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포항시 상원동 441-4번지 (사장:권택진) 냉면, 숯불갈비 전통으로 약 40년간 한자리에서 한결같은 맛을 이어온 냉면 맛은 사계절 언제 먹어도 일품. 냉면은 비빔냉면과 물냉면 두가지가 있다. 비빔냉면은 양념이 중요한 만큼 좋은 깨를 구입하여 직접 참기름을 짜서 쓰고, 물냉면 역시 육수와 면이 중요한 만큼 육수는 소뼈와 고기삶은 국물에 한약재를 첨가, 장시간 우려낸 깔끔한 국물과 면발 역시 메밀의 독특한 맛을 살리기 위해 직접 배분하여 쓴다.숯불구이(1인분, 150g) 10,000원 냉면(1인분) 4,500원포항 육거리 한일은행 옆. 주차장 완비(054)247-2651
한일냉면갈비식당
경북 포항시 상원동 442-2번지(사장:최명애 054-247-5739)포항에서 냉면 잘한다는 집을 꼽으라면 로타리냉면(40년 전통)과 한일냉면(30년 전통)이다.로타리냉면은 비빔냉면이. 한일냉면은 물냉면(평양식, 함흥식 5000원)이 더 맛있다고들 한다.
1968년의 포항의 음식점
당시는 '승리식당'이 포항에서 가장 크고 알아주는 식당이었다. 요즘의 식당들은 음식만을 제공하지만 그때 그 시절에는 요정이나 방석집 따위의 그다지 건전하지 않은 업종의 요식업은 물론 아니지만 분위기만큼은 요릿집 다름아니었다. 저녁이면 술손님을 접대하는 아가씨들을 열댓명씩 데리고 장사들을 했다. 포항제철 기술자로 내한한 일본인들을 위한 전략의 일환임이 분명했다. 당시 일본인 관광객이나 주재원들의 한국 접대여성들을 현지처로 두었다고 지탄의 대상이 되던 때이기도 했다.부친께서 운영하셨던 육거리식당에도 누나들 열 몇명씩 한가족들처럼 한집에서 숙식을 하며 지냈던 것이다.
1970년 포항역
1970년 그때 포항의 최고 중심가는 육거리에서 시민극장, 포항우체국 사이의 길이었다. 서울로 말하면 명동, 대구로 치면 동성로 거리 쯤 될까. 지금은 포항의 중심가가 오거리로 이동했다가 요즘은 또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고 들었다.
1974년 오거리 시민탑
요즘 사람들이 혹시 이런 얘길 들으면 놀랄지도 모르겠지만, 예컨대 '승리식당' 경우, 메뉴의 종목이 한식은 물론, 일식에다 양식까지도 가능했다는 사실이다. 당시 큰 식당들은 중국음식만 빼고는 뭐든 만들어 내놓을 수 있는 조리능력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소위 대중식사라는것이 메뉴의 가짓수에 국한받지않는 범 국가적인 차원으로 어떤 음식이든 만들어내고 있었다. 주방 요리사들의 전지전능한 요리솜씨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하기사 양식이라고는 하지만 , 돈까스, 비후까스, 함박스텍 같은 소위 일본사람들이 자기네 입맛에 맞게 만들어낸 일본식 양식을 말한다.
1968년 당시 포항시내에는 영업용 택시도 그리 많지 않았던 시절이었는데, 기차를 타든 시외버스를 타고오던간에 터미널에 내리자마자 택시기사에게 포항에서 가장 크고 좋은 식당으로 가자고 주문하면 두말없이 승리식당이나, 육거리식당 정문 바로 앞에 알아서 모실 정도였다.
1960년 말에서 70년 초 포항에 제철소가 생기자 포항은 마침내 만년 하절기 피서지에 불과하던 소도시에서 탈피하여 명실공히 산업도시로 발돋움 하게 된다. 포철 초창기 일본에서 신일본제철 기술자들이 대거 포항으로 들어오고 서울 등지에서 고급 산업역군들이 속속 포항에 도착하였던 시기라, 유흥음식점이나 사비스 업종 등은 그야말로 불야성을 이루기 시작하던 때였다.
