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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부류의 성화
성화(聖化, Sanctification)는 히브리어로는 ‘카다쉬()’, 헬라어로는 ‘하기아조( )’로 ‘거룩하다, 거룩하게 하다, 성별하다, 성결하게 하다’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거룩하고 성결하다’는 의미는 전혀 다른 두 의미로 나누어진다. 지난 시간의 ‘신본주의와 인본주의의 핵심 기준’에서 다루었듯이, 인간의 기준과 하나님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인간 기준에서 거룩함은 인간 자체와 행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래서 거룩한 사람이란 ‘성인(聖人)’의 의미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지혜와 덕이 뛰어나 길이길이 우러러 받들어 본받을 만한 사람’으로 되어 있다. 다시 말해 하나님과의 관련 여부와는 상관없이, 인간 자체의 선하고 깨끗하고 뛰어남을 보는 것이다. 이 부분이 인간 기준의 가장 큰 문제이다.
“네가 범죄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네 죄악이 관영한들 하나님께 무슨 관계가 있겠으며, 네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네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네 악은 너와 같은 사람이나 해할 따름이요, 네 의는 인생이나 유익하게 할 뿐이니라.”(욥 35:6~8)
위의 말씀에 ‘네 악’과 ‘네 의’는 ‘인간이 보는 악과 의’를 의미하는 것으로, 세상에서는 사람에게 해를 주는 것은 악이고 반대로 유익을 주는 것은 의로 본다. 다시 말해 인간의 기준은 인간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 하나님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 않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인간 기준에 의한 악과 선, 그리고 거룩함은 인정하시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기준에 의한 것이다. 이에 대해 마틴 로이드 존스는 아래와 같이 언급했다.
“우리는 언제나 성화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의 도덕 상태 및 상황에서 규정하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이것은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대단히 도덕적인 사람도 존재하지만, 그것이 그들이 성화되었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성화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라는 개념을 반드시 포함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도덕성과 순결함 자체가 성화는 아닙니다. 성화에서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과 관련되어야 합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God The Holy Spirit, Sanctification Part)
진정한 성화, 하나님과의 연합
사실 성경에서는 ‘거룩할 성(聖)’이란 단어는, 하나님 또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존재에만 붙인다. 가령, 하나님 아버지는 ‘성부(聖父)’, 하나님의 영은 ‘성령(聖靈)’, 하나님의 아들은 ‘성자(聖子)’, 하나님의 말씀이 담긴 책은 ‘성경(聖經)’, 하나님의 백성들은 ‘성도(聖徒)’, 하나님의 전은 ‘성전(聖殿)’인 것이다. 즉, 하나님과 함께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라 거룩함이 결정되는 것이다.
이는,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삼상 2:2)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마 19:17)는 말씀처럼, 하나님만이 거룩하고 선하시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아닌 존재가 거룩해지려면 하나님과 연결되어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야 되는 것이다. 마치 못이 자석과 연결되어 자석과 하나가 되면 못도 자석이 되는 원리와 같다.
그래서 18세기 정통 복음주의자 조나단 에드워드와 에드워드가 존경했던 17세기 청교도 목회자 토마스 쉐퍼드, 그리고 이 시대의 정통 복음주의 전도자인 박옥수 목사는 한결같이, 진정한 거룩함은 인간 자신에게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연합으로 하나님의 거룩함에 의해 인간의 성화가 이루어짐을 강조했다.
“성도는 그의 영혼이 하나님과 연합된 것을 명백히 느낀다. 성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형상이 성도의 거룩함이다.” (조나단 에드워즈, Religious Affections, Part 3)
“주님을 사랑스러운 분으로 만드는 것은 주님의 거룩하심이며, 그 거룩하심이 사람 안에 거함으로 사람도 거룩하게 만든다.” (토마스 쉐퍼드, Parable, Part 1)
“예수님과 우리가 마음에서 하나가 되면 그때부터 예수님의 거룩함과 의와 지혜와 능력이 우리 것이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살게 되는 거에요." (박옥수 목사, 마하나임사이버신학교 특강, 첫 시간)
"죄와 싸워서 이길 수 있는 분은 지구상에 예수님밖에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내 마음 안에 들어와야 내가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박옥수 목사, 죄에서 벗어나게 하는 속죄제사, p.29)
성화보다 더 중요한 성화의 주체
특히, 성경에 나오는 대표적인 성화에 대한 아래의 구절들을 살펴보면 좀 더 분명히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내가 그 회막과 단을 거룩하게 하며 아론과 그 아들들도 거룩하게 하여”(출 29:44)
“나 여호와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자는 거룩함이니라.”(레 21:8)
“또 나는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줄 알게 하려 하여”(겔 20;12)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살전 5:23)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히 2:11)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 10:10)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히 10:14)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히 13:12)
위의 구절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공통적인 부분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성화 자체보다 성화의 주체, 즉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성경의 가르침을 정확히 알고 있는 16세기 개혁자들과 정통 복음주의 전도자들의 성화에 대한 견해 역시, 어떻게 얼마나 성화를 이루느냐는 성화 자체보다 누가 성화를 이루느냐는 성화의 주체를 중요시 여겼다.
