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결사대 -두산백과사전
무저항주의를 표방한 3·1운동이 일제에 의해 무산되는 것을 본 천도교도 황태익이 구국운동의 방법을 바꾸어 무력항일운동에 나서기로 결심하고, 1920년 3월 9일 진주시 옥봉동에서 천도교동지를 중심으로 조직한 의열단. 황태익은 이 의열단의 대장이 되어 <배일역사서>를 작성하고 동지규합에 나섰다.
여기에 일차적으로 동조한 동지는 천도교 경남청년회당 김의진을 비롯한 임태준(임태준), 노성화(노성화), 황호익(황호익) 노응범(노응범) 강재순(강재순) 강대규(강대규) 등이다. 황태익은 우선 이들 결사대 명단을 작성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보고하고, 이울러 앞으로 임시정부를 도와 대일항전에 적극적으로 나설 뜻을 밝혔다.
황태익은 광범위한 동지규합을 위하여 사천·고성·창원·산청·함안·의령·합천 등을 돌며 복사해서 만든 <배일역사서>를 배포하여 결사대의 취지를 설명하고, 만주에 있는 각 지사단(지사단)과도 연락을 취하면서 조직을 확대해 나갔다. 결사대는 그해 4월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가 남부지방을 순시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총독암살을 계획하고 진주로 급히 달려갔으나 일본군의 삼엄한 경계 때문에 결행하지 못했다.
다음달 5월에 다시 부산의 축항(축항) 기념축하회에 정무총감 미즈노 렌타로를 비롯한 일본고관들이 첨석한다는 정보를 듣고 암살계획을 세웠으나, 역시 일본군의 삼엄한 경계로 손을 쓰지 못하였다. 5월 동지 한 사람을 부산으로 파견하여 그곳 상황을 탐지하게 하면서, 고성군 구만면 화림리 산속에 있는 동지 노응범의 집에서 앞으로 투쟁방법을 논의하였다.
이때 일제의 앞잡이인 노광천(노광천)의 밀고로 진동 주재소 형사 이만갑이 진주에있는 일본 경찰대를 이끌고 현장을 습격함으로써 황태익을 비롯한 8명의 간부급 결사대원 전원을 체포하였다. 진주감옥에 수감된 결사대원은 혹독한 고문을 받았으며, 서울 서대문형무소로 옮겨져 오랫동안 옥고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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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6.1. 조선총독과 정무총감을 암살하려다가 목적을 달성 못하고 경남 고성군(固城郡) 구만면(九萬面) 화림리(華林里) 산중에서 결사대장 황태익(黃泰益)외 7명이 진주(晋州)경찰서에 체포, 1일 진주검사국으로 호송되다. 황태익은 천도교주 손병희로부터 국권을 회복하라는 권고를 받고 진주에서 비밀회의를 갖고, 경남결사대를 조직, 진주·고성·창원(昌原)·사천(泗川)·산청(山淸)·함안(咸安)·영산(靈山)·합천(陜川) 등지의 유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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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유하여 서울과 상해임시정부와의 연락을 취하기로 하였고, 재등(齋藤) 총독이 남부지방을 순시할 때 경계가 삼엄하여 목적을 달성치 못했고, 다시 정무총감이 부산(釜山) 축항식에 참석한다는 탐문에 의해 역시 실패, 고성군 구만면 화림리 산중으로 돌아와 천도교 경남청년회장 김의진(金義鎭) 및 천도교도와 회합하던 중 체포되었다. 결사대 명부, 한글로 된 배일역사서(排日歷史書)도 발각되었고, 함께 체포된 사람은 강재순(姜在淳)·임태준(林泰俊)·김의준·노성화(盧聖和)·황호익(黃鎬益)·노응환(盧應丸)·강대규(姜大規)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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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남결사대(慶南決死隊)의 총독 처단 기도
1920년 6월 초순 경남 진주(晋州) 경찰서에서는 저간 경남 고성군(固城郡) 구만면(九萬面) 화림리(華林里) 산중에서 결사대를 조직하고 조선총독·정무총감(政務總監) 등을 암살하려고 모의하고 있던 황태익(黃泰益) 외 7명 일행을 검거하여 엄중 취조를 끝내고 6월 1일자로 일건 서류와 함께 검찰에 송치했다는 사실이 발표되었다. 사건 경위는 대략 다음과 같았다.
