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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세님의 평창아라리와 청옥산,
아리랑과 평창아라리 정선아리랑 글들을 모아 봤습니다.
아리랑과 청옥산을 써 볼까요.
정선 아리랑엔 거칠현동의 전오륜외 6인의 고려말 선비가 정선읍내서 7Km 떨어진 전오륜의
고향으로 가면서 부른 "눈이 올라 비가 올라 만수산 검은구름 막 몰려든다"
평창, 정선 아리랑에 역사성이나 시사성의 낱말은 이 "만수산" 하나이며 "북망산천"이란 단어뿐.
여기서 "만수산"이란 단어는 역사적 단어이며 산간일대 민초들이 먼저 부른 단어는 전혀 아닌 것 입니다.
그것은 전오륜등 거칠현동이 먼저 불렀던 가사인 것입니다.
왜냐면, 만약 민초들이 역사성있는 단어의 가사를 불렀다면 평창, 정선 아라리엔 최소한 영월로 귀양온
단종에 대하여 모를리는 없었고 이 단종애사의 충절의 아라리 가사는 있어서 전하여져야 하지 않냐는 의문이다.
이렇듯 아라리는 민초들의 생활속의 삶의 희망과 그에 한스러움을 표현하였지 어떤 역사성은 전혀 없는 것입니다.
다만 만수산이란 가락에선 전오륜등 거칠현동 72인은 이성계의 반대세력으로 전오륜의 사부인 이초가 명나라
황제에게 아뢰어 이성계 일파 타도의 거사가 실패로 돌아가고 이초는 중국으로 귀양가서 자결 합니다.
이로서 이초의 문하생들이 야인으로 돌아 가는데...
전오륜의 고향 정선은 요즘같으면 서울서 세시간 거리이지만 그들은 가장 지름길은 원주-신림-주천-마차-미탄-
정선으로 갔다면.. 또한 중주, 제천의 박달재를 넘어도 마차-미탄으로 넘어야 합니다. 어떠한 경로든 당시 도망가는
그들이 바로 고향으로 가지는 못 했슬 것입니다.
그래서 숨을만한 장소는 깊고 깊은 청옥산이 아니었던가 하며 이후 정종, 방원,을 지나 세종때 쯤이라야 해금되고
고향 앞으로가지 않았슬까 하는 추정 입니다.
왜냐면 이방원은 조선의 안위가 평화로워서 만 백성의 평안을 바랐기에 반 세력은 가차 없었던 것입니다.
정종도 3년만에 왕위에서 하야할때 동생 방원으로 하여금 목숨이 보장않 되었기 때문이고 아버지 이성계가 그렇게
죽이지 말라던 정몽주도 새로운 사상의 역성혁명에 위배되는 사상 탓으로 또한 삼봉 정도전도 죽이는데 이들
죽림7현을 편안하게 놔 둘리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반 세력 7인이 함께 행동하는데 이것은 후일을 도모하는
반 행위집단으로 몰릴 수 있는 명분을 그 자신들도 몰랐겠는가?? 또한 정도전을 귀양보내고 하는 방원의 행위를 깊이
생각 못 했슬까??
그래서 그들은 절대로 개성에서 정선으로 곧 바로 가지는 않았슬 것입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 조선의 중앙
집권화를 이루며 혁명의 동기가 희석되어갈때 그들은 정선 전오륜의 고향에 갔으리란 생각 입니다. 그 시기는
세종이나 예종때 아면 안전한 시기는 성종때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그때까지 그들이 숨을만한 곳으로 아마 전오륜이 잘 알고있슬 지형의 미탄 청옥산 깊이 들어가 참으로 오랜 세월을
보냈슬 듯 합니다.
다만 북망산천은 조선때 북쪽이 명이 아니라 청의 오랑캐 땅이 되고 여기에 만리장성(만리장성은 명나라보다
청나라때 더 많이 쌓았기에) 청나라 만리장성에 군역으로 간 민초들의 와이프들이 밤을 지새며 부르던 가사에
한의 뜻을...
이렇게 아라리는 생활의 전부를 묘사하는데 "만수산" 이란 이 거칠현동이 600년 전에 부르던 가사가 구전되며
이 가사의 본 고장은 미탄 일대이고 육백마지기에 화전민이 살수있는 산간오지 청옥산쯤 아닌가?? 주관적이지만
그 아라리의 해석을 해 봅니다.
