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경제"지 (1991년 10월호) 기고문 경제기획원 대외경제조정실장 재임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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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가정은 없다고 하지만 우리나라도 일본과 같이 개화초기에 보다 적극적인 개방노력을 기울였다면 우리의 근세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하는 것은 모두가 한 번쯤은 가져 보는 물음이다.
경제기획원 대외경제조정실장으로서 90년대 초의 우리경제의 국제화 추진 노력을 실무적으로 총괄하면서 이 국제화가 바로 우리나라의 경제구조 개혁을 가져올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세계 각국의 개혁사가 외부적 충격 없이 스스로의 자각과 힘에 의해서만 이룩된 사실이 없음을 나타내는 것을 보고 경제의 구조개혁은 적절한 개방 내지는 국제화와 병행 추진되어야 한다는 요지의 이 글을 정부의 경제홍보지인 '나라경제'지에 썼다. |
'하 늘은 이름 없는 종친(宗親)의 힘을 시험하심에, 문득 그의 아드님으로써 이 나라의 임금을 삼았다. 아직껏 시정(市井) 무뢰한들의 술친구이던 그는 일약 국태공(國太公)이라 하는 지위에 올라가게 되었다. 마침내 그의 힘을 시험할 때가 이르렀다. 조선의 왕가법(王家法)으로써 아직 금하여 오던 태공섭정(太公攝政)이라는 것을 어느덧 그는 잡았 다.'(김동인, '젊은 그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은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 밑에서 보신하기 위해 웅지를 숨기고 파락호로서 불우한 세월을 보내다 1863년 이조말기의 실권자로 등장한다. 그는 외척세력을 숙청하는 한편 당색을 초월하고 남 북인 각파와 신분 계급을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하였다. 대전회통(大典會通) 등의 간행을 통해 법률제도를 확립하고 세제를 개혁하여 양반 상인의 차별 없이 세금을 징수하는 등 국가부흥에 힘썼다. 또한 외교적으로는 서양 오랑캐로부터 우리의 주권을 지키기 위해 나라 문을 걸어 잠궜다.
후세의 사가들은 내치면에서 대원군의 탁월한 업적을 인정하면서도(경복궁 중건은 논란의 대상이 되나) 대동강에서 제너럴셔면호를 소각시키고, 프 랑스 미국과의 마찰로 각각 병인양요(丙寅洋擾), 신미양요(辛未洋擾)를 일으킨 소위 쇄국정책에 대해서는 이를 크게 비판하고 있다.
개혁과 개방
대원군의 쇄국정책에 대하여 후세의 역사가들은 대체로 대원군이 당시 국제정세에 대한 안목이 전연 없고 그 특유의 고집스러운 성격에서 이러한 정책을 택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소설가 김동인은 대원군에 관한 소설 '젊은 그들'에서 보통 역사가들과 달리 특이한 해석을 하고 있어 필자 가 중학생 시절, 이 소설을 흥미 있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즉 대원군은 그 당시 국제정세에 결코 어두웠던 것이 아니고 이를 충분히 꿰뚫고 있었으나 당시의 조선이 너무나 국력이 약했으므로 일단 문을 걸어 잠근 채 내적으로 힘을 충분히 길러서 시간을 갖고 외국에 개방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이 김동인 씨의 진정한 대원군관인지 아니면 소설을 위한 허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아무튼 대원군에 대한 특이한 해석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문제의 초점은 대원군의 쇄국정책이 설사 김동인적 해석에 기반을 두고 있었고 또한 이러한 쇄국정책이 그 당시 백성들의 감정에는 부합되어 나라를 지키는 상책인 것 같이 보였다 하더라도 그 결과가 어떠했느냐에 있다.
이로 인해 근대화의 기회를 놓쳐 나라발전을 더디게 하고 결과적으로는 열강의 개방요구가 거세짐에 따라 궁극적으로 나라를 송두리째 일본에 내 주게 되는 운명으로 이끌었다는 점이다.
만약 대원군이 초기에 각국의 개방요구를 적절히 수용하면서 이와 병행하여 내부제도를 정비하고 국력을 양성하는 정책을 썼더라면 우리의 근대 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상상을 해본다.
