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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기행문> 독도여, 지순한 사랑이여 ―독도 우리 땅 밟기 운동― 리헌석(본지 발행인, 계룡장학재단 이사) 1. [독도 답사단]이 나가신다 2005년 5월 3일 오후 5시, 계룡장학재단(鷄龍獎學財團) 강당에서는 [독도 우리 땅 밟기 운동]을 위한 ‘독도 답사단’이 결성되었다. 우리 땅 독도를 강탈하려는 일본의 만행에 온 국민이 분노하고 있는 가운데, 그 역사 왜곡을 비판하고 나라사랑에 대한 자세를 굳건하게 갖추기 위해 대한민국의 대학생들이 자진하여 모였다. 대전을 비롯한 충청권 대학생 100여 명이 일본에 대한 분노, 우리 땅 독도에 대한 무한한 사랑, 그리고 나라사랑의 뜨거운 가슴을 하나로 결집하는 바탕은 계룡장학재단이 마련했다. 재단에서 독도 답사단을 모집한 결과 700여 명이 희망하였다. 그리하여 ‘독도에 왜 가려는가’라는 질문에 답한 답변서를 제출 받고 재단 이사들이 심의하여 그 대상을 선정하였다. 계룡장학재단은 1992년 창립하여, 1993년부터 2004년까지 장학생 연인원 6,409명에게 10억 7천만원 이상을 장학금으로 지급한 우리나라의 대표적 육영 재단이다. 2004년에는 ‘광개토대왕릉비’를 천안의 [독립기념관]에 건립하여 웅대한 민족정신을 고양시켰다. 2005년에는 병자호란 때 충신인 삼학사(윤집, 오달제, 홍익한)를 기리기 위해 ‘삼학사비(三學士碑)’ 2기를 중국의 발해대학(渤海大學)과 경기도 성남시 남한산성(南漢山城)에 건립하여 민족정신을 발양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장학 사업뿐만 아니라, 민족의 기백을 되살리려는 숭고한 애국애족 정신을 북돋기 위하여 [독도 답사단]을 발족한 계룡장학재단은 다음과 같은 창립 취지를 공표한 바 있다. ① 학문에 대한 기본적인 자질과 재능이 있는 자로서, 품행이 단정하고 학업성적이 우수하여 인류사회 발전에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거나 창조적이며 덕망이 있는 자로 장래가 크게 촉망되는 학생, ② 학업성적이 우수하고 품행이 단정한 자로서 경제적 사정으로 학비조달이 곤란한 학생, ③ 가정형편상 불우한 환경(소년소녀가장 혹은 지체부자유한 부모의 자녀 등)의 처지에 있어 학비조달이 곤란한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육영사업을 실현시켜 나감으로써, 그들을 장차 국가와 사회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할 훌륭한 역군으로 양성시키고, 기타 사회일반 이익에 공여하는 문화사업을 실시하고자 설립하였다. 계룡장학재단은 ‘장차 국가와 사회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할 훌륭한 역군’을 양성하기 위한 목적에 맞게 거액의 경비를 들여 [독도 답사단]을 발족하였다. 이 날 행사 시작부터 독도에 대한 사랑을 노래로 표현하여 하나기 되어 갔다. 가수 정광태가 불러 국민가요로 자리 잡은 [독도는 우리 땅]을 목청 높여 불렀다. 의미도 공감하려니와 그 리듬과 멜로디가 가슴에 불을 지폈다. <울릉도 동남쪽 뱃길 따라 이백 리/ 외로운 섬 하나 새들의 고향/ 그 누가 아무리 자기네 땅이라고 우겨도/ 독도는 우리 땅>. 그랬다. 울릉도에서 뱃길을 따라 동쪽으로 가다보면 외롭게 서 있는 섬이 바로 우리 땅 독도인 것이다.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동경 백삼십이 북위 삼십칠/ 평균기온 십이도 강수량은 천삼백 독도는 우리 땅>. 