%만 채우고 절대 과식하지 마십시오. 잠을 충분히 주무십시오. 그리고 열심히 걸으십시오. 그러면 웬만한 병은 다 나을 수 있습니다.” 이분이 잠시 쉬었다가 말을 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세 의사는 다음 세 약을 함께 복용해야 효과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더욱 귀를 쫑긋 세우고 그 말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바로 ‘말씀’, ‘기도’, 그리고 ‘사랑’입니다. 말씀 약은 매일 일정한 시간에 평생 꾸준히 복용해야 합니다. 기도 약은 부작용이 없는 약이라 많이 복용할수록 좋습니다. 그리고 사랑 약은 상비약입니다. 늘 준비했다가 수시로 복용하십시오.” 그리고 마지막으로 덧붙였습니다. “육체의 건강은 반쪽건강입니다. 영혼이 건강하면 육체의 건강은 따라옵니다. 먼저 영혼이 건강하고 그리고 육체도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병 고치는 약은 이렇게 다양합니다. 무엇보다 마음의 병, 영혼의 병을 고쳐야 합니다. 자포자기의 병, 좌절의 병, 절망의 병, 안 된다는 부정의 병, 어떻게 하다 보면 되겠지 라는 막연한 생각의 병, 누구 때문이라는 남 탓하는 병, 할 수 없다는 불가능의 병, 이 병부터 먼저 고쳐야 합니다.
8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이렇게 문제가 많은 사람이었지만, 예수님은 그를 불쌍히 여기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38년 동안 누워 지내온 이 병자가 일어난다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일어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불가능한 일을 시도하라는 뜻입니다. 가만히 누워만 있지 말고, 뭔가를 시도해보라는 뜻입니다. 할 수 없다는 생각을 버리라는 뜻입니다.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믿음으로 발을 내딛으라는 것입니다. 말씀에 의지하여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주의 말씀 의지하여 깊은 곳에 그물 던져 오늘 그가 놀라운 일을 이루시는 것 보라. 주의 말씀 의지하여 믿음으로 그물 던져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 없네.” 말씀 그 자체에 능력이 있습니다. 말씀에 순종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요 6:63절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예수님의 말씀은 영이요 생명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성령의 역사가 있습니다. 살리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말씀을 믿고 나아갈 때 고침 받습니다. 살아납니다. 회복됩니다. 일찍이 미국에 유학을 가서 박사학위를 받고 교수 생활을 한 김춘근 장로라는 분이 계십니다. 그가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 그는 나이 37세에 악성 간경화에 걸리게 되어 1년 밖에 살 수 없다는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하필이면 왜 접니까? 제가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이국만리에서 애쓰고 고생하면서 공부해서 박사학위 받고 이제 교수가 되어 잘 살아보려고 했는데, 왜 저에게 이 비극적인 저주의 병이 생겼습니까?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복수가 차서 퉁퉁 부은 배를 안고 로스앤젤레스의 <빅 베어 마운틴> 기도원에 올라가서 간절히 기도하는데 갑자기 그에게 음성이 들렸습니다. "너는 네 핏속에 독이 있어서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네 영혼 속의 독 때문에 죽는다." 그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내가 간경화로 죽어가는 줄 알았는데 내 영혼이 병들어 죽어간다는 게 무슨 말씀입니까? 내가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나간 모든 죄를 활동사진처럼 보여주셨습니다. "너는 하나님 앞에 교만했고, 사람 앞에 교만했다. 너의 죄는 바로 교만이다. 네가 남보다 좀 더 똑똑하다고, 공부 잘했다고, 남보다 지식을 쌓았다고 너는 얼마나 인생을 교만하게 살았느냐? 너같이 교만한 사람은 죽어야 된다. 아무런 쓸모가 없다." 그는 자기 자신이 '교만'이라는 죄를 지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습니다. 기도 도중 자기를 찾아오신 주님을 만나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세상 바라보던 시선이 주님을 향하게 됐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깨닫게 됐습니다. 자신을 위해 큰 비전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도 알게 됐습니다. 이제 기도 내용이 바뀌었습니다. "하나님 왜 저 같은 것을 그토록 사랑하십니까? 왜 하필 저 같은 것을 찾아오셨습니까?" 물론 병도 치료됐고 그 이후 미국의 청소년과 청년들을 영적으로 무장시키는 사역을 펼치고 있습니다. 9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주님의 말씀은 괜히 해 보는 헛된 소리가 아니라 권능으로 역사하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듣는 순간 그 병자의 귀가 번쩍 뜨였습니다. 그리고 믿음이 솟구쳤습니다. 그의 온 몸에 힘에 생김을 느꼈고 마침내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자리를 들고 갔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반응하면 영적인 스파크 일어납니다. 권능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믿음의 반응이란 마치 이런 겁니다. 자동차 좌석에 앉아 시동을 겁니다. 윙~ 하고 엔진이 돌아갑니다. 하지만 아직 움직이지 않습니다. 기어를 넣어야 동력이 전달되어 자동차가 움직이는 겁니다. 믿음은 마치 기어를 넣는 것과 같습니다.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권능이 임하는 겁니다. 예수님 밖에서는 우리 인생이 KO(Knockout)됩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예수님 안에 들어오면 우리 인생이 OK(All Right)가 됩니다. 그러므로 패배의식과 소외감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몰라 줘도 주님은 나를 알아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에게조차 소외감 느끼면 끝장입니다. 하나님은 내 모습이 아무리 형편없어도 나를 소외시키는 분이 아닙니다. 마치 나 혼자만 있는 것처럼 나를 사랑해 주십니다. 하나님에게는 꼴찌 인생이 없습니다. 내가 아무리 부족해도 나를 응원해 주시고 희망을 주십니다. 권능으로 역사해 주십니다. 이런 사실을 꼭 믿으시고, 주님을 매일 만나시기 바랍니다. 유명한 흑인 오페라 가수인 제시 놀만(Jessye Norman)이 만델라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대통령이 된 것을 축하하여 영국 런던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열린 음악 공연회에 출연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녀의 순서는 맨 마지막이었습니다. 그날 대부분의 출연자들인 인기 록 밴드 그룹들과 록 가수들이었습니다. 한 사람, 한 그룹이 무대에 올라 공연할 때마다 7만 이상의 군중들은 광란에 가까운 기성과 흥분으로 온 종일 열광했다고 합니다. 무려 10시간이상의 광란의 열풍이 지나간 후 어두원진 밤 제시 놀만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무대에 올랐습니다. 그녀는 한동안 미동도 하지 않고 무대에 두 손을 모으고 서 있었다고 합니다. 기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잠시 후 그녀는 반주도 없이 아카펠라로 천천히 노래를 시작했습니다. 그녀의 노래는 뜻밖에 찬송가였습니다. 죄의 노예가 된 인류를 구원하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찬미하는 전직 노예상인이었다가 회개하고 구원받아 노예 해방을 위해 일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된 존 뉴턴이 작사한 305장 찬송이었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워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장래는 숨소리하나 들리지 않도록 조용해 졌습니다. 3절이 시작되자 여기저기서 사람들은 잊혔던 이 찬송을 따라 조용히 노래하기 시작하기 시작합니다.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 찬양하리라." 노래가 끝났을 때 사람들은 울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한동안 스타디움을 떠나지 못했고 사람들은 깊은 적막 속에서 침묵에 잠겨 있었다고 합니다. 한 기자는 그 날 그곳에 성령이 임하셨다고 보도했다고 합니다. 그날 그 제시 놀만의 노래는 다음 주일 적지 않은 사람들의 발걸음을 교회로 향하게 했다고 합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 날 놀만의 노래 속에 증언된 그리스도의 은혜가 병들고 상처 난 사람들의 마음을 치유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은혜는 무조건적입니다. ‘은혜의 집, 자비의 집’이 되시는 주님께서 우리 인생이 지금보다 훨씬 더 나은 인생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찾아오십니다. 38년 동안 무너진 마음의 성벽을 다시 세우고, 그 인생을 바꾸기 원하시는 그 음성을 듣고 마음의 문을 열고 찾아오시는 주님을 만나므로 여러분의 인생에 위대한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마음을 붙잡아주셔서 걱정과 불안에서 건져주시고, 절망하거나 낙심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모두 베데스다 연못의 38년 된 병자와 같이 주님의 이름으로 일어나고, 성령으로 일어나고, 믿음으로 일어나고, 기도로 일어서게 하옵소서. 우리를 영원토록 일으켜 주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일하시는 하나님 / 요 5:10-18