포항 요식업 양대 산맥으로 꼽던 승리, 육거리 외에 고급 경양식집으로 포항에서 유일했던 희락식당이 육거리식당(후에 신육거리식당으로 상호 변경) 바로 앞에 있었다. 어쨌든 포항에서 승리식당은 한식으로, 육거리는 일식으로 나름대로의 특성을 갖고 외부손님들을 맞게 된다.
중앙동은 포항시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으며, 동쪽은 송도동, 서쪽은 용흥동, 남쪽은 죽도동, 북쪽은 학산동과 접해 있다. 본동은 포항 역사의 근원지로 기록에 의하면 1731년(영조 7년) 이 지역에서 나는 규휼미 등 양곡을 보관하거나 타 지역으로 수송하기 위하여 포항창진(浦項倉鎭)을 현재의 포항역 부근에 설치한 기록이 있으며(역사적으로 <포항(浦項)>이란 지명의 사용은 이것이 최초이다), 1870년에 해군 군사 목적인 포항진(浦項鎭)을 설치하고 군사들을 배치한 기록이 있다.
조선말까지 중앙동 일대는 연일현 북면과 흥해현 동상면에 속했으며 대부분의 지역의 사람들이 거주하기 힘든 불모지였으나 일제시대 초기 1916년 형산강 제방공사를 하면서 부터 많은 사람들이 거주하게 되었다.
1913년 종래 연일현, 흥해현, 청하현, 장기현을 합병하여 영일군으로하고 포항면(浦項面)이 생기면서 중앙동 일대가 포항동이 되었으며, 1917년에 기 합병된 영일군의 청사를 현 북구청 자리로 옮겼다.
1931년에 형산강 제방 공사의 준공과 포항면이 형산면과 통합하여 포항읍으로 승격되고 포항동은 포항동(대흥동 지역)과 남빈정(南濱町 남빈동지역), 영정(榮町 덕산동지역), 중정(仲町 중앙동지역), 대정정(大正町 신흥동지역), 명치정(明治町 덕수동지역), 동빈정(東濱町 동빈동지역), 본정(本町 상원동지역), 욱정(旭町 여천동지역)으로 분리되고 일본식 이름으로 불렀다.
8·15 광복 후 다시 현재의 법정동 이름으로 바뀌었다. 행정동인 중앙동은 중앙동(中央洞)·신흥동(新興洞)·남빈동(南濱洞)· 상원동(上元洞)·여천동(余川洞)·대흥동(大興洞)·덕수동(德壽洞)·덕산동(德山洞)·동빈2가(東濱二街) 등 9개의 법정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1966년 7월 15일 여천동과 중앙동을 합쳐 여중동이 되었으며, 1973년 7월 15일 상원동과 남빈동이 합해진 상남동과, 1983년 2월 15일에 합쳐 행정동명이 중앙동으로 되었다. 1986년 7월 1일 신흥동을 편입하고, 1998년 9월 1일 동빈동·덕수동·대흥동과 통합하여 오늘에 이른다. 중앙동은 6·25 전쟁 때 폐허가 된 지역이었으나, 현재는 음식점, 상가, 병원 등이 집중되어 있는 포항시의 중심지로 발전하였다.
동빈동(東濱洞)
1998년 동빈 1가는 학산동에, 동빈 2가는 중앙동에 편입되었다.포항내항 접안지역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이 마을이 크게 발전하게 된 계기는 1914년부터 약 20여년간에 걸쳐 진행된 형산강 제방과 포항축항공사였다.1930년대에는 동해안 수산업의 전진기지로 정어리·고등어·청어의 생산이 특히 많았는데, 그 후 이 일대에는 각종 어업 보조 산업이 번성하여 냉동공장, 통조림공장, 주물공장 등이 대를 이어오고 있다. 포항-울릉간 여객선 터미널은 이 곳에 있다가 1995년 항구동으로 이전하였다.
덕산동(德山洞)
1998년 중앙동에 편입되었다. 포항 북부경찰서, 북구청, 소방서, 시립중앙경로당, 포항시건설환경사업소, 상수도사업소, 북구 선거관리위원회, 포항초등학교등이 위치해 있다.군청거리 육거리에서 나루끝을 향하는 중심길, 즉 포항 북구청 앞길을 일제시대에 불렀던 명칭 이다. 각종 관공서가 밀집되고 주변에 일인들이 많이 거주하면서 덕산동이 발전하였다. 일제시대 초기 군청거리 서쪽 마을에는 숲이 울창하여 천연두로 죽은 어린애의 시체를 나무 위에 덕(체봉)을 매어 놓기도 하였다 하여 부른 이름이다. 체봉거리라고도 했다.
