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9일 토요일인 오늘은 이순을 맞이한 2015년 재경 24기 우리 대륜 동무들의 봄나들이 날이다. 날은 맑고도 흐린 상태로 태양이 구름 속에 가려져 있어 산책하기엔 딱 좋은 날씨였다. 교대역 14번 출구로 우리 일행들이 하나 둘 모여들다 보니 어느 새 약정 인원을 초과한 32명이 모여들었으며, 오전 8시 출발 시간을 다소 넘긴 15분경에 우리들 일행을 실은 45인승 대형 버스는 교대역을 출발하였다. 차안은 깨끗했고 대형 TV가 갖추어져 있었다. 잠시 달리는 사이에 이번 행사를 기획하고 추진한 구총무가 준비한 김밥과 식수 및 다과와 음료 등이 배달되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섬세한 구총무의 투철한 기획과 추진 정신이 우리 동기들의 모임을 더욱 결속하고 빛나게 하였다. 이어서 산우회장의 인사와 소개를 통해 4명의 게스트가 추가로 참가하게 된 것을 알았다. 이는 우리들의 문화 기획 탐방이 얼마만큼이나 우수하고 훌륭하며 많은 사람들이 동참을 갈망하는지 가늠할 정도였다. 우리들 각자는 버스 안에서 배식된 식사와 다과 들을 들며 담소를 하는데 시내를 벗어나 고속도로를 달리던 버스가 엉금엉금 기어가고 있었다. 상춘객들도 아닌데 지금 이 시간에 웬 사람들이 길거리로 쏟아져 나왔는지... 어제가 어버이날이라 혹 가족 단위 ‘효도 여행(?)’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렇게 가다가는 오늘의 일정이 제대로 소화되기 어렵다고 간파한 회장단이 버스기사와 잠시 대화를 주고받더니 이어서 우리들의 젊은(?) 빛나리 운전 기사가 기지를 발휘하여 고속도로가 아닌 국도로 방향을 틀었다. 고속도로는 우리들의 여행을 시샘했지만 역시 관광은 고속도로가 아닌 국도이어야 제대로 된 관광을 즐길 수 있나보다. 고속도로 주변의 휑한 풍경과는 달리 국도변 주변엔 가로수들이 달랐다. 주택 풍경과 전원까지도 모두 다르게 보였다. 세월을 거듭할수록 우리나라의 국도 주변과 전원 풍경이 자꾸만 더 아름답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마침 국도 주변의 가로수는 5월의 눈꽃이라고 부르는 하얀 꽃들로 채워진 이팝나무들이 길다랗게 식수된 채로 관광객들의 눈을 호강스럽게 맞아주고 있었다. 우리를 실은 버스는 도로 사정으로 인하여 예정시간보다 약 40분 정도 늦게 첫 목적지인 해미읍성에 도착하였다. 40분 정도 지체는 되었으나 오는 동안 두 눈들은 호강하였으리라. 해미읍성에 다다르니 구총무가 섭외한 가이드가 대기하고 있었으며, 바로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해미읍성 관광에 들었다. 해미음성은 왜구들의 잦은 침범에 대비하여 조선 초에 구축한 성곽으로써 구한말 서구 문물의 유입이 한창 고개를 쳐들 때 함께 들어온 천주교와 수많은 신자들의 박해지로 유명한 곳이다. 또한 일제의 강점기 시절 많은 독립투사들의 투옥과 처형지로써, 아울러 우리의 민족혼 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붕괴되기까지 많은 역사적 사실들을 간직하고 있는 장소로써도 유명한 곳이며, 이러한 해미읍성이 복원되고 다시 태어나 이제는 우리들 후손들과 자자손손에 이르기까지 더욱 강건한 민족혼과 민족정신을 고취시키는 무대로써 다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저 지난 해에 현재의 교황이 다녀간 곳으로써 성지로써의 역할과 위상을 높인 장소이기도 하다. 