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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설교(97)
영과 진리로
본문 : 요4:20-24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
예수님은 지금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는 조그만 동네의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를 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먼저 '물을 좀 달라'고 부탁하시면서
대화는 시작되었습니다.
당황해 하는 그 여인에게 예수님은...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라” 고 말씀하시면서,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생수’에 비유하시면서.....
예수님을 영접하기만 하면......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구원의 ‘생수’를 선물로 받게 될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여인이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15)하며 조롱 투로 대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갑자기 그녀의 남편을
불러오라고 명합니다(16절).
그녀는 남편이 없다고 잡아뗍니다(17절).
그러자 예수님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18절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17절b-18절)하면서 그녀의 속사정을
꿰뚫고 계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에 의해 자신의 수치가 드러나자
이 여인은 예수님을 다른 눈으로 보게 됩니다.
그제야 이 여인은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19절)하고
주님을 인정하였습니다.
대화의 과정을 통해서 예수님에 대한
여인의 생각이 점점 바뀌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 예수님은 그냥 한 '유대인 남자'였습니다.
경계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자신의 문제를 지적당하고
난 후에는 '선지자'라고 말합니다.
발전하긴 했지만 아직도 예수님을
정확하게 본 것은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
예수님은 메시아입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나의 믿음의 대상이요,
예배의 대상입니다.
이 외의 다른 어떤 명칭이나 직함도
예수님을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냥 '좋은 분' 정도로 생각합니다.
혹은 '위대한 스승'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또는 '성인'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신앙의 대상이 되지 않으면
아직도 예수님을 제대로 만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나의 구세주,
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분명한 고백이 없다면.....
아직 예수님을 제대로 만난 것이 아닙니다.
사마리아 여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직 예수님의 누구신지
정확히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25절 “여자가 이르되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그녀 역시 메시아 곧 그리스도에 대한
기대가 있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은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26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자신이 바로
그녀가 기다리던 메시야임을
분명히 밝히신 것입니다.
<주제를 바꾸는 사마리아 여인>.....
오늘 본문을 보면....
자신의 속마음을 훤하게 들여다보는
분 앞에서 이 여인은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치 벌거벗겨진 느낌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의 죄악 된
부끄러운 모습이 드러나게 될 때에 .....
그것을 인정하고 수용하기 보다는
회피하려고 합니다.
이 여인도 자신의 사생활의 부끄러운
일들을 계속해서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어떻게든 대화의 주제를 바꿀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꺼내든 카드가 바로 '신학적인 이슈'입니다.
20절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해야
한다고 하니 어떤 것이 옳으냐?'하는 질문입니다.
사실 사마리아인들과 유대인들의 갈등 가운데
핵심적인 문제가 '성전'이었습니다.
3000년 전 솔로몬 왕이 죽었습니다.
아들 르호보암이 아버지의 왕위를
계승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미숙함은
나라의 분열을 가져왔습니다.
유다지파와 베냐민 지파를 뺀 나머지
10지파가 여로보암을 왕으로 추대하였습니다.
10지파가 주축이 된 북왕국을 이스라엘로,
두 지파가 주축이 된 남왕국을 유다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이 된
여로보암은 국토의 넓이나 인구 등......
모든 면에서 남왕국보다 우위에 있었음에도
심각한 고민에 직면하였습니다.
남북을 막론하고 모든 백성이 섬기는
하나님의 성전이 남왕국의 수도 예루살렘에만
있었기 때문입니다.
북쪽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절기를
지키기 위해 남쪽 수도인 예루살렘으로
내려가야만 했습니다.
여로보암 왕이 보기에 이것은
신생 북왕국의 안정을 위협하는
커다란 불안요소였습니다.
마침내 여로보암은 남쪽으로 향하는
국경을 폐쇄한 뒤.......
북왕국의 수도 사마리아에 산당을 짓고
그 곳에서만 예배드리도록 했습니다.
그 예배만이 참된 예배라고 주장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모세오경(창, 출, 레, 민, 신)
이외에는 어떤 하나님의 말씀도 읽지 못하게 했습니다.
자기 왕국에 속한 사람들이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정통성이.....