특히, 종교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의 저서 7,000여권을 보유하고 탐독했으며, 그 중 1,437권의 책에 대한 견해를 밝힌 ‘주해와 주석’을 집필할 정도로 정통 복음주의에 대해 어느 누구보다 폭넓고 깊은 이해가 있었던 정통 복음주의 최고 전문가인 찰스 스펄전은, 중생부터 성화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분의 주체이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에 그의 신앙의 초점을 맞추었다.
“우리는 중생, 회심, 믿음, 성화 모두가 인간의 자유의지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효과적이고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에 의해서라고 믿는다.” (찰스 스펄전, Treasury of David, Psalm 23)
박옥수 목사 역시 빛의 열매인 성화보다는 성화의 주체인 빛에 주목해야 됨을 아래와 같이 강조하고 있다. 즉, 빛이 존재하지 않으면 어떤 사물도 볼 수 없기에 사물들을 보는 데에 초점을 맞추어야 되는 게 아니라 빛에 초점을 맞추어야 된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빛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는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빛이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성화가 이루어지는 것이지,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누구도 성화될 수 없다.
“빛이 온갖 사물들을 우리 눈에 끌고 와서 우리로 하여금 그 사물들을 볼 수 있도록 해줍니다. 산도 강도 사람들의 얼굴도 빛이 없으면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사물들은 보면서도 그 사물들을 볼 수 있게 만드는 빛에는 주목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영적 소경인 것입니다.” (박옥수 목사, 2011 월드캠프 마인드 강연)
성화의 적(敵), 사단의 성화
지금까지 언급한 것처럼, 박옥수 목사를 비롯한 대부분의 정통 복음주의 전도자들은 성화는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모든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의 한 부분이자 하나의 열매로 여겼다. 그렇기에 성화 자체보다는 성화를 이루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은혜에 초점을 맞추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성화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성화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사단은 참된 성화를 막기 위해 다른 성화를 만들었다. 그것은 서두에 언급했던, 하나님이 인정하실 수 없는 거짓된 성화로, 세상과 인간이 추종하는 성화이다. 사단이 만든 성화는, 성화의 주체이신 하나님에게 초점을 맞춘 정통 복음주의자들의 참된 성화와는 반대로, 성화 자체에 초점을 맞추고 인간으로 말미암아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로이드 존스와 박옥수 목사는 아래와 같이 경고했다.
“성화와 관련된 모든 문제는 하나님이 아닌 우리 자신에게서 출발하고자 하는 지극히 해로운 습관으로부터 생겨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자신의 문제들, 우리의 죄들과 필요들을 생각하며, 성화에 대해 말할 때 그런 것들을 염두에 둡니다. 하지만 그것은 완전한 오류입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God the Holy Spirit, Sanctification Part)
“여러분, 우리는 마음 근본이 더러운데 죄지은 것을 뉘우치고 앞으로는 진실하게 살려고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앞으로 진실하게 살면 될 것처럼 생각하지만, 그것은 사단에게 속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진실하게 살려고 마음먹을 그때도 부정한 자요, 더러운 자라는 것입니다.” (박옥수 목사, 죄에서 벗어나게 하는 속죄제사, p.91)
거짓되고 더러운 성화의 역사(歷史)
사람들로 하여금 거짓된 성화에 빠지도록 속여, 참된 성화를 얻지 못하게 하기 위해 만든 사단의 성화를 이해하려면 성화의 반대 의미인 더러움과 사단의 속성을 이해해야만 한다. 먼저 성화의 반대인 더러움은 아래와 같이 에스겔서에 잘 나타나 있다.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처음으로 더럽게 여기신 존재가 나타난다.
