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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토기 문화의 전개
(1)민무늬 토기의 형성
우리나라 청동기 시대의 토기를 일괄해서 일반적으로 민무늬 토기라고 하며 민무늬 토기란 문자 그대로라면 무늬가 없는 토기란 뜻이지만 실제로 청동기 시대에 속하는 토기 중에는 무늬가 장식된 예가 많다. 시대적인 측면에서 남한에서 실제 사용된 예를 보면 민무늬 토기는 청동기 시대의 토기로 한정되지 않으며 기원전 3세기 이후 철기시대에 후기 형식의 민무늬 토기, 그리고 기원전 1세기경 한 대 철기가 본격적으로 유입되었을 때에도 여전히 민무늬 토기가 사용되었다. 토기에는 집단마다 즐겨쓰는 그릇 모양과 무늬 장식이 다르므로 토기 장식 등의 구성 요소를 살펴서 집단의 지리적인 활동 범위나 그 전파 과정을 추적할 수 있다.
* 요하와 압록강 유역에 걸치는 지역 : 여대시 쌍타자 유적 출토 토기와 신암리 토기가 대표되는데, 압록강 이남에서 출토되는 대부분의 토기와 달리 점선.줄무늬와 꼭지 모양의 돋을 무늬 장식이 있고, 접시와 보시기 또는 단지에 굽이 달린 그릇이 많은 것이 특이하다. 또한 그릇 아가리를 두 겹으로 싼 겹아가리가 특징적이다.
* 대동강 유역 : 신흥동식 토기로 대표되는데, 넓은 입지름에 바닥이 매우 좁아 팽이처럼 생긴 팽이형 독형 토기가 특징적이다. 그리고 겹아가리를 하고, 짧은 빗금 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 두만강 유역 : 회령 오동 유적 출토 토기로 대표되는데, 보통의 갈색 민무늬 토기와 함께 붉은간그릇 토기와 공반하는 것이 특징적이다.
* 압록강 유역 : 공귀리식 토기는 고구마형 동체에 고리형 손잡이를 세로로 한 쌍 붙인 것이 표지적이다.
* 한강 유역 : 역삼동식 토기가 대표되는데 앞서 두만강 유역의 토기에서 보이는 구멍무늬 아가리와 붉은간그릇 토기가 특징적이고 입술면에 톱날 장식이 함께 새겨져 있다.
(2)민무늬 토기의 지역적 발전
* 요하에서 압록강 하류에 이르는 지역 : 요령식 동검 사용기의 표지적인 토기로 의주 미송리 동굴 유적에서 처음 확인된 미송리식 토기가 있다. 전형적인 미송리형 토기는 표면을 마연하고 납작 항아리 양쪽에 옆으로 손잡이가 달려 있으며, 폭이 넓게 올라가다 다시 안으로 오므라들면서 동체와 목에 묶음식 대선문을 두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 송화강 유역 : 서단산자형 토기로 대표되며 입지름이 작아지고 목이 짧으며 무늬가 없는 것이 미송리형 토기와 다르다.
* 한강 유역과 그 이남 : 대동강 유역의 신흥동식 토기가 지역화된 가락동식 토기가 있는 겹아가리의 빗금 무늬가 연속적으로 시문되고, 전체 그릇 모양은 바닥이 넓어져 팽이형에서 화분형으로 바뀐다.
* 금강.영산강 유역 : 금강의 부여 송국리유적 출토 토기로 대표되는데 아가리가 살짝 바깥으로 벌어지고 동체가 길쭉한 고구마형을 이르는 것이 특징적이다.
(3)민무늬 토기의 후기 형식과 새로운 토기의 등장
* 요동 지방과 청천강 이북 : 전국 시대 연나라 화폐 명도전과 다량의 철제 유물이 발견된다. 이는 기원전 3세기경 전국 시대 중국 문화가 이 지역에 미쳤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이와 함께 중국식 회도 기법의 토기도 이 지역에 함께 유입된다.
* 청천강 이남 지역 : 전국계 철기의 보급이 미미한 지역으로 민무늬 토기 수법을 그대로 계승하며 대표적인 것은 남한 지방에 수석리-괴정동식의 점토띠구연토기이다.
4.무덤의 구조와 사회적 성격
● 고인돌 : 지상으로 큰 돌이 나와 있어 쉽게 알아 볼 수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돌무덤 중 가장 많이 발견되고 조사된 무덤이다. 고인돌은 해방전 부터 지표조사와 일부 발굴 조사를 통해서 보고 되었지만, 지역마다 그 구조와 성격에 대해 보다 명확하게 밝혀지게 된 것은 해방 후 남북한 학자들이 큰 강 유역을 중심으로 많은 고인돌 군은 발굴 조사하면서 부터이다.
♤북한 : 유적의 지명을 따서 고인돌 형식을 크게 오덕리형.점촌리형으로 분류하였다. 돌널 무덤에서 발전한 것이 침촌리형이며 침촌형이 발전하여 지하 매장부가 지상에 드러난 것이 오덕리형이라고 주장한다.
♤남한 : 상석이 두터워지고 지석은 키가 낮은 덩이돌이며 주검은 지하에 매장된 형식이 크게 유행한다. 이러한 형식을 종전대로 남방식이라고 하고 남방식 속에 포함된 지석 없는 고인돌은 개석식이라는 별도의 형식으로 분류하였다.
최근에는 영산강.보성강.낙동강 유역을 중심으로 지상에 드러난 지석이 상석의 가장자리를 따라 5∼8개 정돌을 고이고, 지하에 토광을 파거나 따로 매장 시설을 갖추지 않은 이른바 위석식 고인돌 이라는 새로운 형식이 밝혀졌다. 고인돌을 세워 만드는 데에는 많은 사람이 필요했으며 여기서 볼 때 고인돌 사회는 족장이 지배하는 족장 사회였을 것이다.
