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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평대군 安平大君 | |
대군(大君)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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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칭 | |
별호 | 자(字)는 청지(淸之) 호(號)는 비해당(匪懈堂)·낭우거사(琅玗居士)·낭간거사(琅玕居士)·매죽헌(梅竹軒) 시호는 장소(章昭) |
신상정보 | |
출생일 | 1418년 10월 18일(1418-10-18)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
사망일 | 1453년 11월 18일 (35세) |
사망지 | 조선 경기도 교동군 |
배우자 | 부부인 연일 정씨(본부인) 그 외에 측실 1명 |
자녀 | 슬하 2남 1녀 |
종교 | 유교(성리학) |
안평대군 이용(安平大君 李瑢, 1418년 10월 18일(음력 9월 19일) ~ 1453년 11월 18일(음력 10월 18일))은 조선 전기의 왕족이자 서예가, 서화가, 시인, 작가이다.
이름은 이용(李瑢), 자는 청지(淸之),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비해당(匪懈堂), 낭간거사(琅玕居士), 매죽헌(梅竹軒)이며, 세종과 소헌왕후의 셋째 아들이다. 문종·세조의 친동생이자 금성대군의 형이었다. 육종영의 한 사람이다. 서예와 시문.그림.가야금에 능하였다. 한석봉과 함께 조선 최고의 명필로 불린다.
그는 1431년 숙부 성녕대군(誠寧大君)의 양자로 입양되었으며 친형 수양대군과 갈등하다가 1453년 김종서, 황보 인 등과 함께 정변을 기도했다는 이유로 계유정난으로 사사당했고 후에 복권되었다. 시호는 장소(章昭)이다.
안평대군 용은 1418년(세종 즉위년)에 태어났다. 그는 1431년 숙부 성녕대군 이종(誠寧大君 李褈)의 양자로 입양되었다.[1]
1428년(세종 10년)에 대광보국 안평대군에 봉해지고 1430년 여러 왕자들과 함께 성균관에 입학하여 학문을 닦았다. 평소 그와 수양이 야심이 있다는 것을 간파한 부왕 세종대왕은 둘을 궐에서 멀리 떨어져 있게 했다.
그는 기질이 호탕하여 무사들을 이끌고 매 사냥을 나서기도 했으나, 그의 주변에는 주로 문인들이 많이 포진해 있었다. 이후 문종 때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 조정의 정치에도 간섭했으나 단종이 즉위한 후 수양대군 일파와 경쟁하였다.
1453년 1월 28일(1452년 음력 12월 19일) 아들 이우량이 병사하였고 1453년 5월 31일(음력 4월 23일) 그의 아내가 죽자 그는 아내의 장례식에 불참하였다.
“ | 내가 불사(佛事)에 지극히 정성을 드리고 지극히 부지런하였으나, 세종(世宗)과 소헌 왕후(昭憲王后)와 문종(文宗)이 서로 잇달아 붕어(崩御)하시고, 아들 이우량(李友諒)도 또 따라서 죽고, 이제 또 아내도 죽으니 비로소 불사(佛事)가 사람들에게 무익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 |
이후 불교 사찰을 찾아다니며 공덕을 드리는 것을 중단한다. 평소 부인 정씨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그는 아내의 장례식에 불참했는데 이를 두고 말이 많았다. 왕조실록[2]에 의하면 "용(瑢)이 박대(薄待)하여 서로 보지 아니한 것이 이미 7, 8년이었다. 졸하게 되자 그 염(斂)하고 빈(殯)하는 여러 가지 일을 전혀 돌아보지 아니하였고, 그 아들 의춘군(宜春君) 이우직(李友直)도 또한 가서 보지 아니하니, 서인(庶人)의 죽음과 다를바가 없다"고 하였다.[3]
그러나 그는 수양대군의 무신세력에 눌려 실권을 박탈당하고 10월 10일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그해 10월 18일 유배중에 교동도(喬桐島)에서 사사(賜死)되었다. 이후 그의 아들 이우직 역시 연좌제에 의해 처형되었고, 아내는 관비가 되었으며 의춘군의 아내이자 며느리인 오대(五臺)와, 딸 무심(無心) 등은 권람의 집의 노비로 분배되었다.
