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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요약]
■노수신(盧守愼)
1515년(중종 10) - 1590년(선조 23)
조선 전기에,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과회(寡悔), 호는 소재(穌齋) · 이재(伊齋) · 암실(暗室) · 여봉노인(茹峰老人). 우의정 노숭(盧崇)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활인서별제(活人署別提) 노홍(盧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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記言別集卷之十六
원임 영의정 소재 노 선생(盧先生)의 휘는 수신(守愼)이요, 자는 과회(寡悔)이다. 노씨는 삼한(三韓)의 대성(大姓)으로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고려 감문위 대호군(監門衛大護軍) 서(恕)가 좌우위 대호군(左右衛大護軍)으로 치사(致仕)한 단(亶)을 낳았고, 단은 감찰지평(監察持平) 준경(俊卿)을 낳았고, 준경은 숭(嵩)을 낳았는데 본조(本朝)에 들어와 우의정이 되었다.
우의정에서 2대 를 내려와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 상례(尙禮)가 있고, 지사간원사에서 2대를 내려와 동지중추(同知中樞) 덕기(德基)가 있다. 이분은 혜장왕(惠莊王) 때에 출처대절(出處大節)로 이름났으며 그 사적이 김 문간공(金文簡公)이 지은 지석문(誌石文)에 기록되어 있는데 선생의 5대조가 된다.
증조는 돈녕부 참봉(敦寧府參奉)을 지내고 이조 판서로 추증된 경장(敬長)이고, 조부는 풍저창 수(豐儲倉守)를 지내고 의정부 좌찬성으로 추증된 후(珝)이고, 부친은 활인서 별제(活人署別提)를 지내고 의정부 영의정으로 추증된 홍(鴻)인데, 모두 선생의 관직이 높아짐에 따라 삼대(三代) 조상을 추은(推恩)한 것이다. 모친 정경부인(貞敬夫人) 이씨(李氏)는 성주(星州)가 본관으로, 예조 참판 자화(自華)의 따님이다.
선생은 총명하고 박학하였으며, 문장을 지을 때에 특히 경술(經術)에 깊은 조예를 보였다. 성동(成童)이 되기도 전에 이미 문학으로 이름이 났다. 17세에는 탄수(灘叟) 이연경(李延慶)의 사위가 되었고 이로 인해 그분을 스승으로 섬겼다. 20세에는 박사제자(博士弟子)에 선발되었는데 태학의 선비들 가운데 선생을 공경하는 자들이 많았다.
모재(慕齋) 김 문경공(金文敬公)이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로 있으면서 시습잠(時習箴)으로 제생(諸生)을 시험하고는 인재가 떨쳐 일어나지 못하는 것을 한탄하다가 선생의 작품을 보고는 다시 탄식하기를, “말이란 신중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하였다.
27세에 예를 갖추어 처음으로 회재(晦齋) 이 문원공(李文元公)을 찾아가 마음을 보존하는 방법에 대하여 가르침을 청하였는데, 문원공이 손바닥을 가리키며, “여기에 어떤 물건이 있다 치자. 손으로 꽉 잡으면 깨져버리고 꽉 잡지 않으면 잃어버리는 것, 이것이 바로 마음이다.”
하니, 선생이 기뻐하며, “이 말씀은 맹자(孟子)의 이른바 ‘잊지도 말고 조장(助長)하지도 말라.’는 것과 다름없는 말입니다.”하였다.
가정(嘉靖) 22년(1543, 중종 38)에 갑과(甲科) 제1명으로 급제하여 처음으로 성균관 전적에 제수되고, 이어 홍문관 수찬으로 옮겼다. 이듬해에 세자시강원 사서로 옮겼는데, 이때 남긴 〈서연강의(書筵講義)〉가 있다. 퇴도(退陶) 이 문순공(李文純公)과 함께 독서당(讀書堂)에 선발되어 도학(道學)으로 서로 추중(推重)하였다.
그해에 공희왕(恭僖王)이 승하하고 영정왕(榮靖王)이 즉위하였다. 이듬해 을사년(1545, 인종1)에 사간원 정언이 되어 이기(李芑)를 간사한 소인으로 논핵한 후 이조 좌랑으로 자리를 옮겼다. 영정왕이 즉위한 지 8개월 만에 승하하고 공헌왕(恭憲王)이 즉위하자, 윤임(尹任)의 일로 사화(士禍)가 일어나 선생이 직첩을 환수당하고 충주(忠州)로 돌아왔다.