덕수동(德壽洞)
1998년 중앙동에 편입되었다. 일제 때부터 포항읍사무소를 비롯한 관공서가 밀집되어 있던 마을로 오늘날에도 관공서와 기관장들의 관사가 모여 있다. 읍사무소청사는 시청사로 사용하다가 1992년 철거하고 신축하였으며, 포항시개항지정기념비(1963년 3월 1일 건립)가 있다.수도산은 본래 백산(白山)이라고 부르던 것을 조선 세조의 왕위 찬탈에 항거한 모갈거사(茅葛居士)란 분이 은둔하다가 순절한 후부터 그 충절을 되새겨 모갈산(茅葛山)이라고 부르다가, 1923-1926년 에 걸쳐 상수도를 시설할 때 배수지를 이 산정에 설치한 후부터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 이 산에 조성된 덕수공원에는 라이온스동산과 모갈거사순절사적비, 모갈정, 충혼탑과 관음사·극락사·보현사 등의 사찰, 반공순국청년동지위령비와 포항사당, 이명석선생 문화공덕비 등이 위치하고 있다.여천원이 있던 곳으로 일제시대엔 포항신사(浦港神社)가 자리했으며, 해방 후 중앙교회가 있다가 근래에 덕수성당이 들어선 원터가 있다. 1940년 인가를 받아 개시된 포항중앙상설시장은 1960년 도시계획에 의해 도로에 편입되면서 폐시(閉市)되었다. 시청, 세무서, 문화원, 국가정보원, 덕산파출소, 임협, 대한적십자사 경북지사 등이 위치하고 있다.
여천동(余川洞)
고려산부인과의원과 금강호텔 사이의 지역으로 1983년 중앙동에 편입되었다.
- 여천동(余川洞) : 나루끝에서 동해 바다로 흘러 내린 여을천에서 명칭이 유래한다.
- 여천원(余川院) : 오늘날 덕수동 천주교회 자리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18세기경 4일과 6일에 시장이 형성되었으며, 일제시대에 한국인에 의한 노점 상설시장이 개설된 여천장이 있었다. 불종거리는 지금의 고려산부인과의원 인근지역에 작은 철탑을 세우고 불이 났을 때 매달아 놓은 종을 쳤다 하여 불린 이름이다. 숙박업소와 음식점, 극장 등이 자리하고 있다.
상원동(上元洞)
1983년 중앙동에 편입되었다. 포항장(浦港場)과 접한 지역으로 일제시대에도 한국 상인들이 다수 거주하던 곳이다. 육거리에서 남빈동 사거리에 이르는 거리는 흥해방면과 연일 방면을 잇는 간선도로로 1950년 도시계획에 의해 4차선으로 확장되었다. 한빛은행포항지점, 국민은행포항지점, 조흥은행포항지점 등이 자리잡고 있다.
남빈동(南濱洞)
남빈동은 칠성강을 타고 배가 드나들던 곳으로 소재지 남쪽에 있다하여 붙여진 지명이다.오늘날 서울 은행에서 죽도 어시장에 이르는 지역으로 1946년에 남빈동으로 부르게 되 었다.1983년 중앙동에 편입되었다. 18세기부터 포항장의 중심지였다. 1931년 남빈 매립 공사가 착공 되어 1932년 4월 13일 준공되었다.
조선 후기 정월 대보름날을 중심으로 포항역 공터에서 상리(포항리: 대흥동·남빈동 지 역)와 하리(여천동과 동빈동 지역)의 줄다리기가 행해졌으나, 1930년대에 소멸되고 말았다. 가구점과 의류점, 건축자재와 기계류 상점 들과 신한은행 삼성생명 기업은행 서울은행 대구은행등의 포항지점들이 자리하고 있다.