“너 덮는 그룹아! 그러므로 내가 너를 더럽게 여겨 하나님의 산에서 쫓아내었고, 화광석 사이에서 멸하였도다.”(겔 28:16)
물론 이 존재는 덮는 그룹으로 있다가 타락한 루시퍼 곧 사단이었다. 여기서 더러움이란 단어는, 히브리어로는 ‘할랄( )’로 ‘더럽다, 신성 모독하다.’라는 의미이고, 중국어 성경에서는 ‘설(亵)’로 ‘더럽다, 업신여기다.’는 의미이다. 즉, 더럽다는 단어 역시 하나님과 관계된 것으로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신성 모독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루시퍼는 최초로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신성 모독을 행한 더러운 존재이다. 그가 행한 신성 모독은,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사 14:13)는 그의 교만에서 발견할 수 있다. 즉, 루시퍼는 모든 지위와 위치를 결정하시는 하나님을 무시한 채, 지위와 위치 자체에 초점을 맞추어 자신이 차지하려고 한 것이다.
주체되신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자신이 이루려고 하는 그것이 바로 신성 모독이고, 모든 악과 불행의 근원인 것이다. 결국, 자기 스스로 지위를 차지하려고 했던 루시퍼는 오히려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유 1:6)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이 주신 지위와 처소까지 잃어버린 채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이 되었다.
그 후 사단은 첫 사람 아담과 하와에게도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더러움을 심어주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 역시 자신들의 벌거벗은 부끄러움을 가리려고 하는 그 자체에 초점을 두고 자신들이 가리려고 애를 썼지, 그 부끄러움을 가죽옷으로 능히 가려줄 하나님은 믿지 않고 무시했다. 이러한 사단의 역사는 인류 역사와 함께 흘러왔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시 14:2,3)
위의 말씀을 인간의 기준으로 보면 이해할 수 없다. 세상에는 도덕적으로 깨끗하고 선하게 사는 사람들도 많이 있고, 또 세상도 ‘권선징악(勸善懲惡)’ 이나 ‘적선(積善)’ 등 선하게 사는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인간이 선한 삶에 초점을 맞추고 선하게 살려고 하는 그 자체가 더럽고 악한 것이다. 선(善)의 주체이신 하나님을 찾지 않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더럽다고 하나님은 아래와 같이 분명히 선언하셨다.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저희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딛 1:15)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성공에 초점을 맞춤으로 성공의 주체이신 아버지를 떠나 스스로 성공하고자 했던 둘째 아들이 나온다. 결국 그는 실패한 후 아버지를 찾았고, 아버지와 함께한 후 아버지로 말미암아 가장 좋은 것들을 얻는다. 이처럼 스스로 선해지려고 하고 성공하려고 하고 행복해지려고 하고 성화되려고 하는 것은, 선과 성공과 행복과 성화의 주체이신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무시하는 데에서 비롯된 사단의 열매들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하나님과 함께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어 하나님으로부터 거룩함을 얻는 것이 참된 성화이며, 성화 자체에 초점을 맞추어 스스로 성화를 이루려고 하는 것은 사단이 만든 더러운 거짓된 성화이다. 사단의 성화에 빠져 있는 사람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5)는 말씀처럼, 성화의 모양만 있지 성화의 능력이신 하나님은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이 분명히 하나 알아야 하는 것은 둘째 아들이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간음하고 도둑질하고 죄를 짓고 방탕한 것을 뉘우치고 돌이키면 선해질 줄로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뉘우치고 돌이켜도 우리는 여전히 악을 행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선해지려는 것을 포기해야 예수님이 오시는데, 예수님이 오셔야 선하게 되는데, 사람들은 내가 선하게 되려고 노력하니까 예수님이 오실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단에게 속아서 거꾸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박옥수 목사, 죄에서 벗어나게 하는 속죄제사, p.93)
"여러분, 신앙도 똑같습니다. 이번에 선을 행하지 못하면 좀더 열심히 하면 될 것 같고, 좀더 각오하고 노력하면 될 것 같고, 술 끊으면 될 것 같고, 기도하면 될 것 같고... 거기에 속아서 사람들이 자꾸 합니다. 그러는 동안에 예수님은 일하시지 않습니다. 탕자가 일하는 동안에는 아버지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탕자가 쉴 때 아버지가 일했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박옥수 목사, 회개와 믿음, p.99)
