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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적 교육과정 디딤돌, 해로 반 브루멜른 (Harro Van Brummelen) 2장 정리
교육과정 기획의 기반이 되는 성경적 세계관, 학급 운영과 개별 학과목을 위한 기독교적 접근 방식, 교육과정을 변혁시키는 지도자의 자질 등에 대해 설명했다. 기독 교사들의 수업 지도안과 평가 예시와 풍부한 토론 자료를 곁들여 기독교 교육과정에 대한 이해를 높인다.
유치원 kindergarten(만 4-6세) / 저학년(primary grades, 1-3학년 만 5-9세)
고학년(intermediate grades, 4-6학년, 만 8-12세) / 중학교(middle school, 6-8학년, 만 10-14세)
고등학교(high school, 9-12학년, 만 13-18세)
2. 교육과정 지향의 선택
네 가지 교육과정 지향 / 전통적 교육과정 지향 / 과정, 성취 중심적 교육과정 지향 / 경험 중심적 교육과정 지향 / 교육과정 지향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 / 기독교 교육과정 지향을 향하여 / 교육과정 기획의 단계 / 핵심 내용 정리 / 참고 문헌
2. 교육과정 지향의 선택
35쪽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하나의 공통된 신앙을 공유한다. 그들은 하나님이 사람을 그분의 형상대로 만드셨으나 인류가 죄로 인해 타락했다고 믿는다. 그들은 개인의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의 구속이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 그들은 또한 성경이 하나님의 권위있는 생명의 말씀이라고 믿는다.
그것은 삶의 영적 차원을 위한 틀을 제공해 줄 뿐만 아니라, 삶의 윤리적, 심미적, 경제적, 사회적, 지적, 심리적, 신체적 차원을 위한 틀을 제공해 준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분의 목적을 따라 사회 속에서 살아가도록 자신을 부르셨다는 믿음을 공유한다. 성경의 기본적 규범은 그들의 사고와 언어 및 행동을 인도해 준다.
글렌대일 전통학교(Glendale Traditional School)
밸리 성취 학교(Valley Achievement School)
쿨리 발견학교(Coulee Discovery School)
캐년 기독교 학교(Canyon Christian School)
상이한 세계관이 교육과정에서 어떻게 다양한 접근 방법으로 이끌어주는 지를 보여주려고 했다.
36쪽 많은 교사들은 절충적이다. 여러 지향 가운데 자신에게 편안한 것을 사용하면서 담당 과목과 교실에 따라 여러 가지 지향 사이에서 왔다갔다 할 것이다.
37쪽 세계관은 삶과 실재에 대한 기본적 신념 및 가정들의 집합이다.
세계관은 한 사람이 세상에서의 삶의 본질과 목적에 대해 믿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답해 준다.
세계관은 의미를 제공하며, 그것을 소유한 사람의 사고와 행동을 안내하고 방향을 지시해 준다.
각 학교가 지식, 학습, 인생의 의미에 대해 어떻게 보는지 생각해보라.
하지만, 복잡한 사회에서 성경적 원리를 적용하는 방법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언제나 하나로 통일되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기독교 학교를 지지하는 사람들조차도 학교 교육의 목적이나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주변 문화와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에 대해 견해 차이를 나타낸다.
<핵심 내용 정리> 58쪽
교육과정 지향 교육과정에 대한 은유 | 기본 질문들 | 지식과 학습 강조점 |
전통적 정보와 사상의 전달자로서 교육과정 | 학생들이 학습해야 할 세상에 대해 사상가들이 발견한 것들은 무엇인가? 학생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무슨 내용인가? (전수) | 기본적 기능들과 추론 능력, 과목별 영역에서 지식 습득 |
과정/성취 중심적 통제되고 효율적인 과정으로서의 교육과정 | 우리는 어떻게 효과적으로 목표를 성취할 수 있는가? 우리는 어떻게 학습 결과를 상술하고 평가해야 하는가? (조정) | 작고 한정되고, 다루기 쉬운 단계별로 자료들을 탐구,숙지,적용하기 |
경험 중심적 개인적 의미에 대한 탐구로서 교육과정 | 우리는 어떻게 학생들이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지식과 의미를 구성할 수 있도록 최선의 도움을 줄 수 있는가? (개인적 의미) | 지식과 의미에 대한 자율적인 창조와 교섭 |
기독교적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성찰적인 해석으로서 교육과정 |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과 피조물, 사회, 자기 자신에 대한 학생들의 적극적인 응답을 촉진할 수 있는가? (책임감) | 경험, 관찰, 개념화, 적용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하고, 펼쳐보이기 |
교육과정을 계획하는 것은 복합적인 과업이다. 타일러의 네 단계 원리는 그 과정을 너무 단순화시켰다. 교사들과 다른 교육과정 기획자들은 일반적으로 선형적인 과정을 사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심의 과정 전체에 걸쳐서 교육과정 기반과 사회적 상황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염두에 두고, 의도된 학습 결과와 학습 활동, 그리고 학습 자료의 선택 사이를 오가며 움직인다.
/ 네 가지 교육과정 지향
37쪽 교육 프로그램에 대한 분명한 방향 감각 부여
38쪽 자신의 기본적 신념들을 숙고해 보라.
이 세상에서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은 부분적이고 불완전하다(고전 13:12).
그러므로 비판적으로 읽고, 당신 자신의 교육과정 틀을 개발하고 정당화하는 시간을 충분히 가지라.
/ 전통적 교육과정 지향
본질적, 근본적 학교, 학교는 지식의 체계를 전달하기 위해 존재한다.
