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외가의 조상에 閔大生(민대생)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그는 門蔭(문음)으로 군수가 되었다.
그는 매번 날이 어두우면 북두성에게 축원하기를
" 원하노니 어진 자손을 낳게 해 주십시오"
하고 정성껏 빌었는데, 아닌게 아니라 딸 하나를 낳았다.
그 딸이 커서 한명회에게 시집을 간 뒤에 또 두딸을 낳았는데
한 딸은 예종의 왕비가 되었고
한 딸은 성종의 왕비가 되었다.
두 왕비는 계절에 따라 손수 옷을 만들어 자기 아버지인 한명회에게 보냈으며,
좋은 명절마다 잔치를 베풀도록 음식도 보내고
또 내시를 시켜 술도 내렸으며
평상시에는 수라상의 음식도 계속 나누어 보냈다.
한명회는 시대의 元勳(원훈)으로
마침내 수상이 되었고
그의 두아들도 아버지의 공로 때문에 큰 고을의 수령이 되었다.
한명회는 자기의 직위가 너무 높아진 것을 두려워 하여
벼슬을 내놓고, 남양 시골로 내려 갔다.
그러나 나라에서는 서울에있을 때와 똑같이 옷을 보내고
잔치를 베풀어 주었으므로 심부름하는 내시들이 줄지을 정도였다.
한명회의 나이 80이 넘어서 부터는 그의 생일때마다 한 직급씩 올려주어
드디어는 崇政(숭정)으로 지중추가 되엇고
90이 넘어 죽었다.
이 사실이 모두 신도비에 실려있다.
한명회는 충후하고 근신하여 남과 다투는 일이 없엇고
조상들의 제사를 아주 정성스럽게 드렸다.
그러한 그의 지성에 하늘도 감동해서 생전에 끝없는
복을 누리게 했으며,
그의 자손들도 지금까지 번창하니
어찌 착한 일을 쌓아온 보답이 아니겠는가?
한명회의 묘소는 천안 외곽지역, 고속도로 옆에 있으며,
도굴을 염려하였는지, 묘소에 둘레석을 사각으로 쌓았는데
그 돌의 크기가 장비가 아니면 건드릴 수 없을 정도로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