평소에 안견(安堅), 박팽년(朴彭年) 등 당시의 서화가들과 자주 교류를 가졌으며 시문에 뛰어났고 서화도 매우 뛰어났다. 글씨는 조맹부체로서 활달하고 자연스러우면서 획(劃) 골(骨)이 들어 있으며 풍류(風流)와 문화를 알던 그의 높은 인품이 그대로 반영되는 듯하다.
현존하는 서적(書蹟)으로는 경기도 여주의 영릉신도비(英陵神道碑), 용인의 청천부원군심온묘표(靑川府院君沈溫墓表), 과천의 임영대군구묘표 등이 있다. 그의 주도로 1450년(문종 1년) 구리 동활자인 경오자를 주조하여 그의 글씨를 바탕으로 하였으나, 그가 사사된 뒤 바로 녹여 을해자를 주조하였기 때문에 전해지는 일이 극히 드물다.
아들 이우직은 강화도에서 진도(珍島)로 유배되었다가 사사당한다. 그의 재산은 모두 몰수되었고 양아버지인 성녕대군 사가의 재산 역시 몰수된다. 10월 19일 안평대군 일가가 화를 입어 몰살되자 양어머니인 성녕대군 부인 창녕성씨 또한 그해 10월 22일 경주로 귀양가 폐출(廢黜)되고, 오라비 성득식(成得識) 역시 거듭된 탄핵을 당했다. 그의 첩과 이우직의 처 역시 관비가 되었다. 양어머니 성씨는 1457년(세조 2)에 귀양에서 풀려나 친가에 있다가 사망한다.
이후 선원계보에서도 삭제되어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었다가, 숙종 때 복권되고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에 실렸다.
제목 미상의 시조
세상 사람들이 입들만 성하여서
제 허물은 전혀 잊고 남의 흉 보는 것이야
남의 흉 보거나 말고 제 하물을 고치괴자.바람에 휘었노라 굽을 솔 웃지 마라
춘풍에 피온 꽃이 매양에 고왔으랴
풍표표 설분분 할제 네야 나를 불으리라.주욕 신사~라 하니 내 죽음직 하건마는
큰 칼 옆에 차고 이제도록 살았기는
성주의 만덕 중흥을 다시 보려 하노라.
시문과 그림에 관심이 많아 안견, 박팽년, 김수온, 이현로 등과 교류하였다.
안평대군과 이현로(李賢老)의 집에는 글과 작품들이 많았는데, 계유정난 이후 세조는 이 작품들을 보지도 않고 '괴상한 글과 작품'이라는 이유로 모두 불태워 버렸다.[6]
장릉배식록 수록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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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종영 | |
사의척 | |
삼상신 | |
삼중신 | |
양운검 | |
사육신 | |
기타 | |
참고 자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조선과 대한제국의 왕자/황자 목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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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존왕 목조 소생 | |||||
추존왕 익조 소생 | |||||
추존왕 도조 소생 | |||||
추존왕 환조 소생 | |||||
태조 소생 | |||||
정종 소생 | |||||
태종 소생 | |||||
세종 소생 | |||||
문종 소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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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 소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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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 소생 | |||||
추존왕 덕종 소생 | |||||
예종 소생 | |||||
성종 소생 | |||||
연산군 소생 | |||||
중종 소생 | |||||
인종 소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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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 소생 | |||||
선조 소생 | |||||
광해군 소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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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존왕 원종 소생 | |||||
인조 소생 | |||||
효종 소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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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 소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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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소생 | |||||
경종 소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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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소생 | |||||
추존왕 진종 소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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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존왕 장조 소생 | |||||
정조 소생 | |||||
순조 소생 | |||||
추존왕 문조 소생 | |||||
헌종 소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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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종 소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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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소생 | |||||
순종 소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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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민황태자 소생 |
동의어 청지(淸之), 비해당(匪懈堂), 낭간거사(琅玕居士), 매죽헌(梅竹軒), 장소(章昭), 이용 다른 표기 언어 安平大君
시대 | 조선 |
---|---|
출생 | 1418년 |
사망 | 1453년 |
유형 | 인물 |
직업 | 서예가 |
대표작 | 몽유도원도발문, 세종대왕영릉신도비, 청천부원군심온묘표, 임영대군묘표 |
성별 | 남 |
분야 | 예술·체육/회화 |
본관 | 전주 |
요약 1418(태종 18)∼1453(단종 1). 조선 초기의 왕족·서예가.
