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나는 꽃은 잘 모른다.
아주 기초적인 꽃만 알 뿐 조금만 벗어나면 '맨탕'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후각이 거의 마비가 돼서 어린 시절부터 꽃향기를 모르고 자랐다.
그래서 실화나 조화나 같은 눈으로 보게되고 자연히 생화라도 특별한 관심을 안 갖게 되어서인지 나무도 그렇지만 특히 꽃에 대해서 아는 바가 적다.
꽃향기는 물론이고 이름이나 꽃말이나 그 구별이나 모르는 편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몇 년부터는 꽃에 관심을 갖게 되어서 한 때는 아파트 정원에 야생화를 수십 종 캐고 사다 심은 적이 있다.
하지만 무지로 인해 태반은 죽이고 지금은 거의 잡초 더미가 되어 버렸지만 그래도 꽃에 대한 관심이 사그라지지 안 해서 작년 봄에는 그 꽃을 찾아 남해를 헤매기도 했지만 역시 꽃에 대한 무지로 그 시기를 잘 못 짚어서 겨우 선암사 뒷자락의 꽃 몇 송이를 보는 것으로 봄을 마무리했다.
그런 꽃 중에서도 유독 매화가 마음에 와 닿았다.
오랜 세월 '환쟁이'들이 그림의 소재로, 선비들이나 글쟁이들이 글의 소재로 써 온 것이 매화이고 그 꽃말의 고고함이나 또 추운 중에 피어서 봄을 처음으로 알리는 그 멋스러움이나 검고 못 생긴 줄기에서 자그만 자태로 귀엽게, 고고하게 피는 모습이 왠지 꼭 한번은 제대로 만나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아마 같은 환쟁이로서 옛 선배들이 심취했던 그 세계에 한번은 빠져 보는 것이 어쩌면 의무 같기도 해서인지 유독 매화를 가까이에서 알고 싶었다. 그것도 흐트런 진 모습으로 만나고 싶었다.
그것이 뭔가 나의 화업에도 도움이 될 것 같은 막연한 생각까지 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올 봄에도 한번 가리라 하고 벼르던 중 어제는 눈이 엄청 내렸다.
먼 거리 테니스 모임에서 막힌 길을 평소보다 두어 배는 더 걸려서 돌아오는데 길옆에 핀 눈꽃들이 정말이지 장관이었다.
가느다란 나무 가지 끝까지도 빼놓음이 없이 매달리고 붙어 있는 눈들이 모습이 밤의 어두움을 배경으로 빛나는데 너무도 아름다웠다.
집에 오니 애들이 신나서 카메라며 장갑을 챙겨서 나가는 소리들이 떠들썩했지만 나는 피곤한 몸을 양주 한잔에 적시고는 잠결에 들었는데 그 아쉬움이 남았는지 아침에 일찍 깨었다.
눈이 더 장관이었다. 나뭇가지의 눈들이 어제처럼 완벽한 모습으로 붙어 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아직은 눈들을 무겁게 이고 있는 나뭇가지의 모습들이 아름다웠다.
나는 대충 아들놈이 먹다 남은 우동 국물을 후루륵 밀어서 아침식사 아닌 식사를 점찍고 '중앙공원'으로 구식 카메라와 디지털 카메라를 메고 나섰다.
딱히 사진 작가는 아니니 작품사진은 아니고 그저 내 그림 소재로나 써 볼까 하는 마음에 여기 저기 이 나무 저 나무를 열심히 찍었다.
그 나무들이 눈을 하얗게 이고 있는 모습들은 가끔씩 보던 모습들과는 전혀 딴 판으로 정말이지 아름다웠다. 늘 보던 가로수 나무나 길도 영화 속의 한 장면 같고 그 나무들 개개의 모습들도 보기에 좋았다. 눈 더미에 의해 끊어지고 이어진 나무 등걸이나 가지의 모습이 온통 하얗던 어제의 그 순백색의 모습들과는 또 다른, 색소폰의 이어지고 끊어지는 음의 느낌이라고나 할까 대금이 뿜어내는 단속음의 연주 같다고 할까 아무 곳이고 카메라만 대면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한참을 찍다 갑자기 술이름 '설중매'가 생각이 났다.
그래 설중매!
사실 어제 하동 매화여행을 가기로 하고 인원을 모았는데 결국 폭설이 나의 계획을 무산 시켰었지만 바로 내 길을 막은 그 눈이 다시 '매화타령'을 부추겼다.
눈 속에 피어 있는 매화!
