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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중국·일본과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 10개국)이 조성하는 1200억달러 규모의 '아시아공동펀드' 가운데, 우리나라가 16%인 192억달러를 분담하기로 했다. 아시아공동펀드는 참여국들이 외환부족 사태에 빠질 때 긴급 자금으로 가져다 쓸 수 있는 일종의 외환비상금이다(중략). 3국 장관들은 연내에 펀드를 출범시키고 내년부터 외환위기가 닥칠 경우 참여국이 펀드를 가져다 쓸 수 있도록 한다는 데 합의했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는 미국·중국·일본 등과 각각 300억달러씩의 통화스와프(맞교환)를 맺은 것과 별도로 외환수급이 불안할 때 활용할 수 있는 외화 유동성이 늘어나게 됐다(기사 중 일부 발췌).
다시 풀어 읽는 경제기사
전 세계적인 금융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많은 국가들이 정책 공조를 통한 경제협력을 꾀하고 있습니다. 전세계 많은 국가들이 정책 공조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죠. 그래서 아시아, 유럽 등 각 권역별 정책 공조도 활발합니다. 아무래도 참여국 숫자가 적으면 정책 공조가 조금 더 쉽게 일어날 수 있겠지요.
동아시아 지역에서도 두 번의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역내(域內) 금융체계 안정을 위한 협력의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되어 왔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지난 1998년 외환위기 극복 방안 중 하나로 제시된 치앙마이 이니셔티브(CMI·Chiang Mai Initiative)입니다. 얼마 전 CMI가 한 단계 더 성숙됐지요. CMI 차원에서 아시아 공동펀드를 출범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위 기사에서도 이 사실을 다루고 있군요. 그럼 CMI와 아시아 공동펀드는 무엇이며, 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지 살펴보도록 하지요.
◆ 치앙마이 이니셔티브와 아시아공동펀드
먼저 치앙마이 이니셔티브라는 용어가 쉽게 이해되지 않는데요. 치앙마이는 태국의 한 도시 이름이고, 이니셔티브는 '발의' 또는 '제안'을 의미합니다. 이를 다시 풀어 보면 '치앙마이에서 제안된 무엇'쯤 되겠지요.
1999년 태국의 치앙마이에서 열린 아세안 10개국(ASEAN: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필리핀,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미얀마, 브루나이)과 한·중·일 3국의 재무장관 회의에서 발효된 협정을 의미합니다. CMI는 동아시아 금융시장 안정화와 역내 외환위기 예방을 목적으로 하는 협정이지요.
CMI는 기본적으로 달러 유동성 부족으로 금융 위기가 발생했을 때, 역내 국가들이 서로 자금 지원을 해서 위기를 방지하자는 의도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위기가 발생하면 회원국 중앙은행이 나서서 자국 통화와 국제 통화를 일정 시점에서 결정된 환율로 빌리고, 계약기간이 지나면 다시 상환하는 방식입니다. 이 방식은 기본적으로 양자 간의 협정에 따른 것이지요. 그런데 금융위기가 발생하면 어떻게 될까요. 각국이 제 앞가림하기 바쁠 수 있기 때문에, 협정을 맺었다고 해도 "우리도 달러가 부족합니다. 못 빌려드려 죄송하네요" 하기 쉽지 않을까요. 기존의 CMI는 이와 같은 실효성의 한계가 있었습니다.
지난 5월 합의된 아시아 공동펀드는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것입니다. 쉽게 말해 돈을 한곳에 모아 놓고 위기 때 필요하면 꺼내 쓸 수 있는 식으로 바꾼 것이죠. 기존에는 다른 나라 중앙은행에 돈을 빌려 달라고 해야 했던 것에 비하면 큰 진전이지요. 따라서 아시아공동펀드 또는 CMI 다자화기금 조성은 실질적으로 동아시아 역내 금융시장의 안정에 기여할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 CMI의 실효성
앞에서 말했듯이 초기 양자 간 협정에 기반을 둔 CMI는 외환위기 발생을 방지한다는 목표를 달성하기에는 한계가 있었죠. 하지만 아시아 공동펀드의 설립은 회원국들이 CMI를 실질적인 동아시아 금융협력 기구로 발전시키려는 노력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게 바뀐 걸까요. 양자 간 통화 스와프 협정의 경우, 위기 발생 국가는 양자간 협정을 맺은 회원국에 일일이 유동성 자금지원 여부를 묻는 형식이었죠. 하지만 이를 위기 발생시 자금 지원국들은 이틀 내로 신속히 회의를 소집하고 2주일 이내에 지원여부를 결정하여 유동성(자금)을 지원하는 체계로 바꾼 겁니다.
