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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 |
휘 |
본관 |
생몰연도 |
유배기간 |
유배시관직 |
최종관직 |
유배사유 |
영조 |
유의양 |
전주 |
1718~미상 |
1771~1771 |
교리 |
부총관 |
사판 간행 |
유의양의 요약 연보는 다음과 같다. 숙종 44년(1718)에 태어났으나 언제 죽었는지 알 수 없다.
조선 후기 문신으로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는 계방(季方)·자장(子章), 호는 후송(後松)이다. 승지 태명(泰明)의 손자이며, 무(懋)의 아들이다.영조 32년(1756)에 생원이 되어 현감을 지냈으며, 영조 39년(1763)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65년 정언을 거쳐 사서·수찬·교리를 역임하였고, 1775년 집의로서 백관들의 안일함을 논핵하였으며, 또한 임진왜란 때 활약한 명나라 군대를 위한 설단치제(設壇致祭)를 건의하기도 하였다. 같은 해 영남어사로 파견되어 지방관들의 치적을 점검하였다.
1776년 왕세손의 응제(應製)에 거수(居首)로 뽑혀 문명을 날리었고, 이어 통정대부로 승품되어 정조 1년(1777)에 강릉부사로 부임하였다. 이때 영서지방의 화삼전(火蔘田)수세문제, 속전세(續田稅)문제, 강릉부 공삼(貢蔘)감세문제, 강릉부 봄보리 작전(作錢)문제 등의 민폐를 임금에게 알리었다.또, 진전(陳田)의 면세문제, 표류하여온 왜인의 문제 등도 강릉지방의 큰 폐단으로 지적하였다. 이듬해 대사간·승지를 지내고 1779년 성천부사를 거쳐 다시 대사간을 지냈다.1781년 예조참의로서 예조이정당랑(禮曹釐正堂郞)이 되어 예조정랑 이가환(李家煥)과 같이 춘관지(春官志)와 1750년 이후의 영희전지(永禧殿誌)를 편찬하였다. 1783년 예조참판으로 감동관(監董官)이 되어 덕릉(德陵)·정릉(定陵)을 개축하였고, 동지사 겸 사은부사(冬至使兼謝恩副使)를 역임하고 이어 승지가 되어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의 수정작업에도 참여하였다.의주부윤으로 있을 때 이승훈(李承薰)이 연경에서 금서(禁書)인 사서(邪書)를 잠입하여 온 것을 금하지 못한 죄로 후일 규탄을 받았다. 1784년 대사간에 이어 공조참판으로 경모원(景慕園)을 증수하였고, 춘방지(春坊志)를 저술하였다. 1787년 부총관이 되어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보집하였고, 이듬해 춘관통고(春官通考)를 저술하였다.
후송 유의양(後松 柳義養)은 영조 47년(1771)에 사판(仕版. 관료들의 명부)을 발간함으로서 남해로 유배를 당하였다. 짧은 기간 동안 남해를 두루 다니면서 일반 서민들을 대상으로 보고 듣고 느낀 점을 산문체 기행문으로 기록한 것이 남해문견록이다. 유의양에 관해서는 남해문견록에서 그의 인품을 알 수 있고 유배 장소와 유배시기를 알 수 있다.