합리적 사고를 위해 축적된 지식 사용
본질주의(essentialist), 항존주의(perennialist)
40쪽 지식이란 단지 지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마음의 문제다. 전통주의자들은 때때로 이것을 간과한다.(호 4:6, 미 6:8).
이들 중 많은 이들이 이성이 신앙 외부에 존재하며 그것 자체가 궁극적인 인간 가치라고 믿는다. 이성은 어떠한 정당화도 필요하지 않으며, 모든 인생의 기본적 질문들에 대답할 수 있다고 말한다.
성경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우리의 마음과 합리성을 지배하는 것은 다름 아닌 마음의 지식과 헌신이다.
추론이 중요하긴 하지만 인생의 궁극적인 대답으로 이끌어주지는 못한다.
이성은 항상 인생에 대한 하나의 입장을 결정하는 신앙적 가정들의 틀 안에서 기능하기 마련이다.
/ 과정, 성취 중심적 교육과정 지향
교육과정에 대한 인식적 과정, 서회적 행동주의자, 혹은 기술주의적 접근법 등..
41쪽 -지식은 객관적이고 비인격적이고 가치가 배제된 상품으로서 파악되어야 한다고 여겨진다.
선형적인 교육과정 계획 - 20세기 초반 프랭클린 보비트(Franklin Bobbit)
20세기 가장 인기 있는 교육과정에 대한 저술, 랄프 타일러(Ralph Tyler) [교육과정과 가르침에 대한 기본적 원리](Basic Princiles of Curriculum and Instruction, 1950)에 기초
“무엇이 가장 가치 있는 지식인가?”(1854년 허버트 스펜서 Herbert Spencer)
1970년대 행동목표 (behavioral objective), 실행목표, 상세한 목적 진술문, 구체적인 결과 측정
42쪽 “교사 배제 교육과정”- 교사들은 주어진 설명서에 나와 있는 대로 한 단계씩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기술자인 셈이다.
기업들이 특정한 내용과 기능을 가르치기 위해 과정 중심의 소프트웨어를 계속 제공하고 있다.
-모든 학습이 구체적인 목표들로 목록화될 수 있는가?
-이 지향은 효율성에 지나치게 초점을 맞추고 개념 및 기능 지식을 좁게 한정하고 있어서 결국 더 중요하지만 쉽게 측정되지 않는 목표들을 간과하지는 않는가?
-특정한 목표들에 집중함으로써 다른 장기적인 효과들을 간과하지 않는가?
-교육의 영적, 윤리적, 심미적 차원을 간과하지 않는가?
-학습은 너무 복잡하고 학습자들 또한 너무 다양해서, 수업 계획에 정형화된 접근 방법을 모든 학생들에게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은가?
다른 문제들과 분리하여 알고리즘만을 따로 풀도록 하는 식의 강조는 창의적 문제 해결과 같은 여러 다른 능력이나 활용 등을 저해할 수 있다.
경험적 실증주의자들 - 지식을 주로 감각적 관찰을 통해 얻는다. 진술은 오직 그것이 경험으로부터 타당하다고 여겨지거나 아니면 논리적으로 자명해야만 의미를 갖는다.
1) 감각적 경험은 불완전하며 잘못 인도할 수 있다.
2) 지식의 확실성은 오직 감각적 지각에서 비롯된다는 이론은 감각적 지각 그 자체에 의해 실증될 수 없다.
3) 경험적 실증주의자들에게 종교적 진술과 신념들은 지식이 아니다.
43쪽
결과적으로 그들은 기술적으로는 유능하지만 정의와 자비가 있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데 필요한 헌신을 결여한 사람들을 양산한다.
자크 엘룰(Jacques Elul)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기 위한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만물을 창조하셨다면(롬 :20, 욥 42:5-6), 모든 지식은 의미와 가치로 채워져 있지 않겠는가? 간단히 말해, 과정/성취 중심 지향은 궁극적 의미의 목적과 가치를 억압한다.
당신이 배운 것 중에서 무엇이 당신에게 가장 유익을 주는가?
/ 경험 중심적 교육과정 지향
44쪽 존 듀이의 진보주의에 의해 예시된 서구의 인본주의적 전통 위에 서 있다.
경험주의자들
- 학생은 본질적으로 선하다.
그들 스스로가 자신의 진리와 자유의 근원이다.
- 학생들은 개인적으로 의미 있는 학습 경험에 능동적으로 참여함으로써 배운다.
- 교사는 긍정적이고 자기 지시적인 학습을 자극하는 적극적인 학습 환경을 제공해 줌으로써 학습을 촉진한다. (촉진자 교사)
다양한 분파
비판적 이론가들
구성주의(constructivism)의 경험주의적 이데올로기는 오늘날 교육과정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운동
스위스의 장 피아제(Jean Piaget)와 러시아의 레브 비고츠키(Lev Vygotsky)의 저술에 뿌리를 두고 있다.
구성주의는 전통적 지향과 과정/성취 중심 지향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슬로건
구성적 지식과 사회적으로 구성된 실재와 같은 용어들이 너무나 빈번히 사용되고 있어서, 우리는 구성주의자의 가치와 은유가 실제로 우리가 지식과 교육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을 변화시키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사실, 나도 그랬다. 구성주의의 학생 중심적 사고 방식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어디에 문제가 있었나? )
“너는 세상의 중심이다. 너는 자유롭고 엄청나게 강력한 생명과 선의 근원이다. 그것을 긍정하라. 그것을 퍼뜨려라. 그 빛을 발하라. 밤낮으로 그것을 생각하라. 그러면 너는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너 자신의 삶의 위대함을”(Greig, Pike, and Selby, 1989, p 26).
학생들이 스스로 선택할 것을 강조하고(자신의 학습에 대해서도), 스스로 자신의 실재를 구성하고, 또 자신의 의미를 창조하는 것을 강조한다. 의미를 위해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자신의 내면을 살피는 것이다.
