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인보 14 황한식 외/ 고은
황한식
크리스챤아카데미 사건 반대신문 진술 몇가지
처음에는 바닥에 앉혀놓고 주먹으로 패고 발길로 찼다
그런 다음 세워놓고 패고 찼다
얼굴이 퉁퉁 부어올랐고
입술 안에 피가 괴었다
그런 다음 침대 각목으로
꿇어앉힌 뒤 끼워놓고 팼다
그런 다음 발가벗겨놓고 패고 차기 시작했다
두 시간쯤 지나서
‘네 사상을 대라’라는 신문이 있었다
나흘 동안의 고문
나흘 동안의 잠 안 재우는 고문 뒤
나는 얼이 빠져버렸다
나는 돌았다
술 취한 조사관은 다시
오금에 각목 끼워넣었다
‘네 동지가 쓴 것 그대로 베껴라’
그런 다음
‘똑같이 베끼면 되느냐
좀 다르게 써라’
‘여기는 지하 1층
지하 2층에 가면 너는
지구 위에서 아주 없어져버린다’
천영초
70년대는 ‘위대한 성장’으로 치달았다
70년대 후기는
소위 유신 제2기로 치달았다
그런 시대
공장에 들어간 여학생
먹물이라 했지
학필이라 했지
그런 대학생들이 하나둘
숨 콱 막히는 공장으로 들어갔다
차라리 감옥보다 더 열악한 공장으로
경제학도 김근태가 들어갔고
미국에서 예일대 졸업생 김난원이
동일방직에 들어갔고
김영준도 울산 공장에 갔는데
여학생 천영초
그도 공장으로 들어가
공순이가 되었다
의식화라니
들어간 그들이 도리어
공장에서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났다
프레이리의 말
지식인은 현실을 배우고
민중은 이론을 배우는 교육의 현장이었다
하는 일마다 잘난체 없이 든든했다
마음놓았다
뒷날 정문화의 아내가 되었던가
한신
군사쿠데타 뒤 카키복 그대로
군정 내무부장관 노릇 하다가
군으로 돌아갔다
모두들 돌아가지 않을 때 그는 큰 키로 돌아갔다
6군단장 장군 각하였으나
마누라가 찾아갈 때는
버스를 타고 오게 했다
사변 이래 군의 상층부는
거의 관행으로 되어버린 부정부패였는데
그 가운데
한신
그리고 김익권 들은 부정을 사절했다
아직 철조망 치지 않은 휴전선시대
그는 그 휴전선 언저리로 돌아갔다
지난날의 격전지인
조국의 산들은
휴전선 너머로 첩첩하고
그 남쪽으로 첩첩했다
군단 본부의 화단에 벌써 하얀 코스모스가 피었다
백작부인 이옥경
조선시대 여자는 이름이 없었다
홍씨 가문의 계집아이 하나가
고종의 입양조카가 된다
잘 익은 구기자 열매빛 입술
그 아이가 자라
일본으로 떠나는 특파대사 이지용의 마누라가 되어
경(卿)이라는 이름 달아 함께 갔다
남편 성따라 이씨가 되었다
이경이었다
살결이 백옥이요
이빨이 설옥이라
이옥경이었다
일본 가서 1만원을 뇌물로 받고
한일의정서
러일전쟁 공수동맹 체결하여
조선반도가 일본의 군사기지가 되어버렸다
그 이래 용산 일대
1백15만평은
임진왜란 일본군 주둔 이래
언제나 외국군 군용지가 되었다
끝내 나라가 넘어간 뒤
기생 산홍이까지도
비록 기생일지나
어찌 5적 대신의 첩이 되느냐고
소실살이 거절했는데
이옥경은
남편으로 모자라
일본 공사관
하기하라
구니와께
하세가와와 사통하니
그녀의 집 하인들은 작대기로
그녀 사진의 음부 언저리 찍어대며
이 구멍은 왜놈의 구멍이라
왜놈들의 구멍이라
「매천야록」펼치다가
이 대목에
잠시 머물렀다
손창섭
아마도 나오지 않아야 할 소설가를 위하여
그도 소설가로 나온 것인가
손창섭
결코 이미지가 서린 얼굴이 아니었다
얽은 듯한
무정한 얼굴이므로 표정이라고는 아예 없이
누구나 몰라보아라
긴 고난주간을 지낸 것처럼
그에게는 햇빛이 없었다
1950년대 전후문학의 숙직실
그에게는 폐허 명동의 술도 노래도
날마다 건달 아니면 거지 같은 예술도 없었다
있는 것은
오직 현실의 한 단층
내일이 없는
비 오는 날
잉여로서의 존재
폐허의 사람은 폐허였다
어디서 사는지 모른다
그의 얼굴은
다시 한번 안경 쓴 무뚝뚝한 얼굴은
어디서 어디로 다 가도록 몰라보아라
그의 목소리는
낡은 첼로의 최저음
그의 아내가 일본여자라는 것밖에는
아무도 본 적 없다
70년대 초
그가 일본으로 떠나버렸다
일본으로의 귀화
그 음울한 습진투성이 문학의 중단은 무엇인가
이이화
어느 대학 학부 따위
대학원 따위
나는 모른다
이런 나는 누구냐
경부선 황간역 지나
그 어디메쯤 태어나
충남 공주에서도
전남 광주에서도 자라는 동안
집안의 한학 온몸에 담아
그것을 새로 되새기는구나
나는 조선 5백년의 역사진행을 보았다
정치사만이 아니라
궁중 비사만이 아니라
백성들의 삶과
양반들과
백성 사이의 삶을 보았다
긴 밤 화롯불 식었다
옛이야기로서의 역사
아니 서사(敍事) 담론으로서의 역사가
나의 역사였다
지리산 뱀사골 밤
술 취하면
거친 술판 힘도 질기고
입도 질기다
나는 누구냐
아래의 이빨 가지런히
먼저 훌렁 벗겨진 머리가 섬뜩하고
그 뒤에 이빨이 섬뜩하다
네 이름이나 알게나
이이화라 하네
이을호
고문으로 머리와 마음 다쳐
갇혀 있거나
나온 뒤에도
제정신 갖출 수 없었다
정신신경 치료조차 체념하면
혼자 산골에 쳐박혀 있어야 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
종잡을 수 없는 말
그리고
한밤중의 돌발행위
빼어난 머리인데
그만 시대의 야만에 다쳐버려
정상으로 돌아오는 날이
다음해
다음해 어느날일까
왕버들눈 탐스러운 봄기운에도
그의 철학이 뱉는 말은
영 야릇할 때
나는 이제 내가 아니다 나는 누구 ?