이러한 아라리의 유추적인 생각들을 언제 총 집합하여 쓸 것입니다.
아라리란 단어적 뜻은 무엇일까요??
테뱃엔 청옥산보다 더 높은 3-5천미터의 분지의 산이 있는데 이 분지 산을 "아리"라 합니다.
그리고 "라"는 고개란 뜻입니다.
분명 아라리는 양주동 박사님의 단군은 산위에,,,
아라리는 님(임금)을 향한 무강,안녕의 노래가사이며
이로서 우리민족 정서는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아리랑이며. 이 아리랑의 뜻은 민초들의 삶의 애환의 표출이며 그 기조는 恨인 것입니다.
이것이 어디에도 없는 후세의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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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칠현동에 대하여,,,>
우선 원주에서 주천=제천-마차-미탄으로 가지만 주천-평창도돈-마차,미탄으로 가는 길도 있는데 그 길 하나는
주천에서 미탄으로 가자면 하나의 길은 좌로 돌고 또 하나는 우로 돕니다
그 사이 주천에서 마차의 직선길이 있다면 서강과 원동제로 올라가는 첩경이 있는데 뺄치라는 동네를 거쳐 가는
옛길을 찾아 볼수도 있습니다. 아마 걸어간다면 이 뺄치에서 강을 건너 원동재를 오르는 이 길이 첩경이란 점 입니다.
정선 가는 길은 강릉에서 험준한 태백산맥을 넘어 임계를 넘어 아우라지로 접어드는 길은 있지만 정선은 미탄을 꼭
거쳐야 들어가는 오지 입니다.
거칠햔동의 7인이 어느 길을 택하든 미탄 한치로 접어들어 정선을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오륜외 6인이 이성계 개국이후 야인으로 전오륜의 고향인 정선으로 갔단 이야기는...
이성계 개국의 역사에 방원은 아버지가 죽이지 말라는 정몽주도 죽였습니다.
그리고 2차 왕자의 난도,,,그리고 방원의 형인 2대 정종은 왕위 계승 3년만에 방원에게 물려주고 개성으로 돌아 갑니다.
그렇다고 방원인 사욕이 아닙니다. 조선개국에 그들의(이성계와 이방원)의 생각엔....고려로서는 국권을 바로 잡기
힘들고 도탄에 빠지고 실의에 찬 백성을 구하기 위함이었지요.
그래서 조선이란 역성혁명의 개국이 다시 붕괴되고 도탄에 빠지고 궁핍해질 백성을 걱정하여 어떤 반란도 가차
없었던 것입니다.
세조를 지니 예종때 할아버지(세종)의 묘가 나쁘다고 장안에 소문이 꼬리를 무니 지관들을 뿌려서 명당을 찾는데
지금의 세종의 묘 영릉이 당시로선 둔촌공 3세손의 묘인데 지관이 예종에게 고 하길,, 이곳이 명당자리이고 지금
팔판동의 8형제가 모두 당상관인지라 그들에게서 왕이 나온다는 소문이 자자 합니다...
이 말이 후일 붙인 말일수도 있으나 분명한건 역사에선 그들의 묘를 이장하고 세종의 묘를 그곳으로 천장 하였습니다.
당시 이씨 조선의 개국초기에 중앙 집권의 국가를 성종때에 이르러서 마무리 하였다면 그 이전엔 쿠데타 소문만 일면
충신 김종서 가문처럼 난타 당합니다.
그런데 전요륜 일행 죽림칠현의 이씨조선 개국을 반하던 일곱명이 전오륜의 고향 정선으로 곧바로 내려갔다면 어느
임금이든 이들이 후일을 도모하는 집단행동으로 바로 처단 될 것이며 이를 아뢰올 인접 부사들은 특진으로 이어지겠지만 태종은 평창의 방림, 대화. 진보(지금의 진부)와 횡성등 강유역을 강무장으로 묶어 가을철로 궁중의 군사 약 5천명
정도가 닷세쯤 사냥을 하고 야영을 하는 군사 훈련을 하였는데 태종은 세종을 이끌고 평창을 두번 다녀간 기록이
있습니다.
평창에서 이런 강무(기동훈련)행사를 한 방원이 정선 소식쯤이야...몰랐겠슬까 하는 생각이며...