이름은 용(瑢), 자는 청지(淸之), 호는 비해당(匪懈堂)·낭간거사(琅玕居士)·매죽헌(梅竹軒). 세종의 셋째 아들이다.
1428년(세종 10)안평대군에 봉해지고 이듬해좌부대언(左副大言)정연(鄭淵)의 딸과 결혼하였다. 1430년에는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함경도에 육진(六鎭)이 신설되자 1438년 왕자들과 함께 야인을 토벌하였다. 고명대신(顧命大臣)이었던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 문신들과 제휴, 수양대군(首陽大君) 측의 무신 세력과 맞서 인사 행정의 하나인 황표정사(黃票政事)에 관여하는 등 점차 조정의 배후 실력자로 등장하였다. 1452년 단종이 즉위하자 수양대군은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황표정사를 폐지하였다.
안평대군은 이의 회복을 위하여 힘썼으나 1453년계유정난으로 황보인·김종서 등이 살해된 뒤 자신도 강화도로 귀양 갔다가 교동(喬桐)으로 옮겨져 사사되었다. 1747년(영조 23년)영의정김재로(金在魯)의 상소로 복관되었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시문·서·화에 모두 능하여 삼절(三絶)이라 칭하였다. 그리고 식견과 도량이 넓어 당대인의 명망을 받았다. 또한 도성의 북문 밖에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짓고 남호(南湖)에 담담정(淡淡亭)을 지어 수많은 책을 수장하였으며 문인들을 초청하여 시회(詩會)를 베푸는 등 호방한 생활을 하였다.
그는 당대 제일의 서예가로 유명하다. 서풍은 고려 말부터 유행한 조맹부(趙孟頫)를 따랐다. 하지만 자신의 개성을 마음껏 발휘한 활달한 기풍은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 그 영향으로 인하여 조선 전기에 크게 유행하였다.
이와 같이 그가 대성할 수 있었던 바탕에는 뛰어난 천분을 타고났을 뿐 아니라 궁중에서 생장하는 과정에서 내부(內府)에 소장된 많은 진적(眞蹟)을 보고 수련하였으며, 그 스스로 서화수장에도 상당하였기 때문이다.
신숙주(申叔舟)의 『보한재집(保閑齋集)』「화기(畫記)」에 의하면, 모두 222축의 서화를 수장하였는데, 그 중 안견(安堅)의 작품을 제외한 대부분이 중국 서화가의 명적이었다. 따라서 그와 교유하였던 인사들에게 명적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줌으로써 당대의 서화계에 큰 역할도 하였다.
현존하는 그의 진적으로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발문이 대표적이며 법첩에 실린 것과 각첩(刻帖)으로 전하는 것이 적지 않다. 또한 동활자에서 1450년 주조한 경오자가 그의 글씨를 바탕으로 하였으나, 그가 사사(賜死)된 뒤 바로 녹여 을해자를 주조하였기 때문에 전해지는 예가 극히 드물다.
