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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랑의 향기마을 원문보기 글쓴이: 촌장
용서와 사랑
경기도 의왕시 '라자로 마을'에서 성령 세마니 지도를 할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때 한국 나사업가연합회에서 전국의 한센 가족들의 신앙을 쇄신시키기 위해 한 달에 약 백 명씩 성령 세미나를 실시했는데, 1983년도에 제가 일년 동안 지도 신부로 봉사했습니다. 그때 여러 가지 체험을 많이 했지만 잊을수 없는 부인이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주제로 첫 강론을 끝내고 그룹 대화를 할 때의 일이었습니다. 제가 어느 팀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때 대화가 잘 진행되다가 어떤 자매 차례가 되었을 때 그만 그 대화가 멈춰 버렸습니다. 그 자매는 고개를 숙이고 아주 불쾌한 얼굴로 앉아 있었는데, 모습이 왠지 불안했습니다. 인상이 대단히 험악했기에 뭔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습니다.
대화가 막히자 자매들이 웅성거렸습니다. 다음 사람이 계속하라고 서로
눈치들을 했지만, 그러나 그다음 여자도 인상을 쓰며 고개를 숙인 여자가 먼저 해야 자기도 하겠다는 뜻을 눈으로 말했습니다. 그러자 분위기가 참으로 무겁고 거북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고개를 숙인 자매도 그 거북한 분위기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였습니다.
대화를 끊었던 자매가 벌떡 일어나서더니 자기는 오기 싫은데 억지로 왔다고 하면서, 자기는 하느님께 부터 받은 은혜는 없고 오히려 하느님께 속아서 신세 망친 것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갑자기 긴장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 자매는 얼굴을 보니까 너무 굳어 있어서 잘못 말했다가는 뭔 망신을 당할지도 몰랐습니다.
우리는 갑자기 어안이 벙벙해 가지고 눈만 말똥말똥 뜨고 쳐다만 보고 있으려니까 드디어 그 자매가 자기 인생 고백을 터뜨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일종의고행성사와 같은 진솔하고도 뼈아픈 고백이었습니다.
본래 그 자매는 건강한 여자였습니다. 그런데 중매쟁이한테 속아서 결혼을 했고, 그가 신랑을 따라 들어간 곳이 한센 가족들의 마을인 정착촌이었습니다. 이를테면 한센 병 환우들의 집단 마을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남편은 환자였습니다. 아주 무서웠습니다. 얼른 나가고 싶었지만 쉽게나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때 신랑이 사람 살리는 셈 치고 같이 살자고 붙들고 사정을 합니다.
처음엔 아무 생각이 없었지만 그쪽의 사정이 너무도 간절하니까 마음을 고쳐먹고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러나 남자는 불안했습니다. 언제고 살기 싫
으면 여자가 도망치면 그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여자를 천주교 신자로 세례를 받게 한 뒤에 혼인성사로 묶었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당신은 이제 어딜 가도 다시 재혼은 하지 못한다고.
그리고 그때부터 남자는 부인에게 행패를 부립니다. 건듯하면 술 먹고 들어와서 때리고 주정을 합니다. 그러니까 여자도 이판사판이 되어 "너 죽고나 죽자." 라는 식으로 가정은 지옥처럼 되어 버립니다. 늘 맞고 싸워야 하니까 여자는 죽고 싶은 생각을 갖게 되었고 남편도 죽이고 싶은 감정을 갖게 됩니다. 그러니까 삶이 엉망이 됩니다.
그때 여자가 자기 말을 하면서 너무도 분하고 억울하니까 크게 울었습니
다. 그때 그 여자만 운 것이 아닙니다. 듣고 있던 다른 자매들도 모두 울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들 신세도 어떤 의미에서 그와 비슷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한참을 울고불고 하면서 자기 설움을 쏟아 내던 그 자매가 얼마 후에 그런 말을 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나도 나쁜 년입니다."