반면 일본은 1854년 미국의 동인도 함대사령관 페리 제독이 흑선(黑船)을 이끌고 나타나 개국을 요구하고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미국 연합함대가 결 성되었을 때 어떻게 대응했던가? 당시 강력한 지방세력이던 사쓰마(薩摩藩)와 조슈(長州藩)는 각기 서양국가와 일전을 치렀으나 완패하고 서양문명의 위력을 통감, 개국을 서둘렀다. 이들은 신식무기 등의 도입을 통해, 세력을 키우고 도쿠가와막부(德川幕府)를 눌러 메이지정부를 탄생시켰다. 이들이 수립한 메이지(明治)정부는 서구의 제도를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일본의 근대화 부국강병을 이루었고 조슈 출신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은 선진 독 일제도에 심취, 이를 일본에 도입하여 메이지시대의 후반기를 이끄는 인물이 되었다.
이후에도 일본은 외부압력이 밀려올 때마다 이를 극복해 나가는 과정에서 오히려 내적 동인만으로는 거의 불가능한 개혁을 성공시킴으로써 오늘 의 일본, 일본경제를 이루어 왔다.
2차 세계대전 후 맥아더점령 정부하에서 재벌해체, 시장경제체제의 본격적 도입 등 경제민주화가 이루어졌고, 1 2차 석유파동을 거치는 동안 산업 전반의 에너지 절약화를 이루었다. 플라자합의 이후 2년 동안 엔화는 거의 2배로 평가절상되어 일본의 수출이 격감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일본기업 과 정부는 오히려 이를 일본상품의 경쟁력을 결정적으로 높이는 계기로 삼았다.
최근 미국과 맺은 구조조정협의(SII)도 일견 일본경제에 대한 미국의 내정간섭적인 성격으로 보이나 이것이 나아가 일본경제 내부의 마지막 남은 제도적 문제점(유통 공정거래 토지관련제도 등)을 제거하여 일본경제를 보다 효율적인 구조로 전환시켜 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며 일부 일본의 경제학자들도 이러한 견해에 동조하고 있다.
소련체제의 대변혁, 동구 사회주의국가의 시장경제체체로의 편입 등 세계질서의 대변화는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에서 출발하 였다고 할 수 있다. 고르바초프는 글라스노스트(개방) 없이 페레스트로이카(개혁)만을 달성하기를 원했을지 모르나 개방 없이 개혁이 불가능함을 파악 하고 두 가지를 병행하였던 것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이같이 개혁과 개방은 병행되어 추진될 때에 비로소 실질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다. 경제적인 면에서 개방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이를 통해 경제구조조정 경쟁력 제고를 이루는 것이 목적이다. 개방은 초기에 단기적으로 국내산업의 위축, 수입증가에 의한 국제수지의 악화 등 비용이 발생할 수 있으며, 개방에 따른 산업의 경쟁력 제고라는 긍정적 효과는 완만히 나타나는 반면 이에 따르는 고통은 눈앞에 즉시 드러나 보이는 법이다. 물론 가장 바람직한 것은 내부의 개혁 자율화를 충분히 이루어 충분한 경쟁력을 갖춘 후, 그 바탕 위에 대외개방을 확대해 가는 방법이라는 것은 의문의 여 지가 없다. 그러나 문제는 대외개방을 통한 선진기술의 도입, 외국상품과의 끊임없는 경쟁 없이 국내적 동인만에 의해서 경쟁력 제고, 즉 구조조정 등 의 개혁을 해나가는 것이 사실상 가능하냐는 데에 있다. 기존의 구조에 의해 이익을 보고 있는 이익집단의 심각한 저항으로 인해 대부분의 내부개혁 노력이 좌절되고마는 동서고금(東西古今)의 예를 볼 때 더욱 그러한 생각을 갖게 한다.
우리나라는 대외지향적 경제정책을 통해 고도성장을 이룩해 왔고 1986년 이후 4년 간 국제수지 흑자를 실현해 국민들의 국제화에 대한 인식이 개선 되고 있으나, 최근에 국제수지가 적자로 돌아서고 또 그 규모가 확대됨에 따라 국제화에 대한 우려의 소리가 커지고 있다. 국제수지가 좋을 때나 시 장개방이 가능하지 지금 같은 상황에서 시장개방을 어떻게 지속할 수 있을 것인가? 외국의 요구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시장개방을 해야 한다면 제도적 으로 개방해 주되 실질적으로 외국상품이 국내에서 유통되지 않도록 여러가지 조치를 하여야 할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세계경제질서는 바야흐로 개방과 개혁의 시대에 있다. 사회주의 국가들이 체제개혁을 통해 시장경제체제로 편입되고 교통 통신의 발달로 기업의 범 세계화가 진전되고 있다.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은 자유무역의 대상범위 및 각국 시장의 개방 정도를 확대함으로써 세계교역을 증대시킬 전망이다. 이 에 더하여 우리의 경제규모 무역규모가 확대되어 세계 10위권 경제로 진입함에 따라 우리는 이에 상응하는 추가적인 개방을 요구받고 있다. 무역대국 인 우리의 수입억제정책으로의 후퇴는 즉각적인 통상마찰을 유발하고 우리의 수출환경을 악화시킬 뿐 아니라 국제수지의 개선, 산업구조의 조정 등 장기적인 우리경제의 과제가 추구하는 방향과 역행되기 때문에 선택할 수 없는 대안이 될 것이다.
