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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관적 성경읽기』(전성민,서울:(사)한국성서유니온선교회,2021)
-혐오를 일으키는 환대의 복음
-대결이 아닌 대화의 세계관
-교회 너머 인류를 위한 사명
김애경(20254501)
세계관을 공부하거나 이야기 하는 목적이 무엇인가? 그것은 궁극적으로 행동의 변화를 바라는 것이다. 새로운 정보의 습득이 관점의 변화, 사고방식의 변화를 가져오고 다른 행동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독교 세계관을 이야기 할 때 “기독교”, “세계”, “관” 세 가지 요소로 나누어 생각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한국 “기독교”의 미래가 어떤 모습일지를 상상하는 데 “세계”와 “관”이라는 요소가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를 알아보자.
먼저 “관”(觀)에 대해 생각해 보자. “견”(見:눈앞에 있는 것을 보다)과 “시”(視:꼼꼼히 들여다 보다)에서 더 나아가 “일정한 관점과 입장을 가지고 보는 것이 “관”(觀)이다. 이것은 피상적 또는 파편적으로 살피는 것을 넘어 전체를 통합할 수 있는 관점을 가지고 보는 것이다.
“세계”는 그야말로 모든 것을 말한다. 우리는 “세계”에 대한 관점을 말할 때 마치 온 세계를 조망할 수 있는 특별하고 객관적인 절대적 위치에 서 있는 듯한 착각을 하는 것이 문제다. 아무리 “세계”를 총망라하는 관점을 이야기한다 해도 그것은 특정 시간과 장소라는 맥락 속에서 형성된 것이다.
“기독교 세계관”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성경에 기초한 세계관이라면 그것이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절대적이라고 생각하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 말씀을 이해하면 하나님의 시각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함정에 빠지기 쉽다. 이것은 하나님이 창조주이시지 우리는 아니라는 인간의 근원적 한계를 무시한 교만이다. 아무리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한다 해도 우리의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경험이 성경을 읽는 틀에 영향을 주었고 주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코로나로 인해 급변하는 현재를 경험하면서 어떤 방식으로든 미래를 맞이해야만 하는 우리에게 던져야 하는 질문은 “우리가 창조해야 할 한국 기독교의 미래는 어떤 미래일까?”, “그러한 미래의 기독교 세계관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라고 저자는 말문을 연다.
그리고 한국 복음주의 기독교가 지향해야 할 방향에 대하여첫째,“지성의 제자도에서 욕망의 제자도로”, 둘째, “중심의 삶에서 경계의 삶으로”, 셋째, “혐오의 율법에서 환대의 복음으로”, 넷째, “대결의 세계관에서 대화의 세계관으로”, 다섯째, “교회의 성장에서 인류의 번영으로”라고 제안한다.
여기서는 셋째, 넷째, 다섯째 방향에 대하여 설명한다.
1. 혐오를 이기는 환대의 복음
“애매한 경계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더 많은 것을 대변할 수 있지 않을까”(경계인의 잠재력)
<싱어게인> 30호 가수 이승윤 씨에 대한 말이다.
경계를 넘어설 때 우리는 타인을 만나게 된다. 낯선 ‘다름’은 경계심을 불러일으키고, 신앙을 오염시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갖게 하고, 또 다른 한 면인 ‘우월감’은 차별과 배제, 혐오의 씨앗이 된다.
조너선 색스(Jonathan Sacks)가 「차이의 존중」(Dignity of Difference)에서 지적하는 ‘낯선 자에 대한 의심’, ‘편협한 당파주의’, ‘이교도에 대한 불관용’을 성경에서 만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배제와 포용 이 두 가지 경향 중 어떤 것이 기독교 세계관의 토대가 되어야 할까? 배제와 포용에 대한 성경의 관점을 살피기 위해, 자기 삶의 경계 너머에 있는 사람들을 만났던 요나와 베드로의 이야기를 비교해 본다. 흥미로운 것은 이 두 이야기의 배경이 욥바의 바닷가라는 것이다.
욥바의 바닷가 Ep. 1: 요나편
요나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작된 요나서는,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길 원하시는 하나님을 피해 정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도망하는 요나를 만날 수 있다. 배 안에서도 배의 밑층까지 내려가 깊이 잠들어 있는 요나의 상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묘사한다.