우리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라서 그냥 쳐다만 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다시 말했습니다. "남편에게 더 잘해 줄 수도 있었는데 나도 똑같이 나빴습니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여자 안에 있던 온갖 쓰레기들을 다 쏟아 내고 나니 그만 성령의 은혜가 몽땅 들어갔던 것입니다. 은혜가 들어가니까 그 여자가 자신의 오물을 다 쏟아 냈을 테지만 어쨌거나 그 자매는 거기서 은혜를 많이받았습니다.
성령 안수식 때의 일입니다. 이 자매가 안수를 받으면서 쓰러지더니 근 한 시간 동안이나 혼절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깨어났는데 그 얼굴이 얼마나 환했는지 모릅니다. 미움과 분노 그리고 악이 다 빠져나가자 그 얼굴이 그렇게 깨끗하고 순수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여자는 그때 은혜를 혼자 다 받은 것 같았습니다.
세미나가 끝나자 이 자매는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그토록 미워했던 남편
에게 잘못을 빌고 은혜를 나누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정신없이 달려서 집에
도착해 보니 남편이 없었습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니 밤 12시가 넘어서 술이
잔뜩 취해 가지고 들어오더랍니다. 그리고 들어오는 모습이 아주 가관이었습니다.
남편이 발로 방문을 세게 차고 들어오면서 한다는 말이 "네 년이 세미나를 받았다는데 어디 얼마나 받았는지 좀 보자." 라는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아내가 오랜만에 집에 돌아왔는데 그게 남편이 할 말입니까?
부인은 남편을 바라보며 불쌍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저 남편을 위해서 여태껏 기도를 안 했는지 반성이 되었으며, 그래서 달려가 남편을 껴안았습니다. 보통 때 같으면 서로 붙들고 "이놈" "저년" 하면서 싸웠을 텐데 아내가 따뜻하게 껴안자 남편이 아주 어색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혼자 주정하다가 잠을 잤는데 이튿날의 일입니다.
부인이 해장국을 맛있게 끓여서는 남편에게 대접하면서 "당신도 이제 나
이가 있는데 그렇게 술을 마셔도 건강을 유지할 수 있어요?" 하며 걱정으 하자 남편이 고개를 들지 못하고 미안해하더랍니다.
묘한 일이었습니다. 다른 때 같으면 밥상을 엎어 버리고 당장 나갔을 텐데 남편이 너무 미안해서 그런지 밥을 못 먹고 그냥 나가더랍니다. 그리고 그날 밤에도 술에 취해서 들어왔는데 술이 취할 때마다 계속 따뜻하게 대해 주자 남편이 한 달이 못 가서 술을 끊더랍니다. 이십 년 동안이나 끊으라고 싸워도 요지부동이었던 남편이 술이 끊어지더랍니다.
다음 날 세미나 때는 부부가 함께 와서 받았으며 그 후로는 성가정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가 그랬습니다. 만일에 그 자매가 자기 안에 담긴 그 쓰레기 같은 미움과 분노를 밖으로 끄집어내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그는 여전히 지옥 같은 세상을 불평하고 원망하면서 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자기를 열어서 끄집어내면 새 바람이 들어갑니다. 성경에서 바람은 '영‘입니다. 새 영이 들어갑니다. 성령이 들어가니까 마귀가 발작을 일으켜 놓고 도망갑니다. "마음을 비워라." 라는 말이 있는데 마음을 비우면 새 바람이 들어가듯이 자신을 열어서 비우면 새 영이 들어갑니다. 재미있는 얘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제가 본래 신학교에 들어가서 신부가 되는 것이 어렸을 때부터 꿈이었습
니다. 그러나 집안 형편이 어려워 먼저 집안의 빚을 갚아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사범학교에 들어가 선생이 되고자 했습니다. 그때 당시에는 선생이 되는것이 가장 빠른 취직의 길이었습니다. 깨 제가 다니던 대전 사범학교 후문 곁에는 빵집이 있었는데 값도 싸고 맛도 있어서 학생들이 들끓었습니다.
그 집 아저씨는 이북에서 피난 온 사람으로 아주 친절하게 잘해 주었으나, 그러나 외상만은 절대로 사절이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사람이 그랬습니다. 한 번 얻어먹으면 다음에는 이쪽에서 한 턱 내야 하는데 저는 돈이 없기 때문에 사람 노릇을 못했습니다. 그때마다 외상을 달라고 하지만 아저씨는 늘 같은 대답만 했습니다.
