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2008년 5월 15일 해마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스승의 날이다. 여러분들에게도 학창시절 기억에 남는 스승님이 여러 분 계실 것이다. 마찬가지로 조약돌에게도 두 분 선생님이 기억에 가장 남는다. 그 중 한 분은 조약돌의 초등학교 저학년 때의 은사이시고 다른 한 사람은 내 딸 아이를 맡았던 선생님이시다.
해마다 오늘만은 두 분에 대한 생각이 각별하여 이미 지면을 통하여 소개드렸지만 다시 한번 연례 행사처럼 올려서 그 분을 추억하는 시간을 갖고 싶다. 처음 읽는 분은 물론이고 이미 읽으신 분들이 다시 읽으시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 조약돌 올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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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학년이 되자 다시 반을 편성하였다. 1학년 때 다른 반이었던 애들의 80% 정도가 새로이 같은 반에 편성되었는 데 같은 동네에 사는 창수도 한 반이 되었다. 여자 애들 중에 코가 오뚝하고 눈이 호수처럼 맑으며 짙은 남색의 비로드 원피스를 입은 애가 단연 돋보였다. 1학년 때와 마찬가지로 역시 여자 선생님이 새로이 우리 담임 선생님을 맡게 되었는 데 하얀 블라우스에 곤색 원피스를 입은 그 선생님의 모습 또한 선녀처럼 아름다웠다.
그 당시 조약돌에게 비친 여성은 참으로 신비스럽고 사랑스러운 존재이었다. 선친은 참으로 엄격하신 분이었음에 반하여 어머님은 늘 따뜻하고 자애스러운 분이었기 때문에 조약돌의 인생에서 모든 여성은 모성애와 연관 지어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누나가 없는 조약돌에게, 가장 사랑하는 어머니마저 한 달에 너다섯 밤 정도 밖에 집에 안 계시니 어머니로 상징되는 모든 여성은 참으로 신비스럽고 그리운 존재이었다.
보잘 것 없는 집안 형편이었지만 일본에서 보내준 사지로 된, 그 당시로는 실로 파격적인 까만 색의 학생복 정장을 입은 조약돌이 CLASS 내에서는 단연 돋보였음직도 하였을 것이다. 한결같이 단발 머리를 한 여자 애들 가운데 유일하게 쪽 머리를 한 비로드 원피스의 미소녀가 내 옆 자리에 앉았으면 좋겠는 데 짝궁의 편성은 남녀 학생의 키 순으로 정한다고 하니 키가 맞지 않아서 그 녀와 짝꿍이 되는 것은 틀렸나 보다.
남녀 학생들이 각각 한 줄씩 두 줄로 키 순으로 작은 애들 일수록 앞에, 큰 애들은 뒤로 정렬을 하였다. 여자 애들의 줄을 힐끗 보니 내가 점 찍은 공주는 앞에서 열 두번 째가 아닌가! 그런데 키가 비교적 작았던 나는 8 번째이니 이것은 뭔가 잘못 되어도 많이 잘못된 것이다.
이런 경우 비상수단을 강구하는 수 밖에. 나는 대오에서 이탈하여 남학생 중에서 열두번째 되는 학생 앞에 가서 슬며시 끼어 섰다. 키도 자그만 녀석에게 새치기를 당했으니 이 녀석은 기분이 나쁘다는 표정으로 인상을 긋는 것이었다.
지난 여름에는 황야의 결투까지도 마다 않고 산전수전을 다 겪은 조약돌이 그의 그런 표정때문에 위축될 리가 없었다. 나는 키가 반 뼘 정도는 나보다 더 큰 그에게 돌아서 한 눈을 깜빡 윙크를 하고 웃어줬더니 더 이상 별다른 문제 없이 공주는 내 차지가 되었다.
그런데 그 공주에 대한 환상은 첫 날부터 깨어지고 말았다. 그 녀는 나의 어머니와는 달랐다. 나는 그 애와 친해지고 싶어서 지난 번 나와바리 다툼으로 결투를 신청할 때 결투 상대방에게 손을 내밀었던 것처럼 그 녀에게 정중하게 악수를 청했다.
“ 나는 조약돌이다. 앞으로 우리 둘이 사이 좋게 지내자. “ 상견례를 하면서 악수를 청하며 손을 내밀었는 데, 그녀는 처음부터 나를 무시하는 것이었다.
“ 아유, 손에 때 묻은 것 봐. 더러워. “ 한마디로 딱지를 맞았다. 그보다 더욱 민망한 것은 우리 주변의 급우들 앞에서 내가 때가 많다는 소문이 난 것이었다.
나는 그 날 오후 학교가 파하여 집에 도착하자 우선 손부터 닦기 시작했다. 손에 감자비누(껌정색 비누인데 정어리 기름을 응고시켜 만든다고 들은 기억이 난다)를 덕지덕지 바르고는 쑥돌(왜 쑥돌이라고 부르는지 모르지만 제주도처럼 화산지대에서 용암이 식을 때 암석 속에서 기포가 형성되어 암석 표면에 곰보와 같은 수 많은 작은 구멍이 형성되어 있어서 지금의 때밀이 수건 대용이 된다)로 손 잔등을 난생 처음 피가 나도록 때를 밀었다.
때가 국수가 밀리듯이 벗겨진다. 깨끗한 내 모습을 거울에 비춰봤다. 목에도 때가 잔뜩 끼어 있다. 나는 옷을 빨가벗고 찬물로 온 몸을 박박 문질렀다. 나는 그 날 이후로 아무리 추운 한 겨울에도 목욕을 하는 습관이 몸에 배게 되었다.