생각만 해도 기쁘지 않은가? 아무리 멀다해도 비록 단 몇 분만 보고 온다 해도 그 기쁨이 한해 내내 다음 봄까지 계속 될 것 같았다.
사진 찍기를 접으며 나는 회원을 모으기 시작했다. 이 폭설에 어디 가냐는 말에 길은 말짱하고 매화는 눈 속에 봐야 한다는 나의 말 같지 않은 '설중매' 유혹에 다행이 두 명이나 넘어 갔다.
후다닥 집에 와서 짐을 챙기고 길을 나서는데 아무래도 한달 째 치료하다 몇 일 못 간 이비인과 병원을 다녀와서 가야 할 것 같아서 병원으로 먼저 갔다.
또 아는가? 콧구멍을 소재하면 매화 향기가 기적적으로 재생될지......
마음이 바빠서인지 두어 명 진료가 왜 그리도 긴지 20분을 넘게 기다리다 답답한 마음에 돌아서 나오는데 간호원이 내 차례란다. 콧구멍 청소와 함께 약 봉지를 들고 달려가니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지체가 되었다.
약속 장소에서 나의 감언이설에 넘어간 순진한 여인네 둘을 태우고 남쪽을 향해 바람처럼 달렸다.
거기 까지는 그런 대로 좋았다.
사실 나의 무모한 계획을 과감히 밀어 부친 적당한 모험심과 과감성 그리고 순발력에 내심 감탄까지 하면서 적당한 유머와 함께 고속도로를 정말 이지 눈썹 휘날리게 달렸다.
하지만 웬걸 천안을 지나니 주춤거리던 차들이 결국 천안 휴게소근처에서 서 버렸다.
서너 시는 도착해서 하동의 '매화마을' 들려서 매화를 보고 '광양' 들려서 잘하면 '선운사' 동백까지 보고 또 '풍천장어'에 복분자 술까지 '땡길려던' 나의 계획에 약간의 먹구름이 끼는 순간이었다.
차들이 그저 약간의 미동만 있을 뿐 앞으로 나아가질 않는다.
결국 우리중 한 사람이 화장실 겸 휴게실로 걸어서 가고 나도 계기판이 바닥을 가르침으로 가스를 넣어야 할 것 같은데 진입로가 막힌 고로 앞으로 가서 출구에서 거꾸로 가서 가스를 넣을까 하고 입구를 지났다.
하지만 출구도 꽉 막혀 그것이 내내 우리를 괴롭힌 나의 커다란 실수이었다는 것이 그 한 참 후에나 증명이 되었다.
한참만에 화장실 간 분이 김밥과 초밥을 사들고 돌아 왔다.
우리는 별로 고프지도 않은 배를 순전히 심심풀이하는 기분으로 김밥, 초밥과 물렁한 오징어를 먹고 씹었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나 감사한 일이었던지 그 한 참 후에 입증이 되었다.
그러던 중 더 기가 막힌 일은 떠날 때는 멀쩡하던 하늘에서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기다려도 차는 꼼짝을 안하고 12시전에 도착했건만 시간은 우리들의 이야기 속에 속절없이 흘러만 갔다. 2시가 되고 3시가 될 때까지만 해도 희망을 안 버리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3시가 넘으면서부터는 희망이 절망이 되고 가슴아프지만 결국 매화타령은 접고 돌아가기로 했다.
하지만 돌아가는 것도 난감했다.
뉴스를 들으니 여기서부터 30k 전방부터 막혔다는 것이 아닌가?
하필이면 우리는 목천 진출로를 몇 키로 진행한 곳이고 다음 진출로는 막힌 곳 다가서 이니 글자 그대로 완전히 포위돼서 '꼼싹달싹'도 할 수 없는 그런 절대 절명의 상황이 된 것이다.
반대편 차선도 아예 차가 없어서 차라리 중앙선을 부시고 되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었지만 우리 차가 탱크도 아니니 방법이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가스 계기판 불이 깜박이기 시작해서 히터도 못 켜다 보니 무릎이 시려오기 까지 하는 것이 아닌가?
옆 국도들은 말짱하지만 우리는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 되어 버렸다.
하늘로 솟을 수도 땅으로 꺼질 수도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 웃고 즐기는 가운데 우리를 더욱 옥죄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커다란 뱀한테 몸이 서서히 조임 당해서 결국은 숨막혀 죽고 마는 그런 답답함만 가중되고 있었다.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차 속에 이불이 두 개나 있고 양말도 여벌로 있고 나의 테니스 운동복도 있는 상황이어서 주섬주섬 덮을 수가 있었고 여차직하면 가까운 휴게실로 가서 물건도 사올 수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상황은 점점 꼬여가고 있었지만 우리들은 모두다 '예술'이란 끈끈이 같은 그 무엇으로 뭉친 사이들이고 또 서로가 '대단한 인생들'이라고 위안을 하는 사이들인지라 그 답답한 속에서도 이런 저런 이야기로 '웃음꽃'을 피우면서 '매화꽃'을 대신했다.
