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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무엇으로 결정할 것인가에 대해서 이번만큼 많이 고민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외면하다, 하나님을 유기遺棄하다, 하나님을 시해弑害하다,” 등을 놓고 원고를 마무리할 때까지 고민했습니다. 결국 내용을 전달하기에는 “하나님 시해弑害”가 가장 좋은 제목이라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제목에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탐욕 추구와 목적 달성을 위하여 하나님을 무수히 많은 수단과 방법들 가운데 하나 정도로 사용하는 한편 때로는 아예 죽여 버리는 범죄까지도 서슴지 않았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동시에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그들의 영혼육의 구원을 위하여 때로는 배신을 당하고, 때로는 유기遺棄를 당하며, 마침내 저와 여러분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모진 핍박과 함께 생명의 주인 되시는 창조주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죽임을 당하는 고난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이셨다.”는 의미 또한 함께 담겨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렇게 받아들이기 어려울 정도로 파렴치하고 기가 막힌 일들이 성민 이스라엘의 유구한 역사 속에서는 물론 저와 여러분이 속해 있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지극히 당연한 일인 것처럼 비일비재하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하와는 교활하고 기회주의적이면서도 지극히 사악한 사탄의 접근을 허락했습니다. 시작은 언제나 이렇습니다. 단호하게 잘라버려야 할 것을 잘라버리지 않을 때 시작됩니다. 하나님처럼 스스로 자신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교묘하고도 달콤한 유혹에 마음을 완전히 빼앗겼습니다. 동시에 창조주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어디까지나 창조주는 창조주이고, 피조물은 피조물입니다. 창조주에게는 창조주의 역할이, 피조물에게는 피조물의 역할이 맡겨져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시간이 흐른다 할지라도 절대로 바뀔 수 없습니다.
하와는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 열매는 무엇이든 먹어도 좋지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만큼은 (절대로) 먹지 말라. 그 나무 열매를 먹는 순간...반드시 죽는다.”(창2:16-17)라는 하나님의 경고도 역시 마찬가지로 잊어버렸습니다. 스스로 자신의 주인이 되겠다고 결정했습니다. 그렇게 되는 수밖에 달리 다른 도리가 없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뿐 아니라 다른 무엇이라 할지라도 마음을 완전히 빼앗겨 버리는 순간, 이제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가치와 의미를 부여받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소하게 여기던 일도 가장 중요한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생각하고 바라는 그대로 여겨지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거기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이제까지와는 완전히 다르게 보였습니다. 평소에 보던 바로 그 나무였지만, 생각이 바뀌자 완전히 다르게 보였습니다. 사탄의 말대로, 먹으면 하나님처럼 자신의 주인이 될 수도 있겠다는 착각에 완전히 매몰埋沒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마음에 겁과 두려움도 능히 이길 수 있었습니다. 마음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습니다. 자기도 모르는 순간, 손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향해서 저절로 다가가고 있었습니다. 열매 하나를 따서 덥석 입에 물었습니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아담에게도 먹어보라고 주었습니다. 결과는 생각하고 바라던 것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하나님처럼 자신의 주인이 되기는커녕 도무지 떨쳐버릴 수 없는 두려움에 완벽하게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되는 수밖에 달리 다른 도리가 없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하나일 때만 길이와 넓이와 깊이와 높이를 측량할 수 없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과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의δικαιοσύνη와 평강εἰρήνη과 희락χαρά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존재하는 의미와 가치와 목적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자신의 주인이 되어서 자신을 책임지려고 했었던 아담은 존재 의미와 가치와 목적이신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이라는 저주를 자초했습니다. 더할 나위 없이 풍요롭고, 윤택하며, 기름진 에덴동산으로부터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이때, 그들을 당신의 거룩한 모양과 형상으로 지으신 하나님의 마음은 과연 어땠을까요? 기뻤을까요? 즐거웠을까요? 시원했을까요? 차라리 잘 되었다고 생각하셨을까요? 가슴을 쥐어짜며 통곡해야할 정도로 아파하지는 않으셨을까요? 이후, 이어진 인간 역사 역시 하나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반역으로 점철되었습니다.