황태익 이하 검거된 일행 전원은 천도교청년회(天道敎靑年會)원들로써 전년 3월 1일 천도교주(敎主) 손병희(孫秉熙) 등 민족 대표 33인이 공포한 독립 선언서 취지에 따라서 민족 전원이 최후 1인 최후 일각까지 조국 독립을 위해 결사 투쟁함은 민족의 당연한 의무라는 신념 하에 전기한 바와 같이 화림의 산중에서 수차 회합하여 결사대를 조직한 후 고성·창원(昌原)·사천(泗川)·산청(山淸)·함안(咸安)·영산(靈山)·의령(宜寧)·합천(陜川)·경성 등지로 왕래하며 동지를 규합하고 자금을 조달하고 있다가 20년 4월 중에 당시 총독 재등실(齋藤實)이 경남 지방에 순시(巡視) 차 진주까지 온다는 소식에 접하고 이를 요격하려고 진주면 옥봉리(玉峰里)에서 계획을 수립하였으나 당일 진주 시내의 경비가 철통같이 엄밀했을 뿐만 아니라 연도(沿道)에는 군대까지 포열하고 있었으므로 계획을 실행하지 못하고 실패했었고, 다음에 부산 축항(築港) 낙성식(落成式)에 전무 총감 이하 총독부 고관들이 대거하여 부산에 온다는 소식에 접하고 이 기회를 타서 대관 암살 계획을 실행하려고 획책해 보았으나 역시 경비가 엄중하여 또 다시 실패했다는 것이었다. 경찰은 일행이 결사 서약하면서 작성하였던 대원 명부(隊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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名簿)와 동시에 한글로 기술한 배일 역사서(排日歷史書)라는 문서도 압수하였다로 했다. 이들은 이 문서를 유포하면서 독립 사상을 고취하였다고 한다.
이 때에 검거된 일행의 명단은 아래와 같은 8명이었다. 즉 황태익(당시 50세) 진주군(晋州郡) 진천면(鎭川面) 일암리(日岩里) 거주, 강재순(姜在淳 당시 32세) 동군(同郡) 정촌면(井村面) 관봉리(官鳳里), 임태준(林台俊 당시 25세) 동군(同郡) 진주면(晋州面) 비봉동(飛鳳洞), 김의진(金義鎭 당시 26세) 동상거주(同上店住), 노성화(盧聖和 당시 48세) 고성군 구만면 화촌리, 노응범(盧應凡 당시 56세) 동상리(里) 거주, 강대규(姜大規 당시 27세) 동상리 거주, 황호익(黃鎬益 당시 40세) 동군 등면(面) 거주……등 등이었다. 그 당시의 동아일보 기사에는 이들이 모두 천도교(天道敎) 경남청년회(慶南靑年會) 소속 회원이라 하였으나 당시 천도교 청년회 조직은 중앙에 본부가 있고, 지방에는 각 교구별(敎區別)로 지회(支會)가 설치되어 있었더니 만큼, 이들도 각기 교구 소속 지회원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사건도 미수(未遂)로 끝나기는 했으나 어마어마한 죄명으로 검거되었었으니 무사하지는 못했을 터이나,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다 함을 기록한 문헌은 지금 찾아볼 수가 없다.
http://e-gonghun.mpva.go.kr/portal/web/book/book_xml_view_detail.jsp?his_code=PV_DO&book_code=0007&item_code=002.003.001.006&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