많은 사람들은 신앙은 모두 같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나 다른 종교들이 모두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는데, 다만 그곳으로 가는 길이 다를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어느 길을 택하든 그것은 인간의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신앙의 과정이 아니라 신앙 자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어떤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로서 살아가고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생활'이 아닌 '생활신앙'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천국 백성이 되기 위하여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이미 천국 백성이 되었기 때문에 감사함으로 '생활신앙'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정체된 것이지만 '생활신앙'은 흐르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은 은혜로 구원받았기에 감사함으로 살아가는 것은 바른 신앙이지만, 내가 구원받기 위하여 무엇을 하려고 하는 것은 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함으로써 하나님에게 도달할 수 있다는 생각은 다른 복음입니다. 그리고 다른 복음에는 저주만이 있을 뿐입니다(갈 1:9). 이미 천국 백성으로서 살아가는 자는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지만, 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율법적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예수님이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이후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베데스다 연못은 간헐천이라고 해서 물이 제멋대로 솟다가 그쳤다가 하는 샘입니다. 그런데 물이 솟구쳐오를 때는 고여 있던 물이 뒤집히기 때문에 마치 물이 부글부글 끌어 오르는 것 같이 보입니다. 이런 현상을 두고 사람들은 천사가 내려와서 그렇게 하는데 그때 연못에 들어가서 몸을 씻으면 병이 낫는다는 전설이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이 베데스다 연못에는 특별한 치료의 효능이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여기에는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 곧 혼자 물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혼자 들어갈 수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은 병 낳기를 간절히 기대하고 있었습니다만 치료의 기회를 얻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 중에 38년 된 병자가 있었는데 병 낫기를 소원하며, 그 베데스다란 연못가에 나와 물이 동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던 중에 예수님이 그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이 환자는 38년 동안 앓았기 때문에 모든 근육이 다 무력해 졌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몸을 가누기조차 힘든 환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물이 동한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힘으로는 제일 먼저 베데스다 못가에 들어가 병을 치료 받을 기회가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소망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소망을 가진 자에게 역사하십니다. 유명한 신학자 에밀 브루너는 “우리의 허파에 산소가 필요하듯 삶의 의미에는 소망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심리학자들이 이런 실험을 했습니다. 쥐를 잡아서 독 안에 넣은 다음 빛이 들어가지 않도록 뚜껑을 완전히 닫아버렸습니다. 빛이 전혀 들어가지 않도록 했더니 그 쥐가 3시간 안에 죽었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독에 쥐를 넣고 이번에는 뚜껑을 닫을 때에 빛이 조금 들어가게 해놓았습니다. 이 경우의 쥐는 놀랍게도 36시간이나 살아있었습니다. 똑같은 여건입니다. 쥐가 스스로 밖에 나올 수도 없고, 먹을 것을 넣어준 것도 아닙니다. 차이는 단 하나 빛을 볼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작은 차이가 3시간의 생명을 36시간의 생명으로 바꾸었습니다. 2차 대전 때 유럽의 연합군 포로수용소에서 군의관들은 새로운 병명을 하나 만들어내었습니다. 그 병의 이름은 ‘철조망 병’이라는 병이었습니다. 이 병은 포로로 잡혀서 철조망 속에 수용된 병사들 가운데 나타나는 병이었습니다. 이 병에 걸리면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하고 극도로 우울해지고 심신이 점점 쇠약해져 가는 증세를 나타내었습니다. 사람을 만나지 않으려 하고 나중에는 누워서 일어나지도 않으려 하고 심지어 죽기까지 했습니다. 치료의 방법도 전혀 없었습니다. 포로수용소에 갇혔다고 해서 다 이 병에 걸리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수용소라는 똑 같은 환경인데 어떤 사람에게는 이러한 증세가 나타났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이 병의 증세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군의관들은 어떤 사람이 이 병에 걸리고 어떤 사람이 걸리지 않는지 그 원인을 조사했습니다. 결과는 이러했습니다. 이 병에 걸린 사람은 하루 종일 가시철조망만 바라보고 앉아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나는 포로다. 나는 철조망에 갇혔다. 이 철조망 때문에 나는 밖으로 나갈 수 없다. 내 인생은 이제 다 끝났다.’ 이렇게 체념하고 자포자기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이 병에 걸렸습니다. 그러나 수용소 안에서도 철조망 저 너머를 바라보았던 사람들, 소망을 가지고 저 푸른 하늘을 보고, 철조망 밑에 핀 작은 들꽃을 볼 줄 알았던 사람들, 내일을 꿈꾸었던 사람들은 이 병에 걸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2차 대전 후 이탈리아 시칠리 섬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산을 하나 두고 두 고아원이 이웃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연합군과 결연이 되어 시설도 좋고 영양도 듬뿍 취할 수 있었습니다. 다른 고아원은 비바람도 제대로 가리지 못하고 분유도 제대로 먹이지 못하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시설과 영양이 좋은 쪽의 어린이 사망률이 환경이 안 좋은 쪽보다 60%나 높았습니다. 상식에 위배된 이 결과가 학자들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연구 결과 중요한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전쟁 중에 세 아이를 잃은 40대의 어머니가 어느 날 시설이 나쁜 쪽의 고아원을 찾아들었습니다. 이 어머니가 고아들을 자기 자식처럼 안아주고 얼러주길 수년간 계속하고 있는 사실에서 이 의문이 풀렸던 것입니다. 어머니의 품에서 배어나오는 따스한 사랑이 아이들의 건강과 생명에 불가결의 요인이라는 것입니다. 적어도 사람에게는 물질보다 사랑입니다. 사랑이 우선입니다.
엄마 손이 약손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저도 어렸을 때 배아프다하면 어머니께서 제 배를 만지시면서 “엄마 손 약손, 엄마 손 약손”이라고 하시면 금방 시원해진 느낌이었습니다. 엄마의 따뜻한 손길이 치유의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2002년 영국의 과학 잡지인 <네이처>에는 엄마의 따뜻한 손이 아이의 신경조직을 자극해서 정서적 안정과 신체 발육을 촉진한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시행하고 있는 ‘프리 허그(Free Hugs 안아주기)캠페인’이 있습니다. 길에서 누구든지 원하는 사람을 안아주는 운동입니다. 포옹은 가슴을 맞대고, 체온을 느끼며, 호흡을 나누는 것입니다. 포옹이야말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줄 수 있는 가장 쉬운 사랑의 표현입니다. 영국의 BBC에서는 포옹을 하면 사람 사이의 긴밀한 유대관계를 느끼게 해주는 호르몬인 옥시토신의 분비가 늘어나고 혈압도 낮아져서 심장병에도 도움이 된다는 연구결과를 보도했습니다. 포옹은 마음의 병을 치유해줍니다. 긴장을 완화시켜주고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을 줍니다.
