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르: 소설
- 추천: 21세기적 나름의 사랑을 경험해 보고 싶은 분께
편견으로부터 잠시 해방되고 싶은 분께
그저 '문학동네'에 대한 추억이 있는 분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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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인지 매번 그에게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리운 기분을 느꼈고, 그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기 위해 주의를 기울여야만 했다. 그건 뭐랄까, 아무 뜻도 없는 말이지만 어쨌거나 너무 사적인 감정이었고, 일단 튀어나오기만 하면 종잡을 수 없는 고백 비슷한 게 되어버릴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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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내가 스물한 살이었을 때, 나는 내가 어리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 내 나이 정도 먹은 누군가를 보며 살 만큼 살았네, 하고 생각하는 쪽에 더 가까웠다. 그러니까 반 고흐 정도면 딱 죽기 좋을 때 죽었네, 하고 말이다. 어떤 경지에 이르고 나서도 자기 인생을 망칠 만한 충분한 시간이 있는 나이. 고흐가 꽤 젊어서 죽었구나 생각하게 된 것은 정말 얼마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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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에겐 대체로 호의적이었으며 본인은 인정하지 않았지만 어두운 표정의 여자를 보면 쉽게 사랑에 빠졌다. 체가 직접 말한 적도 있었다. 자긴 이미 여섯 살 때부터 알았다고. 그런 건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스스로 알게 되는 것이라고. 언젠가 자신이 신을 찾게 될 거라는 믿음이나 언젠가 예술을 하게 될 거라는 예감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확신하게 되는, 영혼에 새겨진 주름 같은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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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족은 서로를 잘 모르는 한에서만 사이가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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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영처럼 반듯하게 잘 자란 사람과는 편하게 지내는 게 어렵다. 특별히 특별한 데가 있는 게 아닌 사람. 그냥 평범해 보이는 사람. 모두와 두루두루 원만하게 잘 지내는 사람. 대체로 좋은 사람. 이상하게 그런 사람들이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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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어릴 때 내가 울면 할머니는 커다란 솜이불을 덮어주었다.
"그 안에서 실컷 울어라."
눈을 떠보면 어둡고 솜이불은 무거운데 그 어둠과 무게가 나를 달래주었다. 그동안 할머니는 나에게 먹일 달달한 음식을 마련해놓고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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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아침 영지는 잠에서 깨자마자 내 귓가에 대고 나와 함께라면 어디든 가겠다고 속삭였다. "왜냐하면……"하고 그 이유들도 함께 읊어주었다. 그 이유들에 취해서 나는 오랫동안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그건 마치 영원히 사랑한다는 말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참다못해 눈을 떴을 때 거기에 영원 같은 건 없었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내 눈썹을, 콧대를, 인중을 건드리며 오직 내가 눈을 뜨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당연히 시간은 내 마음 같은 건 아랑곳 않고 자기 할일을 했고 우리도 그저 우리 할일을 할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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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어릴 때, 여기 진짜 매년 왔어. 같은 반 애들이랑 피자 먹으면서 영화 보고 그랬다고. 진짜 귀여워. 석우는 자신을 귀여워하며 맥주 캔을 땄다. 나 사실 그때 내가 세련된 줄 알았다? 영화나 예술에 대해 많이 안다고 생각했으니까. 에이, 촌스러운 새끼. 그래도 나 지금 많이 멋있어졌지? 나 노력 많이 했다. 석우는 자기 자신을 귀여워했다가, 갑자기 자신을 한심해했다가, 갑자기 자기가 멋있어졌다고 했는데, 그래서인지 조금 미친놈 같아 보였다. 뭐래. 왜 이러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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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돈이 너무 좋지만 돈이 너무 싫다는 이야기를 하다가, 돈이 너무 좋아서 돈이 무섭다는 이야기도 하다가, 현금 없는 사회에 대해 이야기를 했는데, 방금 전까지 영화 이야기를 하다가 왜 갑자기 현금 없는 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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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검열 당국은 이만희 감독의 <휴일>(1968) 시나리오를 두고, "주체성과 예술성이 없"기 때문에 이런 영화는 만들어지면 안 된다고 했다가, 다시 "주체성은 있으나 예술성이 없"기 때문에 이런 영화는 만들어지면 안 된다고 했다가, 마지막에는 "되도록" 이런 영화는 "안 만드는"게 좋다는, 무슨 말인지 하나도 알아먹을 수 없는 말을 했다. 뿐만 아니라 이만희 감독은 <7인의 여포로>(1965)에서 국군을 허약하게 묘사했다는 등의 이유로 입건되기도 했다. 이 일로 촬영이 잠시 중단되었다가 출소 후 겨우 완성한 영화가 바로 <흑룡강>(1965)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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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하기 위해, 아이들이 하고자 하는 말을 막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정작 나조차도 불편한 이야기, 지루한 이야기, 공감되지 않는 이야기를 마주하는 연습이 부족했던건 아닐까. 선생님,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 가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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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영화 만드는 사람인데 영화 가르치는 사람이고, 영화 가르치는 사람인데 영화를 어떻게 가르치는지 배우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며, 영화를 배우는 사람이이고 해. 너무 많은 정체성이 있어서 정체성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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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나저러나 독립영화 감독은 사라졌다. 그 사람들, 어디서 뭘 하고 살고 있을까. 언젠가 짜잔 하고 다시 나타나줬으며 좋겠는데. 나는 그들의 다음 영화가 보고 싶었다. 내가 그들의 영화를 보기 위해 얼마나 먼 길을 갔는지, 가는 길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래도 얼마나 최선을 다해 갔는지, 늦을까봐 조마조마해하면서 갔는지. 내가 내 마음을 어떤 방식으로든 전했다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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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가격과 '문학동네'라는 이름만 보고 구입한 수상작품집.
요즘에 수상작품집을 잘 보지 않았는데.
예전과 달리 아는 이름이 아무도 없다.
마치 세대가 지나가버린 것처럼.
나와 함께하던 국문학 세대는
이제는 드물게 프로 작가가 되어있거나
한낱 독자가 되어 있거나
아니면 국문학을 핑계로 삼고 있거나
그러는 중일 것이다.
'박서련'과 '서이제'의 소설을 읽으면서 어딘가에서
다시 꼭 이 이름들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철학교수 박구용의 말이
문학가는 상을 수용하고 철학가는 상을 거부한다는데.
모두다 존재의 증명에서 발한 행동이라는데.
이 상은 이 작가들에게 존재를 증명해 보여주었는지 문득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