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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체와 성혈 대축일; 2016. 5. 29
창세 14,18-20; 1코린 11,23-26; 루카 9,11ㄴ-17
중앙 보훈 성당; 이기우 신부
6 25 전란 중에 최대의 피해자는 어린 아이들이었습니다. 수도 없이 많은 가정이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전쟁 고아들이 수십 만명이 넘었습니다. 남북 모두에서 전사한 군인들이 가장인 경우는 물론이고, 부상을 당한 경우에도 그 가정은 망가지기 직전까지 갑니다. 그도 그럴 것이 남편이 전쟁에 나가 기적적으로 살아서 돌아온 경우에라도 그 병 수발을 하느라고 아내는 거의 가정 살림을 내팽겨치고서라도 매달려야 합니다. 그 가정의 아이들은 거의 어머니의 손길을 받지 못한 채 자라야합니다. 이곳 중앙 보훈 병원에 누워계신 환자들 가운데 여기에 해당되는 경우가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저는 그분들이 마지막 가시는 길을 지키는 파수꾼입니다. 병자성사와 임종 기도와 장례미사의 성체성사로 그 몫을 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전쟁은 흔히 온갖 죄악을 합리화시키는 악마적 속성이 있습니다. 살인과 방화, 강간과 간음, 절도와 강도, 사기와 폭력 등이 일상적으로 행해지게 만드는 것이 전쟁입니다. 그 와중에 남녀가 사랑을 하다가 아무런 신의도 없이 헤어지는 비극을 노래한 가요가 유행하기도 했습니다. 이름하여 ‘무너진 사랑탑’입니다. 인기가수 남인수가 노래했습니다. 백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천재 가수라는 국민 평가를 받던 가요의 달인입니다.
1. 반짝이는 별빛 아래 소근대던 그날 밤
천년을 두고 변치말자고 댕기풀어 맹세한 임아
사나이 목숨 걸고 바친 순정 모질게도 밟아 놓고
그대는 지금 어디 단꿈을 꾸고 있나 야속한 임아 무너진 사랑탑아
2. 달이 잠든 은물결에 살랑살랑 살랑대는 그날밤
손가락 걸며 이별말자고 눈을 감고 맹세한 님아
사나이 벌판같은 가슴에다 모닥불을 질러놓고
그대는 지금 어디 사랑에 취해 있나
못믿을 님아 꺽어진 장미화야
3. 봄바람에 실버들이 하늘하늘 하늘대는 그날밤
세상끝까지 같이 가자고 눈을 감고 맹세한 님아
사나이 불을 뿜는 그 순정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그대는 지금 어디 행복에 잠겨있나
야멸찬 님아 꺾여진 장미화야
이 노래의 제목은 무너진 부부 신의를 말해줍니다. 당시 한국 사회가 대체 어떠한 비극 속에 놓여 있었는지를 공교롭게도 흥겨운 곡조로 노래했습니다. 그런데 노래 가사 속에서는 남자가 여자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그 반대의 경우가 더 흔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그리고 더 유감스러운 일은 지금은 전쟁 중이 아닌데도 부부간의 신의가 무너지는 일이 대단히 흔하다는 것입니다.
부부간의 신의는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하는 약속입니다. 부부는 혼인 서약을 맺을 때, 일생 서로 사랑하며 존경하겠다고 하느님과 교회 앞에서 서약했기 때문입니다. 가톨릭 교회가 남녀간의 결합을 사회에서처럼 ‘결혼’이라고 부르지 않고 굳이 ‘혼인’이라고 부르는 데는 그만한 까닭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남녀의 결합은 양자간 계약이지만, 가톨릭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남녀의 결합은 신랑과 신부와 하느님 사이에 이루어지는 삼자간 계약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을 사람이 풀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가톨릭 교회가 신자들에게 예수님을 대리하여 거행하는 일곱 가지 성사 중에서, 혼인성사는 신품성사와 동등한 품위를 지니고 있습니다. 신품성사로 성체를 축성하는 사제직이 생겨나고 사제직무가 성체성사를 이룸으로써 교회의 일치를 실현한다면, 혼인성사는 부부의 일치를 실현함으로써 자녀를 출산하고 양육하여 가정 교회를 이루는 거룩한 일입니다. 인류의 번식만이 아니라 인류의 재생이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대로 새로운 인류로서의 교회가 하느님의 가족으로 재생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신자들이 가정이 성화되는 길뿐입니다. 사제직무와 성체성사는 여기에 봉사하라고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들의 가정이 성화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너져 가는 세상 가정의 시류에 떠밀려서 신자들의 가정도 세상 사람들의 가정과 도무지 구별되지 못하는 세속화가 한창 진행 중에 있습니다. 그 형편은 여러분이 더 잘 아실 것이기 때문에 이 자리에서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가톨릭 교회가 전하고 있는 성 가정의 지혜만을 간추려서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혼인성사는 성체성사에 바탕을 두어야 합니다. 이 말은 혼인이 성체성사를 통해 진행되어야 한다거나, 부부가 자주 미사에 참여하여 성체를 영해야 한다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또 부부의 사랑이 맺은 결실인 자녀들에게 신앙 교육을 제대로 시켜야 함에 그치는 것도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혼인성사의 목적인 성 가정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되는 종교적 수단에 불과합니다.