오늘 성경에서는 사랑의 행위를 무시하는 유대인들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어둠, 죄악, 사탄의 역사에 마침표를 찍은 베데스다 못가의 좋은 사건에 약간 예감이 좋지 않은 단어 하나가 있습니다. 9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병자가 일어나 걸어간 그날이 안식일이었습니다. 구약종교의 상징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으로 대표됩니다. 예수님이 병을 고치신 날이 안식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문제를 그냥 넘어가지 않고 꼬투리를 잡아 예수님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10절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유대인들’이라는 표현은 복음서에 70번 정도 나타나는데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반대하고 대적하고 핍박하고 죽이려는 사람들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구약종교를 대표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 제사장들로 구성되어 있고 당시에 영향력 있는 권력층에 해당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힘을 모아 구약종교의 이름으로 예수님을 죽인 것입니다. 잘못된 구약종교의 신봉자, 계승자들로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은 그들에게 불편하고 당황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진리를 환영하지 않습니다. 불의한 사람에게 진리처럼 불편한 게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의 출현이 자신들의 존재 가치가 끝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막은 것입니다. 여기서 안식일이 단순한 것 같지만 굉장히 중요한 문제로 나타납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신 안식일의 참된 의미는 이미 잊어버렸고, 형식과 제도에 얽매인 날로 지키고 있었습니다. 안식일을 자유롭게 하는 날로 여기지 않고 율법화 되고 , 종교화 된 것에 익숙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에 의해 38년 된 병자가 살아난 사건을 기뻐하기보다 시비를 걸고 문제로 삼았습니다. 그들은 38년 된 병자의 감격과 기쁨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권위 실추와 영향력 감소 그리고 신뢰하고 율법화 된 구약종교가 상처받는 것에 대한 분노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38년 동안 병으로 꼼짝 못하고 누워있던 사람이 일어나서 자기의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것을 보면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 일입니까? ‘누가 그렇게 고쳐주었는데.’ 하며 놀라워하고 감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유대인들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안식일 법을 어겼다고 비판하고 정죄하였습니다. 같은 사건을 두고 사랑의 마음으로 보면 기쁨과 감사가 넘치지만, 딱딱한 법과 원칙의 관점에서 보면 기쁨과 감사는커녕 도리어 비판하고 정죄합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 특히 십계명 중 네 번째 계명인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안식일 법은 아주 중요한 법이었습니다. 그 법에는 안식일에는 사람이나 그의 종이나 짐승까지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했으니, 어느 정도까지 하는 것이 일이냐에 대한 규정을 39가지나 만들어 지켰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 랍비들은 안식일에는 옷에 바늘을 지니고 다녀도 안식일 법을 어겼다고 했습니다. 심지어 안식일에 틀니를 하거나 목발을 집고 다닌 것도 문제 삼곤 했답니다. 모든 법에는 법 정신이 있습니다. 법을 만들 때 왜, 무슨 목적으로 이 법을 만드는지와 같은 기본정신이 있습니다. 모든 법의 기본 정신은 생명과 사랑입니다.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을 살리기 위해 필요한 것이 법입니다. 법의 원래 정신이 사람을 구속하고 자유를 억제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의 정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생명과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율법의 정신을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마 22:37-4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법 정신을 망각하고 법을 집행하는 것은 잘못된 법 집행입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 법을 지키느라 사람을 살리고 치료하는 사랑의 정신을 망각해버렸습니다. 안식일 법은 사람을 위하여 만든 법입니다. 365일 노동만 하면 몸이 버텨내지 못하니까, 일주일에 하루는 쉬라고 안식일 법을 만드신 것입니다. (막 2:27)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법으로 따지면 우리 모두는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법으로 따지면 38년 된 병자는 도무지 나을 수 없었습니다.
11-13절 ‘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하니, 그들이 묻되 너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고침을 받은 사람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이 사람들은 누가 네 병을 고쳐주었느냐고 묻지 않습니다. 누가 왜 안식일에 걸어가라고 했느냐가 문제입니다. 즉 병이 나았으면 하루 더 있다가 일어나지 왜 안식일에 일어났느냐 하는 것입니다. 병자는 어떤 분이 자기를 보고 자리를 들고일어나 걸으라고 해 말씀대로 걷게 된 거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너더러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한 사람이 누구냐?”고 묻습니다. “그가 누군지 알지 못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병 고친 사람이 누구냐고 묻지 않습니다. 안식일을 범하게 한 주범이 누구냐 고 묻는 것입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형태는 똑같습니다. 이것이 잘못된 종교의 허상입니다. 종교적인 형식과 율법의 제도로 인간의 본질과 자유를 무참하게 짓밟아 버리는 모습들입니다. 안식일의 본질은 이미 잊어버린 지 오래 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왜 예수님을 몰랐을까요? 예수님이 몇 마디로 자신의 병을 고치시니 많은 사람들이 기적을 보고 몰려들므로 자리를 피하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영광, 칭찬, 인기에 별로 관심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럴 때마다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병이 오래된 불쌍하고 비참하며, 신세타령하고 팔자소관을 이야기하는 희망이 없는 한 영혼에 대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많은 제도, 방법, 권력, 인기 등에 관심이 몰려 있습니다. 도시 문명 속에서 죽어가는 소시민들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권력의 틀에 의해 무참히 짓밟혀 가는 사람에 대해 별로 애정이 없습니다.
14절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사람이 많을 때 예수님이 뒤에 계시다가 사람의 행적이 뜸해지자, 다시 이 사람에게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개인적으로 만났으리라 생각합니다. 꼭 해주고 싶은 얘기가 있어서 만났습니다. 본문에서 치유 곧 병 고치는 것의 놀라운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육신의 병을 고치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치유의 반밖에 안 됩니다. 만약 예수님이 병 고치는 것으로 역할이 끝난다면 의사나 별다를 게 없는 의료행위입니다. 인간은 정신과 영혼이 행복해야 합니다. 여기에 치유의 온전한 의미가 있습니다. 많은 의사와 병원 근무자가 환자를 다루는 것은 반쪽짜리 치료에 해당합니다. 진정한 의사는 영혼을 치료합니다.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주시고 정신적, 영적으로 방황하는 이 사람에게 다시 찾아와 두 번째 치유를 해주셨습니다.
치유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육체적인 치유입니다. 둘째, 한 단계 높은 정신적 치유입니다. 방황, 좌절, 절망, 허무함 등에 해답을 주는 치유입니다. 셋째, 영적 치유입니다. 죄, 사탄,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치유입니다. 예수님은 영적인 치유를 위해 조용한 틈을 이용해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더 심한 병이 생기지 않도록 죄 짓지 말 것을 말씀하십니다. 또한 질병의 원인에는 여러 가지 있습니다. 첫 번째, 자연적 환경적 유전적인 이유로 병이 듭니다. 무슨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부모님의 유전으로 병이 들 수 있습니다. 환경적인 연유로 병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요즘 AI나 구제역이 많이 나타나는데 발병 지역의 조류나 돼지들은 걸리게 됩니다. 즉 자신이 잘못해 걸린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두 번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아플 수 있습니다. 특히 욥 같은 사람이 그런 경우입니다. 세 번째, 환자를 위해 기도할 때 환자의 병이 자신에게 이동하는 수가 있습니다. ‘주님 저 사람을 살려 주시고 저를 죽여주세요. 저 사람의 병을 저에게 주세요.’라고 기도할 때 병이 옮겨지는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에게 세 번째 치유를 적용하십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그 대가로 병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병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속히 지은 죄를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본능적으로 오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질병은 자신의 삶이 죄로 가득 차 있어 그 대가로 받은 경우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이 죄 때문에 오랫동안 병을 가진 것을 보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더 깊은 병이 재발하지 않도록 다시 죄를 짓지 말라고 영적 치유를 하셨던 것입니다. 질병의 성격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어떤 질병은 고난을 겪은 후 그 결과로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주는 계기가 됩니다. 감사하고 기뻐하면서 질병을 가지고 사는 경우도 더러 있습니다. 14절을 보면, 이 병자는 율법을 범한 죄를 지은 사람입니다. 죄 값으로 영원히 병으로 고통당하다가 죽어야 마땅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그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이 그의 죄를 용서해준 것입니다. 사랑이 그의 병을 고쳐준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사랑은 법을 뛰어넘습니다. 사랑이 법보다 우선입니다. 사랑이 최고의 법입니다. 사랑이 최고의 가치입니다. 사랑이 제일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보다 높은 분이 안 계시듯이 사랑보다 높은 가치가 없습니다.