“어찌하여 화를 내느냐? 언짢아하는 까닭이 무엇이냐? 네가 잘하면 내가 받아들이지 않겠느냐? 네가 잘못하여서 죄가 숨어 너를 덮치려고 하니, 너는 죄를 다스려야 한다.”(창4:7)라는 증거대로, 수시로 찾아와서 강하게 유혹하는 죄를 다스리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굶주려 울부짖는 사자와 같이 삼킬 것이 발견되는 순간 조금도 망설이거나 지체하지 않고 즉시로 달려드는 죄를 멀리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완벽하게 매몰埋沒되었습니다. 명백한 죄를 저질러놓고도 뉘우치거나 회개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당당했습니다.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돌로 쳐 죽인 동생이 어디 있느냐고 묻는 하나님에게는 너무나 퉁명스럽게 “(죽은 그가 어디에 있는지)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제가 그를 돌보(기라도 해야 하)는 (책임을 가진) 사람입니까?”(창4:9b)라고 반문했습니다. 한 부모 밑에서 태어난 동생과 자신은 어떤 관계도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런 자신에게 굳이 동생이 어디 있느냐고 묻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따졌습니다. 대들었습니다. 그야말로 안하무인이었습니다. 오늘 부와 명예와 권세 등 물질적 가치가 하나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 속에서도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때, 하나님의 마음은 과연 어떠셨을까요?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입장이었다면 과연 어떤 마음일 것 같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의 죄가 통제 불능 상태가 되었음을 보셨다. 사람들은 눈을 떠서 잠들 때까지 온통 악한 것만 생각하고 악한 것만 계획했다.”(창6:5)라는 증거에 따르면, 하나님으로부터 떠난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죄로 채워졌습니다. 온갖 종류의 악으로 채워졌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심히 부패했습니다. 생각하는 것은 물론 계획하는 모든 것들이 하나같이 악했습니다. 죄는 일시적으로 나타났다가 시간의 흐름과 함께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꾸준히 지속적으로 이어졌습니다. 지극히 의지적으로 저질러졌습니다. 지극히 의도적으로 저질러졌습니다. 죄라는 사실을 누구나 다 알고 있을 정도로 지극히 보편적으로 저질러졌습니다. 온 세상에 널리 퍼져있었습니다. 죄, 부패腐敗, 포악暴惡, 흉악凶惡, 강도와 강간과 살인과 약탈 곧 강포强暴 등은 사람들 몸에 아주 익숙하게 배어 있던 행동 양식이었습니다. 죄와 부패와 강포가 시대의 두드러진 특징이었습니다. 죄와 부패와 강포를 더 이상 채워놓을 공간이 없어서 밖으로 흘러넘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충만תִּמָּלֵ֥א(티말레)했습니다. 사람들은 전적으로 타락했습니다.
아무리 다짐하고 또 다짐하고 또 다시 다짐한다고 할지라도,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힘과 능력과 지혜를 조금도 남기지 않고 모두 다 동원한 한다 할지라도, 이를 악물고 최선을 다한다 할지라도 지극히 작은 선善 하나 조차도 행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죄의 뿌리가 얼마나 깊이 박혀 있는지에 대해서는 하나님 외에는 누구도 능히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세상 어디에서도 구체적으로 확립된 법과 제도를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질서를 기대하는 것은 사치였습니다. 도덕과 윤리와 질서는 어디에서도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완벽한 무법천지였습니다.
“어리석은 자는...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펴 보사 지각이 있어 당신을 찾는 자가 있는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시14:1-3)라고 외칠 수밖에 없는 어두운 세상이었습니다. 죄를 회개하고 여호와께 돌아와야 한다는 의인의 간절한 외침은 허공을 울릴 뿐이었습니다. 철저하게 외면당했습니다. 무시당했습니다. 하나님을 완전히 떠나버린 세상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하나님의 공의를 재촉했습니다. “땅속의 깊은 샘들이 모두 터지고, 하늘의 창들이 모두 열리고, 사십 일 동안 밤낮으로 비가 땅 위에 쏟아지던 날”(창7:11b-12) 흔적도 남기지 못한 채 완전히 다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마음은 과연 어땠을까요? 사람들은 여전히 죄를 버리지 못했습니다. 자신이 주인이었습니다. 마음에 하나님을 모실 공간은 없었습니다. 도시를 건설했습니다. 도시는 대제국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하늘을 찌를 것 같은 높은 탑을 세웠습니다. “우리 스스로를 위하여 이름을 새기자.”라고 외쳤습니다.
스스로 자신의 주인이 되겠다는 외침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바로 그 외침이었습니다. “사방으로 흩어지지 말자.”라고 외쳤습니다. 더 이상 유리방황하지 않겠다는 의미였습니다. 가인의 바람이었습니다. 스스로 자초했던 하나님의 저주를 회개가 아니라 지극히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통해 극복해 보겠다는 교만이었습니다. 무지였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1:28b)라는 증거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고 땅에 충만하라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땅을 정복하라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바다와 하늘과 땅의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초대형 단일 국가의 출현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초대형 국가 운영을 위해서는 남의 간섭을 받지 않고 스스로 모든 것을 선택할 수 있는 개인의 권리가 존중되기는커녕 오히려 제한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초대형 국가가 결정한 내용이 선이라고 한다면 정말로 다행이겠지만, 악이라고 한다면 돌이키기 어려운 아니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최악의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저와 여러분은 이런 현상을 보고 있습니다.
