追 慕 의 글
오늘 2010년(경인년) 4월18일
우리 유가족, 일가친척, 그리고 이웃 친지들이 이곳 蓮花山 기슭에 모인 뜻은?
지난 36년간 일제의 강점하에 우리 민족은 뼈아픈 受難의 歷史를 겪어 왔습니다.
일본은 조선인의 창씨 개명과 함께 세계 제2차대전을 일으켜,
우리 한국의 많은 젊은이들이 일본군의 전쟁터로 또는 노무자로 강제 징집당하여
갖은 고초와 목숨을 잃었으며, 젊은 여성들은 취업을 시켜준다는 미명하게 군위안부로
전쟁터에 끌려나가는등.. 갖은 만행을 당하였습니다.
당시 故人은 일제강정기에 태어나 강화초등학교 6년수석 졸업과 함께
학교장 추천으로 일본고관 자녀들이 다니는 서울 용산중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총독부에서 근무하던 중 일본 군관학교에 들어가 군 연구기관에서
근무하다가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으나,
일본에 강제 징집당하였던 한국의 많은 근로자들이 해방의 기쁨도 채 가시기전
꿈에도 그리던 고향 땅! 그 땅! 한국을 바라보며,,
끝내는 현해탄을 건너지 못하고,
태평양 한가운데 우끼시마호 선상에서
恨... 恨을 품은채,
일본의 만행에 수많은 한국동포들이 수장을 당해 지금까지 65년간
그 많은 영혼들이 구천을 헤매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깝고 슬픈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천지신명이시여!
이들 영혼을 부디 굽어 살펴 주시옵소서!
8.15 해방이 되어 1주일 후면 한국으로 귀향한다는 엽서를 받아들고
그렇게도 좋아하시던 조모님께서는 늘 장독대에
정한수를 떠 놓으시고 하루도 빠짐없이 조석으로 천지신명께
비나이다. 비나이다~! 천지신명이시여!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리시던 조모님의 자식 사랑을
저는 늘 곁에서 지켜보았습니다.
우리 시언(時彦)이....우리시언이....언제 돌아오나...._()_
우리시언이 어젯밤 꿈에는 활짝웃는 너의 모습을 보고 한없이 울었단다.
시언아...시언아!
언제나 일을 하시다가도 되뇌이시는 할머니 생각을 하면 저는 지금도 목이 메입니다.
얼마나 아드님이 보고 싶으셨을까...? 한이 되셨을까...?
저는 이글을 쓰면서 할머님 생각에 한없이... 한참을.... 눈물을 쏟았습니다.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끝내 돌아오지 못하는
아드님,, 자식을 지극정성으로 기다리시던 할머님...!
인자하시고 상냥하시던 그 분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돌무리 배나무집" 하면 강화군에서는 이곳을 지나가는 나그네와 거지까지도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하였다는데... 저의 집안의 큰 자랑인것 같습니다.
조부님께서 한 술의 밥이라도 나누어 먹어야 한다는 철학이 있으셔,
수많은 객이 다녀가는데, 조모님께서는 군말없이 정성을 다하여 손님으로 맞이함이
지극하여 나라에서 내리는 孝婦賞을 받으시기도 하였습니다.
지난 3월 26일 우리 해군 천안호가 백령도 앞바다에서
침몰당하여 46명의 젋은 생명들이 물속에 수장되었습니다,
그 유가족이.... 얼마나 비통하겠습니까..?
저는 그 때
65년전 일본놈들이 우리 애국동포와 수많은 우수인재들을 군함에 실은채
일본근해에서 폭파수장시킨 왜놈들을 또 저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시신도 찾지 못한 5천여명의 영혼이 지금도 구천을 헤매고 있을것을 생각하면
너무나 긴세월,,,
우리 후손이 무관심, 무지하였던 죄책감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이제 늦게나마
여기 ,
어르신의 추모 위령비를 세워 고귀한 영령을 모시고자 하오니,
구천을 떠 도시던 영혼이시여!
당신이 태어나신 이곳 연화산 기슭...안식처에 ...
평안히.... 고히... 잠드소서,,! _()_
감사합니다.
2010년 4월 18일 봉연 謹書
첫댓글 이 글을 읽으니 가슴은 답답하고.....안타까운 수난의 역사 그리고 한 젊은이의 한많은 영혼이 가여워집니다. 저도 명복을 빌어봅니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