미인을 쟁취하기 위해서 라면 그 정도의 고통은 당연히 감수하여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니 3월 달의 꽃샘 추위 속에서 하는 냉수욕이 즐겁기까지 하였다.
그 공주가 우리 학교 교장 선생님의 막내 따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녀의 신분을 괜히 알았다고 후회도 됐다. 지체 높은 교장 선생님의 딸을 천한 조약돌이 사모한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 아닌가! (선친은 조약돌이, 탐라국 왕시조의 79대 왕손이라고 늘상 자부심을 불어 넣어주셨지만 당시 어린 조약돌은 신분의 귀천을 판가름하는 척도는 오로지 빈부의 차이로 판가름 나는 것으로 믿고 있었다)
어떻든 나는 다음 날에 손을 깨끗하게 씻고 왔으니 악수를 하자고 다시 시도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냉담하였다. 남자가 한번 칼을 뽑았으면 그냥 빈 손으로 집어 넣을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나는 악수를 거절하는 그녀의 오른 손을 끌어다가 억지로 악수를 하고야 말았다. 아담한 그녀의 손은 정말 부드럽고 따뜻했다.
그런데 그녀가 ‘으앙!’ 하고 울어버렸다. 담임 선생님과 급우들의 시선이 우리들에게 집중되었다. 선생님이 우는 까닭을 묻자, 그녀가 “ 악수를 하기 싫다는 데 억지로 자기 손을 끌어가 악수를 했다.” 고 일러 바쳤다. 1학년 때 선생님의 무서운 기억 때문에 천사 같은 자태를 한 이 선생님으로부터도 날벼락이 떨어지는 것이 아닌지, 나는 선생님을 감히 쳐다볼 생각을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선생님의 처분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시선을 내리깐 나의 눈에 선생님의 하반신이 들어왔다. 실내화를 신으신 선생님의 종아리 색갈이 분 명 살 색은 살 색인데 그냥 피부와는 달라보였다.
정말 선생님은 하늘나라에서 오신 분인가? 왜 다른 사람과 피부 색갈이 다를까? 가까이 다가선 선생님에게서 사람을 끄는 향긋한 냄새가 났다. 나는 그 때까지 우리 어머님이 단 한번이라도 화장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없으니 집에 화장품도 있을 리가 없었고, 또한 당시로는 스타킹을 신은 여성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선생님이 스타킹은 신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휴전 직후의 한국에서 당시 국내에 스타킹이 있을 리가 없었지만 재일동포가 많은 제주에는 일본에서 들어오는 의류나 일제 화장품이 많이 유입되었기 때문에 스타킹도 일본제였으리라고 생각된다.)
“ 약돌아, 숙녀에게는 정중하게 대해야지 강제로 악수를 해서는 아니 되는거야. “ 선생님은 그 자태뿐만 아니라 마음씨도 역시 천사와 같았다. 종아리라도 몇 대 맞는 줄 알았는 데 의외의 관대함에 선생님을 향한 조약돌의 마음은 더욱 끌리게 되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애들은 원래가 주위가 산만하고 수업시간에도 시끄럽게 떠든다. 그렇지만 이런 급우들을 아랑곳 하지 않고 조약돌은 선생님의 말씀이라면 하나도 빼놓지 않고 경청을 하였다. 성적이 좋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여학생들에게도 공부를 잘하는 애가 인기가 있었기 때문에 더욱 열심히 공부했지만 옆에 앉은 효심이의 마음을 돌려놓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 애의 관심을 끌기 위하여 청소를 도와주거나 붕어빵을 사다 주는 등 선의적인 온갖 노력을 다 해봤지만 효험이 없자, 쉬는 시간에 공주들이 하는 고무줄을 잘라 도망가거나 스커트를 치겨 올리는 둥 짓궂은 짓을 골라 했지만 그럴수록 그 녀의 쌀쌀함은 더욱 그 도가 심해지는 역효과만 가져왔다.
내가 그 녀의 치마를 걷어올리는 장난을 친 그 날 이후 그 녀는 2인용 책상의 중간에 금을 그어서 까지 자기 영역으로 침범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데까지 사태가 발전하자, 나는 그간 쏟은 노력을 몰라주는 그녀가 야속하기 그지 없었지만 당분간 그녀에 대한 관심을 접기로 하였다.
대신에 나는 그 날 저녁에 시냇가에서 개구리를 잡아서 병에 넣어뒀다가 다음 날 학교에 가서는 그녀의 책가방 속에 몰래 집어넣어 놓고 모른 척 지켜보면서 그간의 고통을 보상 받기로 작정했다. 아니나 다를까, 예상치 못한 침입자인 개구리가 그녀의 가방에서 뛰어 나오자 그녀는 기겁을 하여 소리를 쳤다. 야속한 공주에게 복수를 했다는 기분보다는 연모하는 여인이 고통스러워 하는 모습에 마음이 아파서 그녀를 더 이상 괴롭히지 않고 놓아주기로 했다.
신학기 초가 되니 각 교실들은 경쟁적으로 환경미화를 하는 것이었다. 우리 반도 예외는 아니어서 커튼을 간다든지 교훈과 태극기 액자에 대한 청소도 하고 그림도 몇 장 걸어야 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모두 가난한 시절이니 학급마다 자모회 같은 것이 있을 까닭도 없었으며 다행히 담임이 남자 선생님이거나 고학년인 경우는 학생들이 충분히 환경미화를 감당할 수 있었지만 2학년만 하더라도 교실내 높은 위치에 액자를 다시 걸어놓는 일이나 커튼을 설치하는 일을 선생님 외에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으니 이런 일까지도 모두 선생님의 몫이었다.