15절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병 나은 사람은 자기를 고쳐주신 분이 예수임을 알았습니다. 그분에게서 남다른 권위와 위엄을 느꼈는데 그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된 것입니다. 병 나은 사람은 곧 바로 유대인들에게로 갔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고치신 분이 예수임을 증언했습니다. 그의 증언은 단순한 보고가 아니라 믿음의 고백이었습니다. 은혜 받은 자의 감사와 감격으로 전하는 증언이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행한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안식일에 자칭 메시야라 하는 예수를 통해 고침을 받았다면, 그 일로 예수께서 핍박을 받으셨다면, 고침을 받은 자신도 같은 부류로 취급될 것은 분명한 일입니다. 그 결과는 모든 유대사회로부터의 격리요, 왕따를 당하는 소외는 물론 삶의 근거지를 상실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것을 기꺼이 받아드리고자 한 것입니다. 어떠한 희생도 감수하겠다고 결단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받은 은혜가 그보다 훨씬 더 크기 때문입니다. 요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수가성의 여인도 5장의 38년 된 병자의 상황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동일한 것이 증언되고 있는데 그것은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는 자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은혜 받은 이들은 다릅니다. 그 안에 감동이 있습니다. 감동이 있으면 입술이 열립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증언합니다. 무늬만 가진 성도가 아닙니다. 은혜의 감격이 있는 진짜 성도입니다. 그와 같은 이들을 통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입니다. 은혜 받은 자로 사십시오. 남을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말고 사랑하십시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기준으로 살지 말고 생명나무의 기준으로 살아야 합니다. 옳고 그름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행하십시오. 자랑하거나 교만하지 말고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충성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16절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 좋은 일이 있으면 같이 기뻐해야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허다합니다. 예수 믿는 것이 참으로 좋은 일인데, 예수 믿는 사람을 벌레 보듯 싫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종교적인 억압, 어둠의 세력이 덮고 있어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읽고 해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고 세우는 역할뿐 아니라 무너뜨리고 넘어지게도 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실족하지 않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관심은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치유와 구원의 사역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의 규례에 대한 제도적인 것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의 선함을 보기보다는 오직 예수님을 제거하려는 데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안식일 날 병을 고쳤음에 대해 비난을 하고 있습니다.
17절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을 범하고 병을 고쳤다는 이유로 핍박한 게 아니었습니다. 종교적인 계율, 형식, 율법, 자기들의 권위, 기득권을 깨뜨려 버렸기 때문에 용서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예수님께서 해답을 주셨는데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입니다. 여기에 세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믿음이 잘 생기는 기도법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기도하실 때 ‘하나님’이라고 하기보다 ‘아버지’라고 부르십시오. 그게 입에 붙도록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실 때마다 반드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셨습니다. 아주 놀라운 사실입니다. 하나님과 하나이시며 동일시하는 겁니다. 둘째, 하나님은 지금까지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일하시고 주무시거나 노시거나 쉬는 분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아버지가 일하시니 예수님도 일하신다고 합니다. 셋째, 하나님은 안식일에 일하시는 분입니다. 아버지가 태초로 이제까지 일하시니 예수님도 일하신다는 뜻은 안식일에 쉬는 것만 있는 게 아니고 일하는 것도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안식일에 두 가지 요소가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한 가지는 쉬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쉬는 것입니다. 다른 한 가지는 일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이익, 쾌락, 건강을 위한 일이 아니고 이웃을 살리기 위해 일하는 것을 말합니다. 주일에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예수 잘 믿는 사람은 주일이 안식이 아니고 녹초가 되도록 일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때로 갈등을 겪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일하는 것과 쉬는 것의 내용을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사람을 기쁘게 하는데 진정한 안식의 의미가 있습니다. 믿음이 좋은 성도들은 주일에 예배드리고 봉사를 합니다. 저녁에 집으로 들어와 헉헉거릴 정도로 하나님을 섬기고 사람을 섬기고 봉사하고 도와주는 것이 진짜 안식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주일 일과 중 가장 잘못된 게 늦잠 자는 것입니다. 늦게 일어나 텔레비전을 보고 음식이나 먹는 것은 나태, 욕망, 쾌락을 만족시켜 주는 것 외에 아무 의미가 없는 짓입니다.
18절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또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동등 됨을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신 예수님의 행동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 역시 유대인들의 분노를 촉발시키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사실 유대인 자신들도 안식일의 의미가 타락되어 감을 짐작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른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느냐,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느냐, 안식일의 주인은 인자다." 하시며 그들의 핵을 찌르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안식일의 복잡한 조항들은 실제적으로 전문가가 아니면 모를 정도로 만들어 놓고 자기들만 잘 지켰다고 교만해 하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의 말씀 하나 하나가 그들의 분노를 일으키게 한 것입니다.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말씀 속에는 너희들이 지키는 안식일은 위선적이요 형식적이지만 내가 지킨 안식일은 참 안식일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유대인들이 화가 났습니다. 왜냐 하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바르지 못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꼬투리를 잡을 마음을 가지기 때문에 이것도 문제가 되고 저것도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이유는 첫째, 안식일을 범했다는 것과 둘째는,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말한 사실 때문입니다. 이 두 가지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주님은 안식일에도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일하시는데 어찌 아들이 일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거짓되고 위선적인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시비 거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안식일의 규정을 모르지 않으실 텐데 그를 고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비난 받지 않으려면 얼마든지 타협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께는 무엇이 더 소중하셨을까요? 주님은 한 사람이 고침 받아 38년의 어둠에서 해방되는 것을 기뻐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38년 된 병자는 우리들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로 인해 고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죄를 회개하고 고침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무조건 나와서 고침 받기를 원하십니다. 고침을 받으시려면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의지해야 합니다. 그곳에 죄 사함이 있고, 치료가 있고, 인간의 참된 행복이 있습니다. 올해는 말씀으로 위로 받고, 영육 간에 고침 받아 건강하여 한해를 승리하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 도>
“하나님, 제게도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옵소서. 제 마음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 부어지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사랑이 넘쳐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사랑으로 성도를 섬기고 교회를 섬기게 하옵소서.”
아들과 심판 / 요 5:19-29
프랑스 파리에 가면 로댕 박물관이 있습니다. 이곳에 저 유명한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벌거벗은 남자가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도대체 이 남자는 무엇을 저렇게 골똘히 생각하는 것일까요? 장난삼아 어떤 분인 이렇게 말합니다. ‘아, 내 팬티 어디에 있을까?’ 또 다른 분은 ‘아, 휴지가 없는데 어떻게 하나?’라고 말합니다. 이 작품은 ‘지옥의 문’이라는 여러 조각으로 이루어진 작품 중의 하나였습니다. 로댕은 시인 단테의 신곡의 영향을 받아서 이 작품을 제작하였습니다. 이 문에는 지옥으로 향하는 인간의 고통과 번뇌 그리고 죽음을 보여주는 인물 조각상들이 여럿 등장합니다. 로댕은 여기에 이들을 심판하는 심판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등장시키지 않고 대신 이 심판 과정을 지켜보는 생각에 잠긴 사람 곧 ‘생각하는 사람’ 상을 문 중앙에 자리하게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 생각하는 사람은 바로 시인 단테를 염두에 두고 작품을 구상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생각하는 사람은 앞으로 펼쳐질 최후의 심판을 깊이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지 않아서 형벌의 심판을 받고 지옥으로 가는 사람들의 저 고통스런 모습을 보면서 깊이 생각에 잠겨 있는 사람의 모습을 형상화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로댕의 이 작품의 인물처럼 깊이 생각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장차 우리가 서게 될 저 최후의 심판을 깊이 생각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의 보좌 위에서 행하실 저 심판을 깊이 생각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잘 하지도 못하면서 잘 하는 척하면서 일을 그르쳐 놓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성경에 등장하는 유대인들의 꼴이 그러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예수님을 책잡아 죽이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이 스스로 하나님을 친 아버지라고 하였다 하여 신성 모독죄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생긴 것입니다.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일을 하여 안식일 법을 어겼다고 예수님을 박해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하는 그들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잘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판단을 유보하는 것이 옳습니다. 사실 우리는 사람의 마음을 잘 모릅니다. 왜 그런 일을 했는지, 왜 그렇게 처신하는지 잘 모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쉽게 판단합니다. “그럴 수 있느냐?” “그 사람 잘못 봤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사람의 속사정은 하나님만이 온전히 아십니다. 그러므로 판단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께서 대답하신 말씀이 오늘 말씀입니다.