"안 된다니까, 그래!"
아무리 사정해도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아저씨의 별명이 '안 된다니까, 그래!' 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 깍쟁이 아저씨가 외상을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날은 친구들에게 체면을 살리면서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러나 외상이란 것이 그랬습니다. 먹을 때는 한없이 좋고 신나게 되지만 외상값을 갚을 때가 되면 보통 힘들고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때 빵집 아저씨는 외상값을 받을 때가 되면 아저씨는 학교 정문을 지키고 아주머니는 뒷문을 지킵니다. 그러면 돈을 갚지 못하는 저는 학교를 문으로 다니지 못하고 철조망 밑으로 기어 다녀야 했습니다. 돈이 없으니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었습니다. 우연히 신탄진에 계신 할아버지 댁에 놀러 갔었는데 거기서 돈을 훔치게 되었습니다.
저의 집은 대전이었고 신탄진에서는 할아버지께서 작은 철물점을 하셨는데 마침 장날이어서 저는 할아버지 돈 통에서 돈을 조금씩 훔칠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훔친 돈을 빵집에 가지고 가서 외상을 갚았습니다. 갚고 나서 외상을 또 먹고 그리고 다시 할아버지 댁에 가서 돈을 훔쳐서 갚곤 하다가 졸업할 때쯤 되어서는 외상을 몽땅 먹고는 그만 떼어먹어 버렸습니다.
그때는 그랬습니다. 외상 먹느라고 자존심 많이 굽혔던 것을 생각하면 그까짓 한 번 떼어먹은 것이 죄스럽게 여겨지지도 않았습니다. 제가 사범학교 졸업 후에 충남 당진군에 있는 '대난지도' 라는 섬 마을 선생으로 발령을 받아 갔는데, 빵집 주인이 거기가 어딘 줄 알고 따라오겠습니까? 그리고 저는 까맣게 잊을 수가 있었습니다.
제가 섬 마을 선생을 지원한 것은 생활비를 절약하기 위해서입니다. 어영부영 술 먹고 어쩌고 하면 빚을 갚을 수가 없습니다. 저의 집은 그때 많은 빚을 지고 있었습니다. 동생이 큰 병을 가지고 있었는데 결국 낫지도 못하면서 빚만 몽땅 졌던 것입니다. 그때는 한 달 이자가 1할 5부였습니다. 기억이나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때는 참으로 배가 고팠습니다.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쌀 한 말을 가지고 자취를 하는데 아까운 생각에 먹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섬에는 제사다, 생신이다, 또는 모를 심는다, 벼를 수확한다 해서 선생을 초대하는 자리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때 가서 먹을 수 있는 데까지 먹습니다. 목구멍이 찰 때까지 먹습니다. 그리고 학교에 돌아와서는 또 굶을 수 있는 데 까지 굶는 것입니다.
제가 1962년도에 선생이 되었는데, 그 해 6월에 화폐 개혁이 있었습니다. 그때 한 달 제 용돈이 단 돈 백 원이었습니다. 이해가 안 가실 것입니다. 선생이 오fot동안 시계도 못 차다가 1969년도에 가서야 아버지 중고 시계를 월부로 샀습니다. 지금은 유치원 아이들도 시계를 차고 있지만 그때는 좌우간 힘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재미도 있었습니다. 아이들을 가르치고 함께 논다는 것은 정말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그때 열심히 가르쳤으며 공부들도 다 잘했습니다. 그리고 섬에서 1965년도에 나왔는데 그때 마침 섬 마을 선생에 대한 특례가 생겨서 저는 운 좋게 대전 시내에 있는 학교로 발령을 받을 수 있었는데, 그 학교가 바로 사범학교 후문 근처에 있는 서대전 초등학교였습니다.
서대전 초등학교는 마침 저의 모교였습니다. 재수가 참으로 좋았습니다.