자금지원 규모도 초기의 395억달러에서 1200억달러까지 확대했는데요. 이는 위기 발생 확률이 상대적으로 낮은 한국, 중국, 일본, 그리고 싱가포르를 제외한 나머지 9개국 외환보유 총액의 50%가 넘는 규모입니다. 또한 보다 결속력 있는 공동기금으로 전환하는 데 쟁점이 되어 왔던 분담금 배분에 있어서도 한국 16%, 중국과 일본이 각각 32%, 아세안이 20%씩 분담하기로 합의했습니다.
그리고 기존에는 국제통화기금(IMF)의 동의 없이 이용 가능한 자금의 한도가 전체 펀드액 중 10%였는데, 이를 20%로 늘렸습니다. 이 한도를 초과하여 추가로 지원받기 위해서는 IMF와 연계해야 한다는 IMF 자금지원조건 때문에 CMI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있었는데, 이를 어느 정도 해소한 겁니다. 또 IMF는 이렇게 자금을 받은 나라에 구조조정이나 제도 개선 등을 요구하기 때문에, 금융위기 방지라는 본래의 CMI 목적 달성의 걸림돌로 지적되곤 했지요.
따라서 아시아 공동펀드가 IMF로부터 어느 정도 독립적인 금융지원 체제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현행 80%인 IMF 연계 자금공여 비중을 점차 축소하는 방향으로 갈 수 있겠지요. 이렇게 되면 금융위기에 처한 경제의 사후 회복에 치중하는 IMF의 금융지원과는 달리, CMI는 위기의 사전 예방을 목표로 신속하고 충분한 자금지원이 가능하겠지요.
◆ 지역 통화협력체로 발전 가능성
아시아 공동펀드가 궁극적으로 역내 통화금융 협력을 위한 기구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아시아판 IMF 격인 아시아 통화기금(AMF·Asian Monetary Fund)으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논의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역내 금융위기 발생 징후를 재빠르게 포착할 수 있는 공동 감시체계, 자금 수혜국의 도덕적 해이를 방지하고 기금 운영의 실질적인 감독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상설기구가 필요하겠지요. 이렇게 된다면 아시아 공동펀드는 역내 다자 간 출자 형식의 국제기구로서 아시아 통화기금의 면모를 갖출 수 있게 될 겁니다.
최근에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동아시아 통화(通貨) 통합이나 역내 기축통화 도입에 대한 논의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현재 일본이나 중국은 자국통화의 국제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으나, 아직까지는 아시아 특정국가의 개별 통화가 역내 기축통화로서의 지위를 확보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KIEP·조선일보 공동기획기사
문의는 (02)3460-1156KIEP 연구조정실
쉽게 배우는 경제 tip
기축통화란?
기축통화(基軸通貨)란 국제상거래나 금융거래의 결제, 그리고 대외준비자산으로 국제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통화를 말합니다. 한 나라의 통화가 기축통화가 되기 위해서는 세계 경제를 이끌 수 있는 경제규모를 갖추어야 하고, 환(換)위험이나 인플레이션 위험이 적어 통화가치가 어느 정도 안정적으로 유지되어야 하지요. 또 국제거래 통화로서 원활한 수요와 공급이 이뤄져야 하니까 통화의 수량도 풍부해야 하겠고, 해당 국가는 발전된 국제금융시장도 갖추어야 합니다.
최초의 기축통화는 영국의 파운드화였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달러화가 기축통화의 위치를 지켜왔습니다. 위에서 말한 기축통화의 조건을 미국 경제와 미국 달러화가 만족시켰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미국 달러화는 1980년대 이후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가 누적되고 달러화 가치의 안정성이 낮아지면서 기축통화로서의 역할이 약화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부분적으로 유로화, 파운드화, 엔화 등이 국제통화 결제 기능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미국 달러화를 대체할 새로운 기축통화에 대한 논의가 다시 시작되고 있습니다. IMF가 관리하는 초(超)국가적 합성통화인 특별인출권(SDR: Special Drawing Rights)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제도를 창설한다거나, 유로화와 같은 지역 공동통화 체제의 확대 등이 대안으로 제시되기도 합니다.
조선일보 2009.7.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