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8일
동참: 김혜례, 안정자, 김경미
6월7일 저녁 9시쯤 반송에 사는 강영숙씨가 전화가 왔다.
박충일씨가 자살을 해서 내일 출상하니 왔으면 좋겠다고 했다.
윤내경씨에게 연락을 하니 내일 급한 일이 생겨서 도저히 못가겠다고해서
촘무님한테 연락해서 의논해보고 같이 갈 수 있는 자원가나 도반이 있는지
알아보라고 했다.
마음같아서는 법당에서 좀 많은 사람들이 같이 갔으면 했는데
세사람이 가게 되었다.
병원 영안실에 도착하니 반송에 사는 새터민들과 타지역에 있는 새터민들이 모두
까만 옷을 갖춰입고 모여서 손님도 맞고 장례절차를 의논하고 있었다.
내가 박충일씨를 처음 본것은 삼년전 내가 사는 동네에서 새터민가게라고 써 붙인
조립식 구두수선 가게였다.
우연히 가게앞을 지나다 반가워서 인사를 하고 물어보니 반송에 살고 있고
부인은 바로옆에 있는 식당에서 일을 하고 아이들은 이 동네 있는 유아원에
맡겼다고 한다.
일하기는 어떠냐고 했더니 전에 남의 밑에서 다른일을 할 때는 좀 불편했는데 지금은
작지만 개인일을 하니 맘이 편하고 사직동교회에서 많이 도와준다고 했다.
교회에서 교인음식점에 부인 일자리도 알선해준 모양이었다.
내가 보기에 사람은 작지만 야무져 보이고 열심히 하는 것 같아 참 다행이다 싶어서
그 앞을 지날 때마다 아이들 줄 빵을 사가지고 들러서 이야기도 나누고 했는데
몇달있다 보니 가게문이 계속 닫겨 있어서 옆집가게 아저씨한테 물어보니
중국에 부모님 만나러 간다고 하던데 그 뒤로는 소식도 없다면서 그동안 잘 챙겨주었는데
인사도 없이 안온다면서 많이 섭섭해 하셨다.
그뒤에 반송에 사는 다른새터민한테 물어보니 떡기술을 배우러 다닌다는 것이었다.
그해 좋은이웃의날 행사에는 박충일씨는 일한다고 안오고 부인이 아이들 둘을 데리고
참석을 해서 소식을 물어보았다.
또 그 뒤에 들리는 소식으로는 부인과 싸워서 부인이 아이들을 데리고 집을 나갔다고 하고
위에 혹이 있어서 수술을 했다는 소식과 충일씨가 아이들을 보고싶어해서 부인이 집에
들어 왔다가 다시 나갔다는 소리를 들었다.
반송에 갈 때마다 내가 알고 있는 새터민들의 소식을 물어보곤 하는데
그 후에 들은 소식은 혼자 살지는 않고 남한여자와 산다고 했고, 그뒤에는 또 해어졌다고 했는데
영안실에 와보니 4월달에 남한에 데리고 온 중국에서 결혼한 중국부인이 만삭의 몸으로
앉아 있었다.
8월에 해산을 하는데 한국말을 몰라서 눈만 둥그렇게 뜨고 앉아있는 모습이 애처러웠다.
그날 아침에 옥상에 담배피우러 나간 사람이 안와서 올라가보니 옥상출입문에 목을 매고
죽은 남편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부인과 헤어지고 나서 가정적으로 안정이 안되고 건강도 안좋아서
우울해 했다는 것이었다.
새터민들이 남한에 와서 경제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정착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부부싸움이 잦고 또 쉽게 헤어지는 이유는 ,스님말씀대로 혼자서는 외롭고 둘이 살면
서로 맞지 않고 , 또 북한에서는 가부장적인 남자의 권위의식이 너무 강해서 부인에게 잘 못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부인들이 참지 못하고 헤어지는 것 같았다.
여기서는 여자 혼자서도 얼마든지 살수 있기 때문 일 것이다.
장례식장에는 전부인과 두아들도 참석을 해서 마음이 아팠다.
이번에도 수영로 교회에서 목사님이 두분 오셔서 의식을 진행해 주시고 신도들과
성가대도 버스한차가 와서 찬송가도 불러주고, 화장터에 와서 같이 식당에서 식사제공은 물론이고
교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부조금을 모아 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느꼈다.
24살에 남한으로 와서 나름대로 살려고 발버둥을 치다가 만삭의 부인을 남겨두고
겨우 서른두살의 젊은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밖에 없었던 박충일씨의 죽음이
안타깝기만 했다.
서울쪽에서는 새터민이 몇명 자살한 사람이 있었다고 하는데
부산에서는 처음있는 일이라 새터민들도 마음아파하고 서로 한마음으로
장례일을 돕고 있었다.
부디 박충일씨가 편한 마음으로 좋은 곳으로 가시고 언젠가 꼭 성불하시라고 발원했다
첫댓글 넘 마음이 아프네요 보살펴 주지 못한 우리가 참회 합니다 명복을 빕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