19절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것은 스스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여주신 일을 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아버지의 일을 아들에게 보여주셔서 대를 이어 그대로 한 것입니다. 그 아버지의 일은 바로 사랑을 베푸는 일, 생명을 살리는 일이었습니다. 사랑의 일은 중단되지 않습니다. 영원히 계속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성자 예수님에게로, 예수님의 사랑은 그의 열두 제자에게로, 그리고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계속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으로부터 보고 배우고 받은 사랑과 생명의 일은 우리만 아니라 우리 후손들에게도 계속 이어지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계2위 경제대국인 일본에게서 배울 점이 많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대를 이어서 같은 사업을 하는 장인정신입니다. 교토에 가면 부엌칼만 450년간 만들어온 가게가 있고, 600년간 메밀국수만 만들어온 가게가 있습니다. 1010년간 인절미만 구어 온 가게도 있습니다. 이렇게 오랜 역사를 지닌 사업장이다 보니, 생선초밥 1인분에 40만원에서 130만원을 받는 초밥집이 있는 것입니다. 대를 이어 하는 것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여러분의 가문에는 대를 이어 하는 것이 있습니까? 대를 이어 믿음 생활하는 것, 이에 더하여 대를 이어 목회자를 배출하는 것, 대를 이어 장로가 되는 것, 이것은 아주 소중합니다. 대를 이어 가난한 사람을 섬기는 일, 대를 이어 장애인을 돌보는 사역을 하는 것, 대를 이어 선교사가 되는 것, 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이런 좋은 믿음의 대를 계속 이어가는 여러분과 여러분의 후손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19절 예수님은 먼저 “진실로 진실로”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진실로 진실로는 아멘이란 히브리어를 번역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멘을 반복하여 사용하신 겁니다. 어떤 학자는 아멘이 예수님의 독특한 언어 습관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자신이 곧 아멘이라고도 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 3:14절을 보세요.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우리는 아멘을 잘해야 합니다. 아멘에 인색한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아멘에 인색한 그리스도인을 보세요. 그가 풍성한 은혜생활을 하고 있는지를. 은혜를 사모하면 아멘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멘하다 보면 은혜 받게 되어 있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아멘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고린도후서 1:20절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자기 목숨을 드리는 것도 아니고 수억을 헌금하는 것도 아니고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는데 망설일 게 뭐 있습니까? 우리교회는 아멘에 조금 인색합니다. 우리교회가 아멘을 비교적 인색한 편에서 잘하는 편이 되기를 아멘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예수님은 자신이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항상 보고 계심을 말씀합니다. 아들이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보고 그대로 하는 것이 단순히 보고 모방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아버지가 행하신 것과 동일한 성질의 것을 한다는 의미입니다. 또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는 것이 무슨 일이나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비주체적인 인물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뜻을 다 알고 있으므로 스스로 아버지가 원하시는 일만을 행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자신이 아버지와 하나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일을 행하고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관계인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아들에게 전달되어 그대로 진행되는 관계입니다. 20절을 보세요.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놀랍게 여기게 하시리라.’ 예수님과 아버지는 투명한 관계입니다. 아버지는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십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숨기는 게 없습니다. 둘은 사랑으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와 뜻이 같았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곧 예수님의 뜻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와 비전이 일치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비전이 곧 예수님의 비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와 마음이 맞았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이 곧 예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아버지와 뜻이 같습니까?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놀랍게 여기게 하시리라.’ 예수님은 지금까지 아버지가 보이신 일을 해오셨습니다. 이제 더 큰 일을 하셔야 했습니다. 여기서 “큰 일”의 원어 ‘에르가’는 기적이 아닌 일상적인 일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보이신 분입니다. 기적으로 하나님을 나타내시곤 했습니다. 그러나 꼭 기적으로만 나타내신 것은 아닙니다. 일상적인 것을 통해 나타내실 때가 많았습니다. 예수님은 자연법칙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자연현상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자연스럽게 나타내셨습니다. 전도(봉사, 기도)도 그렇습니다. 전도도 자연스러워야 합니다. 처음엔 어색하지만 계속해서 반복하다 보면 점차 자연스러워 집니다. 여러분이 전도에 자연스러워지기를 바랍니다. 21절을 보세요.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더 큰일은 죽은 자들을 살리심을 뜻합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생명의 능력을 주신 겁니다. 구약성경은 하나님이 살리시는 분임을 증언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주신 말씀입니다. 신명기 32:39절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 외에는 신이 없도다. 나는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빼앗을 자가 없도다.’ “나는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전혀 놀라지 않았을 겁니다. 당연하다는 반응이었을 겁니다. 랍비의 속담에도 이런 것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손에는 다른 어떤 대리자에게도 부여하지 않은 세 개의 열쇠가 있다. 그것은 비를 내리시는 열쇠와 여자의 태를 여시는 열쇠, 그리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열쇠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으로 믿었습니다. 문제는 예수님의 그 다음 말씀입니다.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을 아들에게 맡기셨다는 겁니다. 생명의 능력을 예수님께 이양하셨다는 말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그 능력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셨습니다.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셨습니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예수님,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예수님,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 그분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죽었던 우리에게 생명을 부여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 우리를 다시 살리실 줄 믿습니다. 22절을 보세요.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아버지가 아들에게 심판의 권리를 맡기신 겁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생명의 주님이 되신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생명의 주님이 되시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심판주가 되십니다. 어떤 사람에게 생명의 주가 되고 어떤 사람에게 심판의 주가 됩니까?
23절을 보세요.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 구체적인 죄목을 나열하지 않습니다. 죄의 대중소를 말하지 않습니다. 아들의 공경 여부를 따집니다. 아들을 공경하느냐 공경하지 아니하느냐로 판단합니다. 아들을 공경하는 것이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이고 아들을 공경하지 않는 것은 아버지를 공경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버지가 아들을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보내심을 받은 자를 대사라고 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대사입니다. 제자, 증인 외에 그리스도의 편지라고도 부릅니다. 고린도후서 3:3절을 보세요.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 그리스도인은 주님이 세상에 보낸 대사입니다. 원칙적으로 그리스도인을 받아들이는 것이 주님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그리스도인을 거부하는 것이 주님을 거부하는 것이 됩니다. 24절을 보세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사람은 영생을 누립니다. “영생을 얻었고”라고 우리말로는 과거로 번역되어 있지만, 헬라어 원어에서는 “영생을 누린다.”라고 현재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영생을 누립니까?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자들은 어떤 자들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그냥 귀로 듣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쟤, 말 정말 안 듣는다.”라고 하지요. 반대로 “저 아이는 참으로 말 잘 듣는다”라고 하지요. 이 때 “듣는다”는 것은 두 귀로 듣고 마는 것이 아니라, 들은 말씀대로 따라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대로 살면 영생을 누립니다. 영생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은 대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이 천국입니다. 말씀대로 살면 천국을 누립니다. 이렇게 이 땅에서도 주님과 함께 사는 천국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삶을 시편기자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시 16:11)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충만한 기쁨과 영원한 즐거움이 있습니다. 세상의 쾌락과는 비교할 수 없는 기쁨과 즐거움이 있습니다. 이 최고의 기쁨, 최고의 즐거움을 맛본 사람은 세상의 말초적인 쾌락에 빠지지 않습니다. 중국에서 복음을 전하던 워치만 니의 경험담입니다. 주님을 영접한 한 중국 청년이 기차여행을 하였습니다. 승객 중 한 사람이 무료함을 달래자며 가방에서 중국 카드를 꺼냈습니다. 그 카드는 반드시 네 사람이 있어야 가능한 중국 도박의 일종이었습니다. 그의 앞과 옆의 세 사람은 금방 의기투합했고, 나머지 한 사람인 이 청년도 당연히 카드놀이에 동참하리라 생각하고 카드를 돌리려 하였습니다. 그 때 청년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을 실망시켜 드려 대단히 죄송합니다. 저는 지금 도박할 손을 갖고 있지 않기에 카드놀이를 할 수 없습니다. 널리 양해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세 사람 중 한 사람이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물었습니다. “아니, 지금 분명히 두 손이 있는데 손이 없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청년이 다시 대답했습니다. “네, 분명이 두 손이 있긴 합니다만 그러나 제 손이 아닙니다. 이것은 제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손입니다.”