선생님도 높은 교실 천정까지는 키가 닿지 않았기 때문에 학생용 책상을 두개나 포개어 아이들이 붙잡고 있으면 그 위에 올라간 선생님이 작업을 손수 하셨다. 우리 선생님이 대단하시다고 생각하면서 포개 놓은 책상이 흔들리지 않도록 붙잡고 있는 일 같은 것은 조약돌이 항상 발벗고 나서서 담당하였다.
아직 어린 나이이기 때문에 선생님이 작업하는 동안 흔들리려는 책상들을 꽉 붙잡고 있는 일도 쉽지는 않다. 그래서 함께 붙잡고 있는 친구와 나는 선생님의 작업이 얼마나 남았는지 고개를 쳐들어 높은 벽을 쳐다봤다. 그런데 거기에 신천지가 펼쳐져 있었다. 선생님의 후레어 스커트 속으로 하체가 전부 드러나 보였다. 팬티를 입은 선생님의 히프 곡선에서 종아리, 그리고 다리까지. 어린 나이였지만 봐서는 안될 것을 본 죄인처럼 슬며시 고개를 돌렸지만 기분은 참으로 야릇하였다.
그 날 우리는 푸른 색깔의 커튼도 걷어내어 깨끗하게 빨래를 했다. 여자 애들이 빨래하는 것을 내가 도와줬다. 좀 나이보다 성숙한 남자애 하나가 조약돌은 계집애처럼 빨래를 하니 이제 조약돌의 고추는 떨어질 것이라고 놀려댔다.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몰랐기 때문에,
“ 내 고추는 잘 있는 데 왜 떨어지지? “ 하고 물었더니 이 녀석은 한 수 떠 뜨는 것이 아닌가?
“ 약돌이, 너는 고추뿐만 아니라 여자 애들 하고 놀면 배꼽도 떨어지는 것 몰랐지? “
나는 그 말에 정말로 큰 충격을 받았다. 나는 언젠가 어린 시절 나의 어머니에게,
“ 어머니, 나 어디로 나와수광? (나 어디로 나왔나요?)” 하고 물었더니 난처한 표정을 짓던 어머니가 배꼽으로 나왔다고 한 얘기를 들었기 때문에 혹시 내가 여자 선생님이나 여자애들과 놀다가는 임신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엉뚱한 연상을 했으니 기겁을 할 수 밖에 없는 것 아닌가? 친구가 놀리기 위해서 한 말이라는 얘기를 형으로부터 듣고서야 비로소 안심을 할 수가 있었다.
그 다음 주 월요일에는 다시 환경미화를 하게 되었다. 그 날은 지난 번 빨아 말린 커튼을 다시 부착하는 일만 하면 되었다. 선생님이 다시 올라가시려고 했다. 나는 내가 대신 올라가서 하겠다고 제언을 했다. 조약돌의 당돌함에 선생님이, 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책상 두개를 포개놓더라도 사실 키가 닿지 않을지도 모르고 그 작업은 위험스러워보였지만 내가 자원을 한 것은, 선생님의 치마속 은밀한 곳을 내가 아닌 다른 애들에게 보여주는 민망함에서 선생님을 보호해 해드리고 싶은 배려 차원이었다. 그런데 역시 인간에게는 자신의 능력 한계를 알아야 하는 데 키가 작은 조약돌에게 커튼을 부착하는 일은 사실 벅찬 과제였던 것이다.
커튼을 부착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작업인줄은 몰랐다. 높은 데 올라갔으니 다리는 후들 후들 떨리는 데 다가 키가 닿지 않으니 높게 포게 놓은 책상 위에서 까치발을 한데다가 커튼의 끝을 가지런히 맞춰서 창문 틀의 나무에 압핀으로 고정시키는 것인 데 엄지 손가락 힘이 없으니 힘을 가해도 잘 들어가지가 않았다. 젖 먹덕 힘까지 다하여 겨우 한 개 커든의 설치를 완료하고 나니 이마에 구슬땀이 흘렀지만 선생님을 위한 일이라는 데 보람은 있었다.
두번째 유리창 커튼을 부착할 때는 힘이 빠져서인지 몰라도 더 떨렸다. 선생님과 함께 밑에서 책상을 붙잡고 있는 개구장이 녀석들이 보기에는, 다리가 후들 후들 떨리는 조약돌이 재미 있었는지, 아니면 조약돌 때문에 선생님의 은밀한 신체 부위를 볼 수 없게 되어서 부아가 났던 것인지 한 녀석이 장난끼가 발동한 것이었다.
붙잡고 있던 책상을 흔들어버린 것이다. 선생님이 그 학생에게 뭐라고 야단을 치는 것과 동시에 나는 공중낙하를 하면서 밑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아무 생각도 없는 데 정신을 차려보니 나의 몸은 선생님의 품에 안겨서 교실 바닥에 주저앉아 있고 책상을 흔들었던 그 장난꾸러기도 내가 떨어지면서 밀어버린 상단의 책상에 머리가 부딪쳐서 머리에 알밤만한 혹이 생겨났다. 그 녀석은 죽는다고 나딩굴고 있는 데 나는 선생님 품에 안겨 있는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선생님의 포근한 가슴에서 머리를 떼고 선생님을 순간적으로 뵈었더니 선생님께서도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계셔서 나의 육중한 육체에 눌려서 그런 줄 알고 얼른 일어섰다. 강한 충격으로 떨어지는 제자를 구하기 위하여 양 팔로 안는다는 것이 잘못되어 오른 손가락을 다치신 것이었다. 고통스러운 표정도 잠시, 선생님은 자신을 돌 볼 생각을 아니하고 약돌이와 그 녀석의 안위를 걱정하는 것이었다.