그랬다. 우리의 독도는 바로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로 기록되어 있다. 헤아릴 수 없이 오래 전에, 화산이 폭발하여 섬을 만들고, 풍화작용에 의해 섬이 되었을 때부터 바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독도는 우리 땅이었다. <오징어 꼴뚜기 대구 명태 거북이 연어알 물새알 해녀 대합실/ 십칠만 평방미터 우물 하나 분화구 독도는 우리 땅> 그랬다. 독도에는 우물이 하나 있다. 사람이 사는 기본적 조건 중 하나가 ‘우물’이라고 한다. 자연적으로 생긴 우물이 있어서 우리 주민이 살 수 있었다. 서도에 있는 ‘샘’은 바로 우리 가슴에 흐르는 생명수라 하겠다. [독도는 우리 땅] 노래가 가슴에 흐르는 가운데 결단식이 진행되었다. 계룡장학재단의 이사들이 대부분 참여한 가운데 이인구 재단이사장이 충남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정덕기 단장에게 단기를 수여했다. 그리고 ‘독도 답사단’을 인솔할 임원들을 소개하였다. 정덕기 단장, 리헌석 이사, 윤건원 이사, 이규희 향토사학자, 김기풍 과장 등이 힘을 모으기로 했다. 대전일보 장길문 기자, 중도일보 김덕기 기자, 충청투데이 오희철 전진식 기자도 독도를 찾아 민족정신을 되살리는데 참여하기로 했다. 이 날 결단식에서, 계룡장학재단 이인구 이사장은 ‘대회사’에서 독도 답사에 대한 열정적 주문을 하였다. <우리 민족의 자존심을 참을 수 없을 만큼 자극하는 것이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이라는 현실의 문제를 부각시켰다. <우리나라 강토에서 가장 외침의 위협을 받고 있는 곳이 바로 독도>라는 점을 강조하고, <입으로만 규탄하던 독도문제를 피가 끓는 젊은 학도 여러분이 직접 가보고, 밟아보고, 가슴 뭉클하게 느껴보자는 것이 바로 이 행사의 목적>이라고 밝혔다. 더불어 <돌아오신 후에도 여러분의 체험담과 느낌을 많은 동료들께 확산시켜 주십사 하는 당부>를 잊지 않았고, 또한 <시종 즐거운 여행이 되고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드는 좋은 계기가 되어 주기>를 소망했다. 이에 화답하듯이, 우리 청년들은 선언문을 낭독하며 선서하였다. 인솔자로 선정된 우리들, 그리고 행사에 참여했던 재단의 이사들도 비장한 눈빛으로 독도 답사 성공을 성원하였다. 그 날 우리 청년 학도들이 우렁차게 낭독한 ‘선언문’은 다음과 같다. 독도는 우리 땅이다. 역사적으로나 법적으로 그리고 실질적으로도 우리가 영유하고 있는 명명백백한 대한민국 영토이다. 우리가 직접 독도에 상륙하여 우리의 눈으로 우리 땅 독도를 똑똑히 각인할 것이며, 우리 손으로 우리의 독도를 직접 만져보고 우리의 뜨거운 심장과 숨결로 직접 느껴 볼 것이다. 앞으로 우리는 또다시 이번과 같은 농락을 당했을 때, 독도 사수야말로 대한민국 지키기의 첩경임을 각성하고 흔연히 궐기하여 독도 사수의 선봉이 될 것이다. <독도 우리 땅 밟기 운동 답사단> 일동은 출발 시각에 장학재단 앞에서 만날 것을 약속하며, ‘독도는 우리 땅!’을 연거푸 외쳤다.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에게 부여된 의무를 다하는 것인 양 ‘함성’과 ‘주먹’을 일치시켰다. 이렇게 결단식을 마치고 결행의 날을 기다리게 되었다. 2. 독도여, 그대에게 가마 2005년 5월 8일 오전 5시 30분에 계룡장학재단 1층 로비에서는 독도 답사단이 모였다. 인솔자 10명과 학생 104명이 모여 <독도는 우리땅> 노래를 합창한 뒤, 3대의 버스에 분승하여 대전을 출발하였다. 