입담 좋은 해설가에 이끌려 교수목(1,000여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교수형에 처해질 때 쓰여진 나무여서 불리는 이름으로 원래 나무 이름은 회화나무임)과 병마절도사의 집무실인 동헌을 비롯하여 관아의 물품을 관리하고 출납을 맡아보던 관리(고자)들의 집무실인 고자실, 병마절도사 이외의 관리와 가족들의 살림집인 내아에 이르기까지 정신없이 설명을 듣고 따라다니다 보니, 정작 해미읍성의 성곽 산책을 못하고 제대로 감상을 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었다. 이유인즉슨 다음 일정과 예약된 식당의 시간에 쫓기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현재대로 진행해도 식당에는 3,40분 정도 늦는다고 한다. 동헌은 옛날 이순신 장군이 8품시절 잠시 충청도 병마절도사로 부임한 적이 있다고도 하였다. 특히 내아는 병마절도사 이외의 관리들이 부임할 때 식솔들을 함께 데리고 와 묵게 하는 곳으로써 그 때 부인들이 거처하는 장소라고 하는데, 예전엔 부인네들의 출입을 엄격히 통제하여 부인들이 한번 관아를 이탈하고자 하면 몇 개의 출입문을 통과해야만 하는 규제를 받았다고 할 정도로 해미읍성의 정문으로부터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오늘과 비교하여 지금은 ‘人命在天’이 아니라, ‘人命在妻’요, ‘家和萬事成’이 아니라, ‘妻和萬事成’이라고 ‘부인들에게 잘 하라’고 가이드가 너스레를 떤다. 해미읍성을 관광한 우리들은 이어서 ‘삼존마애석불’과 ‘보원사지’터로 이동하였다. 이동하는 길에 좌우에 펼쳐진 ‘서산목장’과 방목된 소들의 풍경이 장관이었다. 과거 5.16 군사 정권 이후 김종필씨가 소유하게 되면서 김종필 목장이었던 것이 전두환 정권의 등장으로 국가에 환수되어 현재는 서산목장으로 불리게 된단다. 권력의 막강함과 무상함을 함께 느끼는 명소라고 할 수 있겠다. 삼존마애석불과 보원사지터로 가는 길목엔 무릉덩(발음대로 적은 것임)이라는 커다란 저수지가 있었는데, 최치원 선생에 의해 무릉도원에 버금간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란다. 아름다운 저수지로써 ‘삼존마애석불’은 커다란 바위에 새겨진 세분의 부처상이다. 해 그림자의 위치에 따라 부처 윤곽이 달리 보이는 것이 신기했으며 국보급 보물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입장료가 없고 관리 요원이 없는 것이 이상하여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모두 서산시가 부담한다면서 은근히 뻐긴다. 세분의 부처 중 오른쪽 부처의 팔 부위 일부가 훼손된 채 지금에 이르고 있었다. 보원사지터에 이르니 절은 온데 간데 없고 당간석주와 5층 석탑 및 절터만 남아 있었다. 백제와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조에 이르기까지의 유물들이 조금씩 남아 있는 곳으로써 비록 황량한 절터이지만 예전의 전성기 시절 화려하고 웅장함을 짐작할 수 있겠다. 일제시대에 이곳에 존재한 많은 유물들은 일본놈들이 다 가져가고 종은 워낙 무거워 반출해 가지 못한 것이 현재 박물관에 보관중이란다. 하여간 일본이란 얘기만 나오면 왜 그렇게 가들이 미운지... 삼국시대부터 줄곧 한반도를 통하여 많은 문물과 교육 및 사상을 도입하여 조금 사람답게 살아가는가 싶더니만, 조선조에 이르러 조선과의 대등한 관계를 끈질기게 요구하며 조선을 속국으로 만들고자 하는 음흉한 계략을 꾸미지만 이를 알턱이 없는 조선의 위정자들은 단순히 일제들을 인륜과 도덕도 제대로 모르는 금수의 나라라고 치부하여 상대도 제대로 하지 않다가 큰 코를 다치고 다시 구한말에 나라까지 빼앗겨 버렸으니 이 울분을 어디에 토로하랴? 