하지만, 학생들이 각자 자신의 고유한 실재를 창조한다면, 그러한 가치들에 대한 어떤 공동의 인식이 과연 가능한지, 또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는 의심스럽다.
(사실 이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회적 구성되는 실재라는 말로서 어떤 생래적인 것에 대해 긍정하고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기에 오히려 기독교적인 것과 통한다고 생각했다. 피아제나 비고츠키 들이 모두 그런 기독교적 배경안에서 이런 사고를 전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들의 소종래는 어디에 귀인하는가? )
-다양한 스펙트럼의 구성주의자들이 존재
진보적 구성주의자와 사회적 구성주의자들
45쪽 그들은 모두 인간이 지식을 만들거나 구성한다고 믿는다. 그들에게 지식은 취득되거나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지식은 외부의 실재를 반영하거나 복사하는 것이 아니다. 진보적 구성주의자들은 지식이란 문화적 맥락 가운데 있는 개인들의 지성에서 창조된다고 믿는다. 사회적 구성주의자들은 지식이란 전적으로 사회적 상호 작용을 통해서 설명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많은 교사들이 구성주의자들이 장려하는 가르침 및 학습 전략 중의 일부를 채택하고 있지만, 구성주의 이론을 의식적으로 수용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기억하라.
구성주의적 전략의 대다수는 구성주의가 하나의 이론으로 인식되기 이전에 이미 오랫동안 교사들이 성공적으로 사용하던 것이다.
심지어 구성주의자들의 전략을 공개적으로 사용하면서도, 구성주의의 이론적 기초에 대해 인식하는 교사들은 별로 없다.
(분명 그런 점이 있다.)
이 이론은, 지식은 감각을 통해 얻어질 수 있으며, 따라서 실제 세상에 대한 하나의 그림으로 인도한다는 서구의-그리고 기독교적-전통을 급진적으로 무너뜨린다. 구성주의는 인간이 지식을 발견하거나, 자연이라는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오히려 그들은 주장하기를, 인간은 모든 지식을 개인적으로, 아니면 사회적 상호 작용을 통해서 구성한다고 말한다. 지식은 외부에 존재하는 세상을 반영하거나 발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 지식을 만들고, 자신의 경험에 대처하도록 돕는데 그것을 활용한다.
실재 안의 질서는 임의적이며, 그것은 개인적인 의미와 중요성을 창조하기 위해서 인간이 구성한 지식에 의해 세상에 부여되는 것이다.
절대적이고, 참되며, 객관적인 지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지식은 철저히 주관적이다.
따라서 교실에서 학습은 아이들 자신의 생각과 가설과 그들의 탐구로 시작된다.
학생들은 자식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물리적, 사회적, 정신적 활동을 성찰함으로써 각자 고유한 이해와 의미를 창조한다.
(어느 정도의 수준에 이르러서는 이런 말들이 의미를 갖는다. 분명 그런 요소가 있다. 내가 이해하는 감자와 다른 사람이 이해하는 감자가 동일할 수 없다. 물론 공통적인 요소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감자라는 이데아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실재 자체가 그런 성격을 지닌다. 사실 하나님의 손에 의해 지탱되지 않으면 어떤 실재도 존재할 수 없고 연속성을 유지할 수 없다. 그런데 그 실재가 계속해서 유동적이며 활동적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그렇다면 감자에 대해 어떤 지식을 가지고 그것을 기반으로해서 무슨 사업과 계획을 구성하고 진행한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인간 자신 자체도 고정적이지 않고, 생각은 더더욱 그러한 점이 많다. 그러므로 종교적, 곧 religeo 의존적인 인간 존재의 본성을 각인하고 그 아르키메데스 깃점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시며,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계시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서 점점 알아가는 것이 없이는 그 실재가 제대로 된 것이 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 실재가 이 광활하고 거대하고 그러면서도 미세하고 세밀한 세상이 항상성을 유지하고 연속성을 지니는 것은 인간의 사고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자비 때문이다. 이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교사들은 학습자의 구성물과 관점과 그들의 해답을 요구하고 그것을 가치 있게 여긴다. 교사들은 학생들의 작업이 일관성 있고 유용한지를 묻고, 또 그들이 자신의 창을 더 크게 열도록 도와준다.
구성주의자들은 정답을 넘어서 의미 있는 활동을 가치 있게 여긴다.
옳고 그름에 대한 외부적인 표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나아가, 모든 것을 포괄하는 교육과정 모델도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교사와 학생들은 학습이 일어날 때 지식과 의미를 창조하고 변형시키기 때문이다.
우리가 진보적 구성주의자들을 따라서 문학 작품을 읽는다면, 모든 사람의 해석이 똑같이 유효하다.
구성주의의 기본적인 문제점은, 사람들이 자신의 지식과 의미를 구성하기 때문에, 가능한 실재들이 여럿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궁극적으로 우리는 더 이상 중요한 공통성을 공유할 수 없게 된다. 우리는 더 이상 공통의 결속과 가치를 인식할 필요가 없다.
개인적인 선택은 모두 적법한 것이다.
이렇게 개인적 의미가 지식과 의미의 구성물을 정당화하게 된다면, 과격한 개인주의와 자기 중심적인 상대주의가 초래된다.
개인의 목소리가 권위와 공동체의 자리를 찬탈한다.
구성주의의 불가피한 아킬레스건
어떤 면에서 구성주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한 발현이다.
인간의 선택과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보편적인 표준이란 없다는 것
따라서 가치는, 도덕적 가치를 포함하여, 문화에 따라 다르고 시대에 따라 변할 수 있는 구성물일 뿐이다.