후송이 근면 성실하고 너무나 부지런한 관료로 엿보인다. 문견록 내용 중에 “현청에서 저녁밥을 보내니 사양하지 못하고 관가에서 ‘토인(천인)과 사령과 식모를 보내려 합니다’하였다. 그리고 ‘이전의 다른 적객들도 이 하인들을 빌어 부리더이다’라고 말하니 후송은 나도 못할 일은 아니지만, 종놈 1명이 있으니 심부름을 할 것이고 밥은 주인이 할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서울 떠나 올 때 약간의 노자를 가지고 왔지만 형편이 못되어 하인을 부릴 수가 없는 처지라 했다. 하인을 부리려면 하인에게 일정한 댓가를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배를 오면서 각 고을을 지날 때 수령에게 구걸하지 않았고 새벽길이 있어도 횃불도 빌리지 않았으나 전라감사가 지난다는 말을 듣고 술막(주막)에 나와 신행(贐行. 먼 길 떠나는 사람에게 주는 글이나 돈)하기에 받았고, 남원에 드니 내가 이전 원(員)의 아내 사촌인줄 알고 술막으로 나와 양식과 노자를 주니 받아왔다. 남해에 들어 온 후는 경상도 관찰사가 보낸 것으로 지내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서 후송은 정5품관 교리와 부수찬을 조정에서 지냈으면 어느 정도의 재산도 있을 것으로 보이나 청렴한 관직생활을 하였기에 유배 올 때 겨우 약간의 노자뿐이라 일 시킬 사람도 쓰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보아도 근면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실하였다는 것은 5여개월 동안 남해 전체를 파악할 수 있는 문견록을 저술하였다. 아무리 문관이지만, 유배라는 죄명에 눌러 근신해야 할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남해의 서민 생활상을 상세하게 기록한 것이다.
우선 후송 유의양이 어떤 인물인지 알아보자. 앞에서 요약연보을 통해 간단하게 소개하였지만 다시 한번 소개한다.
영조 47년(1771)에 남해로 유배되어 약 5개월의 유배생활을 마치고 같은 해 7월 30일에 풀려나와 부교리로 재 등용되었으나 다시 아산으로 정배되었다가 풀려나서 교리에 기용되었다가 종성(鍾城)으로 또 다시 유배되었다. 계속된 3번의 귀양살이 마치고 영조 51년(1775)에 집의로 있으면서 조정대신들의 안일함을 비난하였고 영남어사로 파견되어 민정을 살피기도 하였다. 영조 52년(1776)에 통정대부, 정조 원년(1777) 강릉부사, 정조 3년(1779)에 성천부사, 대사간 정조 5년(1781)에 예조참의로서 예조 이정당랑이 되어 춘관지, 영희전지를 편찬하였다.
정조 7년(1783)에 예조참판으로 감동관(監董官)이 되어 덕릉, 정릉을 개축하였고 이어서 승지가 되어 동국문헌비고 편찬에 참여하였다. 정조 8년(1784)에 대사간, 공조참판으로 경모원(景慕園)를 중수하였고 정조 11년(1787)에 부총관이 되어 국조오례의를 보집하였다. 저서로는 춘방지(春坊志), 춘관통고(春官通考), 오례의통편(五禮儀通編), 북관로정록(北關路程錄), 남해문견록(南海聞見錄) 등이 있다.
남해문견록의 저자와 저술연도를 모르는 채 국문 필사본 1책이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것을 홍익대 최강현(崔康賢. 문학박사) 교수의 노력으로 상세한 검토와 분석 결과가 학계에 보고되고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 문견록의 저술년도와 저자가 유의양이라고 증명할 수 있는 내용을 살펴보자. 최강현의 ‘후송 유의양 유배기 남해문견록(1999년)’에 의하면,
후송이 남해 배소에 도착했을 때 찾아 온 사람은 “뎡 참판 광튱”이라 했는데 광튱은 영조 47년(1771)에 형조참판을 제수 받은 바 있는 정광충(鄭光忠. 1703- ? )이다. 그리고 원문 중 “칠팔 년젼의 어 니휘즁”의 암행어사는 영조 40년(1764)에 홍문관 교리로 근무하다가 남해어사로 피명된 이휘중(李鰴中. 1715- ? )이다.
앞의 사실을 보아 유의양은 영조 때 사람인 것을 알 수 있고 지은이의 성은 전주유씨이다. 원문 중 “우리 동셩 뉴시들이 전 하동 잇기의....와셔 보기 청 되 저희 셩관이 문화요, 젼 동종이 아닌지라”라고 하였으니, 유의양은 전주이씨임을 밝혀주고 있다. 지은이가 영조 때 전주이씨라는 사실을 알고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를 조사한 결과 영조 47년(1771) 2월중에 남해로 귀양 간 사람은 오직 후송 유의양 한 사람임을 알았다.