초대형 권력을 가진 개인과 기업과 사회와 교회와 나라가 이익이라는 명제 앞에서 도덕과 윤리와 상식은 물론 지구촌의 안녕과 미래를 위한 것과는 거리가 너무나 먼 결정을 내릴 때가 한두 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치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세상을 최악으로 몰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이렇게 끊임없이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했습니다. 스스로 멸망을 자초했습니다. “나의 영광과 이집트와 광야에서 행한 나의 이적을 보고도...열 번씩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다.”(민14:22)라는 증거에 따르면, 성민 이스라엘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저와 여러분 역시 다르지 않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가 많은 연고가 아니다. (오히려)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었다.”(신7:7)라는 증거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기뻐חשק’(하솨크)하셨습니다. 그들을 열렬히 사랑하셨습니다. 그들을 뜨겁게 갈망하셨습니다. 집착한다는 오해를 받을 정도로 그들에게 푹 빠지셨습니다. 그들에게 매달리셨습니다. 그들을 거룩하게 구별해 주셨습니다. 당신 백성으로 선택해 주셨습니다. 당시나 지금이나 국력을 가리키는 숫자가 많았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열방이 두려워 떨 정도로 강한 국가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열방들에 비해 지극히 작고 약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라는 당신 명령에 조금도 망설이거나 지체하지 않고 즉시 순종한 아브라함 한 사람을 선택하셨습니다. 이미 여러 지역에서 세력을 단단하게 구축하고 나름 위세까지 떨치고 있었던 부족과 민족과 나라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고 초라했습니다. 그들은 또 하나님께서 값없이 부어주신 은혜를 힘입어 무려 430년 째 이어지고 있었던 바로의 압제로부터 자유를 얻었습니다.
하늘에 닿을 정도로 간절했던 그들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었습니다. 은혜 안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면 이보가 더 큰 사랑과 축복이 없다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가난한 그리스도인이라도 이미 엄청난 축복을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을 단 한 가지도 빼놓지 않고 완벽하게 다 소유했다고 할지라도 영원한 구원과 생명과 하나님 나라에 비교한다면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로 화려하고 웅장하고 거대하게 꾸민 것이라 할지라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또 약속의 땅을 향해서 전진할 수 있었습니다. 사십년을 하루 같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를 받았습니다. 보호를 받았습니다. 무려 40년 동안 단 하루도 빠짐없이 하늘로부터 내려온 만나를 먹었습니다. 가끔은 광야에서는 볼 수 없는 메추라기를 입에서 냄새가 날 때까지 먹을 수도 있었습니다. 은밀히 다가와서 후미를 공격하는 원수들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도 있었습니다. 눈 뜨고 보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였습니다. 성민 이스라엘의 입에서는 “오늘의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는 고백이 나와야할 것 같습니다.
당연히 그래야할 것 같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끊임없이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했습니다. 원망과 불평을 쏟아놓았습니다. 채워지지 않는 탐욕을 드러냈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랑스럽게 내놓을 것이 단 한 가지도 없는 주제에 은혜를 넘치도록 풍성하게 부어주시면 더 잘 믿고 더 잘 따를 것 같은데, 도대체 왜 그랬었는지 이해하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그들이 죄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죄 곧 나, 나 곧 죄”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로 연합할 수 없었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서 몸부림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구제불능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성민 이스라엘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이끌어주셨습니다. 아브라함과 맺은 약속을 그대로 지켜주셨습니다. 불세출의 지도자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성민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이끌어주었던 위대한 지도자 여호수아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성민 이스라엘의 구심점이 사라졌습니다. 동시에, 성민 이스라엘은 당연히 그렇게 해야만 되는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다시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오늘의 자신이 있도록 값없이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주신 유일한 왕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성민 이스라엘의 범죄,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 곧 평안의 상실, 성민 이스라엘의 간절한 부르짖음, 여호와 하나님의 긍휼과 구원, 평안 곧 안식을 누리는 성민 이스라엘”이라는 끔찍하고도 절망적인 다섯 가지 구조가 무려 일곱 번 씩이나 반복됩니다. 성민 이스라엘이 고난 중에 부르짖을 때마다 나타난 사사들은 일단의 성공을 거두지만, 회개와 언약의 갱신으로까지 이어가지는 못했습니다. 특히, 성민 이스라엘이 가지고 있던 가장 치명적인 문제는 외부로부터 교묘하게 들어온 적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완벽하게 잊어버린 집단적인 기억 상실이었습니다.
