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야, 니도 솔찮여.
남편은 전라도 해남이 고향이다. 어릴 때 상경해서 살다가 지금은 부산에 자리를 잡았다. 평소에는 표준말 쓰는 ‘서울사람’이라는 소리를 듣지만, 동향인을 만나면 대번에 “그 짝은 집이 워디요?”하며 고향 사투리를 구사한다. 사투리 농담은 희한하게 반복해도 웃겨서 우리집 단골 유머 레퍼토리다.
시어머님은 남편보다 고향말이 더 심하신데, 사투리에 오묘한 말투가 겹쳐져서 재미가 배가된다.
예전에 텔리비젼에서 프랑스 배우 브리짓 바르도가 한국의 '개고기 문화'를 강하게 비판한다는 뉴스를 보고 있었다.
(뉴스 엥커의 멘트) “한국의 개 식용 문화가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게 되면서...”
어머님은 혀를 차시며
“아야, 개를, 키우는 게 문제제, 먹는 게 뭣이 문제데?”
남편은 옆에서 수박을 먹다가 뿜을 뻔한 걸 겨우 참느라 사래가 걸렸다.
“엄마, 그 게 무슨 말이야? 하하”
“그라제, 안 그냐? 요즘 사람들 개를 아주 요로코롬 안고 유모차에 태우고 데리고 다님시롱 물고 빨고 하드만. 개는 개답게 키워야제, 나는 그 거이 더 이상혀야.”
한바탕 웃고 넘겼지만 여러 화두를 던지는 말씀이다.
한번은, 함께 TV 요리 프로그램을 보고 있을 때였다. 색색의 과일을 먹지도 못하게 그저 꾸미는 용으로 깎고 있었다.
(요리전문가) “플레이팅하실 때는 크리미함을 풍성하게 하시는 센스가 중요하거든요...”
(출연자) “어머나, 너무 예뻐요!”
어머님이 유심히 보시다가 또 한 방 멕이셨다.
“먹는 걸로 뭔 옘병이데?”
여자가 무슨 공부냐고 구박하는 집안 분위기에서 겨우 초등학교만 졸업한 어머님. ‘못 배웠지만’ 본질을 간파하는 통찰과 담백한 유머에 매번 감탄한다. 어머님 말씀에는 힘이 있다. 웃음 속에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을 짚어내는 힘.
말씀 뿐 아니라 어머님은 삶에서도 당신만의 힘이 있다. 특히 자식들과의 관계에서 전통적인 어머니 상(물론 이건 나의 주관적 생각이지만)과는 조금 다르다. 자식 걱정에 노심초사하는 헌신적인 모습보다는 자식 세대에게 중심 자리를 내 놓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그야말로 니들은 니들 인생 즐겁게 살고 나는 나대로 즐겁게 살겠다는 식이다.
“니들이 더 잘 알제 내가 알간디?” 하시면서 자신을 낮추신다. 자식이지만 성인으로 인정한다는, 자신이 스스로 선택하라는 뜻이 담겨있다. 어머님도 ‘그때는 참말로 어츠케 살었는지 모르도록 살었어.’라고 회상하는 고단한 젊은 날을 보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보상이나 ‘내가 어츠케 키웠는디..’하는 기대가 없다. 그저 그 시절 그래도 행복했고 그게 나의 소명이었다가 끝이다. 자식의 삶에 부모의 삶을 투영하지 않는다. 부모와 자식은 서로 사랑하지만 분명 다른 존재라는 ‘거리’가 있는 것이다.
나는 <아버지의 해방일지>에서 어머님과 닿아있는 통찰과 유머를 만났다. 그것은 아마도 한 세계에 몸을 담고 순수하게 세월을 쌓아온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닐까 싶다. 거기에 가족과 세상에 대한 따뜻한 애정이 담길 때만 가능한 그런 것. 나 역시 몸으로 쌓은 인생에서, 알뜰한 사랑에서 우러나는 ‘어른스러움’을 가진 어른이 되고 싶다.
마지막으로, 어머님 이야기다.
남편이 학력고사(지금의 수능)를 보고 집에 왔을 때, 어머님이 놀라며 물었다고 한다.
“오메, 너 오늘 뭘라 일찍 왔냐?”
남들은 수험장에 엿을 붙이고 108배를 한다 어쩐다 하는 마당에 어머님 참 대단하시다. 그야말로 쿨내 진동이다. 아이 삶과 부모의 삶을 분리하고 아이를 바라보며 묵묵히 내 길을 걸어가는, 하지만 유머를 놓지 않는 멋짐. 그런 어른이, 그런 부모가 나도 되고 싶다. 어머님께 이 말씀을 드리면 아마도 이렇게 말씀하실 것 같다.
“아야, 니도 솔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