* 다음 주제는 ‘영혼의 성화(聖化)와 삶의 성화(聖化)’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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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성화에 관한 견해들을 이 정도의 글로 판단하기는 충분하지 않을 것같습니다. 박옥수씨는 조나단 에드워즈와 마틴 로이드 존스와 스펄젼을 좋은 본보기들로 삼고 자기 자신도 " 이 시대의 정통 복음주의 전도자인 박옥수 목사는 한결같이, 진정한 거룩함은 인간 자신에게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로 소개, 언급하고 있네요. 그런데 여기서 박목사는 인간이 노력하지 말고 쉬라, 하면서 그것의 목표나 어떻게 하는 것이 쉬는 것인지, 혹은 "쉬어야지" 하는 또다른 노력을 말하는 것과 어떻게 다른지는 설명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 결과 성화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실제적으로 제시하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 요한 웨슬레는 같은 해 1703년에 태어났고, 조지 휘트필드와 동시대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1899-1981) 은 웨스터민스터 채플의 목사였으면서 성공회와 싸운 경력이 있습니다만 나중에 성령 세례를 강조한 것으로 보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흑인소녀를 노예로 구입하여 자기집의 가정부로 쓰면서 침례받게 한다음 성만찬에 참여케 하는 문제로 교회와 다툼이 있었고 그외 다른 문제로 다툼이 있었습니다만 대체로 그는 훌륭한 사역을 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 자신도 네오-칼빈주의자로서 장로교에 속했지만 처음에 " 일부는 하나님이 구원얻게 예정해놓고 나머지는 구원얻지 못하게 예정했다.." 는
교리에 고민했다가 나중에 그것도 하나님 뜻이라, 생각하고 나니 기쁘게 살게되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는 나중에 알미니안 주의를 맹렬히 공격할 때 주로 "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했습니다. 스펄젼은 침례교 복음전도자였는데 그도 예정론자 이면서 실제는 제한 속죄를 부인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가 담배를 피우는 것이 전혀 문제 없다고 분별한 것은 잘못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훌륭한 그리스도인이었지만 59세로 일찍 죽었는데 담배를 일찍 끊었더라면 오래 살았을 것입니다. 조나단도 천연두 예방접종의 실험대상이 되었다가 55세로 일찍 죽었습니다. Thomas Shepard 는 영국 성공회의 미움을 사서 영국을 떠나 미국 초창기 청교도들
중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를 떠나게 한 사람들은 주로 킹제임스 성경 번역자들을 포함한 영국 성공회 대주교와 사제들이었습니다. 그는 훌륭한 전도자들 중의 하나였습니다만 아내가 죽고 자식들이 죽고 또 그 본인도 44세의 이른 나이에 죽어서 그다지 저술이 많지는 않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박옥수 목사의 성화론을 많이 들어보아도 별로 기대할 것이 없다고 생각되는 것은 위의 글에서도 나타났습니다. 성화가 인간 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 있다고 하면서 그 하나님편에 있는 것이 인간안에 이루어지도록 하려면 어떻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설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거듭난 성도들이 거듭난 이후에도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혹은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쫓아간다는 삶을 박목사는 설명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제가 알기론, 회개는 한번만 하면 족하다고 말하는 것으로 들었기 때문입니다. 성화는 십자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것이 바로 위의 글에 결여되어 있는 것이며 치명적
입니다. 성화는 십자가 사실을 또다시 계속 재확인하며 실질적으로 재경험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을 웨슬레이언(웨슬레파)들은 아주 잘 정리하여 성경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들의 성화이론은 참으로 경청할만합니다. 아마도 요한 웨슬레가 그점에서 모라비아 형제단으로부터 잘 듣고 배웠기 때문일 것입니다. 웨슬레파는 감리교와 1843년경 노예제도에 반대하였기에 분리되었습니다. 감리교 신자들은 노예들을 두고 노예제도를 인정하고 있었으나 웨슬레언들은 반대했습니다. 웨슬레이언들은 침례를 실행하고 목사제도에 고정되지 않았으면서, 주목할 집단들 중의 하나임은 분명합니다.