미리 준비된 ‘독도는 우리땅’ 모자를 쓰고, 가슴에는 독도답사단 명찰을 달았다. 고속도로를 달려 ‘칠곡휴게소’에 도착, 도시락으로 아침을 대신했다. 쌀쌀한 날씨였지만, 독도에 대한 기대로 설레는 표정이다. 버스는 다시 달려 포항에 도착하였다. 여객선터미널에서 10시 울릉도로 출항 예정이었지만, 2시간이나 지연되어 12시 30분에 뱃고동이 울렸다. 전날 울릉도에서 포항으로 출발하려는 선객들이 많아 아침 일찍 울릉도에 다녀온 뒤, 다시 출발하느라 2시간이 지연되었다고 한다. 여객선이 도착하여 승선할 때, 예매하지 않은 울릉도 주민들이 항의 집회로 인하여 또 30여분 지연되었다. 서성이며 기다리는 시간이 길었지만, 독도에 대한 사랑과 설렘으로 모두 감내할 수 있었다. 선플라워, 우리들을 포항에서 울릉도까지 태우고 갈 여객선의 이름이다. 선체의 양쪽 하단이 물 속에 잠기고, 중앙 하단은 홈으로 파여 공기를 부양하고 운행하는 배라고 한다. 선미에서 보면, 양쪽에서 추진기가 운전되어 두 줄기 하얀 물보라가 흩어진다. 하얀 물보라가 퍼져서 하나로 거대한 물살을 만들고, 이 물보라는 하얀 물거품이 되어 뱃길을 꾸민다. 학생들은 1층의 일반석에 자리를 잡고, 인솔자와 기자들은 3층에 자리를 잡았다. 배가 흔들렸다. 자리를 이동하는데, 몸이 기우뚱거려 벽의 손잡이를 잡아야 했다. 몇몇은 바닥에 쓰러져서 일어나지도 못하였다. 학생들을 보살피기 위해 1층으로 가는 일도 쉽지만은 않았다. 눈을 감고 누워 있는 학생, 손으로 입을 잡고 화장실로 가는 학생, 바닥에 편하게 누워 잠을 자는 학생도 있었다. 우리 단원뿐만 아니라, 여객 대부분의 모습이 이러했다. 이러한 상황을 보면서 걱정이 되었다. ‘연안(沿岸)의 물결이 이렇게 크면, 원양(遠洋)의 독도 바다는 얼마나 물결이 드셀까?’ 전날에도 풍랑이 세어서 독도에 접안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다. 또한 일부는 독도 접안(接岸)을 포기하고 울릉도에서 포항으로 철수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터여서 마음의 그림자는 더욱 어두워졌다. 그러나 어두움은 잠시 뿐이었다. 근심을 씻어주는 화면이 멋지게 상영되었기 때문이다. 선실의 텔레비전에서 유치환 선생의 시 [독도]가 아름다운 풍경과 함께 눈앞에 펼쳐졌다. 아름다운 섬, 아름다운 자연, 아름다운 세상을 우리가 찾아가는 것이다. 울릉도(鬱陵島) 유치환 동쪽 먼 심해선(深海線) 밖의 한 점 섬 울릉도로 갈거나. 금수(錦繡)로 굽이쳐 내리던 장백(長白)의 멧부리 방울 뛰어, 애달픈 국토의 막내 너의 호젓한 모습이 되었으리니, 창망(蒼茫)한 물굽이에 금시에 지워질 듯 근심스레 떠 있기에
동해 쪽빛 바람에 항시 사념(思念)의 머리 곱게 씻기우고 자나 새나 뭍으로 뭍으로만 향하는 그리운 마음에, 쉴 새 없이 풀렁이는 풍랑 따라 밀리어 오는 듯도 하건만, 멀리 조국의 사직(社稷)의 어지러운 소식이 들려 올 적마다, 어린 마음 미칠 수 없음이 아아, 이렇게도 간절함이여! 동쪽 먼 심해선(深海線) 밖의 한 점 섬 울릉도로 갈거나. 그랬다. 우리들은 지금 울릉도로 가고 있다. 우리 땅 독도를 밟아 보기 위해 심해선 밖의 울릉도로 우리들은 가고 있다. 창망한 물굽이에 지워질 듯 서 있는 울릉도인지는 모르지만, 뜨거운 꿈을 안고 우리들은 울릉도로 가고 있다. 울릉도는 자나 새나 육지(뭍)로 향하는 그리움을 간직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육지에서 울릉도를 향해 간다. 풍랑 따라 울릉도가 육지로 밀리어 오는지는 모르지만, 우리들은 풍랑을 제치고 울릉도로 간다. 독도에 대한 사랑을 목메어 부르짖기 위해 우리들은 울릉도로 간다. 