3년에 정언각(鄭彦慤)이 올린 벽서(壁書)로 인하여 을사사화(乙巳士禍)에 연루된 사람들에게 죄를 더하게 됨에 따라 선생이 처음에는 순천(順天)으로 유배되었다가 그해에 진도(珍島)로 이배(移配)되었는데, 이때 지은 시로 〈옥주이천언(沃州二千言)〉이 있다.
선생은 진도에서 19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하였다. 바닷가 섬 지방이라 백성들이 우매하였는데, 선생이 예속(禮俗)으로 그들을 가르치자 비로소 시집가고 장가드는 일에도 예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곳에서 〈인심도심변(人心道心辨)〉, 〈집중설(執中說)〉, 〈숙흥야매잠해(夙興夜寐箴解)〉를 저술하였는데, 이 문순공이 이를 보고는 “사도(斯道)가 동방에서 없어지지 않았다.” 하였으니 두 분 사이에 주고받은 서한이 있다.
공헌왕(恭憲王)이 즉위한 지 20년 만에 비로소 을사사화에 관련된 사람들을 풀어 주었는데, 선생은 이때 괴산(槐山)으로 이배되었다.
소경왕(昭敬王)이 즉위하자 이 충정공(李忠正公)이 상에게 아룀에 따라 마침내 서용되어 홍문관 교리에 제수되었다. 이듬해에 홍문관 직제학으로 승진하고 예문관 응교를 겸하였다가 얼마 후 부제학으로 승진하였다.
부모님을 봉양하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청하자, 상이 대신의 말을 들어 특별히 청주 목사(淸州牧使)에 제수하였다. 얼마 후 호서도 관찰사(湖西道觀察使)로 자리를 옮기게 되자 선생이 통치의 근본에 대하여 수천 마디의 상소를 올리고 이어 〈숙흥야매잠해〉를 올리니, 상이 이를 교서관(校書館)에 내려 간행하게 하였다.
이때 의정공(議政公)이 돌아가시어 상을 치르게 되었는데 병이 위독하여 거의 상을 치르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 이 일이 조정에 보고되자 상이 특별히 의관(醫官)을 보내어 문병하였다. 이에 선생이 상소를 올려 사은하고는 임금으로서 경계해야 할 여섯 가지 조목을 바쳤다.
그 내용은,
첫째 경전에 대한 훈고적(訓詁的) 풀이를 하는 데에만 힘쓰고 그 속에 담겨 있는 실제 의리(義理)를 찾아내는 것에 대해서는 힘쓰지 않는
것,
둘째 정사의 흠을 살피는 데에만 힘쓰고 다스리는 방도를 세우는 데에는 힘쓰지 않는 것,
셋째 권력을 잡는 데에만 힘쓰고 인심(人心)에 맞추어 정사를 하는 데에는 힘쓰지 않는 것,
넷째 전례(前例)를 따르는 데에만 힘쓰고 고의(古義)에 따라 행하는 데에는 힘쓰지 않는 것,
다섯째 아첨하는 신하를 좋아하기만 할 뿐 정직한 신하를 아낄 줄 모르는 것,
여섯째 재주나 기예가 있는 신하만 좋아할 뿐 기량이나 식견이 있는 신하를 중히 여길 줄 모르는 것 등이었다.
그 당시에 또 이 문순공과 상제례(喪祭禮)에 대하여 강론하는 편지도 주고받았다.
삼년상을 마치고 대사간에 제수되어 사직을 청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였으며, 특별히 대사헌에 제수되어 또다시 간곡하게 사직을 청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였다. 모친의 병으로 말미를 청하자 상이 이르기를, “경을 하루라도 곁에 두지 않을 수 없으니, 노모를 모시고 서울로 올라오도록 하라.”하고는 현(縣)과 도(道)에 명하여 함께 이 일을 돕도록 하였다.
선생이 서울에 들어오자 상소를 올려 오가는 길에서 본 백성들의 형편에 대해 아뢰었는데, 상이 노고를 위로하면서 또 이르기를, “어질고 재능 있는 인물을 임용하고 고을의 수령을 잘 선택하여 먼저 백성들을 부유하게 한 다음에야 조종(祖宗)의 치적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임신년(1572, 선조 5)에 이조 참판에 제수되었다가 이어 판서로 승진되었다. 그때 현황제(顯皇帝)가 즉위하여 등극을 반포하는 조사(詔使)가 나오게 되었는데, 선생이 상빈(上儐)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여 관반(館伴)으로 개차(改差)되었다. 이어 대제학에 제수되어 상관의(祥冠儀)를 지어 올렸다.
