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교회의 여러 문제점 중에서 은사가 그 한 부분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방언과 예언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 둘 중에 방언이 더 많은 말썽을 부렸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방언 보다는 예언 쪽을 더 권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는 성경이 완성이 되어 진정한 의미의 예언은 없어 보입니다.
다만 방언을 가지고 사람들이 구원 운운하는 실정인데
그 말을 들어보면 유치해서 기가 찰 노릇입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방언이 성령세례라고 말하므로
성령세례의 신비하고 비밀스러운 복을 아주 싸구려로 만들고 맙니다.
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의 위대하신 공로를 심하게 모독하는 말입니다.
본인에게도 언급을 했지만 그 사람은 나라를 위한 정치를 하든지 아니면 진리를
더욱 탐구하여 오직 구원받은 성도들만을 위한 교회사역을 하든지 양자택일해야 할 땝니다.
제가 보기에도 불쌍하고 안타까운데 오래 참으시는 자비의 하나님은 오죽하시겠습니까?
고전14장은 방언과 예언에 관한 말씀입니다.
사랑을 강조하고 신령한 것 곧 은사 중에도 예언을 권면합니다.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전14:1)
그리고 난 다음에 뒤에 가서 방언도 하라고 바울이 권하고 있습니다.
사랑을 구한다는 말은 사랑을 추구하고 좇는 상태입니다.
근데 사모란 추구하는 열심인데 잘 못하면 시기나 욕심으로 치달을 수가 있습니다.
산 기도에 가 보면 이산 저산에서 목소리로 서로 앙앙대며 경쟁하는 그 모습과 같습니다.
사랑을 따라 구하라는 말은 사랑을 좇아가라 하는 뜻인데
그러기 위해 진리의 지식에 의한 예언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사랑이신 하나님께 접근할 수 있는 지식이 없이는 사랑을 따라 구할 수가 없습니다.
사랑과 신령한 것들은 어찌 서로 다른가 묻는다면 사랑은 헤 아가페의 존재입니다.
우리 곁을 스쳐가는 신령한 체험이 아니라 영원히 거하시는 존재이십니다.
사랑을 향한 사모함이나 열심은 시기의 대상이 아니라 마땅히 추구할 대상입니다.
신령한 것은 은사(카리스마)이므로 기능이며 직분자들에게 사역을 위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큰 은사는 사랑을 추구하는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그 지식의 말씀을 예언하는 은사가 필요합니다(고전14:1)
사랑은 존재이므로 성령의 은사에 대한 말씀의 고전12장과 14장 사이에 끼어져 있습니다.
제일 좋은 길, 더욱 큰 은사이기 때문에... 사랑과 예언의 관계성을 보면
예언은 점쟁이와 같은 류의 말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되어 질 것을 미리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말씀 자체가 바로 사랑으로 나타나는 지식이 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고 난 뒤의 예언의 은사가 가장 좋은 것이며 온전한 것입니다.
이를테면 그리스도의 동선을 따르면 주의 영광을 보고 사랑에 이르게 된다고
하고 말해 주는 것이 바로 예언입니다. 이건 틀림없이 이루어지는 성경의 약속입니다.
방언은 개인이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것이나(고전14:2)
예언 곧 설교의 성격은 권면과 안위이며 덕을 세웁니다.
하나하나의 몸이 하나님의 집이 되어 가도록 말씀을 증거하는 겁니다.
성도 개개인이 바로 하나님이 거하실 작은 집이며 전체 집에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엡2:21)
그래서 교회의 사역자들은 말씀을 증거하므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고(엡4:12)
그 몸을 그리스도의 충만한데 까지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게 됩니다(엡4:16)
그래서 예언이 중요하다고 말하는데 이는 대언의 영을 받은 선지적인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방언은 자기 자신을 세우는 은사이며 역사입니다. 개인적인 유익을 위해 필요합니다.
예언은 교회를 세우는 은사요 역사이기에 전체적인 유익을 위해 필요한 겁니다(고전14:4)
하나님의 나라는 자기 혼자만의 나라가 아니기에
다수가 없는 개인적인 신앙은 결함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방언은 곧 속의 것을 밖으로 드러내는 통역이 없으면 방언을 하는 자 보다는
예언하는 자가 더 큰 자이기 때문에 방언의 진정한 가치는 통역에 있다고 말합니다.
통역은 하나님의 비밀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농아의 말은 수화로 통역을 해 줘야만 알아들을 수 있음과 같습니다.
방언을 통역하면 하나님의 비밀을 아는 것으로 예언과 같은 성격이 됩니다.
그러므로 은사는 자신과 다른 이들에게 유익이 되도록 사용해야 합니다.