영생을 누리고 있는 자는 더 이상 도박할 손, 술 마실 손, 성적 부도덕한 짓을 할 손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남을 욕하거나 험담할 입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음모를 꾸밀 머리도, 정욕에 사로잡힌 마음도 없습니다. 영생을 누리고 있는 성도는 자신의 몸을 쾌락과 욕망으로 물들이지 않습니다. 주님을 찬양하는 입술, 이웃을 섬기는 손, 복음을 전하는 발, 하나님의 교회의 부흥을 위하여 연구하는 머리, 오직 주님만 생각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의 마음, 그의 인생이 천국입니다.
25절을 보세요.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지금 이때가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입니다. “죽은 자”란 육체적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죽은 자, 곧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을 말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바로 오늘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는 살아날 것입니다.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이 시간 말씀을 듣는 자는 영생을 누립니다. 말씀을 듣는 성도는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능력을 입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얻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보호하심을 받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몸과 시간과 재능, 물질을 하나님의 사랑을 베푸는 도구, 생명을 살리는 도구로 쓰임 받습니다. 말씀을 듣는 성도, 그리하여 영생을 누리는 성도, 천국 생활하는 성도, 하나님의 사랑을 베푸는 성도, 생명을 살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가장 불쌍한 사람은 마지막에 “걸, 걸” 하는 사람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마지막이 있습니다. 갑자기 죽음이 닥칩니다.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을 때가 옵니다. 교회를 위하여 봉사하고 싶어도 봉사할 수 없을 때 후회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힘 있을 때 봉사할 걸’ ‘그 때 그 사람을 용서해줄 걸’ ‘좀 더 사랑할 걸’ 죽음 앞에서 ‘걸, 걸’ 하며 후회한들 이미 늦습니다. 우리의 시간을 우리 자신만을 위하여 사용한다면, 나중에 반드시 후회할 것입니다. 우리의 건강, 우리의 돈, 우리의 힘을 자신을 과시하고 자랑하고 취미생활에만 투자한다면 인생의 마지막 날, 심판주 주님 앞에 서는 날 후회 막심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맡겨주신 좋은 것들을 어디에 사용하고 있습니까?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다시 한 번 더 주님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이때는 예수님께서 심판주로 오실 재림의 때입니다. 그 때는 모든 것이 끝이 납니다.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가 끝이 납니다. 세상의 수고와 슬픔도 끝납니다. 아름다운 얼굴, 높은 지위, 멋진 아파트, 사랑스런 가족, 모두 끝납니다. 주님의 교회를 위한 봉사, 섬김, 충성, 헌신, 전도, 기도 등 모든 것이 다 끝이 납니다. 이 때 저와 여러분, 우리교회, 우리 자녀, 우리 남편, 아내, 우리나라, 이 세상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마지막 주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26~29절 말씀을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한 마디로 심판은 하나님의 위임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장차 재림하신 뒤에 직접 심판하십니다. 이 말씀은 성경 여러 곳에서 다양한 사람들에 의해서 말씀되고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마 25:31-33) 예수님께서 직접 영광스러운 보좌에 앉으셔서 친히 모든 민족들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음으로 바울은 딤후 4:1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예수님을 심판주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후 5:10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장차 우리가 서게 될 심판대를 그리스도의 심판대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장차 심판은 재림하실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받게 됩니다. 우리 모두가 영광의 보좌에 앉으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서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우리를 심판하실 분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인간이 되셔서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심판하실 분이 우리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중보기도 하고 계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심판하실 분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심판을 두려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심판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결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를 정죄하시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심판하십니까? 재림하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판대 앞에서 모든 인생들을 심판하실 때 책들을 근거로 심판하십니다. 계 20:12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여기 두 종류의 책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생명의 책’이요 다른 하나는 소위 ‘행위의 책’입니다. 우선 생명의 책이 펼쳐집니다. 생명책은 무엇이고 누가 그곳에 이름을 등재할 수 있을까요? 말 3:16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사람 곧 하나님의 백성들의 이름이 이 생명록에 기록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 21:27에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 이 생명책을 어린양의 생명책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책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사람들이 이 책에 그 이름을 올릴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 책에 따라 심판은 어떻게 진행되는 것일까요? 계 20:15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과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사람을 나누십니다. 마치 목자가 양과 염소를 나누듯이 나누십니다. 이것이 심판에서 먼저 이루어질 일입니다. 다음으로 ‘행위의 책’이 펼쳐집니다. 이 행위의 책에는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행했던 모든 것들이 다 기록되어있습니다. 이제 이 행위의 책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게 됩니다. 성경 여러 곳에 같은 말씀이 반복해서 강조되고 있습니다. 마 16:27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또 시 62:12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주여 인자함은 주께 속하오니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심이니이다.” 롬 2:6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분명히 우리가 행한 대로 심판을 받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을 잘 지키는 것입니다. 딤전 1:19을 보면 주목할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바울이 디모데에게 전하는 말씀입니다. 어떤 이들이 예수를 잘 믿다가 그 믿음을 잃어버렸다는 말씀입니다. 출 32:33을 보면 이런 말씀도 기록되어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내가 내 책에서 그를 지워 버리리라.”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었어도 그가 믿음을 끝까지 지키지 못하면 그 이름이 지워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두려움으로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마지막까지 믿음을 잘 지켜야 합니다. 마라톤 선수가 아무리 기록을 단축하여 잘 달려도 마지막 골인 지점에 들어가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처럼, 우리가 아무리 믿음 생활을 잘해왔어도 마지막 심판대 앞에 설 때까지 믿음을 지키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실제로 우리 주변에 믿음이 파선된 사람이 있습니다. 생명책에서 그 이름이 지워진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처럼 되어서는 안 됩니다. 끝까지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 갈보리교회 성도들은 끝까지 믿음을 지켜 생명의 부활로 나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들에 대한 증언 / 요 5:30-47