멀리 조국의 사직이 어지러울 때마다 울릉도는 얼마나 아파했을까, 그것은 유치환 시인 스스로의 마음을 울릉도에 빗대어 노래한 것이겠지만, 그 간절함이 바로, 오늘 우리들의 가슴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우리 땅을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일본의 만행에 분노한 우리들은 독도를 밟아보고 우리 땅임을 다시 확인하고자 한다. 그래서 동쪽 먼 심해선 밖의 울릉도로 간다. 오후 5시, 우리들은 울릉도 도동항에 상륙했다. 바다를 옆에 끼고 걸어서 숙소인 ‘울릉호텔’에 짐을 부렸다. 마당에는 섬잣나무 두 그루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잣 알알은 어느새 떨어지고 빈 송이를 매단 채 옛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엮어 내고 있었다. 그 옆에서 느티나무 두 그루도 오랜 세월을 잎새에 담아 반짝거리고 있었다. 일정에 의하면, 독도는 다음날 입도(入島)하게 되어 있다. 아침 7시 30분에 1진이 떠나고, 오후 2시에 2진이 독도를 향할 계획이다. 그래서 남은 시간에 가까운 곳을 둘러보기로 하였다. 도로를 따라 올라가던 중에 ‘독도박물관’ 표찰이 있어 찾아갔다. 가는 길목에서 놀랍고 신기한 비석을 보았다. <對馬島本是我國之地 대마도는 본시 우리나라 땅>이라는 비석이다. 기록이 담긴 지도를 하단에 새기고, 상단에는 자연석으로 표지를 새겼다. 그 바로 위에 독도박물관 표지석이 있고, 왼쪽으로 안용복 선생 기념비가 자리하고 있었다. 관람 시간이 지나서 박물관 문은 닫혀 있었다. 일행은 삭도(케이블카)를 타고 전망대에 올랐다. 울릉도 도동항이 한눈에 보이고, 멀리 동쪽으로 독도가 있다고 하니, 전망대에서도 가슴이 설레었다. 섬 오른쪽으로는 ‘촛대’를 닮은 바위가 외롭게 서 있었다. 그 너머에는 해수욕장과 마을들이 다소곳이 자리 잡고 있었다. 저녁 식사를 하고 우리들은 선창으로 나갔다. 도동항에서 오른쪽으로 바다를 끼고 도는 산책길을 따라 가면, 중간 중간에 좌판이 벌어져 있다. 그 중 한 곳에 머물러 우리들은 울릉도의 밤을 완상했다. 잔잔한 파도가 밀려오는 밤바다, 그 바다 냄새를 벗하면서 우리들은 마음을 나누었다. 김덕기 우희철 장길문 전진식 기자들과 함께, 그리고 필자와 더불어 윤건원 김기풍 이선복 등은 밤바다에서 모듬회와 소주를 비우며, 내일의 장정(長征) 성공을 축수했다. 좀 전에 올랐던 울릉도 전망대 역시 밝은 불빛을 반짝이며 우리들의 마음을 대신하고 있었다. 3. 독도여, 아픈 가슴이여 아침 6시부터 [독도 답사단] 1진들은 부산하였다. 나는 2진을 인솔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1진이 독도를 밟고 오기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배웅하였다. 7시 30분에 1진 57명이 독도로 출항하였다. 정덕기 단장, 신문사 기자 4명, 김기풍 과장이 학생들을 인솔하고 떠났다. 우리 2진은 오전 동안 가까운 곳에서 울릉도를 견학하기로 하였다. 일부는 해안선을 따라 산책을 하기도 하고, 일부는 성인봉을 오르기 위해 나섰다. 나를 포함한 일부는 어제 보지 못한 박물관을 관람하기 위해 나섰다. 전시용 패널과 지도, 그리고 책들을 보면서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였다. 특히 이승만 대통령이 획정한 평화선(리라인)은 독도를 포함하고 있었다. 다만 얼마 전에 체결한 한일어업협정에 의해 독도가 공동관리지역으로 변하여 가슴 아픈 후회를 낳게 하였을 뿐이다. 