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에 살인의 춱을 보고 다른 까페에 올렸던 글입니다. 눈요기나 하세요.
까페의 황량함을, 줸장의 입장에서-딱 그만큼만- 책임감을 느끼며, 영화감상문을 한 편 써 보겠습니다.
5월 7일, 어버이날 전 날은 서울이 도적같이 찾아온 狂風에 난사당하던 날이었죠. 종로에서 방황을 하며, <살인의 추억>의 범인이 자기파괴적 욕망에 못견뎌 살인을 저지르고야 말 수밖없는, 그런 날씨가 지금의 날씨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습니다. 우연이죠.
예전에 누군가, 제게 <생활의 발견>에 김상경을 보니 - 여기 문맥에 유의하세요. 그냥 김상경이 아닌, 생활의 발견의 김상경이랍디다- 네가 생각이 나더라라고 말하더라고요. 호기심에 잽싸게 비디오를 빌려 생활의 발견을 봤습니다. 제 기분이 유쾌했을까요? 암튼, 전 지금 <살인의 추억>에 관해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살인의 추억은 화성연쇄살인사건을 모티프로 착안한 영화이랍죠. 영화는 그 연쇄사건의 진범이 잡히지 못한 원인을 보다 근본적인 것에서 찾고 있는 듯 합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합리적이지 못한 당시의 수사관행입니다.
감독은 <이것이 비단 그 사건을 담당했던 경찰의 죄>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하는 것 같습니다. 보신 분들, 공사장에서 송강호와 김상경이 범인을 찾는 장면을 기억하시죠? 유력범은 분명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있는데, 도무지 찾을 수가 없죠. 보는 관객 역시, 카메라의 시선을 쫓아, 때론 카메라에 비친 사람들 을 검색하며 범인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때! 현수막이 화면에 클로즈업 됩니다. <빠른납품통해 경제대국 건설하자> 던가? 뭐 그런 내용으로 기억합니다.
영화는 진범을 검거함으로써 피해자를 예방할 수 있는 결정적 기회에, 지원병력들이 전두환 대통령 환영 퍼레이드에 투입됨으로써 실패하는 상황, 다소 오버인 상황을 삽입하면서까지
<진범이 검거되지 못한 것>이
<당시의 거시적이고 구조적인 문제>에 기인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상관없는 이야기를 하자면,
혹 취조실에 등장한 배관공 기억하시나요? 모두들 그 배관공을 눈여겨 보셨을 거라 생각하네요. 뜬금없이 등장하는 배관공, 말없이 장비를 점검하고 돌아가는 그를 관객들은 계속 주시하지 않았을까요? 왜 저 배관공이 등장할까? 전 이렇게 생각합니다. 감독은 저 배관공처럼 진범은 그 안에 있다. 범인이 분명 형사들의 주위에 있었음에도, 결국 잡지 못했다. 이런 아쉬움을 극대화하는 장치가 <배관공의 임무>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사회구조>를 단죄할 수는 없습니다. 단죄하자면, 당시 호흡하며 실존했던 <모두가 죄인>이라는 결론밖에 없기 때문이죠.
더불어,
실제 있었던 사건을 바탕으로 하는 영화인 만큼, 실제 관계자의 심기를 건드릴,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있다는 곤란한 상황이 현실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 곤란한 상황을 해결하는 수법은 참으로 능수능란했다고 생각합니다. 이 모두가 부인할 수 없는 공동의 죄를 개별 등장 인물에게 돌리는 거죠. 누가 뭐래도, 연쇄살인사건이라는 개별 사건 미해결의 일차적 책임은 담당형사에게 있습니다. 그 사람이 벌받기에 딱 좋은 인물이죠.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당형사는 실존 인물입니다. 따라서 책임을 추궁하면서, 옹호하는 그런 역설적 상황의 연출이 필요한 셈이죠.
영화의 해결책, 날라차기부터 시작하는 형사를 외다리로 만듦으로써, 단죄하고 동정심을 갖게 하는(악한이라도 불구자가 되면 불쌍하게 느껴지는 것이 인지상정 아닐까요?) 수법은 참으로 단순명쾌하면서도 교묘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십여년후 살인 현장을 보고 있던 진범에게 꼬마가 <아저씨 거기 뭐 있어요?> 라고 묻자, <응 예전에 아저씨가 이곳에서 했던 추억을 음미하고 있단다>라고 대답을 했다죠. 살인의 추억, 살인의 추억, 살인의 추억!
자! 봐라 이처럼 반드시 잡혀서 단죄받아야 할 범인이 살인을 추억으로 삼고 있다. 이 상황이 말이 될 상황인가? 범인은 꼭 잡혀야 한다. 라는 맺음을 통해, 감독은 유가족의 편에서 관객에게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다시 재수사해야 한다>라는 강한 여운을 통해,
영화는 연쇄살인사건 범인 못찾은 것은 당시 비랍리적인 사회구조때문이다라는 단순한 깨달음의 맺음을,
(그렇습니다. 이건 단순한 깨달음입니다. 예컨대, 교육계의 큰 사건이 나면 신문에서 우리나라의 뒤틀린 교육이라는 근본적인 것 문제삼는 것 부터 시작하고 선진국의 교육구조라는 추상적인 해답을 제시하는 것과 하등 다를 바가 없죠.)
근본적인 이슈를 다시 개별 사건의 해결로 전환하는 맺음, 이 필연적인 과정을 밟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불어,
<개구리 소년 사건> 기억하세요? 기억속에 함몰된 과거지사가 다시 초점화 됐을 때의 전국민을 관심을 되새김질 해 본다면, 연대 88학번 출신 봉준호 감독은 매우 매우 영리한 사람이란 생각을 합니다.
뭐든 쓰고 나면,
뭔가 있는 듯하게 보였던 내지는 그렇게 먹히길 바랐던 제가
여과없이 적나라게 드러난, 딱 걸려버린
민망한 상황이 지금 제게 있습니다.
전 머리를 자르러 가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