폭풍이 일어나 배가 부서지려 할 때 이방 뱃사람들과 요나의 모습이 대조된다. 자신의 신들에게 부르짖는 사공들과 달리 요나는 세상의 상황에 관심이 1도 없다. 제비 뽑아 당첨된 요나는 자신을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고 소개한다. 나는 당신네들과 다르다는 선민부심 사상이다.
요나의 자기도취적인 모습은 2장의 기도에서도 드러난다.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모든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라고 니느웨를 평하며 다른 사람들의 구원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 구원에만 감사하는 요나다.
니느웨 사람들의 회개로 하나님께서 예고했던 재앙을 거두시자 요나는 남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가 죽을 만큼 싫다. 자신을 덮었던 박넝쿨이 사라지자 자신에게 베풀어지는 은혜가 없어지는 것에 대해 요나는 못마땅해 죽겠다고 불평한다. 요나 자신의 분노는 항상 정당했다.
요나서는 하나님이 모든 사람과 피조물을 아끼시는 것이 옳지 않느냐는 질문으로 끝난다.
욥바의 바닷가 Ep. 2: 베드로편
요나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배타적으로 이해하며 자신만의 선민의식에 젖어 있는 사람들, 하나님의 은혜가 자기 세계를 넘어 흐르는 것이 못마땅한 사람들에 던져지는 질문에 대한 답을 사도행전 9-10장에 나오는 베드로와 고넬료의 이야기를 통해 듣는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 고넬료는 로마군대의 백부장이다. 그는 분명히 이방인이다. 고넬료가 환상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욥바에 있는 베드로를 초청한다.
정오 기도를 드리던 베드로는 온갖 부정한 동물들이 들어있는 보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환상을 본다. “일어나 잡아먹어라”는 하나님 음성 앞에서 베드로는 자신의 세계관과는 충돌되지만 하나님의 계획임을 확신하기에,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는 말을 자신과 고넬료의 경험(context)속에서 해석한다. 기독교 신앙의 근본 의미를 회복하는 해석이다.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을 먼저 부르신 것은 모든 사람을 회복하기 위한 하나님의 첫 단계이다. 그렇기에 그 계획을 성취하는 복음은 인간의 어떠한 조건도 차별하지 않는다. 베드로는 이 깨달음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전해진 평화의 복음을 고넬료의 집에서 설교한다(행10:36).
욥바의 바닷가 Ep. 3: 우리의 선택
욥바의 바닷가에서 요나는 선민부심과 그것의 이면인 차별과 혐오에 젖어 하나님의 지시를 피했다. 그러나 수백 년 후 베드로는 욥바의 바닷가에 오랫동안 굳어진 그리고 여전히 힘을 지닌 신앙적 관습과 전통을 탈피하고 성령의 새로운 역사에 동참한다.
자신이 섬기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분이라는 요나의 자부심 가득한 고백(요1:9)과, 예수 그리스도는 만유의 주님이라는 베드로의 고백(행10:36)의 대조는 또렷하다. 베드로가 욥바의 바닷가에서 했던 경험과 해석, 그리고 결단은 그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데 결정적이었다.
세계 속에는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신 너무나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다. 복음은 사람을 가리거나 가르지 않는다. 복음은 우리가 사람들을 가르는 여러 기준을 녹이고 그로 인해 생긴 담들을 무너뜨린다. 이 복음이 우리가 가져야 할 세계관의 뿌리다.
우리의 세계관은 혐오의 율법이 아니라 포용과 환대의 복음을 담아내야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욥바의 바닷가에서 혐오와 환대의 갈림길 중 어느 길로 걸어가야 할지 우리의 선택은 명확하다.
‘아담’인 하와
우리가 경험하는 혐오 중에는 성별을 향한 것도 있다.
교회 안에서도 여성 목사 안수를 반대하거나, 부부관계에서 남편의 머리됨을 강조하는 상보론과(창2:18,21-24; 고전11:7-9; 딤전2:12-14), 여성과 남성이 온전하고 동등한 파트너가 되도록 창조되었다는 평등론이(창3:6; 롬5:12-21; 행2:17-18; 고전11:5, 15:21-22; 벧전2:9-10; 계1:6, 5:10) 공존한다.