향토사학자 이규희 선생은 ‘이승만 대통령이 국내 정치는 잘못했지만, 독립운동을 한 것과 평화선을 그은 것은 훌륭했다. 역사적으로 높이 평가해야 한다.’고 패널을 보면서 강조하였다. 그럴 것 같다. 어느 일면에서는 부정적 평가를 받는 인물이지만, 긍정적 평가를 받을 수 있는 부분에서는 객관적으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 박물관에서 독도에 대한 사진과 영화를 보면서 독도에 대한 새로움을 익혔다. 벽에 붙어 있는 사진, 그리고 텔레비전 화면으로 보이는 모습에서 독도의 진가(眞價)를 확인하였다. 괭이갈매기, 흰갈매기, 딱새, 솔딱새, 유리딱새, 황로, 되새, 녹색비둘기, 흑비둘기, 진홍가슴새, 동박새, 바다제비, 알락할미새, 솔개 등이 독도를 지키고 있는 새들이다. 이 중 ‘녹색비둘기’는 제주도에서 한 차례 발견되고 처음이라니, 이 새들을 보고 싶어 빨리 독도를 가고 싶다. 줄돔, 뱅어돔, 자리돔, 문어, 갑오징어, 가다랭이, 능성어, 몽치, 대구, 두줄촉수, 방어, 귀상어, 강치, 흰강치 등이 독도의 바다에서 사는 물고기들이라고 한다. 이들과 함께 거북손, 지렁이, 흰고랑따개비, 히드라, 말미잘, 미역, 다시마 등이 독도의 바다를 지키면서 우리들을 환영할 것이라 생각하니 가슴이 더 설렌다. 해국, 털머위, 천문동, 땅채송화, 섬기린초, 섬장대, 왕호장군, 번행초, 큰두루미꽃, 섬괴불나무, 숲파랭이, 고비, 억새 등이 독도를 아름답게 꾸미는 야생초들이다. 이 꽃들과 함께 호랑나비, 남방부전나비, 작은멋쟁이나비, 남생이무당벌레, 칠성무당벌레, 수시렁이, 왕귀뚜라미, 거져리, 된장잠자리, 왕잠자리 등이 아름다운 섬을 날아다닐 것을 생각하면 눈은 어느새 동쪽을 향한다. 12시가 되어 1진이 도착했으나, 풍랑이 일어 입도하지 못했다며 아쉬움을 토한다. 점심을 먹고 우리 2진 57명이 독도를 향하여 오후 2시 25분 출항했다. 윤건원 이사, 이규희 향토사학자, 이선복 대표, 필자 등이 학생들을 인솔하고 나섰다. 선실에는 문화방송국(MBC) 취재팀이 함께 승선하였다. 그들은 [산사에서 길을 묻다]를 촬영하기 위해 독도에 들어간다고 한다. 연등을 들고, 스님과 함께 입도하여 밤을 지내고 나올 것이라고 한다. ‘독도에는 절이 없는데, 이들은 어디에서 불심(佛心)을 찾을 것인가?’ 처처불심(處處佛心)이라고 했으니, 독도에도 불심이 있을 것이고, 독도의 바위에도 불심이 있을 터이고, 독도의 나무나 풀에도 불심이 있을 터이고, 독도 하늘을 넘나드는 새들에게도 불심이 있을 터이니, 독도에서 보이지 않는 ‘산사’를 찾아 길을 찾기를 바래본다. 울릉도를 뒤로 하고, 앞에는 망망한 바다가 펼쳐진다. 갈매기 몇 마리가 따라 오다가 돌아간다. 배 옆으로 부서지는 하얀 포말을 바라본다. 그 속에서 보이지 않던 길이 보인다. 하얀 물살과 검푸른 바다는 서로 대조를 이루면서 독도로 달려간다. 계룡장학재단 윤건원 이사는 독도를 꼭 밟아야 한다며 다부진 모습을 보인다. 향토사학자이며 전국통일연대 이규희 고문은 국토의 동단(東端)을 밟아야 한다며 설레는 얼굴로 눈을 반짝인다. 이선복 선화관광 대표는 태극기 다발을 가슴에 안고 동해를 응시한다. 학생들은 태극기를 하나씩 들고 선상에 올라 동쪽 바다를 향해 흔든다. 나도 [독도는 우리땅] 모자를 눌러쓰고, 독도를 향해 태극기를 흔든다. 설레는 가슴으로 바다를 지켜보았다. 부서지는 물보라 사이에 언뜻언뜻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무지개를 본다. 흰 물살이 올라 부서지면 무지개가 생긴다. 무지개가 배를 따라온다. 쉬지 않고 생겼다가 사라지는 무지개를 바라보며 작은 희망을 피워 본다. 가는 중에 오른쪽에 한국해양경찰 경비정이 보조를 맞추고 있다. 