실제로 그들은 노예 생활하던 이집트로부터의 구원, 시내 산에서의 교훈, 40년 동안이나 이어진 광야에서의 인도, 난공불락처럼 여겨졌던 가나안 족속의 완벽한 토벌, 가나안 땅을 선물로 주신 일 등 여호와께서 자신들을 위해 행하신 일들을 잊었습니다. “그때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삿17:6)라고 반복되는 증거에 따르면, 그들은 누구의 통제도 받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왕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앉았습니다. 하나님 중심 사상을 인간 중심 사상으로 바꿔버렸습니다. 의도적이었습니다. 의지적이었습니다.
특히, 그들은 성민 이스라엘의 최후 사사요, 대제사장이면서, 선지자로서 백성들을 정치 종교적으로 이끌어주고 있었던 그Samuel를 찾았습니다.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삼상8:5)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들이 왕을 구하기 위해서 겉으로 내세운 이유는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선지자가 늙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선지자는 중차대한 사명을 감당하기에는 이미 너무 늙은 상태였습니다. 그의 지도를 바라는 백성들 입장에서는 얼마든지 불안할 수 있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선지자의 자녀들이 악하고 무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믿고 따를 수 없었습니다. 문제는 그들의 요구 이면에 숨겨진 의도입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안전과 축복과 성공적인 미래와 위대한 삶을 책임져줄 왕을 세워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는 눈에 보이는 사람 왕을 세워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들은 먹음직스럽고 보기에 아름다우며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웠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는 것과 똑같은 죄를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저질렀던 것입니다.
“그들이...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삼상8:7b)라는 증거에 따르면. 그들은 또 자신들을 위한 왕국 안에 하나님이 계시는 것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인간 실존의 모든 영역 가운데서 만유를 주관하시는 그리스도께서 ‘나의 것이다’라고 주장할 수 없는 영역은 단 한 곳도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그Abraham Kuyper의 지적대로,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곧 하나님의 소유)가 아닌 것은 단 한 가지도 없습니다. 다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그럼에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성민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자신들의 생각에서, 삶에서 완전히 지워버렸습니다.
아예 죽여 버렸습니다. 오늘의 자신들이 있도록 이끌어주신 여호와 하나님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시해弑害해 버렸습니다. 타락한 종교 장사치들 역시 자신들의 탐욕을 채워주고 있던 예루살렘 성전을 사수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시해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허물과 죄로 죽은 저와 여러분을 구하기 위해서 그들의 무지막지한 손에 당신을 내놓으셨습니다. 기꺼이 시해당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과연 어떨까요? 저와 여러분이 속한 교회는 과연 어떨까요? 그들과 다를까요? 기억하십시오. ① 단 한 분밖에 없는 유일한 왕이 계십니다.
온 우주와 인류를 창조셨습니다. 눈부실 정도로 아름답고 찬란한 자연은 왕이 어떤 분인지 보여줍니다. 왕의 통치는 다른 어떤 선善한 왕들보다도 당신 백성들을 위하십니다. 왕의 지혜는 광활한 우주보다도 크고 높고 깊고 넓습니다. 왕의 사랑은 가장 깊은 심해深海보다 더 깊고 또 깊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왕 안에 있을 때 비로소 가장 자기다울 수 있습니다. 충만할 수 있습니다.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행복할 수 있습니다. ② 왕은 사랑하는 당신 백성에게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백성은 왕이 되고 싶었습니다. 피조물이 창조주가 되고 싶었습니다. 반역이었습니다.
왕의 자리를 노리던 백성은 오히려 노예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왕과 함께 왕처럼 살 수 있었지만 종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원하는 탐욕대로 살려고 하다가 원하던 것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삶은 참혹한 고통으로 가득 채워졌습니다. 전혀 예상치 않았었던 죽음까지 당하게 되었습니다. 창조주 왕과의 단절, 이웃과의 단절, 자연과의 단절, 자기 자신과의 단절이라는 고통을 겪게 되었습니다. 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이 단절들은 오늘날 시급하게 해결해야할 사회 문제로 대두擡頭하고 있는 정서적인 문제들의 원인일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③ 왕은 당신을 버린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회복시키기로 작정하셨습니다. 한 사람을 거룩하게 구별하셨습니다. 한 부족으로 거룩하게 구별하셨습니다. 한 나라로 거룩하게 구별하셨습니다. 열방을 위한 구원의 통로로 거룩하게 구별하셨습니다. 그들에게 당신의 능력과 사랑을 베풀어주셨습니다. 온갖 종류의 위태로운 처지로부터 건져주셨습니다. 지키시고, 보호해 주셨습니다. 곁길로 갈 때마다 원래의 제 길로 돌아올 수 있도록 혼내고 징계했습니다. 왕은 사랑하는 백성의 실패와는 전혀 상관없이, 당신의 계획을 실천하셨습니다. ④ 마침내 세상에 오셨습니다.
