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대구감옥(大邱監獄)의 순교자(殉敎者)들
이제 안동(安東)에서 대구(大邱)로 이송되어 경주(慶州)에서 붙잡혀 온 교형(敎兄)들과 만나서 나중에 그들과 같이 승리(勝利)를 거두는 영광(榮光)을 누린 증 거자(證據者)들 가운데, 중요한 분들을 알리기로 하자. 이들은 이시임(李時壬) 안나, 김희성(金稀成) 프란치스꼬, 김약고배(金若古排) 야고보, 김종한(金宗漢) 안드레아이다.
1) 이시임(李時壬) 안나
㉠ 이시임(李時壬) 안나는 덕산(德山)고을 높은뫼(지금의 예산군(禮山郡) 고덕면(古德 面) 몽곡
리(夢谷里) 사람이었다. 그녀는 양반 집 딸인데 1827년에 전주(全州) 감옥에서 죽은 그의
아버지 이(李)성삼(*오빠)에 대하여는 나중에 말하겠다.
㉡ 이시임(李時壬) 안나는 재색(才色)을 겸비한 처녀로서, 뛰어난 열성(熱誠)으로 수계
(守誡)를 하며 동정(童貞)을 지키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외교인(外敎人)들이 이 사
정(事情)을 알게 되어, 불평을 하며 이 문제로 인하여 사람들이 하도 귀찮게 굴어, 가
족이 견디어 낼 수가 없음을 보고, 이시임(李時壬) 안나는 집을 나가, 몇몇 동정녀(童
貞女)들이 일종의 조그만 수도원(修道院)을 만들어 공동생활(共同生活)을 하고 있던,
멀리 떨어진 집에 가서 살기로 결심(決心)하였다.
㉢ 박(朴)이라고 하는 교우(敎友) 뱃사공이 그녀를 거기까지 데려다 주기로 하였다. 그러
나 안나가 그에게 맡겨지자, 그녀에게 폭행(暴行)을 가하였고, 그도 아직 결혼하기 전
이어서 강제(强制)로 결혼(結婚)을 하였다. 비통하기는 하였지만, 이시임(李時壬) 안나
는 체념(諦念)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사는 중에 아이를 낳았고, 그 후 몇 해 아
니 되어 과부(寡婦)가 되었는데, 여전히 모든 신자의 본분(本分)을 충실하게 지켜나갔
다.
1815년에 진보(眞寶) 포졸(捕卒)들에게 붙잡혀, 그곳에서 문초(問招)를 당한 다음,
그 항구한 마음의 덕으로, 대구감영(大邱監營)으로 이송되었다. 여기에서 다시 고문(拷
問)을 용감히 참아 받고 나서 사형선고(死刑宣告)를 받았다.
㉣ 이시임(李時壬) 안나가 이렇게 오죽잖은 뱃사람과 함께 살기로 동의(同意)한 것을 사람
들은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겁탈(劫奪)의 자세한 경위(經緯)를 다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 나라에서는 풍속(風俗)에 근거(根據)를 두고 나라의 관습(慣
習)이 된, 이 가증(可憎)스러운 속담(俗談)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남편이나 부모의 권한(權限)에 있지 않는 여자는, 누구든지 먼저 차지하는 자
의 것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시임(李時壬) 안나는 부모의 집을 떠났으니, 바로 이
경우에 해당(該當)하는 것이었다.
뱃사공이 그녀를 자기의 (所有)로 만들었고, 또 소송(訴訟)을 제기하였더라도 아무런
소용(所用)이 없었을 것이다. 이 사람의 손에서 벗어나려면 많은 학대(虐待)를 받았어
야 할 것이고, 어쩌면 목숨을 잃을 위험(危險)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또 거기에서 벗어
난다 해도 어디로 갈 수 있었겠는가? 도중에 또 다른 불한당(不汗黨)의 손아귀에 들어
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 그래서 이시임(李時壬) 안나는 그녀의 명예(名譽)와 처녀성(處女性)을 잃은 이상, 아무
런 말도 없이 정당(正當)한 결혼(結婚)할 수 있는, 이 교우와 혼인(婚姻)하는 것이 상책
(上策)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더욱이 여인(女人)을 천대(賤待)하고, 멸시(蔑視)하
는 것이 말하자면 자연법(自然法)처럼 되어 있는 조선(朝鮮)이나 그밖의 비(非)그리스
도교 나라에서는, 여자들 자신도 이런 사상(思想)을 가지고 있었다. 즉 여자들은 권리
(權利)도 책임(責任)도 없다고 생각하고,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경우에는 정말로 사슬
에 묶인 것처럼 생각하여, 거기에서 해방(解放)되어 나갈 마음조차 품지를 못한다.