이듬해인 계유년(1573)에 우의정에 제수되었다. 선조 원년에 교리로 부름을 받은 이래 1년에 세 번 자리를 옮겨 대사간이 되었고, 부친상으로 관직을 떠났다가 다시 들어와 겨우 3년 만에 삼공(三公)의 지위에 올랐으니, 관직에 중용됨이 그 어디에도 비할 바가 없었으며 사방 사람들이 모두 선모(羨慕)하였다.
여름에 상이 삼공과 천관(天官)에게 학행(學行)이 있는 자를 천거하라고 명하자 선생은 조목(趙穆), 이지함(李之菡), 김천일(金千鎰), 최영경(崔永慶)을 천거하였고, 또 선비 유몽학(柳夢鶴), 기대정(奇大鼎), 홍가신(洪可臣), 유몽정(柳夢井)을 천거하였는데, 모두 6품관에 제수되었다.
재이(災異)가 발생하자 병을 핑계하고 물러날 것을 매우 강력히 청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이에 정원(政院)과 옥당(玉堂)이 모두들 국가의 원로를 떠나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고, 대신들도 상에게 건의함에 따라 결국 다시 정승에 복귀하였다. 정업원(淨業院)을 철폐하고 장오법(贓汚法)을 엄중히 시행할 것을 청하였다.
을해년(1575, 선조 8)에 인순대비(仁順大妃)가 승하하자 선생이 좌상 박순(朴淳)과 함께 백모(白帽)와 백대(白帶) 차림으로 삼년상을 마치자는 건의를 올리니, 상이 따랐다. 당시에 당론(黨論)이 크게 일어나자 선생이 상에게 건의하여 심의겸(沈義謙)과 김효원(金孝元)을 외직으로 좌천시키자고 청하였다.
그리고 곽월(郭越)이 상소를 올려 시사(時事)에 대하여 말한 것 가운데 “외부 사람이 궁중과 내통하여 사림(士林)을 해치려 한다.”라는 말이 있어 상이 진노하자 선생이 아뢰기를, “이 말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신 또한 들었습니다. 곽월이 길에서 주워들은 말을 경솔하게 믿고서 그렇게 한 것이니 곽월이 잘못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 말을 했다 하여 말한 사람을 죄주어서는 안 됩니다.”하였다.
정축년(1577)에 인성대비(仁聖大妃)가 위독한 가운데 대신에게 교서(敎書)를 내렸는데, 이류(李瑠), 윤임(尹任), 유관(柳灌), 유인숙(柳仁淑) 등을 복관(復官)하는 일이었다. 상이 이 일에 대처할 방법을 하문(下問)하자 선생이 아뢰기를, “신은 그들과 함께 을사년에 처벌을 받은 바 있는 죄인입니다.
따라서 말을 하건 하지 않건 모두 죄가 됩니다만 이 네 사람의 관작을 회복하여 대비를 위로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였는데, 의정부에서도 이어 을사년의 공훈(功勳)을 삭제하고 당시에 연좌(連坐)된 사람들을 풀어 주고 적몰(籍沒)한 재산을 돌려줄 것을 청하였다.
무인년(1578, 선조 11) 정월에 흰 무지개가 해를 관통하여 뻗쳤으므로 사직을 청하였으나 윤허받지 못하였다. 그때 대부인의 나이가 80여 세였으므로 상이 미두(米豆) 30석과 술, 말린 고기, 생선포 등 음식물을 하사하였다. 선생이 전문(箋文)을 올려 사은하고 이어 끊임없이 사직을 청하여 드디어 판중추부사에 제수되었는데, 얼마 후 다시 정승에 제수되었으니 이는 대신이 상에게 건의하였기 때문이다.
간관(諫官) 강서(姜緖)가 교만함을 경계하는 말을 올렸는데, 그 말이 너무나 솔직하였으므로 분위기가 그만 숙연해져서 두려운 마음에 아무도 감히 말을 꺼내지 못하였다. 그때 선생이 아뢰기를, “강서가 올린 말은 사람들이 말하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고, 상께서도 듣기 싫어하는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옛사람의 말에 ‘임금이 어질면 신하가 솔직해진다.’라고 하였는데, 상께서 이처럼 간언을 받아들이시니 이런 신하가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하니, 상이 기뻐하였다. 교리 김우옹(金宇顒)이 성운(成運)에게 관직을 추증할 것을 아뢰자 선생이 아뢰기를, “조식(曺植), 성운(成運), 이항(李恒) 이 세 분은 선왕(先王)의 징소(徵召)를 받은 분으로서, 조식은 지조가 높고 성운은 겸양(謙讓)하였으니 모두 자신의 절조만을 지킨 인물입니다.
