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내가 종정한테 이런 부탁을 받았다. “아버지, 우리 도운이 삼변성도(三變成道)인데 상제님의 진리가 전개되어 온 과정을 우리 신도들에게 한번 교육시켜 주십시오.” 하는.
‘삼변성도, 삼변성도’ 하는데 우리 신도들은 이 종도사가 어려서부터 어떻게 해서 이 증산도를 개창을 해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나 하는 것도 알고 싶을 게다. 해서 내가 지금부터 참고로 그걸 좀 말해주려고 한다. 시간 때문에 체계적으로는 말을 못하고 대강 큰 줄거리만 말해줄 테니 들어봐라.
- 증산도의 삼변
여기 이 증산도 종도사는 왜 그런지 상제님 진리를 어려서부터 그렇게 잘 알았다.
이 종도사의 아버지가 보천교를 신앙하셨다. 조금 소급해서 말을 하면 우리 태모님이 상제님이 어천하신 뒤 두 번째 돌아오는 어천절 치성을 모시고 나서 혼절을 하셨다. 한참을 죽었다 깨어나시면서 이종동생인 차경석 성도를 보고서 뭐라고 말씀하시느냐 하면, “네가 누구냐?” 고 하신다. “차경석입니다.” 하니까 “그러면 네가 무슨 생이냐?” 하신다. 또 “경진생(庚辰生)입니다.” 하고 대답하니까 “너도 경진생, 나도 경진생인데 동갑장사 이 남는다더라. 네 생일이 언제냐?” 하신다. 다시 차경석 성도가 “6월 달입니다.” 하니까 “나는 3월 생일이니 파종, 낙종물, 씨나락 뿌리는 물을 맡고, 너는 이종물을 맡아라. 추수할 사람은 따로 있다.” 하는 말씀을 하신다.
3월 26일이 태모님의 성탄절이다.
그렇게 해서 태모님이 씨를 뿌리고, 차경석 성도가 이종을 했다. 그리고 추수하는 곳이 바로 여기 증산도다. 이 증산도 종도사는 추수하러 온 사람이다.
차경석 성도는 보천교 교주다. 그때 보천교 신도가 얼마였느냐 하면, 6백만이니 7백만이니 했다. 당시는 남한 북한, 남녀 다 합쳐서 조선 인구가 2천만도 안 됐을 때다. 보천교는 일본시대에 항일운동의 대표적인 기구였다.
그런데 병자(1936)년에 차 교주가 작고를 하고, 또 일러 전쟁 후 일본 사람들한테 해산명령을 당하고는 그 세력이 완전히 꺾여버렸다.
- 태상사부님의 일심 신앙
내가 어려서 부모님이 신앙하는 것을 지켜보면, 이 종도사의 아버지가 보천교를 아주 잘 믿으셨다. 우리 아버지가 학자로서 늘 문서를 잡고 계시는데 이렇게 곁에서 보면, 내 이름을 써서 의금을 내신다. 내 아명이 으뜸 원(元) 자에 흙 토 둘을 한 쌍토 규(圭) 자, 원규다. ‘안원규’ 라고 써서 의금을 내신다. 시민이라면 누구도 다 시민세를 내듯이 그때 보천교 신도의 위치에서는 의금을 냈다. 그때 내 이름으로 낸 의금이 1원이었는데 1원이면 아주 큰돈이다.
당시 우리 아버지가 그런 대로 농촌에서 잘 사셨다. 그때는 벼 백 섬이라도 하면 부자라고 했다. 부자로 사셨기 때문에 전국 보천교 간부들 중에 우리 집에 안 와본 사람이 아마 없을 것이다. 밤낮 할 것 없이 전국의 보천교 신도들이 우리 집에 모여서 상제님 천지공사보신 것, 또 보천교 운영하는 것 등 여러 가지 얘기를 밤새도록 한다.
나는 어른들 앞에서 무릎 딱 꿇고 앉아서 노냥 교리를 들었다. 그때 내가 깨졌다. 나이는 어렸어도 비판력도 있고 추구력도 있기 때문에 가만히 들어볼 때 ‘과연 참 옳구나. 이건 참 우주원리다. 이게 정법이다. 이것이 정도를 걷는 것이구나.’ 했다. 그래서 ‘후제에 내가 크면 이걸 꼭 마무리를 하겠다.’ 하는 생각을 가졌다.
- 세상일을 하기 위한 준비, 주유천하
그리고 하나 특별히 말해 줄 것은 내가 열두 살 먹어서의 일이다. 우리 아버지의 금고라고나 할까, 나무 궤짝이 있었는데 그 궤짝을 열어젖히면 책장마다 백 원짜리 금화가 잔뜩 들어 있다. 그때 백 원짜리 금화라고 하면, 지금 돈 백만 원보다도 더 가치가 있을 것이다.