창세기 2:18
(새번역) 남자가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를 돕는 사람, 곧 그에게 알맞은 짝을 만들어 주겠다
(개역개정)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여기서 “남자”와 “사람”은 모두 히브리어 ‘아담’을 번역한 것이다. ‘아담’이라는 히브리어 단어가 한 특정 남자의 이름뿐 아니라 성별과 관계없이 일반적인 ‘사람’도 뜻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창세기 5:1-2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구절 처음에 나오는 사람이름 ‘아담’과 다음에 나오는 일반 명사 ‘사람’ 모두 히브리어로는 ‘아담’이다. 이런 사실은 창세기 1:27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창세기 1:27-28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이 본문에서 ‘사람’은 히브리어 ‘아담’의 번역이다. 즉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대로 ‘아담’을 창조하셨는데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 NIV는 27절에서 ‘아담’을 ‘인류(mankind)로 번역했다. 요컨대 여자도 ’아담‘이다.
창세기 2:18에 나오는 ‘돕는 배필’이라는 표현도 돕는 사람이 열등하다는 느낌이 아니다. 성경에 하나님은 종종 우리를 돕는 분으로 등장(예:시121편)하시는 것을 볼 때에 도움을 받는 짝보다 도움을 주는 사람이 열등하지 않다는 사실을 함께 생각해 보면, 이 구절은 성별에 관계없이 인간이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서로 돕는 공동체가 필요하다는 말씀이다.
아담과 하와 둘 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져 에덴동산을 함께 다스리는 진정한 짝이다. 그러므로 서로 돕는 공동체적 삶을 통해 인간에게 주어진 창조세계를 다스리고 돌보고 지키는 소명을 이루어 간다.
그런 삶이 진정한 하나님의 창조질서이자 십자가로 이루어진 새 창조질서, 그리고 지금 미리 살아야 할 새 하늘과 새 땅의 질서다.
2. 대결이 아닌 대화의 세계관
“대화가 필요해”
대화는 가족에게만 필요할까? 경계를 넘어가 다른 사람을 만날 때 그 다름을 어떻게 할 것인가?
다름은 대결이 이유가 될 수도, 대화의 이유가 될 수도 있다. 의견이 다른 정도가 아니라 세계관이 다를 때는 대화에 그쳐서는 안 될 것 같은 부담감이 생긴다. 다른 세계관을 포기시키고 기독교 세계관을 전파해야 할 것 같은 ‘사명감’같은 것이다. 공격적 전파는 못하더라도 잘못된 세계관들로부터 사회와 교회를 지켜야 할 것 같다. 다른 세계관들은 ‘반 기독교적(anti-Christian) 관점들인가? 정말 그럴까?
대결할 것인가, 대화할 것인가?
데이빗 A. 노예벨(David A. Noebel)의 「충돌하는 세계관」(Understanding the Time)의 첫 장 제목은 ‘세계관 전쟁이 시작되다’이다. 노예벨은 세상에서 넘쳐나는 ‘경쟁적인 세계관’들이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고 있으며, 삶, 학문, 사상의 모든 분야에서 우리 시대 가장 큰 전투가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다고 표현한다. 그런 세계관 전쟁은 생사를 걸고 행하는 싸움으로, 절대 선과 절대 악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이겨야 하는 선이고 상대는 죽여야 하는 악이다. 그러나 정말 ‘전쟁’이 기독교 세계관의 사명이자 숙명일까?
기독교 세계관의 고전이 된 제임스 사이어(James Sire)의 「기독교 세계관과 현대 사상」(The Universe Next Door)에서 사이어는 “다른 사람의 사고방식을 인식해 다원주의 사회에서 서로를 잘 이해하고 더 나아가 상호간에 진실 된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다양한 세계관을 살피는 이유라고 말한다. 그나 사이어는 유신론을 제외한 다른 세계관들은 모두 심각한 결점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판명되었다”고 말하며, 기독교 유신론만이 적절한 세계관이라고 설명하고 있어 ‘답정너’의 분위기가 난다.
세계관 선택의 기본적인 태도는 겸손이어야 하며, ‘답정너’는 겸손을 가장한 교만이기 때문이다.
「은밀한 세계관」(The Hidden Worldviews)는 제목만 본다면 나쁜 세계관들이 기독교인들의 세계관에 은밀히 스며들어 있으니 분별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저자인 스티브 윌킨스(Steve Wilkens)와 마크 L. 샌포드(Mark L. Sanford)는 은밀히 스며든 세계관들의 부적절한 요소들을 지적할 뿐 아니라 긍정적인 측면도 공정하게 평가한다.