그래서 일곱 선비가 야인으로 함께 있다면 이건 의심의 대상으로 어떤 처벌이 따를테죠...
그래서 그들은 서울- 정선 루트중에 미탄 한치 뒷산 청옥산에서 얼마 동안이라도 운둔하다 예종이나 성종조 시기쯤
평화로운 시기이기에 그때쯤에 해금되고 (해금의 명령상이나 문헌상이 아닌 사회풍조상,,,)정선 고향땅을 밟지
않았슬까 하는 생각 입니다.
그때까지 운둔의 장소로는 미탄의 청옥산이란 생각입니다.
물론 반론으로 정선으로 향한 전오륜등 죽림칠현은 임금님이 게신 개성의 방향으로 예를 지냈다고들 하여 바로
개성의 임금이 하야하여 게실때라고 생각할 수는 있으나 그것은 정확한 기록이 없고 600년전의 이야기가 그것만
구체적이라면 미화적일수도 있는 이야기 입니다.
그래서 청옥산일대의 미탄의 민초들이 정선보단 시기적으로 1-20년 빠르게 한치 아라리를 부르지 않았슬까
하는 이 후세의 추정의 가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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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가는 서점엘 갔다.
아리랑책이 큼지막한게 딱 한권 눈에띄길래..얼릉...
한 삼만 오천원 부피쯤 책인데 읽어줄 거라곤 딱 하나 정선 아리랑에도 원래는 후렴이 없엇는데 흥을 돋구기 위해
후렴을 도입했고 아직도 어떨때는 후렴없이 부르다 다음곡 가사가 생각안 나면 후렴을 부른단,, 아마도 그러다
후렴이 발전되고 가락의 리듬이 평창아라리와 같은 원음에서 이탈되어 변절되는...
그 정선 아리리 해석의 책은 저자의 주관이긴 하지만 정선 아라리가 원류로 굳어진다나...
그게 아니라 대한민국 아라리가 경기체가나 시류에 동화될때 산간오지의 평창, 정선 아라리는 교통의 소통도 없어
문화의 전파가 않되어 아직도 옛원음 그대로 남아 흐른다 해야 욿은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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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아라리 중에서도 미탄면 일대에는 청옥산 육백마자기 지명이 들어가는 가사가 참으로 많이 전해져 내려온다.
이 가사들의 아라리는 평창아라리에 시원이 있지 이것을 정선 아라리가 원조라 하면 언어 모순이다.
평창의 미탄면 일대의 아라리는 그들 스스로의 독창성인 지명의 고유명사까지 가사에 만들어졌는데 이를 정선 아
라리라 하면 큰 어패이다. 왜냐면 정선사람들은 자기 동네,,, 나전, 구절, 사북등의 지역적 고유명사의 가락도 없이
미탄, 청옥산, 한치,육백마지기등의 고유명사를 미탄사람 대신 만들어 불렀엇다면 그것은 억지인 것이다.
정선 아라리에서도 이렇게 한 지역을 표현한 집약적 단어는 없다.
위의 고유명사 외의 일반명사로만 된 아라리 가사들은 평창, 정선이 공유하는 가사들이 대부분이지만, 위의 예시에
서 보듯 청옥산 아래 화전민들이 지역적 단어의 아라리를 부를때 서로 주고 받으며 일반가사의 아라리도 타 지역보
다 더 많이 생성 되었으리라 사료된다.
이것은 청옥산 아래 두만이 마을등 미탄 사람들의 아라리가 지역성을 가장 잘 나타내는 것에 예부터 미탄 아라리는
활동적인 모습을 보여줌을 단적으로 증명 하는 것이다.
그래서 육백마지기ㅇ아래 청옥산 일대의 평창 아라리는 가장 독창성있는 가사들로 이루어 졌으며 산나물 뜯으러 또
는 산간지역의 농사의 주된 밭일을 하며 고되고 심심할때 서로 한 소절씩 주고 받으며 부르던 아라리로 흥을 돋구었
던 것있다.