그러는 중에도 자꾸 시간이 흐르고 4시, 5시,.....
그러는데 갑자기 헬리콥터 소리가 난다.
"엠비시다! 엠비시!"
우리는 앞 차창을 가르며 나르는 헬기를 보면서 무슨 망망대해에서 조난이라도 당한 사람들이라도 되는 양 미친 듯이 함성을 질렀다.
"야! 우리가 뉴스에 나온다! 뉴스에 나와!" "야! 이놈들이 우리 여기 있다!"
아니 애꿎은 사람들한테 '놈'자는 왜 붙인단 말인가?
조금 있으니 또 헬기가 나르는데 이번엔 "KBS"다. 나의 우매한 결정이 뉴스에 그것도 쌍으로 나올 판이다.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다.
우리는 할 일도 없어서 '에스비에스'도 기다렸지만 그건 오지 안 했다.
거기는 헬기가 없나?
그러고도 한참을 지났건만 한 일키로나 지났나 보다.
이제 날이 점점 어두워져 가고 있다.
나도 참을 수 없는 한기에 운동복 바지를 꺼내서 하체를 겹으로 싸매고 운전대를 잡고 있었으니 그 우스운 꼴이란 남의 눈에 안 뜨이는 것이 참으로 다행이었다.
우리들의 인내의 한계가 서서히 바닥을 드러내 가고 우스개 소리도 점점 적어져 가고 보초 설 일도 없으련만 돌려가면서 쪼그린 채로 잠도 자고 그러면서 시간도 자꾸만 흘러가고 우리의 비상 식량인 점심 때 남긴 김밥도 다 쪼그라들 무렵 허기도 매꿀 겸 화장실도 해결할 겸 휴게소들을 다녀온단다.
화장실도 남자인 내가 눈길에 미끄러지고 고꾸라지며 그 '나래비'로 선 차들이 커다란 눈을 피해 겨우 해결한 마당이니 여자들은 죽을 맛이었을 것이다.
참는 것이 상책이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는 법이니 어쩔 수가 없었을 것이다..
거기에 비하면 허기는 그런 대로 괜찮았다.
밖이 차고 물과 눈이 진창이라서 그저 찻 속에만 쪼그리고 있는 통에 꼭 비행기 탓을 때처럼 창자들이 짓 눌려서 속이 오히려 더부룩하고 조금 땡길 뿐 커다란 허기는 없었다. 그렇지만 통 미래를 알 수 없는 일이기에 나는 '운짱'으로 차에 남고 둘은 휴게실에 간단다.
"히고! 그럼 따뜻한 오뎅 국물은 해결되겠네!"
하면서 이리공 저리공 머리를 굴리며 한참을 기다리는데 아니 둘이 빈손으로 오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그래도 조금씩 움직이긴 했어도 걷기엔 꽤 멀었던 모양이다. 2십 분 정도 걸어도 멀어서 그냥 어둡 속에서 '본능'은 번갈아 가며 감추고 망보면서 해결하고 돌아 왔단다.
빌려 신고 간 운동화만 물과 눈으로 범벅을 만들어 왔으니 슬리퍼 발인 나 혼자 갔다 오기도 틀렸다.
다시 긴 기다림의 시간이 연속되었다.
그런 와중에도 다른 이들은 문자들을 열심히 날리고 식구들 걱정을 하기도 하고 받기도 하고 그러하건만 난 별 소식도 없고 내가 길에 갇혔다고 문자를 날려도 답도 없다.
다 자기가 판 무덤이니 죽던지 살던지 신경 쓸 일이 아니란 뜻인가 보다.
고소름해 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7시,8시......서서히 배도 고파오고 말없이 조용히 있는 시간들이 더 늘어나고 기온은 점점 내려가는 듯 무릎의 시림은 더 깊어 가고 길은 서서히 얼어 가고 가스 게기판은 조금 움직이려고 엔진을 켜면 아예 노란 불을 왕방울만하게 뜨고는 위협을 해 대고 참으로 난감했다.
이제 이렇게 밤을 새울지도 모른 다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되면 히터도 못 켜니 얼어죽을 판이다.