남쪽 유다에 있음을
알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남북왕조가 다 멸망한 뒤에도
성전을 둘러싼 갈등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바벨론 포로생활을 마친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려고 할 때에.....
사마리아인들이 함께 동참하기를 원했지만
거절당했습니다.
이방인들과 피가 섞인 사마리아인이라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성전건축에 배척을 당하자 사마리아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는 일을 방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예루살렘 성전이 완공되자....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심 산에 자기들끼리
소위 사마리아 성전을 건축합니다(BC 322).
말하자면 성전이 두 개가 된 것이지요.
이 두 성전의 갈등이 2백 년 동안 계속되다가
BC 129년 유대인 지도자였던
요한 힐카누스가 그리심 산의 성전을
완전히 파괴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갈등은
이때가 최고 절정기였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이 앙금이
전혀 해소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결국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어디에서 예배를 드려야 하느냐'에 대한 문제를 가지고
오랫동안 갈등해왔습니다.
바로 이 문제를 사마리아 여인이
꺼내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 문제를 꺼내들었을까 ?
이 문제에 대한 속 시원한 해답을
원했기 때문일까 ?
아닙니다.
그것은 한두 해 묵은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까지 아무도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앞으로도 해결하지 못할 문제입니다.
이 여인이 이러한 신학적인 이슈를
끄집어 낸 것은 사실.....
'남편을 불러 오라'는 예수님의 요구를
회피할 목적이었습니다.
그 당황스러운 순간을 모면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해결하지 못할
'난해한 문제'를 꺼내든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자신의 진면목을
드러내고 싶지 않을 때
이 카드를 종종 꺼냅니다.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죄악 된
모습이 드러날 때에....
그것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지 못하고 삼천포로
빠지는 것을 봅니다.
"왜 교회가 그 모양이야?
교인들끼리 왜 그렇게 싸우는데?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독선적인 주장이 아닐까?
무슨 기독교에 교파가 그렇게 많아?" ......
그것은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솔직한 모습을
드러내고 싶지 않는 사람들이
상투적으로 쓰는 방법입니다.
<참된 예배란>.....
사마리아 여인의 이 난해한 질문을 통해 .....
예수님은 참된 예배에 대한 아주 중요하고도
새로운 교훈을 주시고 있습니다.
예배에 대한 예수님의 첫 번째 가르침은.......
'예배는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대상의 문제'라는 사실입니다.
21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어디에서 예배하느냐'가 아니라
'누구에게 예배하느냐'가
더욱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어디에서
예배해야 하느냐의 문제로 싸워왔습니다.
그것은 예배의 핵심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예배의 핵심은 대상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어디에서 예배하느냐'에 목숨 겁니다.
어떤 예배 형식을 따를 것인지....,
어느 시간에 예배해야 하는지,...
촛불을 켜야 하는지....
가운을 입어야 하는지를 가지고 싸웁니다.
심지어 예배 시간에 악기를 사용하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를 가지고 교단이
나누어지기도 합니다.
그것은 모두 장소의 문제에 해당됩니다.
예루살렘인지 그리심 산인지를 놓고
싸우는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과
똑같습니다.
형식과 껍데기 가지고 싸우다가
누구에게 예배하는지를 놓쳐버린다면
그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따라서 우리가 예배할 때에
항상 물어야 할 질문은 ....
'지금 하나님 아버지께 예배를
드리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나를 만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서
예배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20)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예배를 드린다면
장소가 어디든...,
시간이 언제이든....
어떤 악기를 사용하든...
그것이 내 마음에 들든지 안 들든지
그것이 무슨 문제이겠습니까.
주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예배하면
장소는 어디이든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예배에 대한 예수님의 첫 번째 가르침은.......
'예배는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대상의 문제'라는 사실입니다.
두 번째 가르침은
'예배는 알고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22절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여기에서 '너희'는 사마리아인들이고....
'우리'는 유대인들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유대인들은 아는 것을
예배한다.'고 하니까....
무슨 인종차별적인 발언처럼
들릴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구원은 유대인에게서 난다'고 하니까
더더욱 그렇게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예수님이
강조하시려는 것은.....
'예배란 인간의 경험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시 사마리아인들의 예배에는
우상 숭배의 여러 가지 요소들이
혼합되었습니다.