다음 날은 우리 천사 선생님을 뵈올 수가 없었다. 어제 환경미화 중에 다치셔서 출근을 못 하셨다는 것이었다. 내가 그토록 사모하고 내 생명의 은인인 선생님이 다치셨다니 정말 마음이 아팠다. 그 날은 이웃 반과 합반을 하였는데 수업시간 내내 마음은 온통 담임 선생님 걱정에 빼앗겼다.
3일후에 선생님이 나오셨다. 엄지 손가락에 석고붕대를 감고 계셨다. 다행히 골절은 아니고 근육 인대가 늘어난, 소위 삐신 것이었다. 선생님은 출근하자 마자 나와 그 친구의 안부를 다시 물으셨다. 자신의 몸보다는 제자를 사랑하는 그 마음에 황송하고 죄송스러워서 눈물이 찔끔 나왔지만 아마 이를 눈치챈 녀석은 옆에 앉은 짝꿍밖에 없었을 것이다.
수업이 파한 후 아이들이 돌아갔지만 나는 교실에 남아서 선생님을 기다렸다. 뭔가 선생님께 빚을 진 기분이었기 때문에 사과를 해야 할 것 같았다. 교실에 숨어서 멀리 떨어진 교무실 문이 열릴 때마다 우리 선생님이 나오는지 지켜봤다. 드디어 선생님이 퇴근을 하시려고 나오신다. 밖에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는 얼른 교실 선생님 책상 옆에 사물함에 놓아둔 선생님의 까만 우산을 들고 선생님 앞으로 뛰어가 꾸벅 인사를 하고 우산을 드렸다. 선생님이 고맙다고 답례를 했다.
“ 약돌아, 왜 집에 안 갔니?”
“ 저 때문에 선생님이 다치셔서 죄송합니다. 사과를 드리려고요. “
“ 아니다. 어린 너에게 시키는 것이 아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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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절된 것은 아니고 인대가 늘어난 것 뿐이야. “
선생님이 나를 안심시키기 위하여 하시는 말씀이려니 짐작은 했지만 “골절”이나 “인대”란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지를 못했다.
“ 약돌아, 그래, 이제 집에 가야지? “
한 손으로 우산을 펴시려는 선생님이 안스럽다. 나는 얼른 선생님의 핸드백을 받아드렸지만 선생님이 한손으로 우산을 펴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내가 우산을 펴 드렸다. 까까마리 꼬마와 여 선생님 사제간에 비오는 날에 한 우산 속에 함께 걸어가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아무리 우산으로 몸을 가려도 선생님 부라우스가 차츰 젖기 시작하였다. 한참을 걷다 보니 비에 젖기 시작한 부라우스가 몸에 달라 붙기 시작하더니 살색이 드러나 보였다. 나는 못 볼 것을 보기나 한 것처럼 고개를 돌렸다. 선생님께 비를 피하게 해드릴 수 있는 묘책이 떠오르지 않아서 나는 선생님께서 혼자만 우산을 쓰시도록 우산 밖으로 나오려고 했지만 선생님이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너는 나의 포로야. 못 나가. “ 하시면서 나를 붙잡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솔직히 말씀드렸다.
“비에 젖은 선생님 몸매가 보기에 흉해요.”
‘비에 젖은 선생님 모습이 뵙기에 민망해요.” 하고 말한다는 것이, 아직 어린애이니 정제되지 않고, 더욱이 어휘력이 짧아서 “민망” 이란 단어를 몰라서 나오는 데로 아무렇게나 얘기한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선생님 얼굴이 순간적으로 홍당무로 변하더니 반사적으로 앞가슴을 가리는가 싶더니 자신의 차림을 살펴보시는 것이었다.
약간씩 내리던 봄비가 더욱 굵어졌다. 너무 비가 많이 와서 시야가 보이지 않을 정도였고 길가에 오가는 인적도 드믈었다. 그 때 형아와 신문배달 후에 자주 가는 단골 빵집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선생님께 빵집에 가자고 제안했다. 선생님도 마침 잘 됐다는 듯이 선선히 응했다.
단골 빵집 아줌마가 나를 알아보고 눈웃음을 보내는 것이 그 빵집 아주머니는 나의 마음을 이미 훔쳐본 것 같았다. 나는 애인과 데이트를 하다가 아는 사람에게 들킨 기분이었지만 애인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려고 우리 선생님이라고 소개를 했다. 선생님이라는 얘기에, 빵집 아줌마는 젖은 몸을 닦도록 수건을 가져다 선생님께 드리는 것이었다.
얇은 부라우스를 걸친 선생님의 상체가 완전히 젖어 있었다. 서로 마주 앉은 우리 두 사람은 찐빵이 나올 때까지 잠시 말없이 서로 쳐다만 보고 있었다. 비에 젖은 선생님의 목덜미에 진주 구슬 같은 물방울이 흘러내려 가슴을 타고 내려갔다. 하얀 부라우스 밖으로 뽀얀 살결이 비쳐나 보였다.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 지 몰라 멍한 상태인 조약돌에게,
“ 약돌이, 너 어디를 뚫어지게 봐. “ 하면서 선생님이 다치지 않은 왼손으로 내 이마에 꼴밤을 먹였지만 그 꼴 밤이 꿀밤이나 되는 것처럼 싫지가 않았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찐 빵을 아줌마는 덤으로 두개를 더 얹어서 가져다 주셨다. 찐빵을 먹으면서 가까이서 뵈온 선생님 모습이 오늘 따라 학처럼 더욱 우아해 보였다.
부모님이 무엇을 하시는지 선생님이 물어봤다.