어떤 트럭 기사 분이 조금 가면 출구가 있다고 하였지만 그런 기미는 전혀 없고 꽉 맥힌 차뿐인데 갑자기 차들이 아주 조금씩 움직인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기쁘지가 않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통에 나는 시동을 걸었다 껏다를 반복해야하고 가스만 더 닳을 판이니 차라리 가만히 서 있는 것만 못 했다.
"결국 이러다 가스가 바닥나면?"
여러 일들이 주마등 스치듯이 했다. 긴급 출동을 부르니 올 수도 없고 내 차에 막혀서 다른 차들은 그나마 갈 수도 없을 것이고 난감했다.
나야 여기서 얼어붙어도 싸지만 남의 감언 이설에 넘어간 이 순진한 여인네들은 어찌 한단 말인가? 나야 죄과를 치루는 일이니 어쩔 수 없지만 이들을 헬기에 태워 보낼 수도 다른 차에 얻어 타고 있으랄 수도 정말이지 오도 가도 못하고 '빼도 박지도' 못하는 완전히 '외통수' 상황 바로 그것이었다.
그래도 좇아 왔으니 공범이라고 오히려 날 위로한다.
그런 심난함에 나의 등줄기에 식은 땀이 날 즈음 갑자기 옆에 분이 소리를 지른다.
"출구다!"
아니 출구는 삼십키로는 더 가야는데 이상하다 싶었다.
하지만 분명 거짓말처럼 바로 코 앞에 출구가 있었고 차들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미덥지 않던 그 노란 트럭 기사분 말이 맞았다.
나도 잽싸게 눈으로 뒤범벅인 비상차선을 타고 빠져 나오니 그나마 우리가 마지막이었다.
바로 뒤의 차부터는 다시 막혀서 꼼짝들을 못했다.
어차피 남으로 가지 못할 바에야 빠져 나오고 볼 일일텐데 그저 뭉게고 앞으로만 가겠다고 생각하는 모습들이 참으로 기이했다.
습관처럼 움직이는 '동물의 왕국'도 아닌데 그냥 있는 것을 보면 신기했다.
우리도 사실 출구를 바로 코앞에 두고 그냥 9시간을 서 있었던 꼴이다.
아마 다른 사람들은 밤을 거기서 새울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우리는 까먹은 9시간에 대한 원망은 전혀 없었고 오로지 거기 "죽음의 계곡'을 탈출 했다는 기쁨 그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했고 이제 가스가 '앵코'되어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가 움직인다는 사실이 이렇게 고마운 일인 줄을 전에는 미쳐 몰랐다.
너무도 기뻤고 살았다 싶었다.
"하느님 고맙습니다"란 기도가 저절로 나왔다.
미끄러워도 꼬불꼬불해도 좋았다. 그냥 움직인다는 그 사실 자체만도 행복이고 기쁨이고 인생역전승리였다.
그렇게 한 십여 키로를 오니 천안시내에 다 왔고 우리는 주유소에서 가스통을 채워 넣고 또 바로 그 앞에 장어집에서 풍천 장어대신으로 '장어 정식'과 복분자 술을 따뜻한 방바닥에 널부러져서 창자에 채워 넣으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우리가 지금 앉아 있는 여기는 천국이고 바로 길 건너 고속도로 거기는 지옥이었다.
너무도 고맙다는 생각을 거푸 하면서 우리는 천안을, 직장이 그곳이라서 늘 무심히 다녔던 그 곳을 지옥의 '혹성탈출'이라도 하는 기분으로 튕겨져 나와서 서울로 달렸다.
하행선은 차단되어 있었지만 상행선은 그냥 '진짜의' 고속도로 그 자체였다.
카페에서 몸서리가 쳐질 만큼 시큼한 차로 마무리를 하고 집에 도착하니 두시.
오늘의 '설중매 여행'은 완전히 '떡'이 되었지만 평생에 결코 잊을 수 없는 여행길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
나는 내일 그 원수 같은 설중매 여행을 다시 시도 할 것이다. 이번에는 더 많은 떼로다 모아서 갈 참이다.
-이 글을 쓰기 직전 아침 뉴스를 보니 아직도 그 때의 그 사람들이 고속도로에 있단다.
오전 중에는 풀린다고 하나 밤새 음식을 공수하고 환자도 생기고 난리 북새통이 따로 없었단다. 부디 그 분들에게도 하느님의 은총이 평생 같이 하길, 어찌 보면 반은 같이 한 살가운 동료애로 또 반을 같이 못한 미안한 동료애로 기원을 해 본다.