내가 아버지 곁에서 뒹굴면서 그걸 봐둬서 잘 알았다. 어느 날 내가 그걸 몰래 꺼내 가지고서 집을 나왔다. 아니, 집을 나가겠다고 달라면 돈을 안 줄 것 아닌가. 하니까 몰래 꺼내는 수밖에 없다.
내가 서산 사람인데 그때 집을 나와서 인천으로 서울로 사두방으로 돌아다녔다. 여기 유성에도 왔다. 그때도 만년교가 있었는데 지금 바로 그 다리다. 열두 살 먹어서 만년교 다리를 걸어서 건너가고 건너오고 했다. 세상을 구경하느라고 그렇게 걸어서 다녔다.
주유천하를 하면서 오늘은 조선, 내일은 만주. 또 경우에 따라서는 중국도 갔다. 당시는 중국을 지나라고도 하고 북지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만리장성도 넘어 다니고, 갈 수 있는 데는 다 다녔다.
왜 그렇게 했느냐 하면 세상을 알아야 세상일을 할 것이 아닌가. 일본사람들 싸우는 꽁무니도 쫓아다니면서 나름대로 다 보았다. 눈치껏 의심 안 받게 남의 눈을 잘 피해서 다녔다.
당시는 낮 열두 시가 되면 묵도(默禱)라고 잠잘 묵 자, 빌 도 자, 묵도를 했다. 또 황국신민 서사라는 것도 했다. 그걸 안 하려고 낮 열두시만 되면 어디 가서 숨어버렸다.
또 일본 사람들이 우리나라 젊은 애들에게 각반 차고 국방복을 입게 했는데, 나는 각반도 안 차고, 옷도 이렇게 양복에 넥타이 매고 머리를 기르고서 다녔다.
그런데 내가 징용 영장을 한번 받았다. 집에 결혼을 하러 갔는데 그 틈을 타서 징용 영장이 나온 것이다. 그래서 내가 끌려가다 말고서 도망을 해버렸다. 그러면서 8.15 해방을 만났다.
- 천지공사로 성사된 8.15 해방
나는 상제님 진리를 알기 때문에 8.15 해방 되는 것도 미리 알고 있었다. 상제님 공사 중에 ‘칠월칠석삼오야 (七月七夕三五夜) 동지한식백오제(冬至寒食百五除)’라는 문구가 있다. 칠월칠석삼오야 라는 게 일본 사람이 두 손 드는 날이다. 음력으로는 칠월 칠석(七月七夕), 밤 야(夜) 자는 어조사다. 석 삼 자 하고 다섯 오 자 하면 3+5니까 여덟, 8월이다. 또 3, 5를 승하면 열다섯이다. 3·5, 15. 다섯을 세 번 하면 열다섯 아닌가. 그러니까 3, 5라는 글자가 8월 15일이 된다. 음력으로 칠월 칠석, 양력으로는 8월 15일에 두 손을 들었다.
그때 종정의 어머니를 더불고서 김포 대권면이라는 곳에서 함께 머물러 있었다. 혼자 돌아다니다 보니 강냉이 죽 밖에 먹을 수 없어서 할 수 없이 종정의 어머니를 올라오라고 했다. 대권면 대능리라고 하는 동네가 있는데 그 대권면에서 식량을 관리하는 사람이 자기가 식량을 대드릴 테니 거기 와서 살라고 한다. 그 사람이 나를 그렇게 좋아했다. 내 얘기를 듣느라고 떨어지지를 않는다. 그렇게 해서 그 사람에게 안식처를 제공받아 살다가 거기서 8.15를 맞이했다.
그러고서 상제님 사업을 해야 하니까 집으로 내려와 상제님 사업을 시작했다. 내가 우리 증산도 신도들에게 가끔 이런 말을 한다. ‘그때는 아무도 없고 나 혼자, 내 그림자하고 둘이서 지구촌에 세계가족을 건설한다 하고서 돌아 다녔다’ 하고. 다 바쳐서 신앙을 했다.
- 태상사부님의 죽음과 일본경찰의 전기고문
내가 어린 나이에 지켜보면 우리 아버지는 신앙을 참 일심으로 하셨다. 신앙은 그렇게 해야 한다. 아주 전부를 다 바쳐서 하루도 안 빼놓고 꼭 청수를 모시고 태을주를 읽으신다. 또 성대가 아주 기막히게 좋으신데 그 소리가 금성(金聲)이다. 성대에서 나는 소리도 금목수화토로 오행이 있다. 그런데 목소리 중에 금성은 아무리 소리를 질러야 쉬지도 않고 또 맑다. 그 목청으로 태을주를 읽으면 길 가던 사람도 멈춰 서서 듣는다. 진리는 모를망정, 주문 내용은 모를망정 ‘주문 읽는 소리가 과연 좋다.’하고 서서 듣는다.