어떤 한적한 마을 주유소 앞에 할아버지 한 분이 흔들의자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는 오가는 운전자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있었습니다. 그날따라 손녀딸이 그 곁에 앉아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한 여행객이 마을을 둘러보던 중 다감하게 인사하는 할아버지를 보고 다가와 물었습니다. "이 마을은 어떤 곳입니까?" "젊은이는 어떤 마을에서 오셨소?" "제가 사는 마을 사람들은 모두 서로에 대해 아주 비판적입니다. 서로 나쁜 소문을 퍼뜨리기 때문에 정말 살기 힘든 곳입니다. 저는 그곳을 떠나고 싶습니다." "그래요. 이 마을도 똑 같답니다." 얼마 후, 여행을 하던 다른 가족이 그 할아버지에게 다가와 화장실을 물었습니다. 어머니는 어린 두 아이를 데리고 화장실에 간 사이에 아버지가 다가와 물었습니다. "이 마을은 살기 좋은 곳입니까?" "당신이 살아 온 마을을 어떤 곳입니까?" "정말 좋은 곳입니다. 이웃과 아주 가깝게 지냅니다. 언제나 기꺼이 도움을 주려고 합니다. 어디가나 반갑게 서로 인사를 나눕니다. 작은 일에도 고마움을 잊지 않는 마을입니다. 어쩔 수 없이 정말 가족을 떠나는 느낌입니다." "이 마을과 비슷하군요." 그 가족이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고 떠나간 후, 의아하게 생각한 손녀가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왜 첫 번째 사람이 왔을 때는 우리 마을이 살기에 아주 고약한 곳이라고 하시더니 두 번째 사람들에게는 아주 살기 좋은 곳이라고 하셨어요?" "사람은 어디를 가나 자기 마음을 가지고 다니는 법이란다. 그리고 그 마음이 살기 좋은 곳을 만들기도 하고 고약한 곳을 만들기도 하지."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빚어서 우리에게 담아주신 마음이 중요합니다. 그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초대를 받아들인 자에게는 구원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푸시기 원하셔서 은혜로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은혜로 받아들이지 않고 거절하면 그 자체가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존 스토트 목사가 영국 여왕이 웨스트민스터 성당에서 대관식을 거행할 때의 장면을 묘사하면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들 중의 하나는 대관식이 행해지기 바로 직전 즉 여왕의 머리에 왕관이 씌워지기 바로 직전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캔터베리 대주교는 성당 안에서 동서남북 각 방향의 청중들을 향하여 네 번 소리를 지릅니다. ‘귀빈 여러분, 저는 이분이 틀림없는 영국 여왕임을 여러분께 소개해 드립니다. 여러분은 이분에게 기꺼이 충성을 맹세하겠습니까?’ 대주교가 물을 때마다 웨스트민스터 성당 안에 모인 청중들이 큰 소리로 승인의 대답을 네 번 해야만 비로소 왕관이 여왕의 머리에 씌워집니다.” 스토트 목사는 이어서 말을 합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저도 오늘 여러분들께 예수 그리스도께서 틀림없는 만왕의 왕이시오, 만주의 주이심을 소개해 드립니다. 여러분은 이분께 기꺼이 충성을 맹세하겠습니까?” 이것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한 모든 사람이 필히 대답해야 할 질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합니다.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합니다.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그뿐 아니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하신 제 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됩니다. 제 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십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었습니다. 그때 거기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그 중의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면을 가져다가 신 포도주에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니 그 남은 사람들이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원하나 보자” 합니다.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그때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말하기를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였습니다. 십자가 밑에 있던 이 군병들이야 말로 참된 증인이었던 셈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예수님이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었음을 증언하는 이가 여럿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는 이가 누구입니까?
30절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주님은 마태복음 16:26절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주님은 온 천하를 다 주고도 바꿀 수없는 귀한 존재로 인간을 보신 것입니다. 이런 귀한 생명을 심판하신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심판 속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있습니다. 심판이란 말을 사람들은 싫어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나답과 아비후, 고라와 그 무리, 아간,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자와 나사로에서 심판을 들을 때, 심판이 무섭습니다. '심판대 앞에 서야 한다?' '내 일생을 들고 조금도 죄가 없으신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 얼마나 부담스럽고 힘든 일입니까?
그런데 성경에서는 340번이나 심판이란 말을 적고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으로 도배하다시피 한 요한복음에도 스무 번이나 심판을 말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성경의 심판에 대한 핵심은 그 무서운 심판이 그대로 범죄자에게 임하는 것이 아님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8:20절 ‘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아, 그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그에게 심판을 행하셨음이라 하더라.’ 성경에서 심판이 갖는 의미를 좀 더 신중히 들추어 보면 심판은 부담스럽고 혐오감이 나는 개념이 아니라 그 안에 하나님 사랑이 듬뿍 담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 3: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5:34하 ‘다만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로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의 심판 속에는 하나님 사랑과 떠날 수 없는 연관을 맺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 사랑의 범주에 들어 있다는 사실이지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잡아서 지옥에 보내려고 오신 그런 심판관이 아니십니다. 죄인을 불러 회개하게 하시고 마침내 구원을 받게 하시는 구원의 심판관이십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심판은 세상 심판관이 죄인을 감옥에 보내는 것과 다릅니다. 죄인을 불러 구원에 이르게 하는 심판입니다. 심판 속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할 때, 성도들이 심판의 그 날에 기뻐할 수 있습니다.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아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무나 안타까우셔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를 말씀하셨는데, 증언 또는 증거라는 단어를 오늘 본문에서 열두 번이나 반복하여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만큼 분명히 알 수 있는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예를 세 가지를 드셨는데 하나는 31-35절에서 세례 요한의 증거를 드셨습니다.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언하면 내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되,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그 증언이 참인 줄 아노라.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매 요한이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였느니라. 그러나 나는 사람에게서 증언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로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은 켜서 비추이는 등불이라. 너희가 한때 그 빛에 즐거이 있기를 원하였거니와’ 세례 요한이 분명히 예수님을 가리켜 메시아라고 증언했습니다.
두 번째는 36-38절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적”을 증거로 드셨습니다.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내가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것이요.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언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상을 보지 못하였으며,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가 보내신 이를 믿지 아니함이라.’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고,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일은 하나님이 아니시면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께서 39-40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로 제시하셨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로다.”
예수님에 대하여 이미 성경에 무수히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정말 정직한 마음으로 성경을 살펴보았다면 얼마든지 예수님이 그리스도인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17:11-12절에 보면 바울과 실라가 베뢰아에 가서 복음을 전하였을 때, 베뢰아 사람들이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누구든지 정직한 마음으로 성경을 읽으면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정말 이상한 일입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당시 누구보다 성경을 많이 알았고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다고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예수님을 보고도 그리스도인 것을 알아보지 못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을까요? 그들이 성경을 잘 알고 잘 지킨다고 자부하지만 겉으로만 “말씀! 말씀!”하는 것이지, 실제로는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38절)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머리로는 알지만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고도 말씀을 안다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만약 유대인들이 정말 말씀을 믿고 말씀을 품고 기다렸다면 예수님을 메시야로 알아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말씀도 형식적으로 보고, 하나님도 형식적으로 믿었습니다. 그들 마음에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전혀 그리스도로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정확하게 지적하셨습니다.