“ 아버님은 경찰관이고요. 어머니는 숯을……” 구어 판다는 말이 차마 나오지 않았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지만 어린 나이에도 다른 어머니들은 모두 집에 계신데 숯을 구으러 한라산에 올라가 계신다는 것이 부끄러웠는가 보다.
선생님은, '부모님이 훌륭한 일을 하시는 데 집에 못 들어오시니 고생이 많으시겠구나.' 하고 좋게 위로를 해 주셨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비밀이 있어서는 아니 되겠기에, 집에는 이제 형과 나, 이제 6살이 된 여동생이 함께 살고 형과 나는 아침에 신문을 배달한다는 묻지도 않은 비밀까지도 다 털어놓고 나니 홀가분하고 선생님이란 부담도 줄어 들었다.
비가 어느 정도 가늘어졌다. 나는 선생님과 영원히 친구가 되어 선생님 집에도 놀러 가고 싶고 바다가 함께 가서 수영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선생님께 노는 날(일요일)에 함께 수영을 가자고 제의를 했다. 선생님이 까르르 웃으신다.
“ 얘, 약돌아! 3월 달에 무슨 수영이니? “
나는 그간 꼭 3월 달은 아니었지만 고기를 잡거나 소라나 성게를 잡으러 갔다가 계절에 관계없이 옷을 훌훌 벗고 바다속에 흔히 들어가봤기 때문에 해수욕이 꼭 여름에만 하는 것이라는 관념은 그 때까지는 가져본 적이 없었다.
“ 3월에 곤란하면 4월에는 어때요? ”
“ 약돌아! 4월도 너무 일러. 그런데 약돌이 너 수영복이나 있긴 있니? “
“ 수영복? 그게 뭔데요? “
“ 약돌아. 남자들끼리 수영할 때라면 꼬마니까 발가 벗고 하더라도 괜찮지만 숙녀 앞에서 보물을 보여서야 되겠니? “
여자를 숙녀라고 한다는 얘기나 수영복이 따로 있다는 얘기, 고추가 왜 보물로 취급해야 하는지 그 이유 등 선생님은 너무 유식한 말씀만 하셔서 당시 어린 조약돌의 머리로는 도통 이해를 할 수 없었다.
“ 그럼 저가 선생님 집에 놀러 가면 안 되나요? “
“ 안될 것은 없지. 그래 다음에 한번 놀러 오라고 하면 오거라. “
“ 오늘은 안 될까요? “
“ 오늘? 오늘은 곤란하지. 손이 불편하고 할 일도 좀 있어서 말이야. “ 나는 선생님이 내가 선생님 집을 방문하는 것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 날 찐 빵 값은 형에게 받은 비상금에서 지불하기로 작정을 하였다. 조약돌이 돈이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지 선생님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그렇지만 단호하게 얘기했다.
“약돌아! 네가 빵값을 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오늘은 선생님이 내고 이 다음에 네가 부자가 되거든 한턱 쓰거라. “
“ 난 부자란 말이에요. 그리고 우리 형아가 남에게 신세를 지지 말라고 했어요. 제가 남자니까 오늘은 제가 낼께요.”
그렇지만 빵 값은 결국 선생님이 내시고야 말았다. 그 날 나는 이 얘기 저 얘기 하면서 선생님 집 문 앞까지 따라 갔고 차마 들어가 보고 싶었지만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선생님이 우산을 쓰고 가라고 해서 그냥 괜찮다고 했지만 결국 쓰고 왔다. 선생님은 마음씨도 비단결 같이 곱다.
선생님과 헤어진 조약돌은 집으로 직행을 하지 않고 옷 가게로 갔다. 수영복을 달라고 했더니 당시만 해도 수영복을 파는 곳은 제주도내에 어디에도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럴 리가 없다고 우리 선생님도 수영복이 있다고 했다고 했더니 아마 일본에서 보내온 것인가 보다고 했다. 옳거니. 그렇다면 나도 일본에 고모나 이모, 아니면 외삼촌에게 수영복을 보내달라고 해야겠다고 작정을 했다.
그 날 나는 집에 와서 두 통의 편지를 썼다. 한 통은 일본의 고모에게 수영복을 보내달라는 편지였고 다른 한 통은 선생님께 찐빵 고마웠고 다음 번에는 내가 살 차례다. 그리고 말미에 사랑한다는 말은 적었다가 쑥스러워서 박박 지워버렸다.
결국 나는 그 편지를 영원히 선생님께 보내지는 못했다. 형님에게는 일본에 보내는 편지만 보여드렸다. 형이 고모님께 평소에 편지도 한 통 쓴 적이 없으면서 부담을 드려서는 아니 된다고 보내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럼 여자 선생님과 수영을 가기로 했는 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었더니 “살 빤스(나체)” 만 입고 하라고 놀려대는 것이었다.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슬며시 마당으로 나가는 어린 동생이 안 되었는지 여름 방학 때까지 동생을 잘 돌보면 수영복을 형아가 구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선생님은 여전히 우리 모두를 다정하게 대해주셨지만 약돌이를 집으로 초대하는 것은 잊어버리셨나 보다. 그러던 5월 어느 날이었다. 수업시간이 끝난 방과후 하교를 하지 않고 학교에 남아서 기회를 보다가 선생님께 여쭈어 봤다.