사실 나는 꽃은 잘 모른다.
아주 기초적인 꽃만 알 뿐 조금만 벗어나면 '맨탕'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후각이 거의 마비가 돼서 어린 시절부터 꽃향기를 모르고 자랐다.
그래서 실화나 조화나 같은 눈으로 보게되고 자연히 생화라도 특별한 관심을 안 갖게 되어서인지 나무도 그렇지만 특히 꽃에 대해서 아는 바가 적다.
꽃향기는 물론이고 이름이나 꽃말이나 그 구별이나 모르는 편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몇 년부터는 꽃에 관심을 갖게 되어서 한 때는 아파트 정원에 야생화를 수십 종 캐고 사다 심은 적이 있다.
하지만 무지로 인해 태반은 죽이고 지금은 거의 잡초 더미가 되어 버렸지만 그래도 꽃에 대한 관심이 사그라지지 안 해서 작년 봄에는 그 꽃을 찾아 남해를 헤매기도 했지만 역시 꽃에 대한 무지로 그 시기를 잘 못 짚어서 겨우 선암사 뒷자락의 꽃 몇 송이를 보는 것으로 봄을 마무리했다.
그런 꽃 중에서도 유독 매화가 마음에 와 닿았다.
오랜 세월 '환쟁이'들이 그림의 소재로, 선비들이나 글쟁이들이 글의 소재로 써 온 것이 매화이고 그 꽃말의 고고함이나 또 추운 중에 피어서 봄을 처음으로 알리는 그 멋스러움이나 검고 못 생긴 줄기에서 자그만 자태로 귀엽게, 고고하게 피는 모습이 왠지 꼭 한번은 제대로 만나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아마 같은 환쟁이로서 옛 선배들이 심취했던 그 세계에 한번은 빠져 보는 것이 어쩌면 의무 같기도 해서인지 유독 매화를 가까이에서 알고 싶었다. 그것도 흐트런 진 모습으로 만나고 싶었다.
그것이 뭔가 나의 화업에도 도움이 될 것 같은 막연한 생각까지 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올 봄에도 한번 가리라 하고 벼르던 중 어제는 눈이 엄청 내렸다.
먼 거리 테니스 모임에서 막힌 길을 평소보다 두어 배는 더 걸려서 돌아오는데 길옆에 핀 눈꽃들이 정말이지 장관이었다.
가느다란 나무 가지 끝까지도 빼놓음이 없이 매달리고 붙어 있는 눈들이 모습이 밤의 어두움을 배경으로 빛나는데 너무도 아름다웠다.
집에 오니 애들이 신나서 카메라며 장갑을 챙겨서 나가는 소리들이 떠들썩했지만 나는 피곤한 몸을 양주 한잔에 적시고는 잠결에 들었는데 그 아쉬움이 남았는지 아침에 일찍 깨었다.
눈이 더 장관이었다. 나뭇가지의 눈들이 어제처럼 완벽한 모습으로 붙어 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아직은 눈들을 무겁게 이고 있는 나뭇가지의 모습들이 아름다웠다.
나는 대충 아들놈이 먹다 남은 우동 국물을 후루륵 밀어서 아침식사 아닌 식사를 점찍고 '중앙공원'으로 구식 카메라와 디지털 카메라를 메고 나섰다.
딱히 사진 작가는 아니니 작품사진은 아니고 그저 내 그림 소재로나 써 볼까 하는 마음에 여기 저기 이 나무 저 나무를 열심히 찍었다.
그 나무들이 눈을 하얗게 이고 있는 모습들은 가끔씩 보던 모습들과는 전혀 딴 판으로 정말이지 아름다웠다. 늘 보던 가로수 나무나 길도 영화 속의 한 장면 같고 그 나무들 개개의 모습들도 보기에 좋았다. 눈 더미에 의해 끊어지고 이어진 나무 등걸이나 가지의 모습이 온통 하얗던 어제의 그 순백색의 모습들과는 또 다른, 색소폰의 이어지고 끊어지는 음의 느낌이라고나 할까 대금이 뿜어내는 단속음의 연주 같다고 할까 아무 곳이고 카메라만 대면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한참을 찍다 갑자기 술이름 '설중매'가 생각이 났다.
그래 설중매!
사실 어제 하동 매화여행을 가기로 하고 인원을 모았는데 결국 폭설이 나의 계획을 무산 시켰었지만 바로 내 길을 막은 그 눈이 다시 '매화타령'을 부추겼다.
눈 속에 피어 있는 매화!