반면에 이항은 평실(平實)한 학문으로 후학들을 깨우쳐 배우는 이들에게 끼친 공로가 많습니다. 따라서 이번에 포전(褒典)을 시행한다면 마땅히 이항을 우선으로 하고 성운을 그 다음으로 해야 할 것입니다.”하였다. 이때 조식은 이미 대사간(大司諫)에 추증된 상태였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겨울에 상이 편찮으시자 선생이 침소로 불려 들어가고 다른 대신들도 따라 들어갔는데, 상이 선생의 손을 꼭 잡고 이르기를, “사자(嗣子)를 잘 보필하도록 하라.”하니, 선생이 대답하기를, “신이 목숨을 걸고 보필하겠습니다.”하였다. 상이 병에서 회복된 후 삼공(三公)을 인견하여 선비를 천거하게 하니, 선생이 민순(閔純)을 천거하였다.
신사년(1581, 선조 14) 봄에 재이로 인하여 더욱 강하게 사직을 청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정철(鄭澈)이 비답을 지어 올렸는데, 그 속에 선생을 나무라거나 모욕하는 말이 많았으나 상이 이를 알고도 고쳐 짓게 하지 않았다. 그래서 선생이 계속해서 강하게 사직하자, 상이 이르기를, “하늘이 경을 과인에게 내려 준 것이니 떠나서는 안 된다.”하였다.
그해 9월에 모친 정경부인이 별세하니, 상이 특별히 예를 갖추어 조부(弔賻)를 내리며 이르기를, “지나치게 몸을 손상시켜 주변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말라.”하고, 날씨가 차고 길이 먼 것을 염려하여 담비 갖옷을 벗어 약물과 함께 하사하였다. 그리고 묘소를 지키지 말고 반곡(反哭)하라고 하였으며 열읍(列邑)으로 하여금 상사를 돕게 하였다.
장사를 치르기 전에 선생이 직접 초상을 치른다는 소식을 상이 듣고는 몸조심할 것을 매우 간절히 하유하였고, 장사를 치른 후에는 또 묘소를 지키지 말고 반곡하라는 명을 내렸다. 반곡한 뒤에는 선생이 여막에서 거적과 풀 베개에 거친 밥으로 지냈는데, 선생의 나이가 이미 67세였으므로 상이 우려하여 끊임없이 권도(權道)를 쓰라고 권유하면서 미두(米豆)를 하사하였고, 겨울이 되자 또다시 하사하였다.
이에 선생이 상소를 올려 사은하기를, “벼슬을 할 때에는 봉록을 받아서 봉양을 하였고 초상을 당해서는 하사물을 받아서 제사를 지냈으니, 신의 어미는 살아서나 죽어서나 신이 아무런 공로도 없이 받은 음식을 먹은 셈입니다.”하였다. 대상(大祥)이 다가오자 고향으로 돌아가 가묘(家廟)에 신주(神主)를 모시게 해 주기를 청하였다.
그때에 좌상(左相)의 자리가 비어 있었고 바야흐로 붕당을 지어 서로 공격하여 조정이 크게 어지러웠으나 상이 그 자리를 비워 두고 기다렸다가 선생이 복(服)을 마치자마자 좌의정에 제수하였다. 선생이 상소를 올려 사직을 청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고 특별히 승지를 보내어 소명(召命)을 내렸으며, 또 사관(史官)을 보내어 중도에 문안하고, 한강(漢江) 가에 이르자 술을 하사하는 등 선생에 대한 예우가 매우 각별하였다.
을유년(1585, 선조 18)에 나이가 들어 사직을 청했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고 궤장을 하사한 후 영의정으로 올려 제수하였다. 왕명에 사은한 후 상에게 박근원(朴謹元), 송응개(宋應漑), 허봉(許篈)을 모두 전리로 돌아가게 해 주기를 건의하였는데, 이 가운데 박근원은 이미 죽은 후였다. 이 세 사람은 계미년(1583, 선조16)에 쟁론을 하다가 죄를 얻어 ‘삼찬(三竄)’이라고 불린 이들이다.
병술년(1586) 4월에 흰 무지개가 해를 관통하여 뻗쳤으므로 상소하여 사직을 청하였으나 윤허받지 못하였다. 겨울에 십청정(十靑亭)에 편액(扁額)을 달았으며 자명(自銘)을 지었다. 정해년(1587)에 또다시 나이를 들어 사직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자 상이 윤허하였는데, 대신이 상에게 아뢰기를, “바야흐로 중외에 근심거리가 많아 노 아무개의 덕망이 아니면 진정시킬 수가 없으니 떠나게 해서는 안 됩니다.”하여 마침내 그 명을 거두었다.