“ 선생님, 저하고 약속 잊으셨나요? “
“무슨 약속? “
“ 저…… 아니요? “
“ 너 나에게 할 얘기가 있나 보구나. 약돌이 하고 무슨 약속 했지? 설마 다시 수영 가자는 것은 아닐테고…..” 혹시 너 선생님에게 빵 사주려고 하는 것은 아니겠지? “
“ 사실은 그 때 그 빵이 참 맛 있던데 나 오늘 돈 이렇게 많아요. “ 선생님 집에 가고 싶은 욕망이 빵집으로 바뀌었다. 우리 두 사람은 그 날 빵집으로 가서 다시 마주 앉았다. 나의 요모조모를 유심히 살펴보던 선생님이 길게 자라난 내 손톱을 보고는 손가위를 꺼내어 깎아주는 것이었다. 내 아버지가 손톱을 깎아주신 이래로 내 손톱을 깎은 것이 얼마 만인지 기억이 도통 없다.
선생님은, 약돌이는 몸은 깨끗하니 손톱만 잘 깎으면 귀공자라고 추겨 세워 주시는 것을 잊지 않았다. 내 손을 부여 잡은 선생님 손에서 인자함과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나는 그 날 이후 손톱만은 확실하게 깎고 다녔다. 물론 손톱깎이가 없으니 내 이빨은 좋은 손톱깎이였고 튼튼한 이빨 덕택에 그 날 이후에 내 손톱은 자라날 겨를이 없게 되었다.
선생님께 빵을 사드렸으니 빚을 갚은 기분으로 홀가분하게 되었다. 나는 선생님 댁에 가고 싶다고는 못하고 간접적으로 변죽만 울렸다. 선생님 집이 참으로 크고 좋아보였다. 선생님 방이 따로 있느냐는 등 쓸 데 없는 것을 자꾸 여쭈어봤다. 그 때마다 선생님은 싫어하는 내색 없이 대답해주셨다. 그래서 나는 드디어 결정적인 질문을 하고야 말았다.
“선생님, 댁에 남자가 찾아가도 괜찮은가요? “
“ 남자도 남자 나름이지. 선생님 집을 찾아올 왕자님이 누군데? “
‘나요, 나!’ 하고 큰소리로 외치고 싶었지만 선생님은 내 마음을 알아주지 못했다. 약속이나 한 듯이, 나는 그 날도 선생님 댁 앞까지 따라가고야 말았다. 선생님이, ‘ 약돌아! 오늘 빵 잘 먹었어. 잘 가!’ 하고 작별인사를 하는 것이 아닌가. 지금 시기를 놓치면 선생님 집에는 영원히 못 가볼 것만 같았다. 왜 안 가고 서 있느냐는 질문에 나는 머뭇거렸다. 선생님이,
“ 약돌이, 너 정말 호기심이 많구나. 그래 들어와 봐.” 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나는 대문 지방을 넘어서 선생님 댁으로 들어갔다.
선생님 식구는 은행장(지점장)인 아버지와 어머니, 오빠, 남동생 여동생이 각각 하나임은 마루에 걸려있는 가족사진을 보고 알 수 있었지만 모두 장성하여 객지에서 직장을 다니거나 대학에 다니는 관계로 집에는 부모님과 막내 여동생하고 4 식구만 산다고 하였다. 집에는 아무도 안 계셨다.
선생님은 저녁을 준비하겠다고 했지만 빵을 많이 먹어서 생각이 없다고 했더니 온실에서 따온 귤(당시만 해도 5월에 귤은 제주도라고 해도 참으로 귀했다)과 이상한 물을 갖다 주면서 마셔보라고 했다. 쌉쌀하면서도 야릇한 맛이 나는 그 음료가 커피라는 것을 아는 데는 그로부터도 10년쯤 후의 일이었다. 선생님이 옷을 갈아 입을 테니 좀 나가 있으라고 해서 거실로 나왔는데 얼마 후 선생님이 다시 불러서 들어갔더니, 아랫도리만 바지로 갈아 입으신 선생님이 부라우스를 벗겨달라는 것이 아닌가? 선생님이 요구가 어린 나이에도 퍽이나 당황스러워 어떻게 할 줄 몰라 하는데 선생님이,
“괜찮아. 약돌아! 우리 두 사람만의 비밀이다.” 하면서 돌아서셨다. 등쪽으로 여러 개의 단추가 달린 이런 불편한 옷을 왜 여자들은 입는지 모르겠다. 단추를 풀 때마다 백옥 같은 속살이 드러난다. 또 하나 모를 일은 우리 어머니는 단 한번도 그런 일이 없었는 데 왜 나의 바둑 사부님의 사모님의 경우도 그렇더니 우리 담임 선생님마저도 하필 젖에만 가리개를 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단지 그 당시 생각으로는 젖이 유독 추위를 더 타는가 보다 하고 생각하였을 뿐이다.
선생님의 몸매에 취하여 유심히 살피는 조약돌을 본 선생님은,
“ 지난 번 비를 맞은 선생님 몸매가 보기 싫다는 생각에는 아직도 변함이 없니? “ 나는 그 날의 말 실수에 대하여 퍽이나 후회하고 있었는데 선생님이 나의 아픈 곳을 찔렀다. 그래서 나는,
“아니요. 아주 예뻐요.” 하고 아첨을 하였다. 그 말이 싫지는 않으신지 선생님은,
“짜아식, 조그만 놈이 보는 눈은 높아가지곤….” 하며 눈을 흘기셨다.
그 날 우리는 게임도 하고 선생님 부모님 얘기, 나의 장래, 선생님의 과거 학창시절 얘기 등 밤이 깊을 때까지 얘기를 나누었다. 담임 선생님의 어머니가 들어오셨기에 공손하게 인사를 드렸다. 선생님의 어머님도 참으로 인자해 보였다. 그 어머니는 곶감이랑 과자랑 맛 있는 것을 잔뜩 갖다 주셨다. 과자를 먹으면서 가장 궁금한 비밀을 여쭈어 봤다. 선생님의 남자친구에 대해서 였다.