독도 여객선을 멀찍이서 보호하기 위해 따라왔다가, 회항할 때 다시 멀찍이서 보호하며 따라오다가, 울릉도 인근에서 대기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바로 그 역할을 하는 경비정인가 보다. 우리 해경이 국토를 지키고, 자국의 백성을 지키는 모습에 박수를 보내며 손을 흔들었다. 무지개를 안고 ‘삼봉호’는 달렸다. 그러나 가슴 벅찬 기대로 달려온 독도는 우리들을 반기지 않았다. 독도에 다다랐을 때, 풍랑이 일어 배를 댈 수가 없는 것이다. 선착장에 마중을 나와 손을 흔드는 해경들에게 우리도 손을 흔들었다. 학생들을 비롯한 우리들은 실망스러운 마음을 가다듬고 독도를 향하여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발로 밟지 못한다면, 눈에라도 담아가야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아픈 가슴을 가라앉히며 회항해야 했다. 독도를 두 바퀴 도는 동안 갈매기들이 찾아왔다. ‘새우깡’을 던지면 받아먹는다. 집어 던져 물에 떨어지면 물에 내려 먹는다. 손에 들고 있으면 날아와서 채간다. 관광지에 가면 자주 볼 수 있는 광경이다. 그렇다면, 독도 역시 많은 사람이 다녀가고, 그 와중에 갈매기도 사람들이 던져 주는 먹이에 길들여진 것인가. 하긴 재빨리 상황에 대처하는 것만이 살아남는 길이기도 할 터이다. 가슴에 독도를 담고 돌아서야 했다. 우리를 태운 ‘삼봉호’는 울릉도를 향하여 달렸다. 물살이 더 센 듯하다. 그러나, 마음에 가라앉았던 서러움이 북받쳐 나도 몰래 눈물을 흘렸다. 4. 그대, 고운 사랑이여 돌아와서도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우리 땅 독도 밟기 운동>의 공식 일정은 아쉬움을 남긴 채 독도를 포기하고 말았다. 다음날에는 버스를 이용하여 울릉도 일주 기행과 ‘나리분지’ 답사가 계획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쉬운 마음에 술이나 한잔 하자는 것을 마다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답사단이 울릉도를 일주하는 다음날 오전에, 나 혼자라도 다시 독도를 찾기로 결심했다. 여기까지 와서 그냥 갈 수는 없다. 혼자라도 독도를 밟아야겠다. 이런 생각으로 아쉬운 마음을 다잡았다. 10일 오전에 출항하여 입도하지 못하면 다시 오후에 배를 타리라. 오후에도 입도하지 못한다면, 울릉도에 혼자 남아 다음날 오전에 다시 출항하리라. 그래도 독도가 반기지 않으면 다시 오후에 또 출항하리라. 그래도 안 되면 그 다음날로, 다시 그 다음날로 출항하여 반드시 독도를 만나고 오리라. 이런 다짐이 내 몸을 감싸 돌았다. 1시간 30분 이상 배를 타고 가야 하고, 독도에서 잠시 머물렀다가, 다시 1시간 30분 이상 배를 타고 돌아와야 하는 강행군이지만, 반드시 독도를 밟고 바위에 입을 맞추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서둘러 잠이 들었지만, 꿈속에서도 독도를 여러 번 다녀오느라 힘이 들었다. 그런 와중에서 나는 혼자라도 독도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외로울 정도로 절실한 사람만이 독도를 찾아야 한다는 편부경 시인의 시가 생각나서였다. 그리움을 기다리는 섬 편부경 홀로 눈뜨고 홀로 차를 마신다 홀로 밥을 먹고 홀로 노래 부른다 사랑도 홀로 이별도 홀로 기다리는 그리움도 홀로 오시라 편부경 시인으로부터 [독도 우체국]이라는 시집을 받았었다. 독도로 떠나기 전에, 그 시집에 실린 작품을 읽었는데, 오늘 갑자기 그의 시가 떠올랐다. 정말 마음으로 독도를 사랑하는 사람만이 외롭게 찾아오라는 것 같았다. 