이 미탄면 회동리 청옥산 아래 두만이 마을등의 화전민들이 어려운 생활고에 춘궁기인 봄철에 청옥산위의 고원인 육
백마지기에서 끼니 연명을 위해 나물 뜯을때 삶의 고달픔을 달래기 위해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감흥을 노래한 것이며
이 아라리의 가사들은 민초들의 가시적인 현실속의 삷을 순수한 일차적인 즉흥적인 가사들을이 위주이지 만약 이차
적이라 하면 자기의 생활 이외의 역사적 사건이나 사유적, 이지적 내용의 가사들로, 그러나 아라리엔 그런 이지적이
고 고차적인 2차적 모습의 가사는 없다.
아라리 가사엔 민초들의 고달픈 역경을 해학적이고 은유적으로 달관하는 순수한 일상의 가사로서 고된 삶의 고통을
역설적으로 반전시켜 재미를 더하는 가사로 녹여서 세월의 낙을 만들어 보내는게 민초들이 부르던 아라리의 지혜인
것이다.
이 아라리의 가사들은 인생살이의 깊은 한(恨)이 베여 있으며 정수동이보다 더한 해학과 풍자로, 참말 가사속의 은유
적이거나 풍자적인 어법의 가사들이 어쩜 민초들이 지은 것일까 하는 의문으로 한편의 詩일까 ??
의아하고도 순발력 넘치는 가사들의 아라리를 들을때 참말 웃음을 참을 수 없는 것이다.
삶의 고달픔 속에서도 그 고달픔을 승화하여 흥으로 품어버리는 민초들의 애환을 달래던 가락이 아리랑인
것이다.
아리랑이란?? 전자에 언급했듯이 고래의 먼 역사, 즉, 단군조선 시대에도 기쁠때나 슬플때도 감정을 달래기 위한 노
래를 불렀슬 것이고 그 중에 아리랑이란 가사를 불렀다면 그 아리랑은의 뜻은 직역으론 고개를 넘어가다, 의역으로는
님 그리워 하다란 뜻 아닐까 생각한다.
고개 넘어 산 위의 城에 계시는 님(임금)의 평안과 무사안일이 백성들, 즉 민초들에게 전쟁의 노역이나 화가 미치지
않는 것이란 고대 사회에 전쟁과 노역이 민초들의 가장 큰 근심이었슬 것이다. 이런 근심이 없자면 임금님이 편안 하
셔야 하고 그로서 민초들에게도 평온을 찾을 수 있는 마음으로 해석할 수 있다.
아리랑은 먼 역사에서 아마 이러한 시발을 가지지 않았슬까 하는 유추적 해석이며 그 이후 이 아리랑은 각 지역, 각
시대를 이어오며 민초들이 각기 다른 환경속에 일차적인 자기 삶을 표출한 가사들로 서로 원조라는 등 각 지역적 아
리랑의 시발들을 가지는 것이다.
그 중 이 평창 아라리는 어느 시대인지, 어느 역사 속에서도 그와는 무관하게 화전민들의 산속의 생활에서 그 환경의
스스로의 가사를 만들어 삶의 고된 순간들의 한탄을 탄식조로 소화해낸 오리지날 아라리인 것이다.
또한 정선 아라리에선 원조나 원류라는 말을 함부러 사용하는 오류를 범하여서는 않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삼만냥 짜리 정도의 언 아리랑 책엔 정선 아리랑이 시기적 상한대로 이색을 거론하며 아마 이것이 원류와 원
조로 굳혀지는 정설로 될 것이라 썼다.
이러한 책은 단 한줄도 읽어줄 수 없는게 인용글귀들은 원래의 책에서 찾으면 될것이고 그의 생각. 그런 주장은 오류
라는 생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원래는 평창 아라리나 정선 아라리의 가락은 산의 소리의 동질음이었고 그 가사도 한 바운드의 가사들이었
는데 근대화 시기 정도에 정선 아라리는 오지의 고립되어 이어져 오던 아라리가 외부와의 접촉으로 인하여 산의 아
라리가 짧은 스커트로 갈아 입듯이 화전민들의 산의 소리의 가락이 들의 소리의 가락으로 탈바꿈하여 산에서 부른
다면 바탕에 어울리지 않는 스커트 입고 산에 올라 민족 고유의 아리랑을 부르는 식의 짜깁기일뿐 산의 소리의 고유
의 한탄과 탄식조의 가락을 품어내지 못하는 것이다.