신흥동(新興洞)
1946년 본래의 부락명인 신흥동(새로 흥하기를 바라는 뜻)으로 환원되었으나, 1986년 7월 1일 행정적으로 중앙동에 편입 되어 법정동명만 남게 되었다. 포항우체국, 포항전화국, 중앙동사무소, 수협중앙회포항지점이 위치하고 있다.
대흥동(大興洞)
조선시대 칠성강 북서쪽 대흥산 앞에 마을을 형성하여 영일현 북면 대흥리로 불리었다. 1694년경엔 60-70여호의 마을을 형성하였으며, 1700년대초 이 고장의 세곡(稅穀)을 수송·보관하는 포항창(浦港倉)이 설치되면서 부락명이 포항리로 되고, 포항장(1일과 6일)을 형성하였다.1998년 9월 1일 중앙동에 편입되어 법정동명만 남게 되었다.
대흥동
영일현 북쪽 우물곡동(雨勿谷洞)에 대흥제(大興提)가 있어 18결의 논에 물을 대었다는 기록이 있는 유래 깊은 명칭이다. 해방후 택지로 변한 대흥못의 옛 자리는 지금의 용흥동 현대타워 아파트 정문 앞 부근이 된다. 오늘날 대안산 · 대왕산과 대안곡의 명칭은 대흥상과 대흥곡이 변음된 것이다. 포항시제(浦港市提)라고도 할 수 있는 포항사당제(浦港祠堂祭)는 봄과 가을에 향사를 행하고 있으며, 구(舊) 포항의 도심지역으로서 포항역과 중앙상가 등이 위치하고 있다.의 최고 중심지는 육거리와 시민극장 사이의 길이 서울로 치면 명동쯤 될 정도로 유흥가가 형성되어 있었다.
1920년대 칠성천
1966년 동빈내항 돛단배. 지금의 송도해수욕장과 울릉도 여객선 터미널 사이를 배삯을 받고 사람들을 실어나르던 배다.
1966년 학산동. 도로포장을 위한 공사가 한창이다. 당시 포항은 시내 육거리, 중심가 외에는 거의가 비포장길이어서 여름철 비만오면 진흙탕으로 변해 장화를 신지않으면 안될 정도였다.
경북 포항시 상원동 441-4번지 (사장:권택진) 냉면, 숯불갈비 전통으로 약 40년간 한자리에서 한결같은 맛을 이어온 냉면 맛은 사계절 언제 먹어도 일품. 냉면은 비빔냉면과 물냉면 두가지가 있다. 비빔냉면은 양념이 중요한 만큼 좋은 깨를 구입하여 직접 참기름을 짜서 쓰고, 물냉면 역시 육수와 면이 중요한 만큼 육수는 소뼈와 고기삶은 국물에 한약재를 첨가, 장시간 우려낸 깔끔한 국물과 면발 역시 메밀의 독특한 맛을 살리기 위해 직접 배분하여 쓴다.숯불구이(1인분, 150g) 10,000원 냉면(1인분) 4,500원포항 육거리 한일은행 옆. 주차장 완비(054)247-2651
한일냉면갈비식당
경북 포항시 상원동 442-2번지(사장:최명애 054-247-5739)포항에서 냉면 잘한다는 집을 꼽으라면 로타리냉면(40년 전통)과 한일냉면(30년 전통)이다.로타리냉면은 비빔냉면이. 한일냉면은 물냉면(평양식, 함흥식 5000원)이 더 맛있다고들 한다.
1968년의 포항의 음식점
당시는 '승리식당'이 포항에서 가장 크고 알아주는 식당이었다. 요즘의 식당들은 음식만을 제공하지만 그때 그 시절에는 요정이나 방석집 따위의 그다지 건전하지 않은 업종의 요식업은 물론 아니지만 분위기만큼은 요릿집 다름아니었다. 저녁이면 술손님을 접대하는 아가씨들을 열댓명씩 데리고 장사들을 했다. 포항제철 기술자로 내한한 일본인들을 위한 전략의 일환임이 분명했다. 당시 일본인 관광객이나 주재원들의 한국 접대여성들을 현지처로 두었다고 지탄의 대상이 되던 때이기도 했다.부친께서 운영하셨던 육거리식당에도 누나들 열 몇명씩 한가족들처럼 한집에서 숙식을 하며 지냈던 것이다.
