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도가 철학을 논한다는 것은 그 일부로서 완전한 것이 될 수가 없다. 오히려 윌 듀란트의 <철학 이야기>에서 더 영감을 얻을 수 있는 내용을 잘못 전달된 내용으로 작용할 위험성도 있다. 다만 <철학 이야기>에는 마크 트웨인의 <인간이란 무엇이냐>에서 제시한 인간 기계론(선행은 없고 자신의 만족으로 다른 사람을 도와준다는 철학)도 포함 된다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실락원>을 소개할 때, 악마(Satan)와 악마의 딸 죄(Sin)와 죄의 아들인 죽음(Death)에 대하여 약술한다. 즉 타락한 천사인 악마가 아담과 이브가 살고 있는 낙원으로 들어가려다가 지옥문을 지키던 죽음과 싸운다. 딸인 죄의 중재로 싸움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가브리엘 천사와 악마가 싸울 때, 산을 집어던지는 장면이 나온다.
문화란 접근하기가 어렵다. 문화는 여러 내용의 종합이다. 또한 문화가 발생하여 효용에 이르기까지 과정이 뭉쳐져 있다. 따라서 문화란 개념이 이해는 상황에 따라서 역동적일 뿐만 아니라 분출하는 상호간의 체계 관계도 완전히 파악하기가 힘이 든다. 다행히 필자가 만든 체계가 당분간 사용해 보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철학은 진리에 대한 지혜를 사랑하는 것이다. 진리란 다른 이름이 체계적인 지식이다. 혹은 철학이 개념의 족보라고 한다. 철학은 그 시작을 탈레스로 잡는다. 물을 모든 시작의 근원으로 보았다. 그에 대한 유명한 일화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너무 별을 관찰하러 하늘만 쳐다보다가 우물에 빠진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현실에서 하는 일이 하나도 없는 백수라고 욕하는 것을 벗어나기 위해서 참기름 짜는 기계를 발명하여 많은 돈을 벌었다고 전해진다.
문학의 대명사를 셰익스피어라고 하고, 영국인은 인도와 셰익스피어를 바꾸지 않겠다고 하였을 정도이다. 서양 철학의 대명사는 플라톤(Plato, 427-347 B.C.)이다. 셰익스피어가 약 40편의 희곡을 썼듯이, 플라톤도 저서가 약 40권이다. 물론 소크라테스의 저서로 보는 것과 플라톤의 순수 저서로 보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플라톤의 날개 아래 우리는 서양 철학의 순수한 모습을 보게 된다. 문학인을 공화국에서 쫓아내야 한다고 문학인을 매도한 <공화국>이 있다. 오늘날로 보면 유토피아의 세계를 그린 것이다. 문학의 세계가 그리스의 주 무대였고, 신화가 종교로 자리매김하였던 당시로서는 큰 반역이었다. 그런데 <대히파이어스>는 미학서로 잘 알려져 있다.
플라톤의 스승도 문학인 때문에 처형되었다. 희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의 <구름>은 소피스트 소크라테스가 가르친 제자가 자신의 아버지의 빚장이들을 물리친 것까지는 좋았으나, 도가 넘어서 자신의 아버지가 진짜 아버지가 아니라는 괴변을 늘어놓는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 그 아버지는 아들을 잃은 복수심을 소크라테스에게 돌린다. 이러한 작품이 무대에서 상연되자 많은 사람들이 소크라테스를 미워하게 되고, 드디어 소크라테스에게 사약을 받게 한 것이다. 플라톤의 수제자 아리스토텔레스에 와서 <물리학>에 붙어있는 내용을 형이상학이라고 하여, 오늘날 존재론이라 불리는 형이상학의 기초를 이룬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윤리학에서 자신의 아버지 이름을 딴 개인 윤리학 저서인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완성하였고, 그곳에서 못다 설명한 내용은 <정치학>에서 이어진다고 하였다. <정치학>에서 민주주의를 거지 정치라고 맹비난하였다. 알렉산더의 스승이었으니 군주제를 옹호한 것은 마땅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카타르시스의 개념은 오늘날도 유명하다. 그는 플라톤과 달리 문학인을 좋게 평가하였다. <시학>은 오늘날 미학의 근원이 되는 책이다. 오늘날의 플롯과 스토리의 개념도 이 책에서 유래한다. 서양 철학은 중세에 와서 신학과 결부되어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과 결부된다. 근세에 와서 서양의 파스칼과 베이컨과 라이프니츠(단자론)의 철학이 주류를 이룬다. 소위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으로 나뉘어 진다. 특히 파스칼의 <팡세>는 뒷부분에 신약성서의 해박한 지식을 논하고 있다. 이것은 홉스의 <레바이던>의 뒷부분에 구약에 대한 깊은 분석을 한 것과 비교된다. 베이컨은 <학문의 진보>를 비롯한 철학서와 더불어 몽테뉴의 경수필 <수상록>과 대조되는 중수필을 집필하여 중수필의 시조로 알려지고 있다.
또한 <방법서설>로 알려진 데카르트는 과학자로서 <철학의 원리>라는 지구과학을 서술하고 있는데, 이것을 철학이라고 한다. 마치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과 관련된 뒤편의 내용을 형이상학이라고 하듯이. 한편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목적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군주는 사자(용맹)와 여우(꾀)의 속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 <정략론>에서 정치구조의 순환을 제안하였다. 군주에서 참주로 다시 귀족에서 과두로 그리고 민중(democracy)에서 중우(populism)로 순환하는데, 중우에서 군주로 순환하든지 아니면 식민지로 전락한다고 하였다.