그러나 지금에 이르러러서도 아직도 역사의 진실을 왜곡하고 잘났다고 떠들어대는 것을 보면 역시 쪽바리들의 국가는 금수의 나라임에 틀림이 없는가보다. 아직도 한참이나 우리 조선과 한국의 도덕 및 인륜을 보급해서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고 사람 구실을 제대로 하도록 하여 이웃인 우리들과 더불어 잘 살도록 해야 하는데, 사람이 아니라서 말귀나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을런지...보원사지터에서 개심사로 올라가는 ‘아라메길’. ‘바다’라는 뜻의 ‘아라’와 ‘산’의 뜻인 ‘메’의 합성어로써 서산 인근의 청정한 바다와 아름다운 숲길을 골고루 포함하여 붙여진 이름이란다. ‘서산(瑞山)’이란 지명도 상서로운 땅이라는 의미를 가질 정도로 내부에 수려하고 길지인 옥녀봉과 가야산을 가지고 있으며 가이드에 의하면 앞으로 반세기 내에 우리나라를 책임질 우두머리가 태어난다는 믿음들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어쨌든 지금의 이 길은 정말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아름다운 산책길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처음 오르막 길은 약간의 땀이 베일 정도이었지만 주위에 펼쳐진 덜꿩나무 꽃들과 노린재 나무 꽃, 길가에 낮게 핀 각시붓꽃, 둥글레, 나리 꽃 및 일부 족두리 꽃들은 오르막길에 흘리는 땀의 댓가를 충분히 씻어내기에 좋았다. 이어서 펼쳐진 평지는 둘렛길인지, 산책길인지 혼자 걷기엔 외롭고 둘이 걷기엔 딱 좋은 폭의 길로써 길바닥엔 적당히 떨어진 솔잎과 낙엽들에 의해 양탄자와 같고 위로는 나뭇잎들이 그늘막을 만들어 주어 정말 아늑하고도 분위기 넘치는 길이었다. 구총무 말마따나 회장님을 위해 선택한 길이라고 하는데. 우리 산우회장님 이런 총무와 함께 하니 복에 겹다. 보원사지터에서 개심사까지 약 2km 가까운 길을 약 1시간에 걸쳐서 이르고 보니 개심사 마당 한 켠에 겹왕벚나무 꽃이 아직 지지 않은채 우리 일행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일반 벚꽃은 홑꽃으로써 주위에 흔하지만 겹꽃이라, 그것도 벚나무의 왕겹꽃이라니 평소 꽃만 보고는 겹홍매라고 부를 정도로 겉보기 꽃모양이 비슷했지만 잎에서 많은 차이가 있었다. 개심사 관광을 끝낸 우리들은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하산하여 개심사 아래 위치한 ‘고목나무 가든’ 식당을 찾았다. 이름난 맛집이라고 소문이 나서 그런지 많은 저명 인사들의 사인이 식당 천정 아래 벽면을 가득 채웠다. 음식 맛 역시 배고픈 터에 먹어서 그런지 더욱 맛이 있었다. 배를 불린 우리 일행들은 이곳에서 가이드와 작별하고 우리들끼리 마지막 행선지인 공세리 성당을 찾았다. 공세리란 이름은 조선 시대 충청도 서남부의 조세를 보관하던 공세창이 있었던 데서 유래하는 것으로써, 이곳에 위치한 성당은 10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들어가는 입구에서부터 언덕위 성당 본 건물에 이르기 까지 아름다운 고목과 초목 및 꽃들이 어우러진 언덕 위에 고색창연한 모습으로 우뚝 서 있으니 그야말로 한폭의 풍경화에 버금갈 정도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들 일행은 이곳에서 충분한 관광과 내일보다 하루라도 더 젊은 오늘의 모습들을 사진에 듬뿍 담은 후 귀로 버스에 몸을 싣고 마지막 여흥으로 버스 안을 달구면서 이순 봄나들이 여행을 마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