사마리아 성전 예배의 특징은
열정적이라는 것입니다.
예배자들의 감정에 호소하는
그런 방식들이 많이 도입되었습니다.
그래서 예배가 뜨겁기는 한데
알맹이가 없었습니다.
사람에게 초점이 맞추어진 예배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계시에서 출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제한된 지식을 가지고
예배를 하려고 하니까....
인간의 경험이 강조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유대인들은 제대로 예배했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충분한 하나님의 말씀과
계시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
율법이라는 형식에 얽매어서
제대로 예배하지 못했습니다.
제의와 격식은 갖추고 있었지만
그 의미를 충분히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유대인들은 아는 것을 예배한다.'고
말씀하신 이유는 ......
그들이 사마리아인보다는
완전한 계시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난다'는 말씀에서
하나님의 계시가 더욱 강조됩니다.
여기에서 '구원'은 구원자인
메시아를 가리킵니다.
유대인에게서 메시아가 나도록
하나님께서 계시하셨습니다.
왜 하필이면 유대인이냐고 하겠지만,.....
그것은 하나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셨고
이미 오랫동안 계시해 오셨습니다.
사마리아인이 들으면 기분 나쁠 거라고 해서
이 말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동양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해서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진정한 예배란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의 계시에 따르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과 기분에 맞추는 것이
예배가 아닙니다.
따라서 예배를 잘 드리려면 하나님의 계시를
잘 알아야 합니다.
아는 것을 예배해야 합니다.
사마리아인들은 계시를
알지 못하고 예배했습니다.
사람들의 감정이 뜨겁기는 했지만
하나님의 계시가 빠져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계시를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정작 구원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영접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율법주의로 바꾸어서
의미 없는 형식적인 제사만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이 모두 진정한 예배는 아니었습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에 참석했다는 것이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어떤 예배를 드리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잘 알고
드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감정주의에 빠지거나
형식주의에 빠져서...
예배하고도 잘 했다고
착각하게 되는 겁니다.
예배에 대한 예수님의 첫 번째 가르침은.......
'예배는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대상의 문제'라는 사실입니다.
두 번째 가르침은 '예배는 알고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배에 대한 예수님의 세 번째 가르침은
'예배는 영과 진리로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23-24절 읽어라>
23절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절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하나님이 영이시니 우리도 영으로
예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형식이나 제도가 아니라
영으로 드리는 예배를 영이신
하나님이 기뻐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진정한 예배란 내 영이...,
내 속사람이 예배하는 것입니다.
찬양할 때 내 영이 찬양하고....
기도할 때에 내 영이 기도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순서와 형식에 따라서
수동적으로 내 몸이 움직였다고
예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영이,... 온 몸과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예배할 때에 하나님이 기뻐 받으십니다.
또 '진리 안에서'
즉 '진리의 말씀 안에서' 예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배에는 진리의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말씀에 따라서
예배가 진행되어야 하고,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선포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이 빠진 예배는
예배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배에 대한 예수님의 첫 번째 가르침은.......
'예배는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대상의 문제'라는 사실입니다.
두 번째 가르침은
'예배는 알고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배에 대한 예수님의 세 번째 가르침은
'예배는 영과 진리로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배에 대한 예수님의 네 번째 가르침은
'지금이 바로 예배할 때라'는 것입니다.
23절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우리가 특별히 주목해야 할 것은.....
'언제 그 예배가 가능해지는가' 하는 대목입니다.
예수님은 지금이 바로 그때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까지는 이런 예배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가능하다는 것이지요.
왜 하필 지금일까 지금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이 모든 것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계시의 절정이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 이전의 예배와
예수님 이후의 예배가 같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희생 제물로
예배드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배드립니다.
예수님이 계시기에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가 가능한 것입니다.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님들 !
주님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혹시 사람을 찾아 보셨습니까?
사람이 얼마나 많이 있는가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찾는 사람이 아니라면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겠습니까?
그러나 몸만 와서 앉아 있는 사람은
아무리 많아도 하나님께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찾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령 안에서 자신의 영으로,
그리고 말씀의 진리 안에서
오직 하나님만 예배하는 ...
우리 금산교회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금산교회 김화준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