이렇기에 한치 뒷산의 평창 아라리는 지금까지도 외부와의 순화도 없이 자생된 아라리로 산의 소리의 그
고유의 가락으로 잘 계승되어 왔으며 오늘도 살아서 민초들의 생활과 같이 호흡하며 그들의 애환을 달래
려 불리워 지고있는 것으로 이로서 평창아라리는 전통성의 가치가 높은 것이라 하겠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이것이 나의 평창아라리의 생각이다.................
" 만수산 가사에 대한 나의 이해"
위의 아라리 가사들은 위치적 공간의 파악을 할 수 있는데 그중 특이하게도 역사적 시간대를 알 수 있는 가사가 한
편 있다. 이 가사는 산간오지의 민초들이 먼저부른 것이 아니라 ( 위에서 민초들은 1차적, 삶의 생에 대한 고달픔이
라도 이를 해학적으로 반전시키는 가사들이라 하였다) 이는 600년전 조선 개국시 고려 유신들중 이초가 중국으로
귀양가서 자결후 이초의 문하생 7명이 시절을 알 수 없어 깊은 산으로 숨어야만 했다.
조선 개국파들은 이미 정몽주도 죽였고, 2차 왕자의 난으로 방번, 방과의 소실 강씨부인계통의 왕자도 죽인다.
이때 정도전도 참수 당한다. 이초는 자결할 수 밖에 없었고 그의 문하생들은 위기의식을 느끼고 숨어들어가야만 했다.
(스탈린시대에 트로츠키. 말렌코프는 멕시코등지로 망명을 가고 그 일년뒤 권총이 뒤따렀지만 방원은 바로 그 자리에
서 해결하는 무서움의 그 자체였슬 것이다.)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라는 가사는 개성(송도)의 려말 임금님이 계신
만월대 뒷산에 구름이 막 모여 임금님에게 비를 뿌린다는 해석은 전혀 아니다.
강원도 산간오지에 사는 사람들이 송도의 만수산에 검은구름이 모이는지 어떻게 알까??
또한 이 가사는 전오륜등 7현이 정선의 거칠현동에 은거하면서 임금님을 사모해서 부른 노래도 아니다.
이 가사에 임금님을 사모하고 충절을 이야기 하는 단어들은 없다.
이 가사를 아래에서 이지적으로 살펴보자.
이 문장은 만수산에 있던 검은 구름이 청옥산 높은 곳에 걸려서 눈이 될지 비가 될지 구분이 않 된다는 이야기로, 만약
이 구름이 구릉 아래에 실오라기 같은 동네 정선하늘에서 구름이 비가될지 눈이 될지의 가사는 맞지 않는다. 고원인 청
옥산 산마루에 걸리는 검은 구름은 알수 없다는 표현이라야 하는 것이다.
이로서 이 문장은 전오륜외 6인이 정선시절에 평지에서 만들 수 있는 가사가 아니라 어느 고원아래서 만든 것이라면 이
를 미탄일대서 부르는 노래로서 이를 만든 곳은 청옥산이나 미탄의 고원아래서 만든 것이라 해석해 볼 수 있다.
이를 확증해 보기 위해선 5월쯤에 평창의 높은 산에 올라 (입탄고개등,,)사방을 둘러보면 동편의 가장멀리에 있는 청옥산
정상엔 마치 킬리만자로의 눈 사진처럼 정상부가 하얗게 눈이 내린 산을 볼 수 있다.
그러기에 춘궁기인 봄철에 끼니를 연명하려 봄나물 뜯으러 청옥산에 올라갔슬때 갑자기 검은 구름 몰려오고 날이 흐려지
자 비가올지 눈이 올지 알수없다는 가사이지 이 가사가 전오륜등 거칠현동에서 은거하며 임금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충
절의 노래는 전혀 아니다.
만약 충절의 노래였다면 이런 류의 가사가 아니라 사모하는 뜻의 단어가 포함되었어야 할 것이다.
이 가사는 미탄을 지나간 7현의 이야기가 구전으로 전해지며 당 시기 이후에 민초들이 이 애뜻한 뜻의 "만수산"을 가사에
넣어 부르게 된 것이다.
이런 예로 볼때, 바로 이곳만이 검은 구름이 비가되고 때로는 눈이 되는 곳이기에 이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라는 가사는 청옥산에서 만들어진 것이라 유추해 볼 수 있다.