이듬해 여름에 또다시 강하게 사직을 청하여 윤허를 받았으나 얼마 후 상이 특명을 내려 관직을 다시 제수하고 하교하기를, “사관(史官)을 보내면 연로한 노 아무개가 예를 행하지 못할 것이니 본부(本府)의 낭관(郞官)으로 하여금 선유(宣諭)하게 하라.”하였다. 선생이 그래도 계속해서 사양하자 상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이배(移拜)하였다.
기축년(1589, 선조22) 봄에 봉조하(奉朝賀)가 되기를 청했으나 윤허받지 못했으며, 또 치사(致仕)를 청했으나 윤허받지 못하였다. 일본(日本)의 왜(倭)가 사신을 보내 화친을 요구하자 이 일을 대신에게 의논하도록 하였는데, 선생이 아뢰기를, “천하 사람들이 악(惡)으로 여기는 것은 모두 똑같습니다. 풍신수길(豐臣秀吉)은 제 임금을 시해한 자이니 의리상 교류하여서는 안 됩니다.”하였다.
겨울에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을 고변한 사건으로 대대적인 옥사가 일어났다. 선생이 예전에 왕명을 받고 김우옹(金宇顒) 등을 천거하였는데, 정여립이 그 당시 명성이 높았으므로 그의 이름 또한 천거한 명단 속에 들어 있었다. 이에 상이 이르기를, “노 아무개에 대해 매우 후하게 예우를 하였는데 죄인을 끌어다 등용하였으니, 이는 나라의 위망(危亡)과 관계된 것이요 의리상으로 보아도 매우 엄중하게 처리해야 한다.”하였다.
선생이 곧장 국문(國門) 밖으로 나가 죄인을 자처하며 처벌을 기다리자 상이 대신의 말을 받아들여 판중추부사의 직책을 파직하였다. 이때에 정철(鄭澈)이 좌상으로서 실제로 옥사를 주관하였는데 옥사가 점점 확대되어 진신(縉紳)들이 크게 화를 입게 되자 사람들이 두려워하였다.
어떤 이가 전례(前例)를 끌어다 스스로 해명을 하라고 권하자 선생이 말하기를, “이미 잘못 천거한 이상 법으로 용서받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어찌 스스로 변명하여 죄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4월 7일에 별세하였다.
선생은 정덕(正德) 10년(1515, 중종 10)에 태어나 만력(萬曆) 18년(1590, 선조23)에 별세하니 향년 76세이다. 고향 화령(化寧)에 안장하였으며 장례 때 자신이 지은 묘지명(墓誌銘)을 썼다. 정경부인 광릉 이씨(廣陵李氏)는 선생과 같은 해에 태어나 선생이 돌아가신 해 3월 11에 별세하여 선생의 묘소에 부장(祔葬)되었다.
아들이 없어 종자(從子)인 대해(大海)를 후사로 삼았는데 영천 군수(榮川郡守)를 지냈다. 측실(側室)에서 아들 셋에 딸 하나를 두었는데, 아들은 계래(戒來), 계난(戒難), 계후(戒後)이고 사위는 파주 목사(坡州牧使) 허징(許澂)이다. 대해는 예천 군수(醴泉郡守) 도형(道亨)을 낳았다.
도형은 아들 셋에 딸 넷을 낳았는데, 아들은 생원 석명(碩命), 안변 도호부사(安邊都護府使) 준명(峻命), 봉화 현감(奉化縣監) 경명(景命)이고, 사위는 응교(應敎) 심대부(沈大孚), 진사 유덕구(柳德耈), 도사(都事) 이항(李沆), 진사 이홍석(李弘奭)이다.
선생의 학문은 인륜과 일상생활에서 지켜야 할 준칙에 대하여 독실하게 연구하였고 하늘의 덕과 하늘의 도가 무엇인지 터득하였으며 이를 땅 위의 온갖 사물에 대해서까지 확대해 나갔다. 그리하여 부모를 섬기고 형제와 함께 지내며 벗들과 사귀는 일에서부터 시작하여 임금을 섬기고 백성들을 교화하는 일에까지 미쳐 나갔다.
그 차례는 자신에게 근본을 두고서 가정에서 시작하였으며, 이를 다시 나라에까지 미루어 나가 임금의 잘못된 마음을 바로잡고 대의(大義)를 바로 세우며, 어진 인재를 천거하고 옛 제도를 준수하며 통치의 요체를 밝혔으니, 이러한 내용은 〈서연강의(書筵講義)〉, 〈구색록(懼塞錄)〉, 〈양정록(養正錄)〉에 잘 드러나 있으니 이는 모두 임금에게 학문에 전념할 것을 권장하는 글이다.