1970년 포항역
1970년 그때 포항의 최고 중심가는 육거리에서 시민극장, 포항우체국 사이의 길이었다. 서울로 말하면 명동, 대구로 치면 동성로 거리 쯤 될까. 지금은 포항의 중심가가 오거리로 이동했다가 요즘은 또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고 들었다.
1974년 오거리 시민탑
요즘 사람들이 혹시 이런 얘길 들으면 놀랄지도 모르겠지만, 예컨대 '승리식당' 경우, 메뉴의 종목이 한식은 물론, 일식에다 양식까지도 가능했다는 사실이다. 당시 큰 식당들은 중국음식만 빼고는 뭐든 만들어 내놓을 수 있는 조리능력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소위 대중식사라는것이 메뉴의 가짓수에 국한받지않는 범 국가적인 차원으로 어떤 음식이든 만들어내고 있었다. 주방 요리사들의 전지전능한 요리솜씨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하기사 양식이라고는 하지만 , 돈까스, 비후까스, 함박스텍 같은 소위 일본사람들이 자기네 입맛에 맞게 만들어낸 일본식 양식을 말한다.
1968년 당시 포항시내에는 영업용 택시도 그리 많지 않았던 시절이었는데, 기차를 타든 시외버스를 타고오던간에 터미널에 내리자마자 택시기사에게 포항에서 가장 크고 좋은 식당으로 가자고 주문하면 두말없이 승리식당이나, 육거리식당 정문 바로 앞에 알아서 모실 정도였다.
1960년 말에서 70년 초 포항에 제철소가 생기자 포항은 마침내 만년 하절기 피서지에 불과하던 소도시에서 탈피하여 명실공히 산업도시로 발돋움 하게 된다. 포철 초창기 일본에서 신일본제철 기술자들이 대거 포항으로 들어오고 서울 등지에서 고급 산업역군들이 속속 포항에 도착하였던 시기라, 유흥음식점이나 사비스 업종 등은 그야말로 불야성을 이루기 시작하던 때였다.
포항 요식업 양대 산맥으로 꼽던 승리, 육거리 외에 고급 경양식집으로 포항에서 유일했던 희락식당이 육거리식당(후에 신육거리식당으로 상호 변경) 바로 앞에 있었다. 어쨌든 포항에서 승리식당은 한식으로, 육거리는 일식으로 나름대로의 특성을 갖고 외부손님들을 맞게 된다.
중앙동은 포항시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으며, 동쪽은 송도동, 서쪽은 용흥동, 남쪽은 죽도동, 북쪽은 학산동과 접해 있다. 본동은 포항 역사의 근원지로 기록에 의하면 1731년(영조 7년) 이 지역에서 나는 규휼미 등 양곡을 보관하거나 타 지역으로 수송하기 위하여 포항창진(浦項倉鎭)을 현재의 포항역 부근에 설치한 기록이 있으며(역사적으로 <포항(浦項)>이란 지명의 사용은 이것이 최초이다), 1870년에 해군 군사 목적인 포항진(浦項鎭)을 설치하고 군사들을 배치한 기록이 있다.
조선말까지 중앙동 일대는 연일현 북면과 흥해현 동상면에 속했으며 대부분의 지역의 사람들이 거주하기 힘든 불모지였으나 일제시대 초기 1916년 형산강 제방공사를 하면서 부터 많은 사람들이 거주하게 되었다.
1913년 종래 연일현, 흥해현, 청하현, 장기현을 합병하여 영일군으로하고 포항면(浦項面)이 생기면서 중앙동 일대가 포항동이 되었으며, 1917년에 기 합병된 영일군의 청사를 현 북구청 자리로 옮겼다.
1931년에 형산강 제방 공사의 준공과 포항면이 형산면과 통합하여 포항읍으로 승격되고 포항동은 포항동(대흥동 지역)과 남빈정(南濱町 남빈동지역), 영정(榮町 덕산동지역), 중정(仲町 중앙동지역), 대정정(大正町 신흥동지역), 명치정(明治町 덕수동지역), 동빈정(東濱町 동빈동지역), 본정(本町 상원동지역), 욱정(旭町 여천동지역)으로 분리되고 일본식 이름으로 불렀다.