그러다가 우리 아버지가 보천교에 성금을 많이 낸 것이 들통이 났다. 그때 상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운영 자금이 보천교에서 다 들어갔다. 보천교는 우리나라 민족운동을 한 대표적인 기구였다. 사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그게 들통이 나면 살아남을 수 없으니 누구도 다 죽음에까지 비밀을 그냥 갖고 가고 말지 발표를 않는다.
그런데 어떻게 그게 들통이 나서 우리 아버지가 일본 경찰한테 잡혀 들어가셨다. 거기서 매를 너무너무 맞아 의식 불명이 되셔서 내가 집으로 모셔왔는데 바로 돌아가셨다. 사람은 너무 많이 맞으면 아픈 줄도 모른다.
나는 자식으로서 사식도 태워 드려야 하고, 의복도 차입해 드리고, 요새 담요 같은 것도 갖다가 차입해 드려야 하니까 자꾸 쫓아다녔다. 그러다 고등계 순사한테 끌려가 전기고문도 몇 번 당했다. 그때 고등계는 헌병을 퇴임한 사람들이 고등계에 와 있었다. 전기고문은 당해본 사람만이 안다. 짜릿하면 그만이다. 정신을 잃는다. 전기고문 몇 번 당하면 정신력, 기억력도 반감해버린다. 그런데 그걸 당하고 나면 반항심으로 정신은 더욱 굳어진다.
- 제2변 부흥시대
그러고서 내가 8.15와 더불어 상제님 사업을 시작을 하는데 세상천지, 상제님 사업을 하는 사람이 나 말고 또 누가 있나. 독립사상가들하고 다니다가 거기서 따로 떨어져 나와 강증산 일을 한다고 하니, 세상에서 강증산을 누가 아는가. 거기다 ‘지구촌에 세계가족을 건설한다’고 하니 미친놈이라고 하지, 누가 성한 사람이라고 하겠는가. 또 상제님의 천지공사 얘기를 들어줄 사람이 어디 있나.
상제님의 천지공사는 100프로 귀신 얘기다. 백 날 천 날을 말해줘도 상제님의 천지공사를 집행하겠다는 사람, 신앙하겠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그래도 밤낮 할 것 없이 잠도 안 자가면서 몇 달 몇 해를 쫓아다녔다. 그런데 좀 알아들을 만큼 되면 자기가 하다 만 일이 있으니 그것 먼저 해놓고 신앙을 하겠다 한다. 그 사람이 제 할 일을 다 하려면 10년, 20년이 걸린다. 결론이 인간 세상일 다 하고서 한다고, 한가한 때 해보자고 한다.
하다하다 안 돼서 내가 우주변화원리를 알기 쉽게 도표로 그려서 내놓았다. 하늘땅이 생긴 이후로 그 도표가 내게서 처음 나온 것이다. 상제님 사업을 하기 위해서 내놓은 것이다. 그건 거짓이 없잖은가.
그러고는 내가 독이 올라서 어느 부락이고 가면 청년들을 다 모아놓고서 거기서 일장 연설을 했다. 그때 우리나라에 정당, 사회단체 그런 게 한 200개가 됐다. 그 쟁쟁한 사람들 속에서 내가 누구한테도 뒤지지를 않았다. 나보다 말을 잘한 사람이 없었고 더 강력한 사람도 없었다. 내가 달변가이면서 뱃심이 좋았다.
그래서 6.25 동란 직전까지 전국적으로 많은 신도를 규합을 했다. 그때는 셋 이상, 다섯만 모이면 빨갱이, 공산당이라고 잡아가고 그럴 때다. 그것을 나 혼자서 극복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경찰청장도 만났다.
그때 여기 충청도는 홍락구라고 하는 사람이 경찰청장이었는데 그 사람도 만났다. 내 나이 스물 대여섯 살에 아버지 비슷한 연령의 사람들과 자리를 만들고서 달변을 했다. 그네들을 진리로써 정복을 한 것이다. 그렇게 해가면서 일을 해냈다.
천안 같은 데는 역전에 신도들의 가구가 수백 호였다. 그곳 역부고 누구고 다 우리 신도였다. 온양온천 어디로 해서 다 그랬다. 거기는 기독교가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 자세한 얘기를 하려면 시간이 없어서 다 하지도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