금석문으로는 경기도 여주영릉(英陵)에 있다가 현재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청량리동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 있는 「세종대왕영릉신도비」, 용인의 「청천부원군심온묘표(靑川府院君沈溫墓表)」, 과천의 「임영대군묘표(臨瀛大君墓表)」가 있다. 시호는 장소(章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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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desc_summary><EM class=emph_summary>요약</EM> 단종 즉위 후 둘째 형인 수양대군과 권력다툼을
벌였으나 계유정난으로 희생당했다. 세종의 셋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소헌왕후이다. 큰형은 문종이고 둘째 형이 세조이다. 1428년 안평대군에
봉해졌으며, 1450년 문종이 즉위한 뒤 조정의 배후 실력자로 등장했다. 1452년 단종 즉위 이후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던 황보인, 김종서 등
문신·학자 세력과 제휴하여 수양대군과 권력을 다투었으나,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황보인·김종서 등을 제거할 때, 안평대군도 반역을 도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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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desc_section>단종 즉위 후 둘째 형인 수양대군과 권력다툼을 벌였으나 계유정난으로 희생당했다. 이름은 용(瑢). 자는
청지(淸之), 호는 비해당(匪懈堂)·낭간거사(琅玕居士)·매죽헌.</P>
<P class=desc_section>세종의 셋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이다. 큰형은 문종이고 둘째 형이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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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ref="/encyclopedia/view/b12s1526b">세조</A>이다.</P>
<P class=desc_section>1428년(세종 10) 안평대군에 봉해졌으며, 1429년 좌부대언 정연(鄭淵)의 딸과 결혼했다. 이듬해
성균관에 입학하여 학문을 닦았다. 1438년 왕자들과 함께 함경도에 설치된 육진(六鎭)으로 가서 변방의 경계 임무를 맡으면서 야인(野人)들을
토벌했다. 1450년 문종이 즉위한 뒤 황표정사(왕자들이 추천한 사람 가운데 왕이 적임자를 골라 임명하던 인사제도)를 장악하고 측근의 문신들을
요직에 앉히는 등 조정의 배후실력자로 등장했다. 특히 1452년 <A class="link_define link_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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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ref="/encyclopedia/view/b04d2129a">단종</A> 즉위 이후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던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 문신·학자 세력과 제휴하여, 수양대군과 권력을 다투었다.</P>
<P class=desc_section>1452년 7월 수양대군은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오면서 외교적 위상을 높이고, 돌아온 뒤에는
황표정사를 폐지했다. 이에 안평대군은 잃어버린 권력의 회복에 힘써, 이징옥(李澄玉)으로 하여금 함경도 경성에 있는 무기를 서울로 옮기게 하여
무력을 기르는 한편 1453년(단종 1) 9월 황표정사를 다시 실시하게 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다음달 수양대군이 <A
class="link_define link_g" name=ID3></A><A class="link_define link_g"
href="/encyclopedia/view/b01g3456a">계유정난</A>을 일으켜 황보인·김종서 등을 제거했으며 안평대군 자신도 더불어
반역을 도모했다 하여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후에 귀양지가 교동으로 옮겨져 그곳에서 사사되었다.</P></DIV><!-- //section_des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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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4 id=3756495 class=tit_section>예술활동과 작품 </H4>