또 문견록 중에 “삼월의 유교리 구향오니....”라고 한 유교리는 유언호(兪彦鎬. 1730-1796)이다. 유언호의 문집 연석(燕石) 제2책의 능안와가(能安窩記)와 공암기(恭菴記) 내용 중 남해에서 이웃하여 있으면서 서로 글씨도 써 주고 옥호(屋號)를 지어 주기도 하면서 가까이 지낸 적객(謫客)이 유계방(柳季方. 계방은 유의양의 자(字))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을 종합하여 볼 때, 남해문견록의 저자는 후송 유의양임이 밝혀졌다.
후송의 남해 적소는 읍성 남문 밖(현, 남해읍 남산동) 김 시위 집이다. 문견록에 “읍성에 들어오니 작은 성이 있었다. 북문으로 들어가 관문(關門)을 지나 성 남문(南門) 밖으로 나가니 관가(官家)의 하인 하나가 와서 ‘주인을 잡았으니, 가시지요!’하고 가리키거늘 말을 몰아 바삐 가니 주인의 자식 아이놈이 마주 나와 폭려(暴戾)한 소리를 하고 집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기를 심히 하니 해도(海島) 인심이 극악(極惡)한 줄은 이미 들었던 것이어니와 소견(所見)에 극히 이상스러워 놀랍고 우겨서 들어가려 하면 괴이한 행동거지가 있을 듯 싶기에 그 아이를 꾸짖지도 아니하고 나는 나의 종을 단단히 일러 경계하여 ‘아이의 말을 들은 체 말라’하고 말머리를 돌리어 남문 밖으로 도로 와 가게에 앉아 관가 하인을 불러 이르되, ‘내 귀양으로 이리 왔으니, 보수(保授. 보석된 사람)주인을 관가에서 정하여 맡기는 것이 원칙이니 주인을 정하여 달라!’하고 남문 밖 백성 김시위(金侍衛)의 집으로 정하여 주거늘 그리 가니 김시위는 잡소리를 아니하고 좋이 대접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유배기간은 문견록이 나온다. “귀양살이 장소로 정해진 남해라는 한 곳의 읍은 바다 가운데에 있는 섬이기 때문에 노량나루를 건너가야 한다. 신묘년(영조47년. 1771) 2월 26일 오전에 남해 섬 건너편 하동군 노량마을 나룻가에 이르러서 배가 오기를 기다리며 바다를 바라보니.....이윽고 남쪽 나루에 배를 대니 비로소 남해 땅을 디디게 되었다....나는 점심을 먹을동안 서원(남해충렬사)에 올라가고 싶기는 하였으나 나의 길이 죄명이라 바삐 가는지라 올라가 보지 아니하였다....”라고 하였으니 남해로 유배 온 이유와 날짜, 시간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유배 이유와 날짜를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서 찾아보면, 영조 47년(1771) 신묘년 2월 17일(무자)조에 수찬(修撰)으로 있던 “유의양을 부수찬에 임명하다.”“승전색(承傳色)을 시켜 구전 하교하시니 , 정상인(鄭象仁), 조창규(趙昌逵)가 같이 사판(仕版)을 펴매, 유의양은 서민으로 하여 정과 조 세 사람을 모두 다른 도로 보내되, 죄인 유의양은 남해로 방축하라”하신 것으로 되어 있다.
유배에서 풀려난 날은 같은 해 7월 30일이다. 문견록에 “칠월 삼십일에 나의 귀양 풀린 기별을 듣고, 이틀을 치행(治行. 길 떠날 행장을 차림)하여 떠나려 할 때에 ”라고 적고 있어 유배기간은 영조 47년(1771) 2월 26일부터 7월 30일까지 5개월 5일이다.