생각만 해도 기쁘지 않은가? 아무리 멀다해도 비록 단 몇 분만 보고 온다 해도 그 기쁨이 한해 내내 다음 봄까지 계속 될 것 같았다.
사진 찍기를 접으며 나는 회원을 모으기 시작했다. 이 폭설에 어디 가냐는 말에 길은 말짱하고 매화는 눈 속에 봐야 한다는 나의 말 같지 않은 '설중매' 유혹에 다행이 두 명이나 넘어 갔다.
후다닥 집에 와서 짐을 챙기고 길을 나서는데 아무래도 한달 째 치료하다 몇 일 못 간 이비인과 병원을 다녀와서 가야 할 것 같아서 병원으로 먼저 갔다.
또 아는가? 콧구멍을 소재하면 매화 향기가 기적적으로 재생될지......
마음이 바빠서인지 두어 명 진료가 왜 그리도 긴지 20분을 넘게 기다리다 답답한 마음에 돌아서 나오는데 간호원이 내 차례란다. 콧구멍 청소와 함께 약 봉지를 들고 달려가니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지체가 되었다.
약속 장소에서 나의 감언이설에 넘어간 순진한 여인네 둘을 태우고 남쪽을 향해 바람처럼 달렸다.
거기 까지는 그런 대로 좋았다.
사실 나의 무모한 계획을 과감히 밀어 부친 적당한 모험심과 과감성 그리고 순발력에 내심 감탄까지 하면서 적당한 유머와 함께 고속도로를 정말 이지 눈썹 휘날리게 달렸다.
하지만 웬걸 천안을 지나니 주춤거리던 차들이 결국 천안 휴게소근처에서 서 버렸다.
서너 시는 도착해서 하동의 '매화마을' 들려서 매화를 보고 '광양' 들려서 잘하면 '선운사' 동백까지 보고 또 '풍천장어'에 복분자 술까지 '땡길려던' 나의 계획에 약간의 먹구름이 끼는 순간이었다.
차들이 그저 약간의 미동만 있을 뿐 앞으로 나아가질 않는다.
결국 우리중 한 사람이 화장실 겸 휴게실로 걸어서 가고 나도 계기판이 바닥을 가르침으로 가스를 넣어야 할 것 같은데 진입로가 막힌 고로 앞으로 가서 출구에서 거꾸로 가서 가스를 넣을까 하고 입구를 지났다.
하지만 출구도 꽉 막혀 그것이 내내 우리를 괴롭힌 나의 커다란 실수이었다는 것이 그 한 참 후에나 증명이 되었다.
한참만에 화장실 간 분이 김밥과 초밥을 사들고 돌아 왔다.
우리는 별로 고프지도 않은 배를 순전히 심심풀이하는 기분으로 김밥, 초밥과 물렁한 오징어를 먹고 씹었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나 감사한 일이었던지 그 한 참 후에 입증이 되었다.
그러던 중 더 기가 막힌 일은 떠날 때는 멀쩡하던 하늘에서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기다려도 차는 꼼짝을 안하고 12시전에 도착했건만 시간은 우리들의 이야기 속에 속절없이 흘러만 갔다. 2시가 되고 3시가 될 때까지만 해도 희망을 안 버리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3시가 넘으면서부터는 희망이 절망이 되고 가슴아프지만 결국 매화타령은 접고 돌아가기로 했다.
하지만 돌아가는 것도 난감했다.
뉴스를 들으니 여기서부터 30k 전방부터 막혔다는 것이 아닌가?
하필이면 우리는 목천 진출로를 몇 키로 진행한 곳이고 다음 진출로는 막힌 곳 다가서 이니 글자 그대로 완전히 포위돼서 '꼼싹달싹'도 할 수 없는 그런 절대 절명의 상황이 된 것이다.
반대편 차선도 아예 차가 없어서 차라리 중앙선을 부시고 되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었지만 우리 차가 탱크도 아니니 방법이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가스 계기판 불이 깜박이기 시작해서 히터도 못 켜다 보니 무릎이 시려오기 까지 하는 것이 아닌가?
옆 국도들은 말짱하지만 우리는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 되어 버렸다.
하늘로 솟을 수도 땅으로 꺼질 수도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 웃고 즐기는 가운데 우리를 더욱 옥죄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커다란 뱀한테 몸이 서서히 조임 당해서 결국은 숨막혀 죽고 마는 그런 답답함만 가중되고 있었다.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차 속에 이불이 두 개나 있고 양말도 여벌로 있고 나의 테니스 운동복도 있는 상황이어서 주섬주섬 덮을 수가 있었고 여차직하면 가까운 휴게실로 가서 물건도 사올 수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상황은 점점 꼬여가고 있었지만 우리들은 모두다 '예술'이란 끈끈이 같은 그 무엇으로 뭉친 사이들이고 또 서로가 '대단한 인생들'이라고 위안을 하는 사이들인지라 그 답답한 속에서도 이런 저런 이야기로 '웃음꽃'을 피우면서 '매화꽃'을 대신했다.