그들은 비기독교적 세계관을 평가할 때 우리는 그것들이 기독교 세계관이 간과할 수도 있는 중요한 사상을 일깨워 줄 수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비기독교적 관점들도 기독교 세계관에 정당하게 포함되어야 할 사상을 일깨워주는 긍정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노예벨이 “반기독교적”(anti-Christian)이라고 부를 만한 것들을 윌킨스와 샌포드는 “비기독교적”(non-Christian)이라고 부른다. 반 기독교적 세계관은 무찔러야 하지만 비기독교적 세계관은 대화 상대가 될 수 있다.
대화가 필요해
기독교 세계관이 아닌 다른 세계관들은 하나님을 떠난 타락한 세계관일까?
타락의 한계에 대한 알버트 월터스의 설명은 “죄의 파괴성에도 불구하고 창조의 질서를 유지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에 타락 이후에도 인간과 세상을 긍정할 수 있다고 말한다.
비기독교적 세계관도 궁극적 실재, 인간, 세상에 대해 의미 있는 통찰을 담고 있을 수 있다. 그리고 그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다. 인간의 타락보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더 강력하다.
기독교 세계관도 현실에서 완벽하거나 완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다른 세계관과 대화가 가능할 뿐 아니라 대화가 필요하다. 우리의 세계관은 현생에서는 오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기에 기독교 세계관도 지속적으로 숙고하고 검증해야 할 필요가 있으며 이런 숙고와 검증은 많은 경우 타인과의 대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런 대화의 과정을 통해 우리는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덕목인 온유와 겸손을 연습한다. 바울이 말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도 대화의 덕목이지 대결의 덕목이 아니다.
비 그리스도인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아무도 비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딛3:2)
바울은 고린도후서 10장에서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4절)라고 말한다. 그 무기는 성령께서 사용하시는 말과 글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그 무기를 사용하는 태도는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1절)이었다.
여기 “관용”이라고 번역된 헬라어(에피에이케이아)는 “정의보다 더 정의로운 것”을 말한다. 법의 문자를 넘어 고려해야 하는 더 숭고한 덕목이 바로 “관용”이며 이 “관용”을 지닌 사람은 기독교의 기준이 정의뿐 아니라 사랑이라는 사실을 안다. 이것은 악한 자의 밭에도 비를 내리시는(마5:45) 관용적인 정의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구약에서는 전쟁을 통해 땅을 차지했다. 그러나 신약의 팔복은 무력이 아니라 온유함이 땅을 얻는 길이라고 선언한다. 비 그리스도인과 서로 도우며 함께 살아가는 다원주의 사회에서는 노예벨의 ‘전쟁’이 아닌 사이어의 ‘답정너’ 대화도 아닌, 온유하고 겸손한 대화가 기독교 세계관이 추구해야 할 길이다.
실제 상황을 대하는 자세
리처드 마우(Richard Mouw)는 「무례한 기독교」(Uncommon Decendy)에서 다양한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진리에 대한 소신을 품은 예의”를 계발해야 한다고 역설하며 그것을 “신념 있는 시민교양”이라고 표현한다. 마우는 실제 상황에 대한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온유하고 존경하는 자세로 대우한다'는 것의 한 가지 의미는 그들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격이요 여전히 그들에게 도 신의 자비가 미칠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그들과의 대화를 중단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이 란, 그들이 타인의 삶을 해치려는 의도를 분명히 보임으로써 우리에게 대화 단절을 요청하는 경우에 한다는 뜻이다. 또한
그들이 멋진 피조물로 활짝 피어나서 자기를 만드신 분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음을 결코 부인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것이 사랑이라고 말하지만 동시에 무례하지 않고, 이익을 구하지 않고, 성내지 않고, 원한을 품지 않는 것 또한 사랑의 핵심 특징이다(고전13:5-6).
광장에 선 그리스도인
사도행전17:16-34에는 광장에 선 그리스도인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바울의 일화가 나온다. 제2차 전도여행 중 아테네에 도착한 바울은 우상으로 가득한 도시를 보고 격분한다. 이에 회당에서는 유대인 청중과, 광장에서는 철학자들과 토론하고 급기야 아레오바고 법정에서 설교를 한다. 바울은 대결이 아닌 대화를 시도한 설교를 한다. 바울의 설교는 ‘오직 성경만’ 인용하지 않았다. 그들의 종교심을 인정하고(22절) 문화의 산물인 그들의 시인의 말을 인용한다(28절).