하지만, 학생들이 자신의 가치를 자유롭게 선택하도록 허락한다는 것은 곧 존경심의 결어나 폭력성, 부정직 등을 허용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구성주의는 공통적인 윤리적 책임감과 책무를 약화시킨다.
이처럼 의미를 개인적 구성물로 편협하게 강조하는 것을 통해 학생들을 동정적이고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책임 있고 응답하는 기여자로 양육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Hytten, 1994).
47쪽 학생 주도의 구성주의적 교육과정은 학생들에게 즉각적인 적실성이 있는 학생 도출형 주제들로 채워질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교육과정은, 학생들에게 즉각적인 흥미를 주지는 않더라도 그들의 전체적인 발달에 꼭 필요한 교육과정 주제들을 무시하기 쉽다.
마지막으로, 구성주의자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주신 절대적인 법에 의해 지배되는 하나의 창조된 실재가 존재한다. 모든 지식의 초석은 하나님의 창조다. 우리의 이론과 결론은 하나님의 진리를 밝히 드러내지 못하는 구성물일 수 있다. 그래서 수정되어야 하고 심지어 거부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학교는 학생들에게 실재의 탐구에 기초를 둔 지식을 소개해 주기 위해 필요하다.
급진적 구성주의는 어떤 공통된 지식 기반과 더 나아가 공통의 신앙과 윤리의 확실성과 적실성을 무력화시킨다. 그러나 그들은 모든 지식이 상대적이라는 자신의 견해가, 결국은 그 명제 자체도 필연적으로 상대적이고 또 항상 참인 것은 아니기 때문에, 논리적인 문제가 생긴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 교육과정 지향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
48쪽 교육과정에 접근하는 여러 가지 상이한 방식들에 주지할 필요가 있다.
49쪽 다른 교육과정들 배후에 있는 기본적 사상들을 주지하지 못하면, 우리는 절충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는 수가 많다. 다시 말해, 매력적으로 보이는 어떤 새로운 아이디어들을 사용하면서, 미처 그것이 교육의 본질과 목적과 실천에 대한 자신의 신념과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지 못할 수도 있다.
(이런 점들을 중요하게 여기면서도 선뜻 동의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 너무 틀에 가두는 것이 아닌가? 과연 그런가? 기독교적으로 반응한다는 것이 이런 것인가? 기본적인 전제에 대해 무지하고, 또 그런 것들을 자꾸 미주알고주알 따지는 것이 과연 유익한가? 하는 생각도 들기도 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교조적으로 나아갈 것은 아니고, 성신을 의지해서 성신께서 쓰시는 교육활동이 되도록 해야 하고,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는 것이 되어야 한다.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조직으로도 그렇고 결국 하나님 앞에서 이 모든 일들을 행해야 하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쓰시는 교육 활동이 되겠는가? 이런 지혜와 방법들을 어떻게 체득하고 실제로 자라가게 되겠는가? 생명의 성신의 법에 의해서 구속받은 자로서의 자각과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하시는 실재와 상황에 대해서 자신을 드려서 같은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이 교육활동을 이루어가야 할 것이다. 그것이 협의의 조직안에서든, 광의의 교회의 몸으로 기능을 하는 것이든 간에 그렇다. 이 공부를 어떻게 해 가야할 것인가? 주께서 이 모임을 써주시고 회원들이 새로운 힘과 지혜를 얻게 하시는 기회로 사용하여 주시기를 기도하며 준비한다.)
#모든 교육과정 기획자들은 가치의 전제들에 기초해서 프로그램을 개발한다.
-전통주의자들은 절대적 진리, 성실한 학업, 권위에 대한 존중, 이성의 힘과 궁극적 권위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다.
-과정/성취 지향의 지지자들은 학생들에게 효율성의 가치를 가르치고, 또한 올바른 환경과 절차를 제공하기만 한다면 인간이 이 세상을 정복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경험주의자들은 인간의 가치, 자율성, 지식과 의미뿐만 아니라 사랑과 정의의 세상을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육성하는 데 강조점을 둔다.
이러한 가치들은 상당한 차이가 있다. 하지만, 바우어스(C.A. Bowers)가 지적한 것처럼, 그 배후에 깔려 있는 이론들은 몇 가지 공통적인 가치를 공유한다.
# 합리성에 대한 믿음은 일상 생활에서 벌어지는 문제들의 유일한 조정자다.
(그렇지 않다면 다른 무엇이 있을까? 인간에게)
# 인간 본성은 선하며, 아니면 적어도 교육을 통해 그렇게 될 수 있다.
(내가 0.0001%의 가능성만 있어도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은 어떤가?)
# 따라서 인간은 자율적이며 자기 지시적이다.
개인적 자율성에 대한 지배적인 강조는, 자유는 다른 사람을 위하여 자아의 제한을 요구한다는 개념에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게 했다. 이상하게도, 권리와 자유는 선함과 책임감에서 독립적인 것으로 주장되고 있다. 개인적 이기심이 서로에 대한 봉사를 대체했다.
그 결과 빚어진 물질적인 이익과 자아 실현에 대한 강조는 책임 있는 상호 배려의 가치를 무너뜨리고, 사회적 헌신을 약화시켜, 온전한 공동체와 시민 생활을 유지하는 가치에 대한 조망을 “가중되는 문젯거리”로 전락시켰다(Bowers, 1988, 23:Lickona, 1993,6).
당신이 학교 교육과정에서 반드시 고양되어야할 가치라고 믿는 것들을 규정하고 정당화해 보라. 어떻게 이러한 가치들을 특정한 교육과정 주제에서 증진시킬 수 있을지 제안해 보라.