대학에 다닐 때 사귄 사람이 있었는데 무슨 사정이 있어서 이제는 헤어져서 옛날 추억속의 인물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하는 선생님의 얼굴에 어떤 슬픔이 진하게 묻어났다. 그렇지만 나는 이제는 헤어졌다는 그 부분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선생님은 그 녀석이 아니라도 약돌이가 대신 보호해드릴 것이라고 다짐을 했다.
적막감이 감돌고 훈기라고는 전혀 없이 어린 동생만이 하루 종일 집을 지키는, 그리고 석유등을 켜는 우리 집에 비하여 부모님이 계시고 먹을 것이 풍부하며 안온한 방에 침대가 놓여있고 전기불까지 들어오는 선생님 댁은 정말 낙원과 같았다. 차라리 선생님 집이 우리 집이고 선생님과 영원히 함께 살았으면 좋겠다고 엉뚱한 공상을 하면서 잠시 행복에 젖어보기도 했다.
그 날 밤 늦게까지 조약돌이 돌아갈 기미가 없자 선생님이,
“약돌아! 너무 늦으면 집에서 걱정하시지 않겠니?” 하고 집으로 갈 것을 종용했다.
“선생님, 약돌이는 집으로 가고 싶지가 않군요. 여기서 자고 가면 안 될까요? “
의외의 당돌한 질문에 선생님은 단호하게
“그것은 안돼. 남의 집에서 함부로 외박을 하는 것은 나쁜 일이야. “
그 한마디가 참으로 야속하게 들렸다. 선생님을 사랑해서는 아니 되는 나의 흑심이 탄로가 난 기분이었다. 나는 내키지 않는 발길을 돌려서 선생님 집에서 나왔지만 한 동안 그 집 앞을 서성거렸다. 얼마나 흘렀을까? 내가 아직 가지 않은 것을 알아서 였을까? 추리닝을 걸친 선생님이 대문 밖으로 나오시는 것이 아닌가? 나는 얼른 숨으려고 했지만 숨을 만한 적당한 은신처가 없었기 때문에 발각되고야 말았다.
“약돌아! 너 아직 안가고 있었니? 아니면 집에 갔다 온 것이니?”
문방구에 가려고 나왔다는 얘기를 듣고 보니 나를 찾으러 나온 것이 아니라는 데 안도가 되었다. 나는 집에 가서 형에게, 선생님 댁에서 자고 와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왔다고 생각치도 않은 거짓말을 하고야 말았다. 선생님은 정말 기가 막히다는 표정이었다.
“ 좋다. 문방구에 함께 갔다 오자. 그런데 정말 다짐을 하나 하자. 선생님이 학생을 데리고 잤다는 것이 탄로 나면 선생님은 더 이상 학교에 나갈 수가 없으니 비밀로 해야 되는 데 이 비밀을 영원히 지킬 수 있겠니? “ 하고 물었다. 사랑하는 선생님이 학교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조약돌이 죽는 것보다 더 큰 슬픔이 아닌가? 나는 기필코 비밀을 지키겠다고 다짐을 했다. 문방구에서 돌아온 선생님과 나는 다시 한번 새끼 손가락을 걸고 비밀 준수를 서약하였다.
선생님은 마치 무슨 불륜이라도 저지르는 것처럼 선생님 부모님도 모르도록 내 신발을 선생님 방으로 가지고 들어갔고 소리를 내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래서 조약돌과 나는 선생님의 1인용 침대에서 함께 자게 되었다. 선생님이 잠옷으로 갈아입고 나보고도 겉 옷을 벗으라는 것이었다. 나는 겉옷외에는 벗을 것이 전혀 없었다. 달랑 겉 옷만 입고 있으니 벗을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자꾸 벗으라고 하니 속옷이 없다고 차마 말할 수가 없어서 윗도리만 벗으니 하얀 살이 드러났다.
“ 약돌이 몸 좋은 데.” 하고 귓속말을 속삭인 목소리에 귀가 간지러웠다. 선생님이 전등불을 껐다. 두 남녀가 나란히 누운 선생님 방의 창가에는, 달에 걸린 모과 나무 잎이 창가에 스치웠다.
그리 넓지 않은 1인용 침대에 여인과 함께 누운 꼬마 조약돌은 선생님의 품을 멀리 벗어날 수는 없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 고된 업무이신가 보다. 선생님은 얼마 후 잠이 드셨다. 잠이 든 선생님의 얼굴 모습은 모나리자의 미소이다. 선생님 몸에서는 우유냄새인지 귤 냄새 같은 향기가 났다.
선생님은 아무런 걱정 없이 잠을 잘 주무시는 데 조약돌은 전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다가 엉뚱하게도 선생님 젖을 한번만 빨아봤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솔직히 해봤다. 그렇지만 그것은 있을 수 없는 크나큰 죄를 저지리는 것이라는 떨림이 어린 나이에도 왔다. 그래서 선생님의 가슴 위로 그냥 손만 얹어봤다. 느낌이 좋다. 잠 속에서 선생님이 본능적으로 가슴에 얹힌 약돌이의 손을 꼬옥 붙잡고 내려 놓는다.
그 날 내가 잠을 못 이룬 까닭은, 아마도 잠자리 환경이 바뀌고 더욱이 난생 처음 커피를 마신 데 다가 선생님에 대한 야릇한 감정 등 복합적인 요인이 아니었나 싶다.