오전 5시 30분, 자리에서 일어나 ‘도동항’으로 발길을 돌렸다. 바다를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바다는 어제보다 잔잔한데, 선객(船客)도 없는 대합실에 근무자 한 명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오늘 바다는 어떤가요?” “글쎄요. 다른 날보다는 잔잔하네요.” “어제 독도에 갔다가 입도하지 못하고 돌아왔거든요. 오늘 다시 가려고 하는데, 어떨까요?” “바다는 아무도 알 수 없어요. 그러나, 이 곳에서 오래 살아온 제 경험에 의하면, 오늘 오전에는 가능할 것 같습니다. 한번 가셔도 좋을 것 같은데요. 그러나, 장담하지 못하는 게 바다이지요.” 그 분과의 대화를 나누고, 왼쪽 산책길에서 체조를 하며, 독도에 반드시 가리라, 마음을 다졌다. 숙소로 돌아왔다. 룸메이트 이규희 선생에게 내 결심을 밝혔다. 배낭을 꾸리고, 윤건원 이사에게 인터폰을 했다. 그러자 윤 이사가 나오고, 정덕기 단장도 따라 나왔다. 호텔 앞에서 대화를 나누는 그때, 바닷가를 산책하고 돌아오는 부지런한 학생들을 만났다. 상황을 파악한 그들도 함께 가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급히 희망자를 모아 14명, 나와 김기풍 과장 등 16명이 호텔을 나섰다. 빈속에 길가에서 더덕즙을 한 컵 마시고 길을 재촉했다. 그리하여 7시 32분 ‘삼봉호’를 타고 세 번째 출항을 감행하게 되었다. 어제보다 잔잔한 바다여서 안심이 되었다. 선장도 파고가 1~1.5미터로 최적의 항해 조건이라고 안내하였다. 아침 식사도 거른 채 출발한 우리들은 어제보다 경건한 마음으로 배에서 상영하는 ‘실미도’를 관람하였다. 실미도 작전은 실패하였지만, 우리들은 실패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독도를 향하였다. 우리를 태운 배가 독도에 가까워졌다. 선두에 앉아 있었는데, 항해사가 앞의 해치를 열고 밧줄을 정비하고 있었다. ‘아, 오늘은 독도에 접안(接岸)을 하는구나!’ 가슴이 설레었다. ‘아, 오늘은 입도(入島)를 하는구나! 어제 입도하지 못할 때에는 해경들이 여러 명 나와서 손을 흔들었다. 그런데, 오늘은 두 명만이 마중을 나오고, 나머지 사람들은 비를 들고 청소를 하고 있었다. 선착장 바닥의 갈매기 분비물을 쓸고 치우는 일이다. 항해사가 밧줄을 던지고, 해경이 잡아 걸었다. 드디어 독도에 상륙하는 것이다. 서둘러 배에서 내렸다. 만세를 불렀다. 독도를 향하여 걸었다. 계단 앞에서 해경들이 길을 막았다. 돌아서서 바위에 입을 맞추었다. 독도 표지석일까, 태극기 문양 앞에 섰다. 플래카드를 들고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몇몇이 얼싸안고 [독도는 우리땅]이라는 노래를 불렀다. 몇몇 학생은 일명 ‘독도춤’을 추었다. 이곳에 오기 위해서 우리는 어제 두 번이나 실패를 했다. 그렇지만, 이제 독도는 우리들의 사랑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독도와 우리는 하나가 되어 갔다. 독도에서 1 리헌석 요한 바오르 2세 교황이 한국에 도착하여 입을 맞춘 것처럼 바위에 입을 맞추었다. 지문을 찍듯이 내 사랑을 다하여 내 입술의 무늬를 새겼다. 독도가 우리 땅임을 바람에게 말하듯이 독도가 우리 사랑임을 물결에게 말하듯이 흔들리는 마음이거나 세월에 가라앉는 눈빛이거나 변하지 않을 요량으로 독도에 입 도장을 찍었다. 배는 독도를 한 바퀴 돌면서 절경을 보여준다. ‘독립문 바위’를 보면서 독도의 영원함을 빌었다. 그래야 우리나라도 영원히 독립국으로 승승장구할 것 같다. 