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의 사자성어(69)
마이동풍(馬耳東風)
말 마(馬), 귀 이(耳), 마이(馬耳) 라함은 ‘말의 귀’를 뜻하고,
동녘 동(東), 바람 풍(風), 동풍(東風) 이라함은 ‘동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의미한다.
따라서 마이동풍(馬耳東風) 이라함은
“말의 귀를 스치는 동쪽 바람”이라는 뜻이다.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충고 등을 전혀 듣지 않거나,
상대에게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우리 속담에 “쇠귀에 경읽기”라는 우이독경(牛耳讀經)과 같다.
흡사 담벼락에 대고 얘기하는 것과 같다.
말의 귀에 동풍이 부는 것이 왜 ‘남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지 자못 궁금하다.
‘동풍’은 ‘봄바람’을 의미한다.
음양오행설에서 동(東)은 봄(春)을 의미하고,
남(南)은 여름(夏)을, 서(西)는 가을(秋), 북(北)은 겨울(冬))을 각기 가리킨다.
따라서 동풍은 봄바람을 의미하고 북풍은 차가운 겨울바람을 나타낸다.
북풍이 몰아칠 때는 추위가 대단하다는 것을 뜻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마이동풍은 “ 흡사 말의 귀에 봄바람이 스쳐 지나가듯이 귓등으로 흘려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마이동풍’이란 말은
이백의 “왕거일(王去一)의 한야(寒夜)에 독작(獨酌)하고 회포에 잠긴다에 답한다”라는 시에 나온다.
시 제목이 말하듯, 이 시는 왕거일이라는 친구가 보내온 시에 대한 회답시이다.
이백의 친구인 왕거일이 자기의 불우(不遇)함을 이태백에게 호소한다.
이백은 거기에 대해 달이 휘영청 밝고 추운 밤에 독작을 하고 있는
왕거일의 쓸쓸함을 생각하면서 시를 지어 보냈다.
그 내용을 보면,
“술을 마셔 만고의 쓸쓸함을 씻어버릴 것을 권하고,
또 그대처럼 고결하고 뛰어난 인물은 지금 세상에서는 쓰이지 못함이 당연하다고 위로한다.
지금 세상은 투계(鬪鷄)의 기술이 뛰어난 인간이 천자의 사랑을 얻을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만적(蠻賊)의 침입을 막아 공을 세운 인간이 권력을 잡고 거드름을 피우는 세상이다.
자네나 나는 그런 인간들의 흉내를낼 수 없다.
우리는 창에 기대어 시를 읊거나 부(賦)를 짓는다.
그러나 그것이 걸작이라도 세상에서는 한 잔의 물만한 가치도 없다.
세상사람들은 우리의 작품을 듣고 고개를 흔들며,
동풍이 말의 귀를 스치는 정도로 밖에 생각하지 않는다.
어리석은 자들이 명월이나 주옥과 같은 우리들을 비웃고 귀한 지위를 대신 차지하려고 한다.
옥석혼효(玉石混淆)하고 현우전도(賢愚轉倒)되어 있는 것이 지금의 세상이다.
우리들 시인에게는 경상(卿相)의 자리는 없다.
청년시절부터 우리는 산야에서 고답하는 것이 원이 아니었던가” 하고 격려하여 힘을 북돋우고 시를 끝맺는다.
상대방 말을 귀담아 듣는 것을 경청(傾聽)이라고 한다. 경청을 해야 의사 소통이 된다. 총명한 사람과 유연한 사람은 경청하면서 상대방의 쓴 소리도 달갑게 듣는다.
경청에서 경(傾)은 사람인(亻)에 머리 기울일 경(頃)이 합친 글자이다. 머리를 기울여 열심히 듣는 모습을 뜻한다. 상대방이 말할 때 먼 산을 바라보며 손이나 만지작거리며 듣는 자세는 경청하는 자세가 아니다. 대화 중에 스마트폰을 꺼내서 들여다 보는 것 역시 경청과는 거리가 멀다.
소통은 상대방을 존중하고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일 때 이루어진다. 달변가라고 해서 소통을 잘하는 것은 아니다. 상대방을 논리로 압도했다고 해서 상대방이 설득되는 것은 아니다. 논리정연한 말에 눌린 상대방은 “그래! 너 참 똑똑하다. 잘났다~ 어디 두고보자!” 하면서 속으로 반감을 가지기도 한다.
옛날 공자 일행이 제(齊)나라 변방을 지날 무렵이었다. 일행의 말이 남의 밭에 들어가 보리를 뜯어먹어버려 농부가 노발대발하면서 말을 빼앗아 돌려주지 않았다. 공자의 제자 중 언변이 좋은 자공(子貢)이 이치를 늘어놓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공자는 마부를 2차사절로 보냈는데 어쩐일인 지 농부는 아까와는 전혀 다르게 온화한 기색으로 화를 풀었다.
공자가 설득비결을 물었더니 마부는“별것 없습니다. 이 고장의 관습대로‘형님’이라고 불렀을 뿐입니다.”라고 했다. 그 마부가‘형님’이라고 불러서 된 것만은 아닐 것이다. 지식인 자공과는 다른 태도와 화법, 그리고 마음씨 좋은 마부의 인간적인 매력이 화가 난 농부의 마음을 움직였을 것이다. 지식과 권위만을 내세운다면 이는 소통이 아니라 먹통이 됨을 알 수 있다. 소통은 무엇보다 상대방의 감정을 배려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고집이 세고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 사람을‘벽창호’같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벽창호는 벽창우(碧昌牛)에서 유래된 말이다. 벽창우에서 벽은 평안북도의 벽산군(碧山郡)의 첫자이고 창은 창성군(昌盛郡)의 첫글자이다. 벽산과 창성지방의 소(牛)들은 몸집이 크고, 힘이 세며 고집이 대단했다. 그래서 달구지를 끌고 산길을 가다가 호랑이를 만나도 피하지 아니하고, 머리로 들여받는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고집이 세고 남의 말을 듣지않는 사람을 ‘벽창우’ 같다고 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벽창호로 변음되었다고 한다.
우리주위에는 마이동풍하는 경우가 적지않다. 예를들면, 게임에 중독된 아이에게 스마트폰을 멀리하라고 아무리 얘기해도 이는 마이동풍일 것이다. 열애(熱愛)중인 애인하고 헤어지라고 부모가 권유하더라도 이 역시 마이동풍이기 쉽상이다. 핵무기개발에 광분(狂奔)하고 있는 김정은에게‘세계평화를 위해 핵을 포기하라’고 권해 본들 마이동풍일 것이다.
무릇 인생을 넉넉하고 편안하게 살아가려먼, 마음을 열고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여유가 있어야한다.(2023.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