꿈 같은 밤을 보낸 그로부터 며칠 후 선생님이 나에게 남아 있으라고 했다. 그 날도 우리는 선생님 댁으로 함께 갔다. 선생님은 집에 당도하자 마자 다짜고자 나의 옷을 벗기는 것이었다. 대 낮에 그 것도 저쪽 방에는 선생님 어머님도 계신데 말이다. 나는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지만 나의 몸을 전부 노출하는 것이 싫었다. 선생님은 잔 말 말고 벗으라더니 결국은 강제로 나를 홀랑 벗기고 말았다. 너무나 황당하였다. 조약돌의 분노는 고추에서 폭발을 하였다. 조약돌의 조그만 고추가 골이 나서 빠딱하게 섰다. 의외의 반응에 선생님은,
“ 약돌이, 너 제법인데…….” 하시면서도 의외의 사태에 선생님도 약간은 민망하셨나 보다. 약돌이가 입을 만한 것을 옷장에서 찾다가 마땅한 것이 없었던지 선생님의 여벌 팬티를 하나 휙 던져주시는 것이었다.
민망하던 것을 오로지 감추어야겠다는 일념으로 여성용 팬티를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나는 선생님의 팬티를 얼른 받아 입어서 그것을 가렸다. 선생님은 약돌이의 단벌 일제 사지 학생복을 가지고 나가셨다. 펄펄 끓는 가마솥에 내 옷을 집어넣고 삶는 것이었다. 그 동안 선생님은 나를 따뜻한 물이 가득 담긴 들통에 들어가 목욕을 하라고 하셨다.
이런 깨끗한 집에 있으려면 몸이 깨끗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말씀이 아닌가. 군 말 없이, 그리고 넉살 좋게 나는 정말 빨가 벗고 선생님 댁에서 목욕까지 하는 데 까지 발전을 하였다. 그 때까지 까만 똥 비누만 보아온 조약돌은 난생 처음 선생님 댁에서 향내가 나는 빨간 비누로 목욕을 하니 정말 왕자가 된 기분이었다. 이런 왕자의 몸을 손이 닿지 않는 등 부분의 때를 선생님이 몸소 밀어주시는 데 선생님의 어머니가 들어오셨다. 민망해 죽겠는데 이제 그 어머니까지 가세를 하여서 모녀가 이 조약돌을 목욕시켜 주는 것이 아닌가.
선생님이 나의 옷을 홀랑 벗긴 까닭은, 지난 번 선생님 침대에서 잠을 자면서 조약돌이 선생님 댁에 이들을 옮겨 놓고 온 것이었다. 조약돌이 간 후에 몸이 가려워서 혼이 났다는 것이었었다. 삶은 옷을 빨래하고 말리는 동안 팬티만 입고 있는 것은 곤란하다고 생각한 선생님이 아버지 바지를 가져다 줬지만 너무 커서 도저히 입고 걸을 수가 없으니 결국 선생님은 다시 치마를 입으시고 자신이 걸쳤던 츄리닝 바지를 벗어주셨다. 역시 컸지만 선생님의 옷은 입을만 했다. 옷이 어느 정도 마른 후에 내 본래의 옷으로 갈아입으려고 선생님의 팬티를 벗으려고 했더니 괜찮다면 약돌이에게 줄 테니 입으라고 했지만 그 것도 비밀로 하라고 당부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왜 비밀로 해야 하는지는 어쩌면 알 것도 같았다.
그 날 저녁까지 얻어 먹고 집으로 가려는 데 선생님 어머니가 자루에 쌀을 넣어 가지고 가도록 주셨다. 너무 무거워서 결국 선생님과 함께 우리 집까지 들어다 주셨다. 집에 오자 조약돌은 선생님이 주신 팬티를 더 이상 입지 않고 벗어서 고이 간직하고 여전히 바지만 입고 다녔다. 조약돌이 고이 간직했던 그 팬티가 행방불명이 되어서 찾았지만 결국 찾지 못했는 데 어느 날 어머님이 입었다가 벗어서 빨아서 널어 놓으신 것을 발견하고서는 나는 그 팬티에 대해서는 더 이상 모른 척 할 수 밖에 없었다.
그 후에도 조약돌은 선생님 댁에 무상으로 출입을 했지만 더 이상 이를 옮겨 드리는 염치 없는 짓을 할 수가 없어서 더 이상 자고 가겠다는 말을 하지도 않았고 그런 적도 없었다.
그 선생님은 사도가 무엇인지를 몸소 가르쳐 주신 분이었고 아마 오늘 날 그런 선생님을 찾기는 쉽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실로 어린 날의 애틋한 추억이자 지금 생각해보면 조약돌의 첫사랑, 아니 첫 짝사랑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그 시절은 사제간에도 그런 낭만이 있었는데 요즘 젊은이들은 아마 그런 낭만을 알기나 할까?
그 선생님이 얼마 전에 향년 80세로 임종을 하셨다는 소식을 듣는 옛 제자의 가슴이 여려 오지만 은사님께 아무 것도 해 드릴 수가 없었음이 안타깝다.
그렇지만 우리 선생님은 하늘나라에서도 조약돌을 대신한 하느님의 사랑을 분명 듬쁙 받고 계실 것이다. 오늘 밤에도 선생님과 함께 했던 그 방에 드리웠던 달님이 아파트 베란다 너머로 기웃거리고 있다.
제자들이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핸드폰으로 커닝을 하더라도 수능에서 좋은 점수만 획득하면 그만이란 생각으로 묵인하는 자칭 참교육자, 사이비 용공 전도사 전교조 교사들에 대한 분노가 조약돌로 하여금 참스승이 어떤 분인지, 옛날에 이미 올렸던 이 글을 파일에서 끄집에 내어 올리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