서중석
70년대 청년운동은
70년대 청춘은
여기 민청학련 사건으로부터 시작했다
여기 민청학련 사건의 무기수
서중석
그의 한국사 공부는 고행으로부터 시작했다
유인태
황인성
이근성 들과 함께
얼핏 스치다가 치밀한 사람 만나면
그가 서중석
지식이 무거우면
현실과 동떨어지는가
그러나 그런 무거움과 함께
그는 현실 속에 있다
말 한마디도 몇 번이나 씹은 나머지 나왔다
그런 그가 받은 고문은
육전(陸戰)
해전
공전 등 헤아릴 수 없다
그는 흐득흐득 짐승으로 울부짖다가 뻗어버렸다
역사가 과거가 아니라
악과 싸우는 오늘의 고행이고저
단계벼루
추사 완당 김정희
한폭 글 쓸 때마다
한폭 그림 칠 때마다
이름 하나씩 지어
그런 몇백개의 호의 뒷전에 그가 앉아 있다
그의 단계벼루
제주 대정현 귀양살이에도
함께 간 벼루
일생을 함께 지내는 동안
오직 먹 갈고
먹 갈아
드디어 그 벼룻바닥 뚫려
더는 벼루 노릇을 할 수 없었다
벼루 주인 김정희는
술 얼큰히 취해서
눈물 짓고
그 벼루 묻어
벼루 무덤 앞에서 해 넘겨
추모제 올렸다
그대가 먼저 가셨도다
윤걸이
옛날 옛적 석가족의 한 공주는
문둥병에 걸렸다
그녀는 히말라야산 중턱으로 보내어
그 굴속에서
죽든지 살든지 하라 했다
그런데 몇년 뒤
그 굴 파본 사람이 있었다
수행자 코라였다
문둥병 씻은 듯 나은 미인이
거기 있었다
그들은 부부가 되어
열여섯쌍 쌍둥이
아들딸 서른둘을 두었다
2천6백년 뒤
동북아시아 70년대에는
이른바 가족계획으로
한 집에 둘 키우자
그러다가
한 집에 하나 키우자였다
하나가 된 어린이 윤걸이
너 이놈 소원이 뭐냐
누나 있으면 좋겠어요
동생 있으면 좋겠어요
만인보14(2008.1.20).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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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시감상
만인보 14 황한식 외/ 고은
박희용
추천 0
조회 419
08.01.20 13:10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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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영주작가/김주태/ 설마 , 역사가 후퇴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08.01.20 15:35
역사는 꾸준히, 상승직선은 아니나 나선곡선이라도 그리면서 진보함은 분명하다 생각합니다. 우리 글쟁이들도 그것 하나 굳게 믿기땜에 꾸준히 개인작업과 공동작업 하는 것 아닌가 합니다. 프랑스 혁명기와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가 반면교사일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드나, 민주화와 평등을 목표로 하는 정치적 진화는 계속되리라 봅니다. 이러한 때, 진보와 개혁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깊은 공감과 폭넓은 연대의식으로 든든히 서야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도 고은의 만인보 작업의 진지성을 다시금 돌아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10여년 전에 1~9권보고 지난 년말에 10~26권 구입해 숙독하는데, 함께 음미하고 공부하자는 뜻에서 자선
이지만 다시 생각해볼만한 시들을 권별로 워드해서 게속 올리겠습니다. 재작년인가 예천 한내 출판기념회에서 고은 시인 뵈었는데 70대인데도 소주 한정 없더군요, 정말 대단합디다, 헛짓 헛말 흐트러진 모습 하나 없이. 주도를 완전히 통과했더군요, 그러니 시도 기걸차게 쓰는 모양. 요즘 노벨상 땜에 좀 오바한다는 풍문이 들리나 만인보 자체는 내 보긴 대단한 역작입니다. 그외 시는 많이는 안 읽어보았지만 좀 거시기, 교훈조랄까 선동조랄까. 주태 쉰이든지 만인보 읽어보실 분은 연락 바랍니다. 대여기간은 1개월. 대여료는 소주 한 병. 70cm눈 야! 여기 안동은 눈 귀경 못합니다. 요즘 치과 다니느라 동지들 연통도 못해 죄송, 낫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