그러는 중에도 자꾸 시간이 흐르고 4시, 5시,.....
그러는데 갑자기 헬리콥터 소리가 난다.
"엠비시다! 엠비시!"
우리는 앞 차창을 가르며 나르는 헬기를 보면서 무슨 망망대해에서 조난이라도 당한 사람들이라도 되는 양 미친 듯이 함성을 질렀다.
"야! 우리가 뉴스에 나온다! 뉴스에 나와!" "야! 이놈들이 우리 여기 있다!"
아니 애꿎은 사람들한테 '놈'자는 왜 붙인단 말인가?
조금 있으니 또 헬기가 나르는데 이번엔 "KBS"다. 나의 우매한 결정이 뉴스에 그것도 쌍으로 나올 판이다.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다.
우리는 할 일도 없어서 '에스비에스'도 기다렸지만 그건 오지 안 했다.
거기는 헬기가 없나?
그러고도 한참을 지났건만 한 일키로나 지났나 보다.
이제 날이 점점 어두워져 가고 있다.
나도 참을 수 없는 한기에 운동복 바지를 꺼내서 하체를 겹으로 싸매고 운전대를 잡고 있었으니 그 우스운 꼴이란 남의 눈에 안 뜨이는 것이 참으로 다행이었다.
우리들의 인내의 한계가 서서히 바닥을 드러내 가고 우스개 소리도 점점 적어져 가고 보초 설 일도 없으련만 돌려가면서 쪼그린 채로 잠도 자고 그러면서 시간도 자꾸만 흘러가고 우리의 비상 식량인 점심 때 남긴 김밥도 다 쪼그라들 무렵 허기도 매꿀 겸 화장실도 해결할 겸 휴게소들을 다녀온단다.
화장실도 남자인 내가 눈길에 미끄러지고 고꾸라지며 그 '나래비'로 선 차들이 커다란 눈을 피해 겨우 해결한 마당이니 여자들은 죽을 맛이었을 것이다.
참는 것이 상책이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는 법이니 어쩔 수가 없었을 것이다..
거기에 비하면 허기는 그런 대로 괜찮았다.
밖이 차고 물과 눈이 진창이라서 그저 찻 속에만 쪼그리고 있는 통에 꼭 비행기 탓을 때처럼 창자들이 짓 눌려서 속이 오히려 더부룩하고 조금 땡길 뿐 커다란 허기는 없었다. 그렇지만 통 미래를 알 수 없는 일이기에 나는 '운짱'으로 차에 남고 둘은 휴게실에 간단다.
"히고! 그럼 따뜻한 오뎅 국물은 해결되겠네!"
하면서 이리공 저리공 머리를 굴리며 한참을 기다리는데 아니 둘이 빈손으로 오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그래도 조금씩 움직이긴 했어도 걷기엔 꽤 멀었던 모양이다. 2십 분 정도 걸어도 멀어서 그냥 어둡 속에서 '본능'은 번갈아 가며 감추고 망보면서 해결하고 돌아 왔단다.
빌려 신고 간 운동화만 물과 눈으로 범벅을 만들어 왔으니 슬리퍼 발인 나 혼자 갔다 오기도 틀렸다.
다시 긴 기다림의 시간이 연속되었다.
그런 와중에도 다른 이들은 문자들을 열심히 날리고 식구들 걱정을 하기도 하고 받기도 하고 그러하건만 난 별 소식도 없고 내가 길에 갇혔다고 문자를 날려도 답도 없다.
다 자기가 판 무덤이니 죽던지 살던지 신경 쓸 일이 아니란 뜻인가 보다.
고소름해 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7시,8시......서서히 배도 고파오고 말없이 조용히 있는 시간들이 더 늘어나고 기온은 점점 내려가는 듯 무릎의 시림은 더 깊어 가고 길은 서서히 얼어 가고 가스 게기판은 조금 움직이려고 엔진을 켜면 아예 노란 불을 왕방울만하게 뜨고는 위협을 해 대고 참으로 난감했다.
이제 이렇게 밤을 새울지도 모른 다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되면 히터도 못 켜니 얼어죽을 판이다.
