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도회明道會
한국 천주교회 초기에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에 의해 세워진 평신도들의 교리 연구 및 전교단체. 명회(明會)로도 불렸다. 주문모 신부는 1795년 최초의 선교사로 조선에 입국하는데 성공하였다. 주문모 신부는 오래 전부터 북경(北京)에 세워져 있는 그와 비슷한 회의 본을 떠서 ‘천주교 교리를 가르치는 회’라는 뜻의 이 회를 조직하고 회장으로는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티노)을 임명하였다. 명도 회원들은 우선 자신들이 천주교에 대해 깊은 지식을 얻도록 노력하고 다음으로는 그것을 교우와 외교인들에게 전파하도록 서로 격려하고 서로 도와주었다. 주 신부는 이 회를 위하여 개최되는 장소, 사회자의 임명, 남녀가 유별될 것 등을 규정해 주었으며, 회는 점차 전국으로 보급되어 큰 성과를 거두었다.
내용이 엄격한 ‘명도회규’(明道會規)도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직접 만들어 시행하게 했는데, 그 ‘회규’ 자체는 오늘날 전해진 것이 없다. 주 신부에 의하여 임명된 명도회의 사회자는 회원들에게 매월 그 달의 주보 성인(主保聖人)이 지정되어 있는 회원권을 나누어주었다. 명도회에 가입하는 절차이기도 한 이러한 회원권 제도를 당시의 신자들은 보명(報名)이라고 불렀다. 보명이란 열심한 신자를 신부에게 알리면 신부가 교회의 성인 이름을 따라 지어 보내고 연말에 가서 신자의 부지런함 여부와 전교한 성과 등을 신부에게 보고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또한 이에 관해 다른 기록은 “먼저 이름자를 보고하고 신공(神功)을 하는데, 신공을 부지런히 한 사람은 입회가 허락되고 부지런히 하지 않은 사람은 제명된다”고 말하고 있다.
당시 교회의 지도급 인사였고 명도회의 핵심 멤버이기도 했던 황사영(黃嗣永알렉시오)에 의하면 명도회의 집회 장소로는 육회(六會), 즉 여섯 군데가 있었는데, 그 중 다섯 곳은 홍필주(洪弼周), 홍익만(洪翼萬), 김여행(金勵行), 현계흠(玄啓欽), 황사영의 집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첨례(瞻禮)[축일] 때마다 신도들과 같이 육회에 참석하여 포교에 힘썼으며, 육회는 각각 3, 4명 내지 5, 6명의 회원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황사영에 따르면 그가 맡았던 모임은 자신을 필두로 남송로(南松老), 최태산(崔太山), 손인원(孫仁遠), 조신행(趙愼行), 이재신(李在新) 등 6명의 회원으로 구성되었었으며 그중 조신행과 이재신은 양반, 손인원은 중인이었다고 한다.
지방에서의 명도회 활동은 자료의 부족으로 분명치 않으나 서울에서만은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음이 확실한데 <황사영 백서>(黃嗣永帛書)는 이에 관해 “회원들은 물론이고 신자들도 이에 감화되어 모두 전교를 일삼았으므로 경신년(庚申年, 1800년) 가을과 겨울에 걸쳐 하루하루 입교자가 불어나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명도회는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 때 주문모 신부와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회장 등 간부가 모조리 순교하는 바람에 자연 그 활동이 침체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827년의 순교자 이경언(李景彦)이 명도 회원들에게 보낸 서한 등으로 미루어 그 후에도 이 조직이 꾸준히 존속된 것은 확실하다.
복사: 가톨릭 대백과 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