선생이 섬에 유배되어 깊은 시름과 곤궁 속에서도 재주와 학식을 함양하여 마침내 크게 쓰이게 된 것은 하늘의 뜻이었다. 선생의 문장이 매우 고매하므로 학사(學士) 용주(龍洲) 조경(趙絅)이 말하기를, “그의 시부(詩賦)는 상고 시대 시문의 기운(氣韻)이 있어 은유(殷卣)와 주이(周彜)에 견줄 만하다.”하였다.
선생은 옛 성인과 현인의 글을 탐독하여 훌륭하고 아름다운 문장에 푹 빠졌고 이것을 축적하여 자신의 문장을 지었다. 그러므로 기이하면서도 법식에 맞는 《역경(易經)》의 문장과 바르면서도 아름다운 《시경(詩經)》의 문장과 신중하고 엄격한 《춘추(春秋)》의 문장은 바로 선생이 문장을 지을 때 늘 견지해 온 표준이 되었다.
어떤 이들은 선생의 문장이 송유(宋儒)들과 같지 않다고 의심하지만, 왕봉주(王鳳洲)의 “이치를 담론한 것에도 사람마다 차이가 있으니, 무숙(茂叔)은 간결하고 준엄하며 이정(二程)은 명확하고 합당하며 자후(子厚)는 차분하고 심오하다.”라는 말과 같이 도학을 보위한 면에서는 이들 모두와 똑같다.
선생의 운문은 섬에서 유배 생활을 한 19년 동안에 지어진 택반음(澤畔吟)으로, 굴 좌도(屈左徒)가 깊은 시름과 그리움 속에 지은 시들과 운치가 같다. 장계곡(張谿谷)은 소재(穌齋)의 기품과 인격은 사람들 가운데 우뚝이 뛰어나다고 평가하였고, 최간이(崔簡易)와 차창주(車滄洲)는 본조의 300년 문장가들 가운데 누구도 미칠 만한 사람이 없다고 하였으니, 아! 어찌 후세의 자운(子雲)을 기다리겠는가.
선생의 별호(別號)는 소재 또는 이재(伊齋), 암실(暗室)이다. 마지막으로 좌상 정공 탁(鄭公琢)이 상을 모시고 조용히 아뢰기를,
“아무개가 어질다 하여 상께서 매우 깊이 믿고 맡기셨는데 하루아침에 천거를 잘못한 죄로 배척을 받았으니 사람들이 애석해하고 있습니다.”하였으나 상이 들어주지 않았다.
광해군 2년에 조정에서 의논하여 선생을 소경왕(昭敬王)의 묘정(廟廷)에 배향할 것을 청하였는데, 광해군이 끝을 잘 마치지 못했다 하여 이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선생이 별세한 뒤에 옥주(沃州) 사람들이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냈으며, 상주(尙州)의 도남서원(道南書院)과 충주(忠州)의 계상사(溪上祠)에서는 선생을 합향(合享)하였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도덕을 겸비하고 학문을 널리 닦았으니 / 道德博文
인이 되고 / 仁也
나라를 예로써 다스렸으니 / 爲國以禮
경이 되고 / 敬也
할 말을 숨김없이 다 했으니 / 盡言無隱
충이 되고 / 忠也
곧은 의리로써 정도를 지켰으니 / 守經直義
정이 된다 / 正也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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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穌齋先生神道碑銘