<P class=desc_section>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시·글씨·그림에 모두 뛰어나 삼절이라 불렸으며, 거문고에도 능했다.</P>
<P class=desc_section>무이정사와 담담정을 짓고 문사들을 초청하여 연회를 베풀고, 궁중에 소장된 서화와 자신이 모은 중국
서화가들의 작품을 연구·수련하면서 주위의 사람들에게도 이를 소개하는 등 당시 문화계의 중심인물로 활동했다.</P>
<P class=desc_section>그의 글씨는 고려말부터 유행한 조맹부의 필체를 따랐으나 이를 한국적인 필법으로 발전시켜 조선 중기까지
커다란 영향을 끼쳤으며, 중국의 사신들로부터 "조맹부에게 배웠으나 조맹부보다 훌륭하다"는 찬사를 받을 정도로 널리 이름을 떨쳤다. 꿈에 본
광경을 당대 제일의 화가 안견(安堅)에게 그리게 한 〈몽유도원도 夢遊桃源圖〉에 발문을 쓰고, 여러 학자 문사들에게 글을 짓게 하여 큰 시화첩을
만들기도 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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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WIDTH: 657px" class=info_thumb><STRONG>몽유도원도</STRONG> </DIV><!-- //info_thumb --></DIV><!-- //thumb_section --></DIV>
<P class=desc_section>1452년 경자자를 개주해 만든 임신자의 자모를 썼다. 1747년(영조 23)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의
상소로 복관되었다. 그의 글씨로는 경기도 영릉에 있다가 현재 서울의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 옮겨진 〈세종대왕영릉신도비 世宗大王英陵神道碑〉, 용인
〈청천부원군심온묘표 靑川府院君沈溫墓表〉, 과천 〈임영대군묘표 臨瀛大君墓表〉 등 금석문이 남아 있다. 시호는 장소이다.</P></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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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id=book_txt_description class=txt_sourceinfo>다양한 분야의 전문 필진으로 구성. 시의성 이슈에
</P></DIV></DIV></DIV></DIV></DIV></DIV></DIV>[Daum백과] 안평대군 – 다음백과, Daum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안평대군 安平大君 | |
대군(大君)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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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칭 | |
별호 | 자(字)는 청지(淸之) 호(號)는 비해당(匪懈堂)·낭우거사(琅玗居士)·낭간거사(琅玕居士)·매죽헌(梅竹軒) 시호는 장소(章昭) |
신상정보 | |
출생일 | 1418년 10월 18일(1418-10-18)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
사망일 | 1453년 11월 18일 (35세) |
사망지 | 조선 경기도 교동군 |
배우자 | 부부인 연일 정씨(본부인) 그 외에 측실 1명 |
자녀 | 슬하 2남 1녀 |
종교 | 유교(성리학) |
안평대군 이용(安平大君 李瑢, 1418년 10월 18일(음력 9월 19일) ~ 1453년 11월 18일(음력 10월 18일))은 조선 전기의 왕족이자 서예가, 서화가, 시인, 작가이다.
이름은 이용(李瑢), 자는 청지(淸之),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비해당(匪懈堂), 낭간거사(琅玕居士), 매죽헌(梅竹軒)이며, 세종과 소헌왕후의 셋째 아들이다. 문종·세조의 친동생이자 금성대군의 형이었다. 육종영의 한 사람이다. 서예와 시문.그림.가야금에 능하였다. 한석봉과 함께 조선 최고의 명필로 불린다.
그는 1431년 숙부 성녕대군(誠寧大君)의 양자로 입양되었으며 친형 수양대군과 갈등하다가 1453년 김종서, 황보 인 등과 함께 정변을 기도했다는 이유로 계유정난으로 사사당했고 후에 복권되었다. 시호는 장소(章昭)이다.
안평대군 용은 1418년(세종 즉위년)에 태어났다. 그는 1431년 숙부 성녕대군 이종(誠寧大君 李褈)의 양자로 입양되었다.[1]
1428년(세종 10년)에 대광보국 안평대군에 봉해지고 1430년 여러 왕자들과 함께 성균관에 입학하여 학문을 닦았다. 평소 그와 수양이 야심이 있다는 것을 간파한 부왕 세종대왕은 둘을 궐에서 멀리 떨어져 있게 했다.
그는 기질이 호탕하여 무사들을 이끌고 매 사냥을 나서기도 했으나, 그의 주변에는 주로 문인들이 많이 포진해 있었다. 이후 문종 때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 조정의 정치에도 간섭했으나 단종이 즉위한 후 수양대군 일파와 경쟁하였다.
1453년 1월 28일(1452년 음력 12월 19일) 아들 이우량이 병사하였고 1453년 5월 31일(음력 4월 23일) 그의 아내가 죽자 그는 아내의 장례식에 불참하였다.