말로서 사람에게 유익을 주므로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방언으로만 말하고 계시와 지식과 예언 등 가르치는 것으로
언어로 표현이 되지 않으면 아무 유익이 안 된다고 말씀합니다(고전14:6)
피리와 거문고와 같이 생명이 없는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을 분별하지 못하면 다른 잡동사니 소리와 다를 바 없습니다(고전14:7)
또 나팔소리가 분명치 않으면 전투를 예비할 수 없습니다.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왜 나팔소리와 전쟁이야기가 나오는가 하면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마24:31)
나팔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고전15:52)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살전4:16)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계1:10) 이와 같은 상황을 보면
언제나 구원은 하나님의 나팔과 함께 일어나는 전투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들을 수 있는 귀가 있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나팔로 들릴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알아듣기 쉬운 말 곧 분명하게 제시하는 말을 해야만 하는 겁니다.
나타나는 말, 잘 표현되는 말씀이 바로 제대로 부는 나팔소리입니다.
주의 일꾼들은 그리스도의 진리의 복음을 잘 표현하고 설명해야 합니다.
따라서 자신이 받은 계시나 지식은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씀을 듣는 이들에게 구원을 위한 영적전쟁을 준비시키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날 마지막 때인 성령의 시대는 나팔을 크게 분명하게 불 때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기도나 설교들이 허공에다 말하는 것(고전14:9) 또는
뜻 없는 소리(고전14:10)와 같다면 외국인 곧 야만인의 부르짖음이 되고 맙니다.
꼭 타잔과 같은 괴성을 질러대면 누가 그 소리를 알아듣겠습니까?
만약 소리의 뜻을 파악하지 못하면 야만인(외국어)과 같이 되고 맙니다.
말은 그 소리의 아름다움보다 말에 담긴 능력이 중요합니다(고전4:20)
바울의 생각은 한 마디로 말해서 나는 야만인인과 같이 되기 싫다는 겁니다.
결과가 나타나지 않는 말은 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말입니다.
입에서 나는 소리 곧 말의 능력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생명과 양식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말은 그 사회의 생혈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덕을 세우는 말을 하기 위하여 영적으로 풍성하기를 구하라(고전14:12)하십니다.
이 풍성함은 지식이나 내용만의 전달이 아닌 능력 있는 말의 차원을 뜻합니다.
다시 바울이 강조합니다. 속의 깨달음은 반드시 밖으로 전달되어야 합니다(고전14:13)
그래서 통역을 위해 기도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은사를 가진 사람들은 대체로 그 자체만 고집하는 경향이 있어 문제가 됩니다.
그러나 신령한 사람들은 전체의 조화를 이룰 지혜를 가진 성숙한 사람들입니다.
방언기도는 영으로 하는 기도이기 때문에 마음의 열매가 없습니다.
이를테면 논란이 있는 관상의 기도는 영으로 말할 수 없는 극치의 즐거움을
맛보지만 깨고 나면 오감으로 느끼는 세상에 자신이 그대로 놓여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통역은 그 기도의 내용을 알게 하므로 마음의 열매(인격의 변화)를 맺게 합니다.
그래서 영으로 하는 기도는 마음으로 깨달음이 있어야 하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고전14:15) 바로 방언에 대한 정답입니다.
영으로만 하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유익하게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고전14:16)
그래서 바울은 영으로만 기도하지 않고 깨달음으로 이성적인 기도도 한다는 말입니다.
만일 영으로만 기도하고 영으로만 찬양하고 감사하면 자신은 영으로
하나님께 감사를 했으나 다른 사람은 그 사실을 모르는 문제가 발생합니다(고전14:17)
그래서 남에게 도움이 안 됩니다. 은사를 주신 목적은 다른 사람의
유익이 되어 덕(집)을 세우기 위함인데 자기의 유익만 챙기는 결과가 되고 맙니다.
방언에 대한 바울의 감사의 이유는 하나님의 비밀을 많이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자체가 바울의 자랑이 아니라고 말합니다(고전14:18) 남을 가르치는
다섯 마디의 말이 남에게 유익이 되고 교회에 덕이 된다고 말합니다(고전14:19)
하나님의 말씀은 이성으로 받아들여 인식하여 생각으로 분별하여
마음으로 소화를 시켜 영의 창고로 들어가므로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가 살아
역사하시는 말씀(히4:12)에 의해 좌지우지가 되어야만 정상적인 하나님의 집이 지어져 갑니다.
그러나 자신이 황홀하고 경이로운 체험을 한답시고 남이 알아듣지 못한 말로
중얼거리는 건 만약 통역이 없다면 결국 신앙의 초보에서 꼼짝 달싹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은사가 나타나는 고린도교회가 신령하기는커녕
그리스도 안에 육신에 속한 젖먹이들이 되고 마는 겁니다(고전3:1-2)
그래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지만 사랑까지는 아직 까마득한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지혜를 가진 예언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제대로 설명하는 걸 듣지 못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거역하는 육신의 사람들이
되어 그 십자가의 도를 거부하고 십자가의 원수로 이 땅에 착 달라붙어 있는 형국입니다.
첫댓글 아멘!
할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