41-42절 “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알아주기 원하셨습니다. 그것은 사람으로부터 영광을 얻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래야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유대인들이 영생을 알았고 영생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 것을 알고 당연히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사실상 영생에 대한 관심이 없었습니다. 말씀을 읽고 연구한다고 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자신들의 종교적인 신분을 유지하고 세상 영광을 얻는 도구로 여긴 것입니다.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 이상은 아무 것도 그들이 원하는 것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추구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오직 세상 영광만 추구하는 마음뿐이었습니다. 43-44절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하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지 못한 이유는 예수님이 제사장도 아니고 바리새인도 아니고 서기관도 아니고, 무식한 나사렛 출신에다가 목수의 아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 안에 분명히 하나님의 신성이 드러났지만 그들의 눈에는 제사장이 보낸 유력한 사람만큼도 못하게 보였습니다. 그들은 철저히 사람의 영광 밖에 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없고 오직 세상만 추구하고 사람의 영광을 더 추구하는 사람은 예수님 당시나 지금이나 예수님을 만나도 알아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2천 년 전에 예수님이 오셨을 때 성경도 많이 알고 하나님을 잘 섬긴다던 유대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 것을 알아보지 못한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주인이 아니고 세상이 주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도무지 알아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똑같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와 같이 계신지 안 계신지를 아는 눈이 트이려면 마음의 주인이 바뀌어져야 합니다. 여러분이 세상을 주인 삼아서 살면 예수님이 여러분과 함께 계신 것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유대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이려고 했던 것처럼 함께 계신 예수님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정말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알아보려면 우리 마음의 주인이 바뀌어야 합니다. 세상이 주인 노릇을 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정말 예수님을 주님으로 여기고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하는 사람인지 한번 돌아보아야 하는데 우선은 말씀이 여러분 속에 들어오는지를 한번 보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지적하셨습니다.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않는다고.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말씀을 마음으로 받으셨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 안에 거하고 있습니까? 한번 몇 가지 말씀만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말씀이 여러분 안에 있습니까?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는 말씀이 여러분 안에 있습니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이 여러분 안에 있습니까?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말씀이 여러분 안에 있습니까? 말씀을 아는 것과 말씀이 내 마음 안에 들어오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내 마음의 주인이 누구냐에 따라 다릅니다. 내 마음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면 내가 하나님을 구합니다. 하나님만이 내가 사랑하는 대상입니다. 정말 예수님을 사모하고 사랑하고 원하는 사람은 말씀이 그 사람 안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 말씀으로 살게 됩니다. 그러나 마음에 다른 주인이 있는 사람, 세상 영광을 추구하는 사람은 따르기가 부담스러운 말씀은 마음에 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받아들입니다. 하기 싫거나 부담되면 거절합니다. 이 기가 막힌 현실이 유대교 지도자들의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눈이 세상 영광으로 다 가려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안에 하나님의 신성이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전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하나님을 모독하는 죄라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입니다. 어느 장로님들의 모임에서 강사님이 설교하면서 물었답니다. “장로님들은 왜 사십니까?” 그때 한 장로님께서 대답하시더랍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지요.” 목사님께서 그 장로님을 향하여 정색을 하고 물었답니다. “장로님, 정말 하나님 영광을 위하여 사십니까?” 그랬더니 대답을 못하시더랍니다. 이것이 우리 자신의 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데 우리는 얼마나 외모를 꾸미는 일에 연연합니까?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하며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오면서도 많은 시간을 거울 앞에서 보냅니다. 하나님 앞에 나오면서도 사람에게 잘 보이는 것만 생각하지 내면의 더러움을 보지 못합니다. 영적인 무지는 부끄러워하지 않고, 세상의 학력과 경력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그처럼 세상 영광에 관심이 많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해 주기를 원하지만 나는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자기중심이 되고, 자존심과 열등감의 종이 됩니다. 우리가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보려면 이 점을 점검해야 합니다. 마음속의 주인이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을 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말씀하시지 않으신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를 큰 소리로 부르고 계십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음성을 듣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하여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사람만큼도 섬기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돈 만큼도 믿지 못합니다. 힘들고 어렵게 살아가는 어떤 성도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제게는 역사하지 않으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볼 수만 있어도 견뎌나갈 수 있을 텐데요!” 마찬가지로 이것은 대부분 많은 성도들의 안타까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안타까움은 더 크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옆에 있는데, 여러분의 자녀가 여러분을 보지도 못하고, 여러분의 말을 듣지도 못한 채, 두려워하고 외로워하거나 잘못된 길을 간다면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너무나 많은 성도들이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고 답답한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모습을 보는 주님의 안타까움에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어느 목사님이 우리가 천국에 가서 예수님을 만나면 어떤 말로 인사를 할까 생각해 보았더니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하고 인사할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모른다면 2천 년 전에도 예수님을 몰랐을 것이고 다시 오실 예수님도 맞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것을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45-47절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발할까 생각하지 말라. 너희를 고발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가 바라는 자 모세니라.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하시니라.’ 이제 우리는 베데스다에서 시작 된 중요한 논쟁을 마치려고 합니다. 38년 된 병자가 고침 받은 것이 눈앞에 훤히 보이는데 유대인들은 왜 예수님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을까요? 유대인들은 주님께서 자신들을 아버지께 고소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양심에 가책을 느끼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예수께서 분명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38년 된 병자를 고친 것도 옳다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독선으로 양심을 누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주님께서 언젠가는 자신들을 아버지께 고소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저는 인간의 고집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신앙적인 독선으로 뭉친 고집은 자신이 망하는 행위인줄 알면서도 인정하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이 우리를 섬뜩하게 합니다. 특히 고집의 중심에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그 무엇이 있을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유대인들의 독선을 지지하는 것은 모세의 율법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생각이 자신들의 행동이 잘못이라면 모세에게 잘못이 있지 자신들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엉뚱한 배짱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진정으로 모세도 믿지 않았습니다. 모세조차도 그들의 영광을 이용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을 위해 이용하는 권위의 근거를 모세로 삼았던 것인데, 주님은 훗날 그들을 고소하는 사람은 도리어 모세일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이 말씀이 우리의 삶의 행동에 근거가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하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고집의 근거, 내가 갖고 있는 타협할 수 없는 독선, 사람은 누구나 고집과 독선을 갖고 있는데, 만일 행동의 근거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면 우리는 고침 받아야 합니다. 말씀에서 나온 것이라고 해도, 혹시 말씀을 내 입장에서 해석하여 근거를 삼는다면, 그 말씀이 곧 그들을 고소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원한 모델로 삼고 그분에게서 우리 행동의 권위를 찾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고난 속에서도 오직 예수로 살아간 사람이 있습니다. 잔느 귀용입니다. 잔느 귀용 부인은 17세기 사람으로서 성직자도 신학자도 아니었지만 앤드류 머레이, 워치만 니, 허드슨 테일러 등과 같은 위대한 기독교인들에게 많은 영향력을 끼쳤던 정말 경건한 예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귀용 부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 몸부림치며 주님을 갈망하였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거룩하지 못하여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얼마나 나아지고 있는지 철저히 자기를 점검하고 또 살폈습니다. 그러나 헛되고 피곤할 뿐이었습니다. 그것은 자기 노력으로 거룩해지려고 애를 썼기 때문입니다. 행복은 노력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무거운 삶을 짊어진 채 주님을 찾으면서 동분서주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잔느 귀용 부인이 프란시스코 수도회 수사 한 분을 만나 자신의 심정을 고백하며 상담을 하였습니다. 그가 귀용 부인에게 답해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당신 안에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영국과 백년 전쟁에서 조국 프랑스를 구한 오를레앙의 처녀 쟌다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곳은 저녁 종소리를 들으며 늘 밭을 갈던 들녘이었습니다. 전도자 무디가 주님을 만난 자리도 그가 늘 일하던 보스턴의 한 구두 가게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것은 모든 사람들이 다메섹을 향하여 늘 다니던 길 위에서였습니다. 모세는 양 떼를 몰고 늘 다니던 길목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곳은 무의미하게 세월만 반복되던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기대할 것도, 소망할 것도, 바라볼 것도, 뭔가 신날 것도 없는 그런 삶의 일상 한 가운데였습니다. 바로 그곳에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 매일의 일상적인 삶의 길목에 서계심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침실에서 주방에서 사무실에서 출 퇴근 길에서 어디서나 우리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조건이 있다면 오직 하나입니다. 진심으로 “예수님만 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하소서!” 하고 구하는 것입니다. 진심이어야 합니다! 여러분, 어떤 환난과 핍박과 시련 속에서도 예수님이 함께 하심을 분명히 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여러분, 오늘 그 은혜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이미 하나님은 부어주시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누리시면 됩니다. 무엇이 여러분의 눈을 가리어 예수님을 보지 못하게 합니까? 세상과 사람의 영광으로 가려진 눈을 가지고 있음을 조심해야 합니다. 여러분 마음에 정말 “예수님 한분이면 충분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제게는 더 이상 세상 사랑이 없습니다. 주님이 이렇게 하시던 저렇게 하시던 주님이 함께 계시면 충분합니다.” 이렇게 기도를 할 수 있으면 됩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어떤 시험도 문제도 십자가도 이길 힘이 생깁니다. 무거운 짐은 다 주님께 맡길 수 있습니다. 우리 갈보리교회 성도들은 핍박, 중병, 사람들의 비판, 경제적인 어려움, 어떤 시험도 다 넉넉히 이기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