“ | 내가 불사(佛事)에 지극히 정성을 드리고 지극히 부지런하였으나, 세종(世宗)과 소헌 왕후(昭憲王后)와 문종(文宗)이 서로 잇달아 붕어(崩御)하시고, 아들 이우량(李友諒)도 또 따라서 죽고, 이제 또 아내도 죽으니 비로소 불사(佛事)가 사람들에게 무익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 |
이후 불교 사찰을 찾아다니며 공덕을 드리는 것을 중단한다. 평소 부인 정씨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그는 아내의 장례식에 불참했는데 이를 두고 말이 많았다. 왕조실록[2]에 의하면 "용(瑢)이 박대(薄待)하여 서로 보지 아니한 것이 이미 7, 8년이었다. 졸하게 되자 그 염(斂)하고 빈(殯)하는 여러 가지 일을 전혀 돌아보지 아니하였고, 그 아들 의춘군(宜春君) 이우직(李友直)도 또한 가서 보지 아니하니, 서인(庶人)의 죽음과 다를바가 없다"고 하였다.[3]
그러나 그는 수양대군의 무신세력에 눌려 실권을 박탈당하고 10월 10일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그해 10월 18일 유배중에 교동도(喬桐島)에서 사사(賜死)되었다. 이후 그의 아들 이우직 역시 연좌제에 의해 처형되었고, 아내는 관비가 되었으며 의춘군의 아내이자 며느리인 오대(五臺)와, 딸 무심(無心) 등은 권람의 집의 노비로 분배되었다.
평소에 안견(安堅), 박팽년(朴彭年) 등 당시의 서화가들과 자주 교류를 가졌으며 시문에 뛰어났고 서화도 매우 뛰어났다. 글씨는 조맹부체로서 활달하고 자연스러우면서 획(劃) 골(骨)이 들어 있으며 풍류(風流)와 문화를 알던 그의 높은 인품이 그대로 반영되는 듯하다.
현존하는 서적(書蹟)으로는 경기도 여주의 영릉신도비(英陵神道碑), 용인의 청천부원군심온묘표(靑川府院君沈溫墓表), 과천의 임영대군구묘표 등이 있다. 그의 주도로 1450년(문종 1년) 구리 동활자인 경오자를 주조하여 그의 글씨를 바탕으로 하였으나, 그가 사사된 뒤 바로 녹여 을해자를 주조하였기 때문에 전해지는 일이 극히 드물다.
아들 이우직은 강화도에서 진도(珍島)로 유배되었다가 사사당한다. 그의 재산은 모두 몰수되었고 양아버지인 성녕대군 사가의 재산 역시 몰수된다. 10월 19일 안평대군 일가가 화를 입어 몰살되자 양어머니인 성녕대군 부인 창녕성씨 또한 그해 10월 22일 경주로 귀양가 폐출(廢黜)되고, 오라비 성득식(成得識) 역시 거듭된 탄핵을 당했다. 그의 첩과 이우직의 처 역시 관비가 되었다. 양어머니 성씨는 1457년(세조 2)에 귀양에서 풀려나 친가에 있다가 사망한다.
이후 선원계보에서도 삭제되어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었다가, 숙종 때 복권되고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에 실렸다.
제목 미상의 시조
세상 사람들이 입들만 성하여서
제 허물은 전혀 잊고 남의 흉 보는 것이야
남의 흉 보거나 말고 제 하물을 고치괴자.바람에 휘었노라 굽을 솔 웃지 마라
춘풍에 피온 꽃이 매양에 고왔으랴
풍표표 설분분 할제 네야 나를 불으리라.주욕 신사~라 하니 내 죽음직 하건마는
큰 칼 옆에 차고 이제도록 살았기는
성주의 만덕 중흥을 다시 보려 하노라.
시문과 그림에 관심이 많아 안견, 박팽년, 김수온, 이현로 등과 교류하였다.
안평대군과 이현로(李賢老)의 집에는 글과 작품들이 많았는데, 계유정난 이후 세조는 이 작품들을 보지도 않고 '괴상한 글과 작품'이라는 이유로 모두 불태워 버렸다.[6]
장릉배식록 수록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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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종영 | |
사의척 | |
삼상신 | |
삼중신 | |
양운검 | |
사육신 | |
기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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