창조주가 피조 세계 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에덴을 잃어버린 세계로 침투하셨습니다. 가난한 사람, 포로 된 사람, 눈먼 사람, 눌린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몸소 인간이 되셔서 고단한 인간의 삶을 돌봐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백성들은 왕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아주 죽여 버렸습니다. 시해弑害했습니다. 창세 때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반역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왕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이들의 죄를 모조리 끌어안으셨습니다. 죽음으로 값을 치르셨습니다. 영원한 죽음과 저주와 지옥 불구덩이를 완전히 깨뜨리고 부활하셨습니다.
당신을 따르는 하나님 나라 백성들을 새롭게 일으켜 세워주셨습니다. 원래의 자리였던 아버지 보좌 우편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온 세상을 완벽하게 되찾기 위하여 다시 오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⑤ 왕은 오늘도 여전히 쉬지 않고 일하고 계십니다. 스토커라 불릴 정도로 당신 백성을 지독하게도 사랑하시는 왕, 당신 백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기꺼이 세상에 나타나신 왕, 기꺼이 당신 백성에게 시해 당하신 왕, 반드시 다시 오실 왕께서 지금 이 순간에도 쉬지 않고 일하고 계십니다. 이미 세상에 임하였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당신 나라 완성을 위하여 일하고 계십니다.
저와 여러분을 당신의 손과 발 삼아서 일하고 계십니다. 기억하십시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속해 있는 교회 안에서 이 왕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습니다. 강한 왕, 강한 군대, 화려한 궁 등 세속에 마음을 완전히 빼앗겨 버린 성도는 왕을 여러 가지 수단들 가운데 하나 정도로 여기고 있습니다. 자신 안에 충만하게 임하여 계신 왕, 자신의 삶을 아름답게 가꿔주시는 왕, 상황과는 전혀 상관없이 영원한 구원과 생명은 물론 참된 기쁨과 즐거움과 만족과 평안과 안식과 쉼으로 충만한 하나님 나라를 누리게 하시는 왕을 보여주는 성도는 눈을 씻고도 찾기 어렵습니다.
안타깝게도 “신은 죽었다! 신은 죽어 있다! 우리가 그를 죽였다!...세상에서 가장 거룩하고 가장 강력했던 존재가 우리의 칼날에 피를 흘리며 죽었다. 누가 우리에게서 이 피를 닦아 줄 것인가? 어떤 물로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할 수 있을까? 우리를 위해 어떤 속죄의 제사와 어떤 거룩한 제전祭典을 만들어 내야 할까? 그 일의 심각성은 우리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것 아닌가?...이보다 큰일은 결코 없었다...지금 존재하는...교회들은 하나님의 무덤과 묘비 외에 무엇이 될 것인가?”라는 그Friedrich Nietzsche의 주장은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작금의 현실이 되어 있습니다.
장차 이 땅에 남아 존재하게 될 교회들이 하나님의 무덤과 묘비 외에는 다른 어떤 존재 이유도 가질 수 없다는 지적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끔찍하고 참담하기까지 합니다. 타락한 세상을 영원한 구원과 생명과 하나님 나라로 안내하기 위해 거룩하게 구별된 교회가 빛과 소금이 되지는 못할망정 어쩌다가 이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을까요? “교회를 볼 때 하나님은 없다!”라고 비웃고 조롱하는 세상을 만들었을까요? 이유는 하나 자신이 왕 곧 하나님인 줄 착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왕의 자리에 앉아있을 때가 많았었음을 솔질하게 고백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왕을 자신의 안전과 축복과 성공적인 미래와 위대한 삶을 위한 여러 가지 수단들 가운데 하나 정도로 여기고 부리는 죄를 저질렀음을 솔직하게 인정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탐욕을 지켜내기 위해서 왕을 시해하는 현장에 자신도 있었다고 인정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실권實權을 온전히 인정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무덤과 묘비가 아니라 오히려 인류 구원을 위해 기꺼이 시해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 높이고 자랑하는,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영원한 구원과 생명과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는 복된 교회로 존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