어떤 트럭 기사 분이 조금 가면 출구가 있다고 하였지만 그런 기미는 전혀 없고 꽉 맥힌 차뿐인데 갑자기 차들이 아주 조금씩 움직인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기쁘지가 않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통에 나는 시동을 걸었다 껏다를 반복해야하고 가스만 더 닳을 판이니 차라리 가만히 서 있는 것만 못 했다.
"결국 이러다 가스가 바닥나면?"
여러 일들이 주마등 스치듯이 했다. 긴급 출동을 부르니 올 수도 없고 내 차에 막혀서 다른 차들은 그나마 갈 수도 없을 것이고 난감했다.
나야 여기서 얼어붙어도 싸지만 남의 감언 이설에 넘어간 이 순진한 여인네들은 어찌 한단 말인가? 나야 죄과를 치루는 일이니 어쩔 수 없지만 이들을 헬기에 태워 보낼 수도 다른 차에 얻어 타고 있으랄 수도 정말이지 오도 가도 못하고 '빼도 박지도' 못하는 완전히 '외통수' 상황 바로 그것이었다.
그래도 좇아 왔으니 공범이라고 오히려 날 위로한다.
그런 심난함에 나의 등줄기에 식은 땀이 날 즈음 갑자기 옆에 분이 소리를 지른다.
"출구다!"
아니 출구는 삼십키로는 더 가야는데 이상하다 싶었다.
하지만 분명 거짓말처럼 바로 코 앞에 출구가 있었고 차들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미덥지 않던 그 노란 트럭 기사분 말이 맞았다.
나도 잽싸게 눈으로 뒤범벅인 비상차선을 타고 빠져 나오니 그나마 우리가 마지막이었다.
바로 뒤의 차부터는 다시 막혀서 꼼짝들을 못했다.
어차피 남으로 가지 못할 바에야 빠져 나오고 볼 일일텐데 그저 뭉게고 앞으로만 가겠다고 생각하는 모습들이 참으로 기이했다.
습관처럼 움직이는 '동물의 왕국'도 아닌데 그냥 있는 것을 보면 신기했다.
우리도 사실 출구를 바로 코앞에 두고 그냥 9시간을 서 있었던 꼴이다.
아마 다른 사람들은 밤을 거기서 새울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우리는 까먹은 9시간에 대한 원망은 전혀 없었고 오로지 거기 "죽음의 계곡'을 탈출 했다는 기쁨 그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했고 이제 가스가 '앵코'되어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가 움직인다는 사실이 이렇게 고마운 일인 줄을 전에는 미쳐 몰랐다.
너무도 기뻤고 살았다 싶었다.
"하느님 고맙습니다"란 기도가 저절로 나왔다.
미끄러워도 꼬불꼬불해도 좋았다. 그냥 움직인다는 그 사실 자체만도 행복이고 기쁨이고 인생역전승리였다.
그렇게 한 십여 키로를 오니 천안시내에 다 왔고 우리는 주유소에서 가스통을 채워 넣고 또 바로 그 앞에 장어집에서 풍천 장어대신으로 '장어 정식'과 복분자 술을 따뜻한 방바닥에 널부러져서 창자에 채워 넣으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우리가 지금 앉아 있는 여기는 천국이고 바로 길 건너 고속도로 거기는 지옥이었다.
너무도 고맙다는 생각을 거푸 하면서 우리는 천안을, 직장이 그곳이라서 늘 무심히 다녔던 그 곳을 지옥의 '혹성탈출'이라도 하는 기분으로 튕겨져 나와서 서울로 달렸다.
하행선은 차단되어 있었지만 상행선은 그냥 '진짜의' 고속도로 그 자체였다.
카페에서 몸서리가 쳐질 만큼 시큼한 차로 마무리를 하고 집에 도착하니 두시.
오늘의 '설중매 여행'은 완전히 '떡'이 되었지만 평생에 결코 잊을 수 없는 여행길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
나는 내일 그 원수 같은 설중매 여행을 다시 시도 할 것이다. 이번에는 더 많은 떼로다 모아서 갈 참이다.
-이 글을 쓰기 직전 아침 뉴스를 보니 아직도 그 때의 그 사람들이 고속도로에 있단다.
오전 중에는 풀린다고 하나 밤새 음식을 공수하고 환자도 생기고 난리 북새통이 따로 없었단다. 부디 그 분들에게도 하느님의 은총이 평생 같이 하길, 어찌 보면 반은 같이 한 살가운 동료애로 또 반을 같이 못한 미안한 동료애로 기원을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