原任領議政穌齋盧先生。諱守愼。字寡悔。盧氏。三韓大姓。本於光山。高麗監門衛大護軍恕生致仕左右衛大護軍亶。亶生監察持平俊卿。俊卿生嵩。入本朝爲右議政。右議政二世。有知司諫院事尙禮。知司諫院事二世。有同知中樞德基。在惠莊王時有出處大節。事在金文簡公所撰誌石文。於先生爲五世祖。曾祖敦寧府參奉贈吏曹判書敬長。祖豐儲倉守贈議政府左贊成珝。父活人署別提贈議政府領議政鴻。皆以先生貴故。推恩三世者也。母貞敬夫人李氏。籍星州。禮曹參判自華之女也。先生聰明博學。爲文章。尤深於經術。未成童。旣以文學名。十七。灘叟李先生延慶。妻以女。仍師事之。二十。選博士第子。學中士多敬之者。慕齋金文敬公知館事。以時習箴試諸生。歎人才不競。見先生作。復歎曰。言不可不愼。二十七。以禮初見晦齋李文元公。請聞存心之術。文元公指掌曰。有物於此。握則破。不握則亡。先生喜曰。此忘助之異名也。嘉靖二十二年。擢甲科第一名。初授成均典籍。移弘文修撰。明年。遷侍講司書。有書筵講義。與退陶李文純公同選書堂。以道學相推許爲重。其年恭僖王薨。榮靖王立。明年乙巳。爲諫院正言。論劾李芑傾邪小人。移吏曹佐郞。榮靖王立。八閱月而薨。恭憲王立。有尹任事。士禍起。先生收職牒歸忠州。三年。鄭彥愨上壁書。加罪乙巳人。先生初配順天。其年遷珍島。作沃州二千言。先生在珍島十九年。誨中固貿貿。先生敎以禮俗。始知嫁娶有禮。著人心道心辨執中說,夙興夜寐箴解。李文純公見之曰。斯道不亡於東方。有往復書。恭憲王立二十年。始解乙巳人。先生量移槐山。及昭敬王立。李忠正公白上。遂有收敍之事。先生拜弘文校理。明年。陞拜直提學兼藝文應敎。尋陞副提學。乞歸養。上用大臣言。特拜淸州牧使。尋改湖西道觀察使。先生上治本數千言。仍進夙興夜寐箴解。上下校書。令刊行。時議政公歿而奔喪。幾不勝喪。事聞。上特遣醫問之。先生上疏謝。進君德之戒六事。一。務討訓解。不務求實義。二。務察瑕類。不務立治道。三。務攬權柄。不務合人心。四。務循前例。不務行古義。五。務悅諂諛。不務愛正直。六。務喜才藝。不務重器識。時有與李文純公講喪祭禮書。旣三年。拜大司諫。辭不許。特拜大司憲。又固辭不許。以母病請告。上曰。卿一日不可不在左右。以老母來京。仍令縣道共行事。及入京。上疏言民事。上爲之勞慰。且曰任賢才。擇守令。先致富庶。然後庶復祖宗之治。壬申。拜吏曹參判。仍陞拜判書。時顯皇帝卽位。頒登極詔使來。先生爲上儐。辭改館伴。仍拜大提學。上祥冠儀。明年癸酉。拜右議政。上之元年。以校理召還。一年三遷。爲大司諫。以憂去。復入才三年。致位三公。尊用無比。四方想望。夏。上命三公同天官。薦有學行者。趙穆,李之菡,金千鎰,崔永慶。又薦士四人。柳夢鶴,奇大鼎,洪可臣,柳夢井。皆授六品爵。有災異。因辭疾乞免甚力。上許之。政院玉堂。皆以爲國之元老不可去也。大臣亦白上。遂復相。請撤淨業院。申嚴贓汚法。乙亥。仁順太妃薨。先生與左相朴淳。上白帽帶終三年議。上從之。時黨議大起。先生白上。沈義謙,金孝元兩貶補外。郭越上疏言事。有外人通宮禁。伐士林之言。上怒。先生曰。此言相傳臣亦聞之。越輕信塗聽。越雖過矣。不可以言。罪言者也。丁丑。仁聖大妃大漸。下敎大臣。瑠,任,灌,仁淑復官事也。上問之曰。事何如。對曰。臣乙巳罪人。言不言皆罪也。復四人官爵。以慰太妃可也。政府仍請削其勳。釋連坐。還籍沒。戊寅正月。白虹貫日。乞免不許。時大夫人八十餘。上賜米豆三十碩。酒,脩魚,腊,食物。先生上箋謝。仍乞辭不已。拜判中樞。尋復相。大臣白上也。諫官姜緖。進驕溢之戒。言甚切直。左右肅然畏憚之。不敢言。先生曰。緖之言。人之所難言者而能言之。上無厭聞之色。古人曰。君仁則臣直。上容諫如此。宜有臣如此也。上悅。校理金宇顒。言成運贈爵事。先生曰。曺植,成渾,李恒。先王召此三人。植高運謙。皆自守之士。恒平實。開牗後學。多有功於學者。今行褒與。當先恒而後運也。時植已贈大司諫矣。冬。上不豫。先生召入臥內。諸大臣從之。上執手言曰。善輔嗣子。先生對曰。臣當死生以之。上旣疾止。引見三公。令薦士。