그래서 문견록 내용 중에 8월부터 다음해 2월까지 남해 백성들의 삶이나 풍경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후송 유의양이 남해에서 남긴 남해충렬사 헌시(獻詩) 한수를 소개하고자 한다.
후송은 한문을 한글로 쓰고 풀이한 내용을 달았다.
엄뎡일쳔니에 엄 길 일쳔니에
방고노냥변이라 고뎍을 노량의 자 보디라
니슈쳔병갈이오 니의 머리 하 군의 승뎐비오
구형통뎨션이라 거북의 형상은 통뎨의 뎐션이로다
츈츄무디독이오 츈츄 닑을 바 업서시니
튱효유손뎐이라 튱효 손이 이셔 뎐여 엿도다
쳔심유댱니 구향 가 손이 음이 오히려 장니
고음보검편이라 보검편을 높피 읍도다
후송이 쓴 한글을 다시 한문으로 쓰고 번역하여 정리하여 보면,
嚴程一千里(엄정일천리) 시한(時限) 있는 로정(路程) 일천리 길
訪古露粱邊(방고노량변) 옛 노량 충렬사를 찾았네
螭首天兵碣(이수천병갈) 이수(뿔 없는 용머리)는 통제사의 비석이요
龜形統制船(구현통제선) 거북 모양의 전선은 통제사의 배로다
春秋無地讀(춘추무지독) 춘추좌전(春秋左傳)은 읽은 바 없으나
忠孝有孫傳(충효유손전) 충효는 자손에 전하여졌네
竄客審猶壯(찬객심유장) 적객의 마음 오히려 장(壯)하니
高吟寶劍篇(고음보검편) 보검편 글귀 소리 높혀 읽노라
남해문견록 전문을 간단하게 요약하여 보자.
●신묘년(영조47년.1771) 2월 26일에 노량나루에서 점심을 먹다 ●죄인이라 충렬사를 참배하지 못하고 바삐 읍으로 가다가 장량상동정마애비를 보고 남해충렬사 헌시 한 수를 짓다 ●읍성 남문밖 김시위 집에 적소를 정하다 ●유배 온 대사헌 정광충과 대화하다 ●금산에 올라 나막신바위, 문장암, 보수대, 유혈도(세존도), 목화봉, 의상대, 용굴, 음성굴, 쌍홍문, 저두석, 구정봉을 답사하고 사슴과 범도 많다고 했다 ●노량목은 관방의 요충지라 했다 ●용문사를 찾아보고 ‘한사람이 문을 막으면 일만 사람이 열지 못할 천연의 요새’라 표현하였다 ●생복 따는 포작이와 물산(전복, 홍합, 미역, 무명, 모시, 베, 명주 등) ●장례에 북, 장구치고 피리와 저를 불며 상여를 인도하는 풍속이 있다 ●효자 이성삼과 열녀 김연대 이야기 ●남해방언을 듣고 무슨 말이지 몰랐다 ●여거사, 광대, 요지경 등의 놀음과 동냥 ●3월에 유교리(유언호)가 유배와 가까이 지내다 ●제주도 풍속과 비슷하다 ●진주, 하동 동종이 찾아오다 ●7월 30일에 귀양에서 풀려나다. 남해 백성들의 삶을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앞으로 국문학 연구와 풍속연구에 좋은 자료가 될 것이라 본다.
남해문견록은 국립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한장필사본(韓裝筆寫本)으로 크기는 가로19.9cm×세로 30.9cm로 한백지(韓白紙)에 세로로 묵서(墨書)한 순국문 필사본이다. 분량은 31장이다. 내용으로는 우송 유의양이가 남해 유배당하여 남해 노량나루에서부터 시작한 유배생활 중 섬의 지세, 산물, 풍속, 위생, 언어, 미신, 교유 등 각 방면에 걸쳐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자연스럽게 산문체 기행문으로 묘사ㆍ서술하였다.
남해문견록 전문을 남해역사 테마기행(2003년. 지은이 정의연)에서 소개한 바 있다.