8·15 광복 후 다시 현재의 법정동 이름으로 바뀌었다. 행정동인 중앙동은 중앙동(中央洞)·신흥동(新興洞)·남빈동(南濱洞)· 상원동(上元洞)·여천동(余川洞)·대흥동(大興洞)·덕수동(德壽洞)·덕산동(德山洞)·동빈2가(東濱二街) 등 9개의 법정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1966년 7월 15일 여천동과 중앙동을 합쳐 여중동이 되었으며, 1973년 7월 15일 상원동과 남빈동이 합해진 상남동과, 1983년 2월 15일에 합쳐 행정동명이 중앙동으로 되었다. 1986년 7월 1일 신흥동을 편입하고, 1998년 9월 1일 동빈동·덕수동·대흥동과 통합하여 오늘에 이른다. 중앙동은 6·25 전쟁 때 폐허가 된 지역이었으나, 현재는 음식점, 상가, 병원 등이 집중되어 있는 포항시의 중심지로 발전하였다.
동빈동(東濱洞)
1998년 동빈 1가는 학산동에, 동빈 2가는 중앙동에 편입되었다.포항내항 접안지역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이 마을이 크게 발전하게 된 계기는 1914년부터 약 20여년간에 걸쳐 진행된 형산강 제방과 포항축항공사였다.1930년대에는 동해안 수산업의 전진기지로 정어리·고등어·청어의 생산이 특히 많았는데, 그 후 이 일대에는 각종 어업 보조 산업이 번성하여 냉동공장, 통조림공장, 주물공장 등이 대를 이어오고 있다. 포항-울릉간 여객선 터미널은 이 곳에 있다가 1995년 항구동으로 이전하였다.
덕산동(德山洞)
1998년 중앙동에 편입되었다. 포항 북부경찰서, 북구청, 소방서, 시립중앙경로당, 포항시건설환경사업소, 상수도사업소, 북구 선거관리위원회, 포항초등학교등이 위치해 있다.군청거리 육거리에서 나루끝을 향하는 중심길, 즉 포항 북구청 앞길을 일제시대에 불렀던 명칭 이다. 각종 관공서가 밀집되고 주변에 일인들이 많이 거주하면서 덕산동이 발전하였다. 일제시대 초기 군청거리 서쪽 마을에는 숲이 울창하여 천연두로 죽은 어린애의 시체를 나무 위에 덕(체봉)을 매어 놓기도 하였다 하여 부른 이름이다. 체봉거리라고도 했다.
덕수동(德壽洞)
1998년 중앙동에 편입되었다. 일제 때부터 포항읍사무소를 비롯한 관공서가 밀집되어 있던 마을로 오늘날에도 관공서와 기관장들의 관사가 모여 있다. 읍사무소청사는 시청사로 사용하다가 1992년 철거하고 신축하였으며, 포항시개항지정기념비(1963년 3월 1일 건립)가 있다.수도산은 본래 백산(白山)이라고 부르던 것을 조선 세조의 왕위 찬탈에 항거한 모갈거사(茅葛居士)란 분이 은둔하다가 순절한 후부터 그 충절을 되새겨 모갈산(茅葛山)이라고 부르다가, 1923-1926년 에 걸쳐 상수도를 시설할 때 배수지를 이 산정에 설치한 후부터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 이 산에 조성된 덕수공원에는 라이온스동산과 모갈거사순절사적비, 모갈정, 충혼탑과 관음사·극락사·보현사 등의 사찰, 반공순국청년동지위령비와 포항사당, 이명석선생 문화공덕비 등이 위치하고 있다.여천원이 있던 곳으로 일제시대엔 포항신사(浦港神社)가 자리했으며, 해방 후 중앙교회가 있다가 근래에 덕수성당이 들어선 원터가 있다. 1940년 인가를 받아 개시된 포항중앙상설시장은 1960년 도시계획에 의해 도로에 편입되면서 폐시(閉市)되었다. 시청, 세무서, 문화원, 국가정보원, 덕산파출소, 임협, 대한적십자사 경북지사 등이 위치하고 있다.
여천동(余川洞)
고려산부인과의원과 금강호텔 사이의 지역으로 1983년 중앙동에 편입되었다.
- 여천동(余川洞) : 나루끝에서 동해 바다로 흘러 내린 여을천에서 명칭이 유래한다.