● 돌널 무덤과 돌무지 무덤
♤돌널 무덤 : 벽석을 한 매의 판석으로 짠 것, 여러 매의 판석으로 짠 것이 있다. 강계시의 공귀리돌널 무덤은 수 매 판석식으로 주과 옆에 작은 관을 잇대어 만들어 부모와 자식이 합장한 돌널 무덤으로 추정된다. 두만강 지류의 연길 소영자에서는 100여 기의 돌널 무덤이 발굴 되었다. 한반도로 내려오면서 비파형 동검을 부장한 돌널 무덤이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돌무지 무덤 : 일정한 구역의 지면을 평탄하게 막아내고 막돌을 장방형으로 쌓아 묘역을 만든 무덤이다. 청동기 시대의 것으로는 요령 지방의 장군산 무덤이 있고 같은 돌무지 무덤이면서 많은 사람이 묻혀 있고 중심과 주변의 무덤 구덩이간에 부장품과 무덤 시설에 차이가 나는 무덤이 있는데 강상 무덤과 누상 무덤이 그 대표적 예이다.
● 돌곽 무덤과 토광 무덤
♤ 돌곽 무덤 : 지하에 깊은 움을 파고 부정형 할석 또는 덩이돌로 장방형의 곽을 짠 무덤으로 대체로 늦은 철기 시대에 유행했다. 세형 동검을 부장한 돌곽 무덤은 서북한과 서남한 지방에 주로 분포한다.
♤ 토광 무덤 : 돌곽 무덤에서 다음 움무덤으로 넘어가는 과도기 무덤으로 토광에 나무관을 넣은 다음 토광과 목관 사이에 적당히 돌을 채운 무덤이다. 토광을 파고 목관을 안치한 다음 아예 돌로 채우지 않은 경우는 토광목관묘가 되며, 돌곽 대신 목관을 짠 경우는 토광목곽묘가 된다. 철기 시대 이후 토광목관묘가 되며 한반도에서 성행하기 시작한 것은 한사군 설치 무렵인 기원전 1세기이다.
5.집자리 구조와 촌락
Ⅰ.집자리 조사와 촌락 위치
집자리 조사는 * 개개 가옥에 대한 건축 기술상의 특징과 주거지에서 유물 출토 상황을 분석하여 주거 생활을 복원해 내는 것이며 * 촌락 전체를 분석 단위로 하여 그 구조와 사회 성격을 밝혀 내는 것이며 * 여러 촌락이 포함된 일정 지역 내에 촌락간의 정치적.종교적.사회적 관계의 여러 양상을 파악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신석기 시대를 뒤이은 청동기 시대는 물론 철기 시대의 집도 지금까지 발굴 조사된 대부분이 반움집 형태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 신석기 시대의 집자리 : 처음은 원형과 타원형 뿐이다가 점차 방형 위주가 되고 말기에 장방형이 나타난다.
● 청동기 시대 : 청동기 시대가 되면서 향상된 농업 생산력을 바탕으로 일정 지역의 인구가 증가하고 촌락은 커진다.
● 청동기 시대에서 철기 시대 : 이 시기에 걸쳐 촌락이 형성된 곳은 대부분 강을 끼고 있다. 청동기 시대 촌락은 신석기 시대 촌락과는 달리 그 대부분이 강변에 형성되었다 해도 강에 바로 인접한 것이 아니라 일정한 거리와 고도를 유지한 구릉지대에 형성되었다.
Ⅱ. 여러 지역의 집자리
* 요동 반도 : 여대시 쌍타자 유적이 대표적으로 총 14기가 조사되었는데 모두 막돌로 벽을 쌓은 지상 가옥에 가까운 반움집이다. 집자리마다 기둥 구멍이 남아 있는데 주로 돌담벽 밑에 있으며 막돌로 벽을 쌓은 것은 다른 지방에서는 보이지 않는 특징이다.
* 두만강 유역 : 이 지역을 중심으로 한 한반도 동부 지역에서는 화령 오동 유적이 대표되는데 움의 깊이가 평균 70센티미터 정도로 한반도 다른 지역보다 깊게 나타난다. 장방형의 반움집 집자리터에 장축 방향으로 4열의 기둥 주춧돌이 놓여 있는 것이 특징이다.
* 대동강 유역과 한강 유역 : 장방형의 반움집이 대부분이다. 유난히 길고 큰 장방형의 집자리가 적지 않게 발견되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한강 유역의 경기도 파주군 옥석리 집자리이다.
* 금강과 영산강 유역 : 원형 집자리가 집중되어 있으며 송국리형 집자리라고 일컫는데, 한가운데에 큼직한 두 개의 기둥 구멍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철기 시대 유적으로는 청천강 유역의 세죽리와 세형 동검관계 점토띠 토기 문화유적인 충남 서해안가의 보성 교성리 유적을 들 수 있다. 세죽리 유적에서는 동서 1∼1.3킬로미터, 남북 200∼300미터의 넓은 범위에서 마을터가 확인 되었으며 이 곳 집들은 주춧돌 없이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새초 같은 것으로 지붕을 덮었던 초가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교성리 집터는 산의 정상부 비탈면의 높은 쪽을 단면 '遁'자 형으로 파서 반움집으로 만든 것으로 고지성 집자리로서 방위용의 특수목적으로 지어졌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참고 문헌
이청규, 「청동기.철기 시대의 사회와 문화」, 『한국사』1, 한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