자칫 잘못하면 하나님을 여러 신들 중 하나로 오해하게 할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그들의 세계관을 하나님 설명의 출발점으로 삼았다(23). 바울이 했던 설명의 틀과 뿌리는 창조에서 시작하는 진정 우주적이고 총체적인 성경적 세계관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회개와 심판을 말한다(30-31절).
성마른 판단과 정죄, 그리고 혐오를 일으키는 ‘진리 수호’는 창조주 하나님의 복음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두려움의 표출이다. 그것은 복음과 하나님을 오해하게 할 뿐 변화를 일으키지 못한다. 진리에 대한 열정과 함께 공적 예의를 갖춘 ‘신념 있는 시민교양’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이 광장에 서기 위해 추구해야 할 덕목이다.
3. 교회 너머 인류를 위한 사명
서울대학교 물리천문학부 교수이며 「과학과 신학의 대화」 대표인 우종학 교수가 이런 말을 했다.“예배드리면 죽인다고 칼이 들어올 때 목숨을 걸고 예배드리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러나 예배 모임이 칼이 되어 이웃의 목숨을 위태롭게 하면 모이지 않는 것이 신앙입니다.”
이 말에서 우리는 신앙에 사회적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교회인가 예배당인가?
교회와 예배당은 구별이 되어야 한다. 건물은 예배당이고 공동체를 이루는 사람들이 교회다. 구약의 ‘성전’은 문자적으로 ‘하나님의 집’이다. 성막이나 성전이 지어졌을 때 주님의 영광이 그곳에 가득 찼다는 표현은 하나님이 특정한 자리에 계신다는 생각을 강화시킨다(출40:34-35; 왕상8:11).
하지만 솔로몬의 성전 봉헌기도를 보면 최고의 것으로 성전을 세워놓고 마치 허무한 개그를 하듯 그 성전은 하나님이 계신 곳이 아니라고 고백한다. 건물은 사람이 지은 것에 불과하며 하나님은 건물에 갇힌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솔로몬은 분명히 알았다.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왕상8:27)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디 계신단 말인가?
예수님은 하나님이 계시는 곳에 대해 명확히 알려 주셨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20). 이 말씀은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이 ‘교회에 가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되는 것’이라고 도전한다. 이미 “우리가 교회다”라고 격려하는 말씀이다.
신약에서 스데반의 설교에서 핵심 중 하나는 하나님이 움직이신다는 사실이다(행7장). 스데반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정리하며 하나님은 그들의 모든 여정 가운데 그들의 소리를 들으시고 그들과 함께 하셨다고 설교한다. 그리고는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니”라고 결론을 맺으며 하늘과 땅이 즉, 온 세상이 하나님의 보좌이자 발판이라는 이사야 66:1-2을 인용하며 설교를 마친다.
이 설교는 사람들을 매우 화나게 했고 급기야 스데반을 돌로 쳐 죽였다. 이렇게 시작된 박해 때문에 예루살렘 교회는 유대와 사마리아로 흩어지게 되었다. 역설적이게도 그 흩어짐 덕분에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과 함께 움직이신다는 사실이 더욱 명확해졌다. 모일 뿐 아니라 흩어지는 교회와 함께 하나님은 움직이신다.
참된 예배의 회복
언젠가는 다시 예배당에 모여 예배를 드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예배의 회복’을 보장하지 못한다. 이사야 1:11-15에서 하나님은 온갖 종류와 많은 재물을 가지고 다양한 절기에 예루살렘 성전에 모여 드린 예물에 대해 소름끼칠 만큼 무서운 반응을 보이신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 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하나님은 이어서 참된 예배를 회복하는 길을 알려주신다.
이사야 1:16-17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예배 회복의 핵심 열쇠는 예배당에서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사회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는 일상의 삶이다.
신앙은 교회의 부흥에 그치지 않고 인간의 번영을 추구한다. 인류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서 함께 살아야 할 공동체이며, 하나님은 인류의 번영 자체를 바라고 기뻐하시며, 새 하늘과 새 땅은 온 인류의 번성한 문화로도 채워질 것이기 때문이다(창1:28; 사60:4-9; 계21:24-27).