/ 기독교 교육과정 지향을 향하여
기독교적 세계관과 그에 따른 기독교적 교육과정 지향은 성경이 삶을 위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말씀이라는 데 그 출발점이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된 자기 계시로 순종과 응답을 요구한다. 이 말이 곧 성경의 적용이 현존하는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는 상세한 공식을 준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가 성경과 창조 세계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속에 계시된 삶의 원리들을 통해서 사고하고, 또 그것에 따라 행동하도록 부르셨다.
50쪽 우리의 응답을 통해서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 구원을 계속해서 이루어 가는 것이다(빌 2:12).
하나님은 신자들을 부르시고 그들이 지속적으로 그분의 말씀을 이해하고, 또 더욱더 책임있는 방식으로 그것을 적용할 것을 명령하신다.
우리 주변 사회는 기독교 신앙이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삶에 대해서는 별로 ㅁㄹ할 것이 없는 것으로 가정한다. 성경은 기독교 신앙이 삶의 모든 것을 포괄한다고 주장한다. 성경은 개인 만이 아니라 모든 열방을 순종으로 부른다. 우리는 비단 교회 내에서만이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서 사랑과 희생으로 충만한 하나님의 모방자가 되도록 부름받았다(엡 5:1).
성경이 삶의 모든 부분에 적실한 것이라면, 또한 교육과정에도 마찬가지다. 성경이 만일 하나님이 사랑과 희생의 삶을 요구하신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 준다면, 교실 또한 학생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응답하는 제자가 되도록 격려하고 도와주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
또한 성경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다고 말한다면, 교실은 학생들과 교사들이 자신의 재능과 은사들을 펼쳐보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곳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지역 사회, 국가, 세상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만일 교사들이 기독교적 세계관의 적실함을 믿는다면, 그들은 학생들을 위해 쉬지 않는 기도로 학습 활동을 계획하고 지도하면서 그러한 이상을 고양시키는 교육과정을 위해 매일 진력해야 한다.
심지어 학생들로 하여금 응답하는 제자로서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이끌어 주려는 그들의 최선의 노력을 죄가 훼방할 때에도 그렇게 해야 한다.
1) 교육과정의 내용
지식은 단지 인간의 독단적인 구성물이 아니다. 모든 지식은 우주를 창조하고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의존한다.
(그렇다. 우리의 지식은 의존적 지식이다. 언어가 그렇고 우리의 존재 자체가 그렇고, 이 사회와 우주 만물이 그러하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없다면 지식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우리도 그러하다. 또한 설혹 존재한다고 해도 어둠의 일이 그러하듯이 그렇게 사람을 어둡게 만들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참된 지식이 아니라 반역의 무기가 되고 만다. 결국 심판을 쌓은 일이 되고 말 것이다.)
기독교 교사는 학생들이 특정한 견해를 생각없이 다시 토해내거나 무비판적으로 맹종하도록 요구함으로써 주입시키지 않는다.오히려, 그들은 학생들이 중요한 이슈와 관심거리들을 간파하도록 해주는 배경적 지식과 기술을 얻도록 도와준다. 교사들은 성경적 진리와 그 의미에 기초한 관점을 제시한다.
(그렇게 충분히 제시할만한 정도에 있는가? 그렇지 못하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러나 그들도 자신의 오류 가능성을 인정하며, 또 우리 중 아무도 하나님의 창조 세계와 우리 삶에 대한 그분의 뜻에 대해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는 점을 인정한다.
51쪽 그들은 특정한 해석에 집착하며 강요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학생들이 개인적인 응답을 개발할 수 있도록 해주고, 기본적 원리들을 숙고하는 것의 중요성을 늘 알려 준다. 따라서 학생들이 인생의 과업을 능력 있고 책임 있게 감당하도록 격려한다.
교육과정의 내용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실재에 대한 학생들의 경험 속에 뿌리를 두고 있다. 교사는 학생들의 경험과 관련된 내용을 선택하거나, 혹은 단원이나 주제를 시작할 때 학생들이 하나님의 창조의 한 국면을 고찰하고 탐구하도록 해준다. 그러고 나서 학생들이 그 개념과 이슈들을 좀더 형식적이고 추상적인 방식으로 그들의 연령 수준에 맞게 분석하고, 발전시키고, 또 반응하도록 도와준다.
적어도 다섯 가지 기준이 교육과정 내용의 선택을 지배한다.
·① 학생들의 삶에서 중요성이 있어야 한다. 즉 학생들은 그것이 의미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② 자신이 속한 국가와 문화에 중요한 질문들을 탐구해야 한다.
③ 학생들이 자신의 문화적 유산이 가진 강점과 약점을 숙지하도록 해야 한다.
④ 학생들이 사회에서 효과적으로 역할을 감당하는 데 필요한 기술들을 개발시켜 주어야 한다.
⑤ 문화에 영향을 미치는 세계관들에 대한 주의 깊은 고찰에 기반하여 태도, 가치, 성향 및 헌신을 개발시켜야 한다.
이와 같은 기준에 기초한 교육과정 내용은 학생들이 삶에 대한 기독교적 시각을 고찰하고 채택하도록 장려할 것이다. 그것은 또한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현상과 이슈들에 대한 그들의 결정에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2) 학습을 위한 틀
학생들을 지혜의 길로 인도하는 일은 내용을 드러내는 것 훨씬 이상을 요구한다.
교사는 학생들이 성경적 세계관을 따라 살아가는 삶의 의미를 경험하는 교실 구조를 제공한다.
그들은 의로움, 정의, 동정심, 존중이 면면히 스며 있는 교실 구조를 창조한다.