그때 2학년을 맡다가 12월에 군대에 갔습니다. 그런데 4월인가, 가정 방문
때의 일입니다. 제가 맡은 반의 여자 아이 하나가 아주 붙임성이 있었습니다. 쉬는 시간만 되면 달려와서 선생님 손을 붙잡고 애교를 부립니다. 그런데 바로 그 아이의 집을 방문하는 날이었습니다.
저는 일부러 다른 집부터 방문을 하고 그 아이 집을 맨 나중으로 잡았습니다. 이를테면 귀여워하는 아이니까 그 집을 아꼈던 것입니다. 드디어 다른 학생들의 방문이 끝나고 그 집 차례가 되자 아이가 뛰어가더니" 아버지!" 하면서 불렀습니다. 그러자 기다렸던 그 아이 부모가 방에서 얼른 나와 마루 밑으로 내려오더니만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했습니다.
저도 반갑게 인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 아버지 얼굴을 봤을 때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 아버지는 바로 '안 된다니까, 그래!' 그 빵집 아저씨였습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정말 죄를 짓고는 못삽니다. 어디 가서 만나도 꼭 만납니다. 그 아저씨도 저를 보더니 아내 알아봤습니다.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때 제가 그랬습니다.
"아저씨, 빵 값 못 가져왔습니다. "솔직하게 말했습니다. 그때도 사실, 드릴 돈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아저씨도 그랬습니다. "선생님, 저도 이제 빵 장사 안 합니다."
제가 이 얘기를 1993년도, 잡지 『신동아 』 9월호에 수필로 썼습니다. 그때는 제가 썼던 『낭만에 초쳐먹는 소리』라는 책이 전국적으로 인기를 끌어서 신문과 잡지, 심지어는 방송이나 텔레비젼에 이르기까지 등장하게 되자 『신동아 』에서 원고를 부탁했던 것인데 저는 별로 쓸 것이 없어서 그 내용을 썼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나가자 많은 사람한테서 전화와 편지를 받았습니다. 주부들과 학교 선생님, 그리고 목사님과 스님들한테서도 칭찬이나 칭찬을 들었습니다.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감동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도둑질을 하고 빵 값을 떼어먹은 얘기인데도 그분들은 나쁘게 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제 영혼이 맑고 깨끗하다는 것입니다.
한 아주머니는 전화에 대고 울었습니다. 왜 그러느냐고 했더니 저보고 무조건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상했습니다. 저에게 감사할 것이 없었습니다. 저는 그저 부끄러운 과거를 밝혔을 뿐입니다. 그러자 그 부인이 말했습니다. 자기에게 아이가 셋이 있는데, 그중에 한 아이가 가게에서 자꾸 돈을 훔친답니다. 얼마나 밉고 속상하지 모릅니다.
용서하고 사랑하려 해도 뒤돌아서면 또 밉고 속상했습니다. 그런데 신부님도 어렸을 때 돈을 훔치셨다는 말씀을 듣고는 자기 아들이 저절로 용서가 되더랍니다. 그러면서 그 부인이 말하기를 자기는 아들을 이해 할 줄 모르는 나쁜 엄마였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런 뜻으로 제 얘기를 썼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그 내용을 보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감추는 사람한테 우리도 문을 잠그고 감추게 됩니다. 잘못 열었다간 무슨 망신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또 무슨 약점이 잡힐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쪽에서 열면 상대 쪽도 열리게 됩니다. 그때의 만남은 축복입니다. 열려진 문에 만남의 은혜가 있습니다. 만남의 두 번째 비결은 자신을 열고 끄집어내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여러분이 행복하기를 원하십니다. 진정으로 원하십니다. 절대로 가난하다고 불행한 것이 아니요 병들었다 해서 불행한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지혜만 가지고 있다면 누구나 멋진 세상을 살 수 ㅇ있습니다. 따라서 내려갑시다. 자존심 상해도 내려가고 또 부끄러워도 자신을 활짝 열도록 합시다. 진정한 만남의 기쁨이 거기에 있으며, 새로운 세계가 거기에 있습니다. 아멘.
♣ 은총 피정 中에서 / 소록도 성당 강길웅 요한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