그래서 우리는 사회의 건강을 위해 ‘예배당에 모이지 않는 것이 신앙’이라는 말을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과 함께 하실 때 그들의 모임이 교회이며, 예수님은 성도의 공동체인 교회의 머리가 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길 위에서 그 움직이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알아간다. 더 이상 장소는 문제가 아니다. 영과 진리만이 문제다(요4:21-24).
기독교 세계관은 평화의 세계관이다
지금 한국 기독교에는 혐오와 차별의 근본주의 신학이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이름으로 퍼지고 있다. 적지 않은 보수 혹은 근본주의 신학의 바탕위에 ‘세계관 전쟁’이라는 명목으로 혐오와 차별을 부추기고 정당화하기까지 한다.
지금 한국 복음주의를 관찰하면 반진화(anti-evolution), 반이슬람(anti-Islam), 반공주의(anti-communism), 반동성애(anti-homosexuality)라는 특징을 찾아낼 수 있다. 이 네 가지 안티의 공통점은 두려움이다. 이는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지 않는 사랑의 실패이자 자신의 의제(egenda)를 효과적으로 이루게 해줄 도구로만 취급하는 사랑의 실패다.
기독교 세계관은 하나님이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모든 사람을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셨다는 고백이 가장 중요하고 포용과 환대를 추구하는 평화의 세계관이어야 한다.
기독교 세계관의 토대가 되는 성경 이야기를 흔히 “창조-타락-구속”이라는 주제로 요약한다. 그러나 송인규 교수는 “창조-보존-화목”을 제안한다. 이 방식들의 차이를 논하기 전에 두 가지 방식 모두 “창조”로 시작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타락은 결코 성경 이야기의 시작이 아니다. 인간은 죄인이기 전에 하나님의 형상이다.
“온 세상을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선언과 함께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다”는 고백도 기독교 세계관의 핵심이다.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이 선하게 창조하신 세상 가운데서 타락 이후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인(창9:6; 약3:9)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간다.
“창조-보존-화목”의 세계관은 인간이 타락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보존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주목하고 더욱 진지하게 성찰할 수 있다. 또한 인간의 타락은 이 세상을 보존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이기지 못한다. 기독교 세계관은 인간의 반역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여전히 사랑하시고 보존하시는 이 세상이 하나님께 의미가 있으며 동시에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세상이라고 알려주는 세계관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토대 위에 한국 교회와 복음주의가 사랑을 회복하기 위해 추구해야 하는 기독교 세계관의 자리와 방향을 “지성 너머 욕망의 제자도”, “중심이 아닌 경계의 삶”, “혐오를 이기는 환대의 복음”, “대결이 아닌 대화의 세계관”, “교회 너머 인류를 위한 사명”으로 제안하며, 요컨대 우리가 추구해야 할 기독교 세계관은 “평화의 세계관”이다.
평화를 이루는 피가 흐른 십자가는 평화의 십자가다. 이 세상은 평화를 누려야 하는 세상이다. 예레미야는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던 사람들에게 “그곳을 고향삼아 지내고 그 나라를 위해 일하여라. 그리고 바벨론의 번창을 위해 기도하여라. 바벨론이 잘 되는 것을 너희에게도 좋은 일로 여겨라”(렘29:7,메시지성경)라고 편지했다.
바벨론은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가 아니고 세속사회다. 하지만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그곳의 번창을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번창”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평화’라고 번역하는 ‘샬롬’이다. 유진 피터슨은 ‘샬롬’을 “온전함, 곧 한 사회의 역동적이고 생동감 있는 건강을 뜻하는 것으로, 그런 사회는 신의 목적에 합당한 방향으로 고동치고 삶을 변혁시키는 사랑으로 물결치는 사회”라고 설명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더라도, 그 사회를 역동적이고 건강한 사회, 하나님의 뜻에 어울리는 세상으로 만드는 시민의 몫을 감당해야 한다. 평화는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비전이다.
우리는 이제 기도해야 한다. 머리와 마음, 그리고 몸을 다해~
“그가 다스리는 동안, 정의가 꽃을 피우게 해주시고, 저 달이 다 닳도록 평화가 넘치게 해주십시오”(시72:7, 새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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