일본을 물리치고, 일본보다 앞서는 우리나라가 되기를 소망해 본다. 맑던 하늘에 동쪽부터 검은 구름이 일기 시작한다. 일본 녀석들의 심술처럼 어둑어둑해지는 바다를 헤치고 앞으로 간다. 물개가 살았다는 ‘물개바위’에는 물개가 살지 않는다고 한다. 섬을 한 바퀴 돌면서 동도와 서도 사이에 부교를 설치하거나, 부분적으로 메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독도를 찾는 사람들은 누구나 입도(入島)하여 너른 광장에서 <독도는 우리땅> 노래도 부르며, 신나는 춤판이라도 펼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우리나라 땅인데, 왜 일본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가? 물론 국제문제가 미묘하다는 것은 들어 알고 있지만, 독도에는 이미 대한민국 주민이 3명이나 살고 있는데, 왜놈들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독도를 떠났다. 5. 돌아보며 다지는 생각들 독도를 찾아오는 길이나, 떠나는 길은 눈물어린 길이었지만, 독도를 밟아보겠다는 꿈을 이루어 행복한 포만감으로 벅찼다. 오랜 동안 간절한 염원으로 지녔던 독도 상륙, 이를 이룬 보람과 행복의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내렸다. 그야말로 감격의 눈물길이다. 독도에서 울릉도로 회항하는 길을 다시금 해양경찰청 경비정이 호위하였다. 어제도 그랬듯이 오늘도 그러하다. 아마 오늘과 같이 내일도 우리를 굳건하게 지키리라는 믿음으로, 경비정을 옆에 두고 항해하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그러면서 또한 일본의 도발을 미연에 방지해야만 하는 우리의 입장이 서글퍼지기도 한다. 독도에 상륙하는 순간부터 걷잡을 수 없이 흐르던 눈물, 그리고 돌아서며 다시 돌아보며, 남몰래 흘리던 눈물의 의미를 다시금 되살려 보았다. 독도에서 2 리헌석 독도여 네 손을 잡고 왜 나는 울어쌓느냐? 반갑다 손길이 뜨거운가, 가슴에 화르르 불꽃이 인다. 독도여 네 가슴을 밟고 왜 나는 울어쌓느냐? 오늘도 바다는 멀고 하늘은 눈 시린 쪽빛이다. 우리를 태운 배는 울릉도로 기수를 돌려 속력을 낸다. 부서지는 물결소리가 커지고, 엔진 소리가 더 요란하다. 사실이거나, 혹은 느낌으로 그러하거나, 독도를 두고 떠나는 마음이 그러하니 어쩌겠는가. 이제 독도가 그리울 때는 편지를 쓰겠다. 편부경 시인이 쓴 [독도우체국 2]에서 보면,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산 27번지로 편지하면 독도를 지키는 섬마을 사람들의 안부를 알 수 있다고 한다. 우편번호 799-805를 환하게 적어 우체통에 넣으면 된다고 한다. 그러면 독도를 가슴에 품을 수 있다고 한다. 그리하여 독도 경비대 앞의 바닷가 우체통에 뜨거운 내 사랑이 닿을 때쯤이면, 나는 다시금 그리운 가슴을 씻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리운 사람들에게 독도에 대한 사랑을 바닷바람에 실어 보내면, 그들도 나처럼 독도에 대한 간절함이 생겨날 것만 같다. 여객선에는 독도 사랑과 나라 사랑에 대한 스티커가 붙어 있다. <독도는 우리 땅 대마도는 우리것>, 그렇지, 독도를 돌아보고 오면서 나도 같은 마음이 된다. <동해는 우리바다 국토를 지키자>, 그래, 우리바다를 지켜야 우리나라를 지킨다는 것에 공감한다. <역사왜곡 일삼는 왜놈들의 버르장머리를 고치자>, 정말 그렇게 되었으면, 정말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