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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문산 사나사 계곡과 사나사 [답사 2006. 7. 2. 한국의산천 ] 서울에서 양수리를 거쳐서 양평쪽으로 가다보면 가평,유명산으로 넘어가기 위해서 북쪽으로 중미산 농다치 고개쪽으로 37번 도로를 타야하는데 양평에서 그 도로 초입에서 들어서는 사나사라는 귀에 익지 않은 특이한 이름을 가진 절이 있다. 용문산과 유명산 대부산 사이에 이어지는 함왕골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용문산은 이미 널리 알려져서 많은 인파가 붐비지만 사나사 함왕골(용천계곡)은 아직도 한적한 편이다. 계곡은 그리 넓지는 않지만 무더운날 가족을 동반하여 하루쯤 쉬었다 오기 좋은 곳이다. 함왕봉 (947m) 서쪽에 함왕골,동쪽에 연수천 계곡이 흐르고 있어 정상까지 오르면 고봉에 오른 듯한 느낌을 주며 산 남쪽으로 남한강이 있어 조망 또한 일품이다. 923년 고려 태조의 국정을 자문한 대경국사(大鏡國師) 여엄(麗嚴)이 제자 융천(融闡)과 함께 세운 절로서 현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奉先寺)에 속해 있다. ▲ 왼쪽부터 사나사 원증국사 석종비. 용천리 삼층석탑. 삼층석탑 뒤쪽에 원증국사부도탑이 있다.ⓒ2006. 한국의산천 ▲ 양평 용천리 삼층석탑 ⓒ2006. 한국의산천 1983년 9월 19일 경기도문화재자료 제21호로 지정되었다. 사나사에서 소유하고 있다. 사나사는 신라의 고승 대경이 923년(경명왕 7) 제자 융문으로 하여금 창건하도록 한 사찰이다. 석탑은 현재 사나사 대웅전 앞에 있는데, 높은 석축은 최근에 쌓은 것이다. 석탑은 부재가 변형되고 구성이 정확하지 않아 지금 세워진 곳이 원래 위치였는지는 알 수 없다. 기단부 이외의 부분은 구성이 조금 산만해졌지만 원래 재료인 화강암에 원래 모습임이 분명하다. 뚜껑돌[蓋石]과 기단부의 양식으로 미루어 고려 중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형태는 기단부와 탑신 상륜부로 구성된 일반형으로 상륜부의 높이는 2.8m이며, 아랫부분에 여러 매의 장대석으로 결구한 지대석을 놓아 기단부를 받치게 하였다. 기단부는 하갑석형(下甲石形)이 있어 하기면석은 없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윗면에 괴임 1단이 있고 경사가 있어 각우(各隅)의 합각이 뚜렷하다. 상기면석은 4매의 돌로 조립되었고, 각 면에 우주(隅柱:모서리의 기둥)와 중앙에 탱주(撑柱:지탱해주는 기둥) 1개가 짜임새 있게 새겨져 있다. 위 갑석은 1매의 판석으로 되어 있는데 하각(下角)이 뚜렷하며 높고 낮은 각형단(角形段)의 괴임을 조각하여 위의 3층의 탑신을 받치고 있다. 각 층의 옥신과 옥개석은 1매의 돌로 구성되었다. 각 옥신에는 우주가 정연하며 옥개석은 모두 형태가 같고 아랫면에는 추녀에 낙수 홈이 음각되어 있다. 옥개석 받침은 3단이다. 정면에는 1단으로 된 낮은 각형 받침이 옥신을 받치고 있다. 상륜은 노반석뿐으로 가운데 탱주의 둥근 구멍이 관통되었다. ▲ 사나사 원증국사석종비. 경기유형문화재 제73호. ⓒ2006. 한국의산천 고려 말의 고승 원증국사(1301-1382)의 묘탑비이다. 사나사원증국사비, 원증국사비라고도 한다. 사나사 경내 함씨각 오른쪽 누각안에 세워져 있다. 고려 말의 고승 원증국사(圓證國師:1301~1382)의 묘탑(墓塔)이다. 사나사 부도 (舍那寺浮屠), 원증국사 부도라고도 한다. 충목왕(忠穆王) 2년(1346) 원나라에 가서 청공(淸珙)의 법을 이어받아 임제종(臨濟宗)의 19대 법손(法孫)이 되었다. 충목왕 4년(1348) 귀국하여 왕사·국사가 되었으며, 우왕(禑王) 때 사나사를 중건하고 소설암에서 입적하였다. 입적한 이듬해 다비를 하니 사리가 무수히 나왔다. 왕은 그를 원증국사로 책봉하고, 제자 달심(達心)이 사리를 모아 부도를 세웠다고 한다. 이 탑은 화강암으로 건조한 석종형(石鍾形)의 부도로서 4각기단 위에 탑신(塔身)과 탑정(塔頂)을 얹었다. 탑신은 표면에 아무런 조각이 없고 상하는 수평을 이루었다. 탑정에는 화염문(火焰紋)을 조각한 낮은 보주(寶珠)가 얹혀 있다. 대석은 1매석으로 가로·세로 각각 1.1m이며, 탑신과 접하는 곳에 연화문이 새겨져 있다. 탑신의 지름 1m, 전체 높이는 2.75m이다. 이러한 형식의 비는 1379년에 세워진 여주 신륵사(驪州神勒寺) 보제존자석종비 (普濟尊者石鐘碑)와 근본적으로 유사한 것이나 보다 간략화된 형식임을 알수 있다. 옥개석은 가옥의 지붕 형식을 모방하였으나 세련되지 못하고, 그나마도 한쪽은 떨어져 나갔다. 비신은 균열이 일고 일부는 파손되었으며, 석주도 한쪽은 파손이 심하다. 전체높이 1.67m, 나비 1m이며, 6·25전쟁 때 파손되어 전문을 판독할 수 없는 상태이다. 다만 비문(碑文)은 정도전(鄭道傳)이 지었고 글씨는 재림사주지(梓林寺住持)인 선사 훤문이 썼으며 우왕 12년(1386) 문인 달심(門人 達心)이 세웠다는 사항들을 대개 알 수 있다. 이 비와 관련해서는 조선 영조 49년(1773)에 양평군내의 당산계원(堂山契員)이 원증국사를 사모하는 마음에서 새겼다고 전한다 ▲ 가랑비가 뿌리고 산봉우리에는 안개가 걸려있다. ⓒ2006. 한국의산천 서죽 정비석님의 '산정무한'을 되내이며 발길을 돌렸다. 천 년 사직이 남가일몽(南柯一夢)이었고, 태자 가신 지 또다시 천 년이 지났으니, 유구(悠久)한 영겁(永劫)으로 보면 천년도 수유(須臾)던가! 고작 칠십 생애(七十生涯)에 희로애락을 싣고 각축(角逐)하다가 한움큼 부토(腐土)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이라 생각하니, 의지 없는 나그네의 마음은 암연히 수수(愁愁)롭다. 클릭 ■☞ 산정무한 원문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