이러한 가치들이 없다면, 가르침은 단지 학생들의 머리에만 머물고 가슴까지 도달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면 결국 학생들을 주님의 뜻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인격체들이 되도록 인도하기가 어렵다.
학습 전략들은 학생들이 하나님의 독특한 형상이라는 점과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섬기고 사랑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교사는 단지 학생들의 지적인 성장뿐만 아니라 영적, 도덕적, 심미적, 사회적, 정서적, 신체적 성장을 위해서 바람직한 학습 결과와 표준에 기초해서 그들을 평가한다.
3) 책임감 가르치기
52쪽 스티븐 홀트롭(Stephen Holtrop)은 기독교적 교육과정 지향을 “책임감 가르치기”라고 요약하여 부른다.
책임감 가르치기는 한 사람을 독특하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을 수 있으며, 창의적이고, 천사보다 조금 못한 존재로 보며, 아울러 타락하였고, 흠 있으며, 비틀거리는 존재로 본다. 더 나아가 책임감이라는 틀은 교사와 학교가 책임 있게 행동하고 책임감을 증진시키도록 부름받았을 뿐만 아니라, 학생들도 책임 있는 존재로서 그들의 학습을 극대화하는 과업으로 부름받았다고 말한다.
창조 세계의 정수로서, 사람은 이 세상을 향해 특별한 책임을 갖는다. 학생들은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의 수많은 양상들에 대해 정통한 지식을 소유하고 또한 그것에 대해 책임 있게 사고하는 구체적인 훈련을 받아야 가장 책임 있게 행동할 수 있다. 그것은 단지 어떤 사실이나 다른 사람들의 응답을 암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슈들에 대한 비판적인 사고를 의미한다.
책임 있는 교육과정은 단지 어떤 개인적인 선택이나 법적인 안전망이 아니다. 그것은 무엇이든 괜찮다는 식도 아니고, 또 기본으로 돌아가자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학생의 마음이 실제 이슈들에 개입하도록 해서 행동을 불러일으키는 방법을 주의 깊게 계획하는 것을 포함한다.
(Holtrop, Van Brummelen과 Elliott의 책, 1997, 57-58).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가르침을 생각해 보라. 각 지향의 어떤 국면들이 예수님의 가르침 가운데 나타나는가? 그리스도인들이 현재의 학교 교육과정을 계획하고 수행해야 할 방식에 대하여 어떤 합의점을 찾을 수 있는가?
(그렇다. 본서가 이야기하는 바들을 따른다 해도, 어떤 획일적인 기독교적 교육과정이 있을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교육과정을 합의해서 만들어갈 수 있는가? 투쟁과 갈등 속에서 합의를 이루고 부족한 결과 가운데, 또는 실망스런 결과 속에서도 중단하지 않고 나아가야할 책임과 의미, 또 가능성이 있다. 하나님께서 주장하시고 허락하시는 이 상황과 환경 속에서 그렇다면 어떻게 주의 뜻을 이루어갈 수 있는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니면 어떻게 하지 말아야 하는가? 우물 안 개구리가 되지 않고, 그렇다고 지구 밖의 자존자가 되지 않고, 하나님의 세계 안에서 책임있게 생각하고 행동하고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로서 시간과 공간의 제한, 그리고 지식과 능력의 한계 속에서 하나님 앞과 이웃들 사이에서 책임 있는 존재로 인격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그분의 지체로서 자존감과 존중심을 가지고 이웃을 사랑하는 존재로서 함께 살아갈 수 있겠는가?
아니 살아가야 한다. 지금 한 순간도 그 걸음을 멈출 수 없다. 하나님이 주인이시고 나는 그분의 충직한 종으로서 할 일을 하고 산다면 참으로 그보다 더 큰 행복이 없을 것이다. 그리하다. 그리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한다. 부족하더라도 주님의 손에 맡기운 자로서 주님을 의지하여 그분의 통치에 순복하여 생각하고 행동하고 열매를 맺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분의 선한 손이 열매를 맺게 하시도록.)
/ 교육과정 기획의 단계
1) 타일러 원리(The Tyler Rationale)
<질문을 묶어 조직적으로 발표>
53쪽
① 학교는 어떤 교육 목적들을 성취하고자 하는가? (목표들)
② 이러한 목적들을 성취하기 위해 어떤 교육 경험이 제공될 수 있는가? (경험 선택하기)
③ 이러한 교육 경험은 어떻게 효과적으로 조직될 수 있는가? (경험 조직하기)
④ 이러한 목적들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확정할 수 있는가? (평가)
53쪽 타일러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의 모델을 교육과정 기획을 위한 선형적-기술적 과정으로 활용한다. 그들은 가르침을 작고, 다루기 쉽고, 측정 가능한 행동 목표들로 나눈다. 그리고 이렇게 미리 상술한 목표들을 성취하기 위해 가장 효과적인 수단들에 초점을 둔다. 이러한 목표들은 엄밀한 개념들과 기술들을 명확히 설명하지만, 종종 중요한 전체 목적들을 간과한다.
사실 타일러 자신은 자신의 추종자들이 말하는 목표들을 비판한다.
(엉, 그러게, 타일러는 전통적인 입장에서 교육과정을 이야기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한 목표들이 너무 세부적이고, 행동을 강조하는 반면 내용을 무시하고, 또 그가 명명한 바 마음속에 있는 “철학적-심리학적 스크린”을 가지고 선택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Lauren Sosniak, Anderson Sosniak 의 책, 1994, 118).
그들은 실제로 교육과정을 결정하는 여러 복잡한 실재들을 간과했다.
게다가 이 원리는 그 자체로 삶에 대한 경외감이나 동정심, 정의와 같은 기본적 신념들을 주장할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다(Macdonald와 Purpel, 1987, 183).