1978~1986년 중 수입자유화가 우리경제에 긍정적으로 작용하였던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수입자유화 추진결과 우리나라 제조업의 국내수요 중 수입 비중(시장침투비율)은 일방적으로 하락하였고, 수입자유화에 따라 수출비율이 상대적으로 감소한 반면 내수산업의 경우 국제경쟁력 강화를 통해 수출 특화도가 제고되거나 수입대체를 이룩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경쟁력의 근원, 국제화
결론적으로 시장개방으로 표현되는 국제화 추진(국제화는 이보다 훨씬 복합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지만)은 사실 외국의 압력보다는 우리 스스로의 필 요에 의해 추진하여야 할 과제이다. 경제성장으로 인한 경제규모의 확대와 최근의 고임금 추세는 노동절약적 기술집약적 산업구조로의 구조조정을 통 한 경쟁력 제고를 요구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경제 내부의 실질적인 경쟁체제가 필요한바, 이는 적절한 시장개방을 통한 외부경쟁의 유입과 연 계될 때만이 달성 가능하리라 본다. 오늘날 국제수지의 어려움이 우리산업 내지 제품의 전반적 경쟁력 저하에 그 근본원인이 있다고 한다면 이런 때 일수록 지속적이고 일관성 있는 대외경쟁의 도입만이 우리산업의 경쟁력을 장기적으로 향상시켜 준다고 필자는 믿는다. 물가안정 노사화합 통상마찰 완화 등 우리경제의 현안과제도 국제화 추진이 없이는 달성이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오늘의 물가문제가 구조적으로 볼 때 경쟁력이 없거나 취약한 부문(농수산부문 서비스부문)이 선도하고 이를 흡수해 오던 공산품부문의 가격 경쟁 력이 한계에 달한 데 있다고 본다면, 이러한 취약부문도 적정한 국제화가 이루어져야 물가안정의 근원적 기반이 마련될 수 있을 것이다. 치열한 대내 외경쟁을 통해서만이 기업이 발전할 수 있는 풍토, 즉 쉽게 돈을 벌 수 없는 경제사회구조가 정착되지 않고는 우리나라에 있어서 노사문제의 근본적 해결에 한계가 있다고 보는 견해에 필자는 동의하고 있으며, 이를 전제로 한다면 노사관계의 근원적 안정을 위해서도 적절한 국제화의 과정이 있어 야 하지 않을까?
현재 미국을 비롯한 주요 교역상대국과의 통상마찰은 우리 경제구조 전반의 자율화 국제화를 요구하는 양상으로 소위 구조조정협의 형태로 발전 하고 있는 추세를 감안할 때 우리경제의 사활이 걸려 있는 우리의 해외시장의 적절한 관리, 이를 통한 통상마찰의 완화노력이 우리경제의 전반적 국 제화의 추진 없이 단순히 통상기술적 차원에서 해결되어 갈 수 있을 것인지를 심각하게 생각해 보게 된다. 결국 국제화의 원만한 달성만이 우리경제 가 장기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방안이 아닐까?
병약한 아이를 키울 때, 완전히 건강해질 때까지 계속 바깥 바람을 쏘이지 않고 포대기에 싸서 집 안에서만 키우는 방법을 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진정 현명한 부모라면 감기가 걸리더라도 적절히 바깥 바람을 쏘이며 동네 아이들과 뛰어 놀면서 자라도록 할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아이의 체질 과 성향에 대해 부모의 정확한 진단은 반드시 필요하다.
한국경제는 적절한 외부자극과 시련에 견디고 이를 극복하면서 발전해 왔고 앞으로의 시련에도 이길 수 있는 체질을 갖고 있다. 이것은 근래 30년 동안의 우리경제 발전사가 이를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지 않은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