이러한 예는 얼마든지 있다. 이러한 사상(思想)이 신자들 간에는 통용(通用)되지 않
는 것은 덧붙여 말할 필요조차 없으니, 외교인(外敎人)게 강탈(强奪)되어 갔던 신자 과
부(信者寡婦)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필사적(必死的)으로 항거(抗拒)하여, 강탈자에게
서 해방(解放)되어 나오고야 만 사실을 여러 차례 볼 수 있다.
2) 김희성(金稀成) 프란치스꼬
㉠ 김(金)「경서」희성(稀成) 프란치스꼬는 예산(禮山) 여사울(지금의 예산군 신암면 (新岩面)
신종리(新宗里) 마을의 부유한 중인(中人) 가정에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글공부를
열심히 하였고, 또 열렬한 교우(敎友)인 그의 아버지 김광옥(金廣玉) 안드레아 자신도
아들을 철저히 교육시켰다.
김광옥(金廣玉) 안드레아는 1801년 박해(迫害) 때에 붙잡혔으므로, 기회 있을 때마
다 가족(家族)들을 권고(勸告)하여, 자기 본을 따라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훈련(訓
練)을 시켰고, 집안끼리 또는 이웃과 화목(和睦)하게 살며, 고신극기(苦身克己)로 하느
님을 섬기고 영혼(靈魂)을 구하라고 가르쳤다.
㉡ 김희성(金稀成) 프란치스꼬의 열심은 그때부터 나날이 더해가기만 하였다. 아버지의
본을 따르겠다는 거룩한 경쟁심(競爭心)을 발휘하여, 그는 세속(世俗)의 물건 따위는
모두 우습게 생각해서, 재물(財物)을 버리고 일월산(日月山) 중에 있는 경상도(慶尙道)
영양(英陽) 고을 곧은장으로 가서 숨어 살았다. 거기에서 그는 나무뿌리와 도토리 등으
로 연명(延命)하며, 그 이후로는 늘 금욕생활(禁慾生活)을 하였다.
해마다 사순절(四旬節) 시기에는 대재(大齋)를 엄히 지키고, 여러 가지로 고신극기
(苦身克己)를 하였다. 타고난 급급한 성정(性情)을 이기려고 어떻게나 노력하였던지,
그는 오래지 않아 양순(良順)한 인내(忍耐)의 모범(模範)이 되기에 이르렀다.
㉢ 1815년에 배신자(背信者) 전지수가 안동(安東) 포졸(捕卒)들을 데리고 느닷없이 그를
잡으러 왔다. 그때 김희성(金稀成) 프란치스꼬는 산에 있다가 포졸(捕卒)들이 내려오라
고 소리치는 것을 듣고, 아들 문악에게 일렀다.
ꡒ나는 천주의 명이니, 가야 한다. 너는 나를 따라오지 말고, 온 집안을 보살
피며 특히 네 할머니를 극진히 모셔라.ꡓ
그런 다음 아주 기쁜 낯으로 하산하여, 포졸(捕卒)들과 배반자(背反者)까지도 관대하게
대접하고, 어머니에게 하직(下直)을 고하며,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간청하면서, 착하
고 상냥한 말로 위로(慰勞)하였다.
그런 다음 아내를 향하여, 어머니 말씀을 잘 듣고 잘 봉양(奉養)해드리며, 아이들을
잘 가르치라고 부탁한 후, 마지막으로 자기의 뒤를 따르라는 부탁을 하였다.
㉣ 그러고 나서 명랑하고 웃는 낯으로 포졸(捕卒)들을 따라 나섰다. 안동(安東)읍에 이르
러 첫 번 신문(訊問)을 당하고, 며칠 안 있어 대구(大邱)로 이송(移送)되었다. 형벌(刑
罰) 가운데서 그가 보여준 용감한 항구심(恒久心)은 관헌(官憲)들을 당황하게 하였으
나, 이내 사형선고(死刑宣告)를 받았다.
3) 김 야고보 화준
김약고배(金若古排) 화준 야고보에 대해서는 그 자세한 내력(來歷)을 알 수 없으나, 청
양(靑陽)고을 수단이(지금의 청양군(靑陽郡) 사양면(斜陽面) 신왕리(新旺里))에서 태어났다.
성격이 온순(溫順)하고 참을성이 있었으나, 하느님을 섬김과 영혼(靈魂)을 구하는 일
에는 크나큰 힘을 보여줄 줄을 알았고, 성교회(聖敎會)의 규구(規矩)를 충실히 지키며
기도(祈禱)와 성경(聖經)읽기에 부지런하여,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어디에서 체포(逮捕)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청송(靑松)에서 체포되었음), 1815년에 붙
잡혀 안동(安東)읍으로 압송(押送)되어, 거기에서 관장(官長)의 갖은 유혹(誘惑)과 약
속(約束)에 항거하며, 혹독(酷毒)한 고문(拷問)에도 참아 견딘 후, 대구(大邱)로 이송
(移送)되었고, 마침내 사형선고(死刑宣告)를 받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