이 원리는 세계관에 근거한 전반적인 목적들을 고려할 여지가 없다.
오직 과목 전문가들과 다른 사람들이 제안한 목록에서 나온 몇 개의 목표들이 철학적-심리학적 상이점들에 의해 걸러질 뿐이다. 또 이것은 교사란 학생들을 효과적으로 다루는 지침을 따르기만 하면 되는 일종의 기술자라고 가정한다.
결과적으로 이 원리가 사용되는 방식은 특별히 과정/성취 중심의 교육과정 지향에 맞는다. 하지만 다른 교육과정 지향들을 수행하기 위한 모델이 되기에는 역부족이다.
2) 프로그램 설계의 구성 요소들
54쪽 나는 교육과정을 일련의 역동적인, 계획된 학습 경험이라고 본다.
교사는 학생들과 수업을 하면서 계속해서 자신의 교육과정 기획을 평가하고, 개정하고, 채택한다.
교육과정의 절차를 위한 이 모델은 세 개의 동심원을 갖고 있다.
가장 바깥의 원은 근본적인 틀을 형성하는 요인들이고, 가운데 있는 원은 프로그램 구성 요소들이며, 중심에 있는 원은 앞의 두 원을 연결시켜 주는 심의 과정을 나타낸다.
이 모델의 선들은 점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은 각 원들 간에, 또 그들 안에서 수많은 상호 작용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 복잡성 이론이 요즘 주목을 받기는 하지만 원래 단순과 복잡이 상호 작용하는 것이 하나님의 피조세계이다. 한 사물은 물론이고 온 우주 전체가 그러하다. 그러니 그것을 마치 벽을 쌓듯이 그렇게 제한된 틀로만 보는 것은 한계가 너무 분명하다. 열린 체제로 가야 한다. 그리고 항상 겸손하게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인간으로서 의존적 존재로서 분명한 태도를 가지고 자신과 이웃에 대해 겸손하게 존중하며 하나님의 뜻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계속해서 자라가야 한다. 멈추면? 멈출수도 없거니와 자기 안에 갇히는 것이 되는 셈이다. 그렇게 멈출 수 없는데, 스스로 멈추어 있는 것이니 말이다.)
-교육과정 기반들
(지식관, 세계관적 관점, 학교 교육의 목적들, 가치에 대한 신념, 교수법에 대한 관점)
-상황적 구조 요인들
(경제적 상황, 사회적 상황, 정치적 상황, 문화적 상황)
- - 교육과정 전략들에 대한 심의
(프로그램 기획, 수행, 프로그램 평가)
- - - 프로그램 구성 요소들
(학습 자료, 학습 활동, 학생 평가, 의도)
55쪽 이런저런 방식으로 다양한 과정 요소들이 유동적이고 역동적인 방식으로 상호 작용을 한다.
첫째, 교육과정 기획을 위한 적절한 출발점이 하나로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둘째, 계획에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이 모델의 모든 측면을 직접적으로 고려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의 인생을 인도하는 비전은 무엇인가?
교육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들은 무엇인가?
학교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지식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들은 과목을 어떻게 선택하고 구조화하는가?
그들은 인간을 어떤 눈으로 보는가?
그것이 교육과정 계획에 주는 함의는 무엇인가?
미래의 가능성에 영향을 미치는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상황은 무엇인가?
약간의 다양성은 건강한 토론과 심오한 통찰로 이끌어 줄 수도 있다. 하지만, 해결할 수 없는 근본적인 간격들은 프로젝트 자체를 좌절시키든지, 아니면 뚜렷한 초점이 결여된 교육과정으로 귀찰될 것이다.
56쪽 최종적인 계획에서 결정된 학습 내용과 활동과 자료들은 그 프로젝트의 의도와 일치해야 한다.
기획자들은 학습 활동과 자료들을 개발하고 선택하는 데 도움을 주는 수많은 질문들을 해야 한다.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의도를 성취할 수 있는가? 어떤 내용과 기능과 표현 활동을 포함시켜야 하는가? 어떻게 그것을 구조화하고, 균형을 유지하며, 순차적으로 나열해야 하는가? 의도들과 학습 활동, 그리고 학습 자료들간의 연결이 논리적이고 분명한가? 제안된 프로그램은 분명하고 통일된 초점을 갖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대답은 교육과정 기반에 대한 교육과정 기획자들의 관점에 상당 부분 의존한다.
# 당신의 교육과정 지향을 묘사하는 진술문에 포함시키고자 하는 요점들을 한 페이지의 개요로 작성해 보라. 이 개요를 보관해 두었다가 다음 세 장을 읽은 후에 그것을 개정해 보라.
/ 핵심 내용 정리 / 참고 문헌
# 당신의 교육과정 지향을 묘사하는 진술문에 포함시키고자 하는 요점들을 한 페이지의 개요로 작성해 보라. 이 개요를 보관해 두었다가 다음 세 장을 읽은 후에 그것을 개정해 보라.
1. 나의 교육과정 지향은 무엇인가?
2. 이 교육과정 지향에 포함될 요점들은 무엇인가?
3. 어떻게 이것을 한 페이지의 개요로 작성할 수 있겠는가?
1. 나의 교육과정 지향은 무엇인가?
먼저 내가 이해하는 교육과정 지향이란 무엇인가?
브루멜른은 교육과정 지향을 세 가지로 구분하고 그것을 넘어서 기독교적 교육과정 지향을 제시하고 있다. 교육과정 지향은 교육과정의 핵심이 무엇인가를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크게 세 가지를 말한다.
첫째, 전통적 교육과정 지향이 있다. 이것은 교육과정이 정보와 사상의 전달자 임을 강조한다. 그래서 지식과 학습에서 기본적 기능들과 추론 능력, 과목별 영역에서 지식을 습득하는 것을 강조한다.