- 여천원(余川院) : 오늘날 덕수동 천주교회 자리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18세기경 4일과 6일에 시장이 형성되었으며, 일제시대에 한국인에 의한 노점 상설시장이 개설된 여천장이 있었다. 불종거리는 지금의 고려산부인과의원 인근지역에 작은 철탑을 세우고 불이 났을 때 매달아 놓은 종을 쳤다 하여 불린 이름이다. 숙박업소와 음식점, 극장 등이 자리하고 있다.
상원동(上元洞)
1983년 중앙동에 편입되었다. 포항장(浦港場)과 접한 지역으로 일제시대에도 한국 상인들이 다수 거주하던 곳이다. 육거리에서 남빈동 사거리에 이르는 거리는 흥해방면과 연일 방면을 잇는 간선도로로 1950년 도시계획에 의해 4차선으로 확장되었다. 한빛은행포항지점, 국민은행포항지점, 조흥은행포항지점 등이 자리잡고 있다.
남빈동(南濱洞)
남빈동은 칠성강을 타고 배가 드나들던 곳으로 소재지 남쪽에 있다하여 붙여진 지명이다.오늘날 서울 은행에서 죽도 어시장에 이르는 지역으로 1946년에 남빈동으로 부르게 되 었다.1983년 중앙동에 편입되었다. 18세기부터 포항장의 중심지였다. 1931년 남빈 매립 공사가 착공 되어 1932년 4월 13일 준공되었다.
조선 후기 정월 대보름날을 중심으로 포항역 공터에서 상리(포항리: 대흥동·남빈동 지 역)와 하리(여천동과 동빈동 지역)의 줄다리기가 행해졌으나, 1930년대에 소멸되고 말았다. 가구점과 의류점, 건축자재와 기계류 상점 들과 신한은행 삼성생명 기업은행 서울은행 대구은행등의 포항지점들이 자리하고 있다.
신흥동(新興洞)
1946년 본래의 부락명인 신흥동(새로 흥하기를 바라는 뜻)으로 환원되었으나, 1986년 7월 1일 행정적으로 중앙동에 편입 되어 법정동명만 남게 되었다. 포항우체국, 포항전화국, 중앙동사무소, 수협중앙회포항지점이 위치하고 있다.
대흥동(大興洞)
조선시대 칠성강 북서쪽 대흥산 앞에 마을을 형성하여 영일현 북면 대흥리로 불리었다. 1694년경엔 60-70여호의 마을을 형성하였으며, 1700년대초 이 고장의 세곡(稅穀)을 수송·보관하는 포항창(浦港倉)이 설치되면서 부락명이 포항리로 되고, 포항장(1일과 6일)을 형성하였다.1998년 9월 1일 중앙동에 편입되어 법정동명만 남게 되었다.
대흥동
영일현 북쪽 우물곡동(雨勿谷洞)에 대흥제(大興提)가 있어 18결의 논에 물을 대었다는 기록이 있는 유래 깊은 명칭이다. 해방후 택지로 변한 대흥못의 옛 자리는 지금의 용흥동 현대타워 아파트 정문 앞 부근이 된다. 오늘날 대안산 · 대왕산과 대안곡의 명칭은 대흥상과 대흥곡이 변음된 것이다. 포항시제(浦港市提)라고도 할 수 있는 포항사당제(浦港祠堂祭)는 봄과 가을에 향사를 행하고 있으며, 구(舊) 포항의 도심지역으로서 포항역과 중앙상가 등이 위치하고 있다.의 최고 중심지는 육거리와 시민극장 사이의 길이 서울로 치면 명동쯤 될 정도로 유흥가가 형성되어 있었다.
1920년대 칠성천
1966년 동빈내항 돛단배. 지금의 송도해수욕장과 울릉도 여객선 터미널 사이를 배삯을 받고 사람들을 실어나르던 배다.
1966년 학산동. 도로포장을 위한 공사가 한창이다. 당시 포항은 시내 육거리, 중심가 외에는 거의가 비포장길이어서 여름철 비만오면 진흙탕으로 변해 장화를 신지않으면 안될 정도였다.
첫댓글 저때로 돌아가서 땅좀 사놨으면..ㅋㅋ
저때로 돌아가면 형은 돈이 없는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