혼인성사가 성체성사에 바탕을 두어야 하는 가장 큰 목적은, 예수님께서 당신 교회를 위해서 목숨 바쳐 세우신 사랑의 새 계약을 가정에서 이루는 것입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범대로, 남편과 아내는 서로를 위해서나 자녀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쳐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부간의 신의와 자녀에 대한 사랑에 목숨을 거십시오. 그래야 여러분이 행복해지실 수 있고 구원되실 수 있습니다. 부모가 서로를 위해 목숨 걸고 신의를 지키는 모습을 보고 자란 자녀들만이 장성하여 자신의 가정을 이룰 때에도 성공할 수 있습니다. 만일 장성하여 이룬 자녀들의 가정이 원만치 못하다면 그것은 부모가 보여준 부부간 신의의 성적표라는 엄연한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자녀는 백지 상태에서 부모가 보여주는 부부간 신의의 현장을 수십 년간 지켜보고 배우는 존재입니다. 자녀의 불행은 부모의 책임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리라.” 이 말씀에 따라서 가톨릭 교회는 성체와 성혈을 부활하신 예수님의 현존으로 선포합니다. 삼위일체의 진리에 따라서, 강림하신 성령의 현존이기도 합니다. 성체와 성혈에 담긴 이같은 진리가 가정에서부터 실현될 가능성이 없다면 교회의 미래는 없습니다. 그러나 가정이야말로 성체와 성혈의 진리가 반드시 실현되어야 할 기초 교회입니다. 목숨을 걸고 지키고, 목숨 바쳐 지키는 사랑이 가정에서 살아있어야 부부도, 자녀들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헌 신짝처럼 내버려도 그만인 형편에서는 지옥이 금새 현실로 다가올 뿐입니다. 가정이 지옥이 되는 징표는 기쁨의 상실, 그 하나로 충분합니다.
여러분의 가정에는 기쁨이 넘치십니까?
다시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이 멜키세덱의 예를 따라 하느님께 어떻게 예배드려야 하는지를 배운 것처럼, 가부장인 남편들과 가모장인 아내들이 가정생활을 하느님께 드리는 제물로 바치십시오. 가정생활이 여러분의 제대입니다. 여러분이 사랑하는 자녀들이 빵과 포도주입니다. 이를 성체와 성혈로 축성할 수 있는 자격은 오직 부모라는 존재뿐입니다.
사제들은 오늘도 다시 희망을 안고 하느님께 기도하면서 신자들의 가정이 성화되기를 위하여 일생을 바치고 있습니다. 성체를 축성하고 성혈을 축성하여 나누어 드리면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이 미사에서도 저는 예수님께서 하신 대로 여러분에게 말씀드릴 것입니다.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이 잔은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너희는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여러분이 성체와 성혈로 모두 배불리 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다 모으면 열두 광주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열두 광주리는 열두 사도로 시작된 교회입니다. 성체와 성혈의 성사가 교회를 이루지 못한다면 우리 모두는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체와 성혈의 성사로 주님을 모신다면, 그리고 그 결과로 여러분 가정이 주님을 모신 가정 교회가 된다면 우리는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이 과정은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천상 가정에서 그분의 자녀로 만나는 날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무너진 사랑탑을 다시 세우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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