그래서 원문은 생략하고 문견록에 나오는 효자ㆍ열녀ㆍ풍속을 소개하고자 한다.
문견록 중 “효자 한사람이 있으니 성명이 이성삼(李聖三)이었다. 제 아비는 종실(宗室. 임금의 친족) 후예로 세계(世系)책이 있고 전주에서 옮아와 살고 있었다. 성삼이 천성으로 지극하게 효행을 하더니 아버지의 상을 만나 초상 습렵부터 모든 것을 다 ‘상례비요(喪禮備要)’대로 하고 장사에 굿과 풍류를 아니하고 장사 지낸 후 산중에 초막을 짓고 시묘하니 사람들이 호랑이의 해(害)가 있는데 라며 말리되, 성삼이 손수 죽을 쑤어 먹고 삼년을 지내고 내려올 때에 그 집에 사람을 얻어 들이고 논을 사 주어 ”지어 먹고 묘를 조석으로 보살펴 달라“하고 내려와 기제(忌祭)와 절사(節祀)를 극진히 하고 하룻길이라도 갈 적과 올 적에 사당에 분향 고사(焚香告祀)하여 온갖 일을 다 예(禮)대로 하고 그 노모가 갑술생(1694년)이니 금년(1771년)이 칠십팔세이었다.
근력이 강건하되 성삼이 밤낮으로 곁에서 저녁에는 잠자리를 펴 드리고 새벽에는 문안드리는 일과 목마르지 않게 항상 보살펴 드리는 효양(孝養)을 지극히 하고 그 형 하나가 있으니 우애 지극하고 성삼이 벌어 전답을 사드라도 반드시 제형의 이름으로 문서를 하니 이웃사람들이 말려 가로되, ‘시방은 자네 형제 우애 극진하거니와 자네 자식들은 종형제니 저희 장래 서로 다투어 어지러워지는 일이 나기 쉬우니라’하니 성삼이 가로되,
‘내 비록 전토를 사나 형이 가장이니 형의 이름으로 사는 것이 당연하고 장래 종형제 사이에 전토로 싸움의 화근이 되는 지경에 이르면, 그 전토 있은들 무엇에 쓰리오?’하니, 성삼의 효우 언행이 실로 가이하여 해도(海島) 인물 같지 아니하되, 시골 무리들의 이웃들이 조소(嘲笑)하고 귀히 여길 줄을 모르니, 풍속이 무식하고 예의가 없이 상스럽기 가이 없었다. 성삼이 이따금 내게 왕래하여 상례 제례에 의심된 곳을 묻고 상례비요 책이 없어 걱정하거늘, 내 제 행실을 귀히 여겨 백지(白紙)를 얻어 대구(大邱)에 보내어 박아다가 주며 생각하니, ‘서울의 사대부가(士大夫家)에 예서(禮書)를 많이 쌓아 두고도 행하지 못하는 이가 몇 집인가?’책이 아깝게 느껴졌다.“
문견록 중 열녀 연대(蓮臺)에 대한 기록이 있다. “열녀 일인이 있으니 이름이 연대라고 하는 사람이다. 상사람 김자평(金自平)의 딸이요, 사노(私奴) 임분선(林芬善)의 처가 되었더니, 연대의 나이 겨우 17세에 홀로 되어 삼년상의 슬픔을 마치니 그 아비가 연대의 젊은 과부를 참혹하게 여겨 개가(改嫁) 시키려 하니, 연대는 산 속 나무에 가 스스로 목매어 죽으니, 남해 현감이 계(啓)를 올려 왕께 여쭈어 지금 임금의 기유년에 정문(旌門)을 마을에 세우고 은전을 내리오시니, 성세(聖世)에 초상지은(褒賞之恩)이 이런 바다 고을까지 미쳤는 일을 뉘 아니 감동하리오?