先生薦閔純。辛巳春。因災異。乞免益力。上不許。鄭澈撰批答。文頗有譏侮語。上覺之。然無改作之事矣。先生仍力辭不已。上曰。天以卿授寡人。不可去也。其九月。貞敬夫人卒。上特加禮以賜弔賻。曰母過毀。缺四方之望。念日寒途遠。解貂裘幷賜藥物。令母守塜返哭。令列邑共喪事。未葬。上聞先生居初喪之節。禮諭甚切。旣葬。又有返哭之命。旣返哭。先生居倚廬。寢苫枕草。食疏食。先生已六十七。上憂之。勉以權制不已。賜米豆。至冬。又賜之。先生上疏謝曰。自惟仕而受祿以爲養。喪而受賜以爲祭。臣母生死皆食臣無功之食云。及祥乞歸。祔家廟。時左相缺。方朋黨相攻擊。朝廷大壞矣。上虛位以待。服闋。遂拜左議政。上疏乞免。不許。特遣承旨宣召。又遣史官。問於中道。又宣醞漢江上。寵禮之殊甚。乙酉以老乞免。不許。賜几杖。陞拜領議政。旣謝命。白上。朴謹元,宋應漑,許篈皆放歸田里。謹元已死矣。三人者。癸末以爭論得罪。謂之三竄者也。丙戌四月。白虹貫日。上疏乞免。不許。冬。扁十靑亭。作自銘。丁亥。又以老上疏乞免。上乃許之。大臣白上曰。方中外多虞。非某之德望。無以鎭靜。不可去也。遂寢其命。至明年夏。又力辭。許之。而尋復特命還授敎曰。遣史官某老不行禮。令本府郞舍。宣諭。猶力辭不已。移判中樞。己丑春。乞奉朝賀。不許。又乞致仕。不許。日本倭遣使求和。事下大臣議。先生曰。天下之惡一也。秀吉弑其君。義無可交也。冬。有鄭汝立上變事。獄事大起。先生嘗有命薦金宇顒等。汝立方有名譽。亦在薦中。上曰。某尊禮之甚厚。而引用罪人 。國之危亡係焉。義甚嚴。先生卽出國門之外。以負罪自居。上聽大臣言。罷判中樞。於是澈爲左相。實主獄。獄事滋蔓。搢紳大陷。人心懼之。客欲授例自列。先生曰。旣誤薦。法之所不貸。豈自明而得伸哉。明年四月七日。先生卒。先生生於正德十年 。卒於萬曆十八年。壽七十六。歸葬化寧。葬用自銘。貞敬夫人。廣陵李氏。與先生同年生。先生卒之年三月十一日卒。祔葬同原。無子。以從子大海爲後。官榮川郡守。側室子三人。戒來,戒難,戒後。壻一人。坡州牧使許徵。大海生醴泉郡守道亨。道亨生三男。生員碩命,安邊都護府使峻命,奉化縣監景命。壻四人。應敎沈大孚,進士柳德耇,都事李沆,進士李弘奭。先生之學。薦於彝倫日用之則。達之天德天道。推之萬事萬物。自事父母。處昆弟。與朋友交。以至事君敎俗。其序本諸身。始諸家。推諸邦國。格君心。正大義。擧賢才。遵舊章。明治體。可見於講義。懼塞養正。皆典學之文也。先生旣拘囚海島。幽愁窮抑。涵蓄才學。卒以成大用者。天也。文章甚高。龍州趙學士絅曰。其聲律古氣。可比於殷鹵,周彝。先生讀古聖人賢人書。沈浸醲郁。積而洩之。爲文章。故易奇而法。詩正而葩。春秋謹嚴。乃先生尺木繩準也。或疑先生之文不類。宋儒王鳳洲之言曰。談理之文。亦有品別。茂叔之簡役。二程之明當。子厚之沈深。其衛道一也。其有韻之文。海島十九年。澤畔吟也。正與屈,左徒。牢愁幽思之同致。張谿谷有言。穌之氣格。雄拔。崔簡易,車滄洲。極言本朝三百年操觚之士。無一人及之者云。噫。奚待後世之子雲哉。先生別號曰穌齋。或曰伊齋。或曰暗室。最後。左相鄭公琢。侍上從容言曰。以某之賢。上倚任之甚重。一朝以謬薦坐斥。人心惜之。上不聽。光海二年廷議以先生請配享昭敬廟庭。光海以爲不保終始報罷。先生旣卒。沃州人爲之立祠以祀之。尙州道南,忠州溪上祠。皆合享焉。其銘曰。
道德博文。仁也。爲國以禮。敬也。盡言無隱。忠也。守經直義。正也。<끝>
記言別集卷之十六 / 丘墓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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穌齋先生世系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