칸트의 많은 철학 논문에 중요 삼 비판서는 형이상학으로 잘 알려지고 있다. 필자가 인식론인 <순수이성비판>은 20년에 걸쳐서 일독을 하였다. 그 정도로 난해하다. 다른 두 저서인 윤리서인 <실천이성비판>과 미학서인 <판단력비판>은 몇 달 동안 읽었다. 칸트의 인식론은 플라톤의 모사설(copy)과 다르게 구성설(constitution)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것을 코페르니크스적인 인식의 혁명을 낳았다고 한다. 그리고 진선미도 칸트의 미학이 플라톤이 주장한 선미(선한 것이 아름다운 것)에서 선과 미를 분리하는 데서 드디어 진선미를 분리한 셈이 된다. 해외에 나가지도 않았지만 대학 강단에서 강의를 하면서 얻은 사색의 결과가 합리론과 경험론을 합쳐서 통일된 철학을 만들어 내게 된 것이다.
헤겔은 주저인 <정신현상학>이란 작은 책자를 통하여 그의 사상의 전모를 드러냈다. 그리고 <미학>을 통하여 문학과 음악과 미술과 건축과 조각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드러냈다. 그러나 반은 엉터리라는 실패작 <역사철학>에서 역사에 대한 잘못된 논리를 전개하여 하나의 오점을 남겼다. 현대의 실존주의의 시조인 키에르케코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죽음에 생각하고 대비하여야 죽지 않는다는 역설적인 논리를 설파하였다. 유신론자인 키에르케코르와 다르게 무신론자였으며 결국 말로가 미쳐서 죽은 니이체의 많은 저서는 잘알려졌고 잘 번역되어 있다. <반그리스도론>에서 제일 미워한 사람은 사도 바울이다. 그의 내용을 조모조목 반박하고 있다. 신화를 재해석한 <비극의 탄생>에서는 감성인 디오니소스(박카스, 술의 신)가 이성인 아폴로를 이김으로서 가치관의 혼란을 초래한다는 내용이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신은 죽었다고 외치고 있다.
현대의 철학 중에서 마르크스의 철학은 계속된다. <자본론>에서 에리자베스 시절에 유럽에서 잘 사는 나라였던 영국의 평균 수명이 18세였다. 그러나 소위 부르조아들은 36세가 평균 수명이었다. 공장에서 노동하는 어린이가 더위와 과로로 쓰러지면 물을 한 바가지 퍼부어 깨운 다음 다시 일을 시키고 있다. <경제학 철학적 수고>에서 상부구조와 하부구조를 논하고 있다. 현대의 존재론(형이상학)은 무척 어렵다. 하이덱거의 <존재와 시간>이나 그의 제자 사르트르 <존재와 무>는 칸트의 인식론인 <순수이성비판> 만큼이나 어렵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마치 권터 그리스의 <국부마취를 당하고>에서 150쪽까지 도대체가 알 수가 없었다. 그 이유는 치과에 앉아서 치료를 하는 장면인데, 처음부터 치료받는 장면이 계속되는 가운데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추측할 수조차도 없는 상황이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존 듀이나 피어스의 철학은 교육철학에서 약간을 들었고, 그의 실용주의(pragmatism)는 잘 알려져 있지만, 정통 철학 보다는 오히려 심리학에 뿌리가 되는 내용으로 생각된다.
부조리 철학은 까뮈의 <이방인>에서 보듯이 바로 철학이다.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와 현대의 많은 소설인 죠셉 헬러의 <군령 22호>나 존 바드의 <엽연초상인>도 부조리 소설이다. 부조리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을 부조리 영웅(Absurd hero)라고 한다. 현대 철학이 부조리 문학을 받아들여 부조리 철학으로 삼고 있다. 현대는 비트겐 슈타인 이후의 분석 논리학도 한 가닥으로 성장하고 있다.
한편 한국 철학은 중국의 성리학에 영향을 받아서 이기 이원론과 이기 일원론이 서로 버티고 있다. 이퇴계와 이율곡이 서로 버티었다. 이율곡의 사상전집 서문에서, 어느 스님과의 대화중에 스님이 말한 내용이 우리 성리학에도 있다고 하여 스님이 무릎을 꿇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런데 나타난 것이 이와 기이며 나주에 나타난 것이 음양이라고 한다. 음양의 중심 되는 중간 지대를 기라고 하며 기의 중심을 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귀신의 개념도 이와 기가 나타나는 곳이 아주 밝은 지대인데, 이곳을 귀신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유교철학에는 귀신의 문제가 우리가 생각하는 무속 신앙과는 다르다. 덧붙여서 불교에도 귀신의 개념은 없다. 다만 귀신은 무속 신앙일 따름이다. 다산 정약용의 실학사상도 앞으로 더 검토해야할 내용이라고 본다.
문화에서 철학을 논하기 위해서는 필자로서는 좀 더 알아야할 철학서들이 많으며, 그 깊이를 잘 모르면서 무식이 용감하다고 과감하게 돌진한 감이 있어서 죄송하게 생각한다. 바꾸어 말하면 전공도 아닌 내용을 감히 들먹인다는 자체가 모순이다. 그러나 문학도로서 문화 특히 철학에도 관심을 가지는 것으로 위안을 삼는 수밖에 없다. 문학도들의 많은 분발을 통하여 문화 특히 철학에도 깊은 혜안이 나타날 때까지, 계속해서 독서하는 투자를 끈기 있게 지속해 주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