3만냥짜리 아리랑이란 책에선 이 귀절때문에 정선 아라리가 최고(最古)의 시간상으로 가장 옛 시간대라고 더이상의 상한
대 시간의 단어가 없기에 이 가사로 인하여 정선 아라리를 원조로 자리매김 하여야 한다는 글을 볼때...그게 원조라는 억지
의 무슨 글이 그리 편견적인가?? 표현력이 모자란다고 자기 맘대로 글을 쓰면 큰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우리의 아리랑 풀이에 원조나 시원은 없다.
고래로부터 민초들이 삶의 애환을 달래려 부르던 가락이기 때문에 이는 고대인들의 시대에 인간 본연의 감정의 발생의 자연 발생적으로 보아야 하며 그러기에 어느 목적이나 특유의 객체적 미화도 없이 1차적 자신의 세계에 국한되는
가사들로 이루어 졌다. 그 단어들이 구전으로 수천년 이어져 내려오는 것이다.
또한 역사적 단어 이외의 가사에서 어쩜 그것이 구전으로 전해오는 최고의 단어들일 수 도 있다.
구전이란 지금도 모심기 노래에 신농씨기.... 이 신농은 사직과 같이 춘추시대 농업의 신이다,
이를 내용도 모르는 농부가 모심을때 부르는 것은 2-3천년 구전으로 전해지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아라리 가사 천 오백수 모두가 생활과 직접적이 가사들이기에 이 단어들 중에 2-3천년전의 생활에서 비롯되어
불리어진 가사도 있슬 수 있는 것이다.
또한 600년전 당시 고향으로 숨어오던 전오륜외 6인은 마흔이 안된 삼십대들로 그들이 정선에서 수십년 살았단 기록은 없다.
그래서 이 가사는 청옥산 일대의 한치뒷산등에서 나무를 뜯으며 아라리의 가락이 왕성히계승, 발전되 오던 이 청옥산
일대에서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던 전오륜등의 이야기에서 것으로 만수산을 차입한것으로 유추 해석 하는 것이다.
이로서 만월대에서 날라오는 검은 구름이 높은 청옥산 산마루에 걸려 눈이 될지 비가 될지 애뜻한 사연을 담고있는
이 아라리는 이 가사가 정선이라기 보다는 미탄 청옥산으로 봐야 하는 것괴 이 가사는 전오륜등 거칠현동
7현이 만든것이 아니라 그 이후 미탄일대의 화전민들 사이에서 만들어지고 불리워 진 것이다.
이것이 나는 이해이다.
아라리에 제잘난 해석들 하시는 위인들,,, 이 글에 대한 비판의 토를 달아들 보세요.
저는 지금도 친구들 이야기중 하나는 쌈 하는 곳엔 후세가 있다냐??
이래도 이 만수산 가사를 전오륜등이 부른 가사입니까??
그들이 임금님을 놀리기라도 하는 뜻 입니까??
이러한 오류들로 정선 아라리가 원조라 하는 부류들...언제든 논쟁을 기다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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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후세는 경노당 가면 고도리치는 노인네들에 등을 돌리고 돌아앉아 이 평창아라리와 아리랑의 재 해석의 광범위한
생각의 글을 쓰려던 것을 아리랑의 이해의 순서와 상관없이 나의 아리랑의 이해의 글을 계속 쓸 것입니다.
물론 나의 글들일라도 검증이나 이런것은 아랑곳 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그들이 오류가 심하고 또한 역사에 증거를 찾을 수 없는 것이 흔한 것입니다.
그 에로 우리나라 대부분의 절에 당간 지주가 있는데 당간은 아마 일제넘들이 대동아 전쟁의 철로 사용하려 압수한
듯 하나 스님들을 울 나라의 한문을 제일 잘 하는 집단으로 이해할 수 있으나 그들은 당간에 대하여 지금 단 한줄의
기록도 없는 것 입니다.
이렇듯 아리랑에 그 역사적 증거를 찾으려 하는 우매함보다는 이 후세는 그 증거의 부분집합이 아닌 진 부분 집합들의
모순되지 않는 가상의 생각의 이해로 아리랑을 유추 해석하는 것 입니다. 저는 많은 것을 아직 알지는 못하나 숨쉬는
동안 끝까지 모든 아리랑의 재 해석을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