관장(官長. 시골 백성이 수령을 높이 부르는 말)되었는 이가 효열지행을 각별히 숭상하면 풍속이 거의 나을 듯 싶고, 효열지행을 가르친 후에야 나라에 충성하고 웃사람을 섬길 줄을 알게 될 것이다.“
이렇게 남해섬 백성도 효자와 열녀가 있으니 백성들은 본받아야 될 것이다라는 것이다.
연대의 정려기문(영조13년.1737. 정려각 세움)에 의하면, 아버지가 연대를 개가시키려 하자 연대는 “열녀는 두 사람의 남편을 섬기지 아니한다”고 하였거늘 제가 비록 천한 처지이나, 어찌 정신까지 천하겠습니까?라고 말한 후 슬피 울고 옷을 빨아 입고 머리에 빗질까지 하고 몰래 하늘에 고하고 가만히 집을 나가서 나무에 목을 매어 자결하였는데, 방울 방울 피눈물이 나뭇잎에 물들어 있었다. 이듬해 봄에 그 핏방울이 묻어 있던 나뭇잎들에는 벌래들이 글씨를 새겼는데, 그 글자는 ‘매울열자(烈字)이었다. 이 광경을 본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었다.
일반 백성들의 상례는 사례(四禮)에 의하지 않고 내려오는 풍습대로 지내는 모습을 문견록에 기록하였다.
“어버이의 장례(葬禮)를 모실 때에 수일전(數日前)을 기하여 집에 차일(遮日)을 치고 술과 고기를 많이 장만하여 동리사람들을 모아 각별히 많이 먹이고 무당과 경재인(재앙을 없애기 위해 경을 읽어 주는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을 뫄 아침부터 밤이 되기까지 굿을 하고 새벽에 발인(發靷)하여 갈 때에 북과 장구를 치며 피리와 저를 불어 상여 앞에 인도하여 산까지 가니 장수(葬需. 장례의 여러 가지 물품)는 부주 받는 일이 없고 장사 지낼 때에 산신께 폐백을 드리는 이가 없고 돌아와 제사를 한 번 지내는데 제사 이름을 ‘넋제’라고 하였다. 대범 장사에 주육(酒肉)과 풍류(風流)를 착실히 한 후에야 이웃사람들이 ‘장사를 잘 지내니 그 상인(喪人)이 착하다’하고 장수를 약간 잘 차려 지내어도 풍류와 주육이 착실하지 못하면, “장사를 잘못 지냈다”하고 꾸지람이 많다고 하였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우습기도 하고 그지없고 해괴하여 놀랍기까지 하였다.“
남해의 상례에 있어 북과 장구를 치고 피리와 저를 불며 상여를 인도하는 풍습은 남해섬 전역에서 이루어지는 행위라 볼 수 있다. 설천면 감암마을의 백게 전설에도 나온다. 남해역사테마기행(정의연 2003)에 의하면, 지씨 집안에 상을 당하여 명당에 묘를 쓰고 하관할 때의 일이다. “평상시의 출상 시간보다 일찍 뒷산 묘소로 상여는 올라갔다. 상부꾼들이 지루함을 참지 못하여 빨리 산을 내려가자고 하면서 웅성거리기 시작하였다. 상여가 올라 온 지 1시간 이상을 지났을 때였다.
이웃 노량마을에서도 심씨 집안에 초상을 당하여 건너편 산으로 북과 강쇠를 치며 올라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때 한 사람이 지금이 하관할 때다. 들려오는 저 북소리는 소가죽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죽은 소가 우는 소리다. 하니 상주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하관을 시작하였다.“라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비록 상례비요의 형식에 맞추어 상을 치루지지 않았지만, 남해섬의 풍습이다. 지금은 관혼상제가 세월의 흐름에 따라 많이 변형이 되었지만, 상을 당했을 때, 푸짐한 주육으로 조문객들을 접대하고 상례가 끝난 후에도 종사한 사람들에게 노고를 위로하고 있다. 앞으로 남해의 민속 발굴 사업에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문헌 : 英祖實錄, 正祖實錄, 純祖實錄, 國朝榜目, 淸選考, 增補文獻備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