형제모임은 그러한 성화에 관한 이론은 별도로 세워져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형제모임에서는 어떤 교리책도 없고 오직 성경만을 교리책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주님의 만찬을 매주일 실행함으로서 십자가 사실을 마음에 날마다 새기며, 주님의 만찬에 참여하기에 책망받을 것없는 사람들로 날마다 보전되기를 원하며 기도합니다. 주님의 만찬은 십자가 사실을 새기는 시간이므로 자아가 십자가에서 죽었고 새생명 그리스도께서 내주하심을 실행하는 것이므로 그것이 바로 성화의 중요한 출발점이고 점검표입니다. 그런 점에서 형제모임은 성화를 실천적으로 배우고 실행한다 할 것입니다.
박옥수 모임에서 회개는 구원얻을 때 한번 뿐이라든가, 죄의 자백이나 회개의 기도가 필요없다고 가르친다면 그런 모임 집단에서 진정한 회개가 지속적이고 체계적으로 이루어지도록 잘 가르친다는 것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성화에 관한 한 꼭 권할만한 책이 한권있습니다. 윌리엄 맥도날드 형제의 " 참 제자의 길" 인데 이곳 북미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입이 마르게 칭찬하는 책입니다. 전도 출판사에 전화로 주문하면 우편으로 보내줄 것입니다. 아마 3천원정도 할까요? 두껍지 않고 3시간이면 정독할 수 있습니다.
꼭 읽어봐야 겠네요,, 윌리엄맥도날드 형제님글 저도 좋아합니다,, ^^
이외에도 그와 비슷한 수준으로 성화에 좋은 책들이 전도출판사에 몇 권있지만 이 책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꼭 하나 더 전도출판사 책으로 권한다면 순례하는 교회라는 교회사 책으로 브로드벤트 저술인데 이 책은 지식을 많이 넓혀줍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의 입장에서 본 교회사입니다. 이 책은 읽는데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ㅎㅎ 순례하는 교회책 장로형제님은 두번 보셨다고 저더러 읽어보라고 빌려주셨는데,,
절반정도 읽다가 나중에는 형제님이 형광팬으로 표시해놓은부분만 읽었는데도 ㅋ
장마다 왜 그리 표시도 많은지. ㅠ 한달도 더 걸렸던것 같습니다..ㅎㅎ
언제 다시 도전해볼까 생각중입니다,,
대신 요약편이 나왔기에 그 책은 어렵지 않게 보았습니다,,
[고전] 13: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
여기에서 사랑은, 피조물인 사람에게서 나오는 육적인 사랑이 아니라, 곧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일것입니다
사랑이 없다는 말씀은, 하나님이 없다라는 말씀입니다....
그 어떠한 말을 주장하거나 글로 표현하는 사람일지라도...그(피조물)가 스스로 높아져서 거룩하신 하나님(사랑)의
자리에 서 있다면...그는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 생각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섬김의 자리에서 떠나서 섬김을 받는 자리에 서있는...
자기 지위(피조물)와 처소(위치)를 떠나 스스로 높아져 하나님(창조주)의 위치에 있는 자는 곧 사단의 종이기 때문입니다
기소선을 떠나는 많은 사람들이 한결같이 지적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금방 사탄의 종이 되지는 않고 단계적으로 진행될 줄로 압니다. 처음에는 사탄에 의해 흔들리고, 사탄에 의해 쓰이고, 사탄을 위해 살게되고, 사탄의 종이 되어버립니다. 이래도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들어갑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예외가 있으리라(성령 훼방, 배도 등) 생각되지만 그런 예외가 일반화 된다고 할 때에는 구원얻지 못한 사람들이 구원얻기 위해 노력하고 매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일회용 구원을 인정하는 것이 됩니다. 일회용 구원은 아직 성령님에 의한 하나님과의 관계가 세워지지 않은 것이 확실합니다.
하토브님, 댓글... 유익한 자양분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성화에로의 삶 자체를 부인하던 박옥수씨가 어떠한 방식으로든 이러한 글을 허용하고 있다는 자체가
뭔가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음은 영혼의 성화와 삶의 성화를 연제한다하니 한번 지켜봐야 겠습니다...^^
아마 딕 욕 형제나 다른 교회들로부터 거듭난 이후에는 죄의 자백, 회개의 기도 불필요 등으로 비판받는 부분들이 있어서 도전받아 그러하지 않나 생각됩니다.
날마다 (주님 안에서 자신은 이미 죽은자 임을 깨닫고)죽노라-사도 바울.
날마다 (자기 계획과 악착같은 생각으로 왕처럼 군림하며)사노라-박옥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