지식의 전수이다.
둘째, 과정/성취 중심적 교육과정 지향이 있다. 이것은 작고, 한정되고, 다루기 쉬운 단계별로 자료들을 탐구하고, 숙지하고 적용하는 것을 강조한다. 타일러에 의해 제시된 목표-경험선택-교수학습활동-평가의 환류로서 순차적이고 선행적이다. 교사는 이런 과정을 계획하고 마치 정해진 메뉴얼에 의해 물건을 생산하는 공장의 노동자 또는 기술자와 같다. 가치가 배제된 정해진 목표에 의한 지식과 제반 사항을 습득하고 체화하는 과정이 교육과정이다. 누구에게나 사용될 수 있다. 민주주의는 민주주의 체제대로, 공산주의는 공산주의 체제대로 공장처럼 교육을 돌리면 된다.
그러나 과연 교육이 그런 것인가? 교육과정이 목표한 대로 기계처럼 움직이고 산출 결과를 내는가? 한국의 경우에도 독재 정권 하에서 민주주의를 억압하고 전체주의적인 사고와 생활 방식을 고양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피는 결과를 초래했다. 반대 급부로 오히려 민주주의 투사들이 배출되었다. 하지만 그 피해와 영향은 독버섯처럼 사고 방식과 생활 방식을 지배했다. 그런 민주주의 세대들에게서 지극히 오염된 결과물들을 추후에 배출하고 말았다.
물론 교육이 전부가 아니다. 사회가 교육의 하수물이 아닌 점이 분명하다. 교육은 사회 속에서 영향을 받고 또 사회에 영향을 끼치는 상호 작용의 분야이다. 백년을 바라보면서 교육을 계획하고 실행한다고 하는데, 이제는 5년 단위의 교육과정 계획의 변화를 보듯이 그렇게 단순하게 돌아가지 않고 매우 복잡한 사회 주체들의 참여 속에서 실행되고 평가되고 수정되고 다시 환류하여 수행되는 과정을 반복하고 있다. 요즘 패미니즘의 강세와 개인주의적 사고와 생활 방식의 팽배는 이러한 교육적 수행의 결과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제대로 가르쳤다고 해도, 그것이 반사의 거울이 되어 오히려 반작용을 하는 교육과정이 될 수 있었다. 그릇되게 가르쳤다고 해도 역시 그런 반작용이 있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결국 이런 모든 과정을 통해서 열매맺는 것은 무엇이고, 거기에 대한 판단과 심판은 어떻게 따를 것인가?
인간이 주인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주체의 인간 나라를 꿈꾸고 지향하는 그런 교육과정을 추구한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사회이고 개인이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셋째, 개인적 의미에 대한 탐구로서의 경험 중심적 교육과정인 구성주의적 교육과정은 한계와 유익을 가지고 있다. 분명 지식과 의미는 개인이 주체적으로 탐구하고 수립할 부분이기도 하다. 다른 사람에게 핑게를 대어서도 안되고 댈 수도 없다. 하지만 분명 사회적 환경과 영향 하에서 그런 작업이 수행된다는 점에서 개인의 주체적 사고와 수행은 한계가 있다. 그런데 그것이 마치 천상천하 유아독존 식으로 자기가 세상의 중심이고 모든 것이 자기 중심적으로 해석되고 돌아가야 하는 것으로 여긴다는 것은 스스로의 논리로도 모순이 된다. 자기가 그러하면 다른 사람들도 그러한데, 그렇다면 무엇이 진리인가? 무엇을 기준으로 생각하고 살아가야 하는가? 객관적인 지식은 불가능한가?
이런 점에서 인간의 의존성에 대해 깊이 생각할 부분이 있다.
인간은 독존적인 존재가 아니라 의존적인 존재이다. 피조물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격적 존재이다. 그럼으로 그만큼의 인격적인 책임을 가지고 있다. 자기 몸처럼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자기가 그만큼 소중한 존재라면 이웃도 소중한 존재임을 인정하고 그런 존재들로 이루어지는 사회가 어떤 성격을 띠고 역사를 만들어가며 문화적인 활동을 해야 하는지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의 언어도 그렇고, 존재 상황도 그렇고 인간은 의존적인 존재이다.
교육과정 역시 그러하다. 교육과정이 지향할 바는 그런 의존적인 존재로서 책임 있게 그만큼의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모든 진리는 인간이 구성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이고 그것을 인간은 자기의 눈으로 해석해가야 한다. 그래서 자신의 눈이 하나님의 눈처럼 밝아져야 한다. 그리고 진리의 하나님과 교제하는 기쁨과 즐거움을 누려야 한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제대로 알아가야 한다. 그렇게 해서 자신이 누구인지도 제대로 알아갈 수 있을 것이다.
곧 영생은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인간은 목석이 아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생명으로 창조함을 받은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러니 하나님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살아가야 한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면 그즉시 죽음이다. 어둠이다.
곧 하나님의 말씀, 로고스 안에서 인간은 자신을 발견하고 하나님께로 점점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한다. 빛이신 하나님께 나아가면서 눈이 멀지 않으려면 그리스도의 눈을 가지고 나아가야 한다. 그리스도만이 진리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니 그분이 길이다. 그것이 생명이 된다. 인간이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는 길과 진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리스도 그분이 생명의 양식이시다.
나의 교육과정 지향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하나님의 진리 안에서 곧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누리는 일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풍성한 것들을 누리는 것이어야 한다. 생각과 삶, 계획과 수행과 평가와 다시 환류하여 자라가는 것들이 활발하게 그분의 성신이 주시는 힘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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