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절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찬송하리로다 하는 말은 복 되신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감히 하나님을 복이라고 칭찬할 수 없으니 찬송을 드립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복이시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복의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이 복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옵니다.
에베소서는 복으로 시작되는 책입니다. 저주 멸망 심판은 아예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찬송하리로다’(유로게토스)는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누구에게? 바로 성도와 그리스도 안에 신실 곧 믿음의 사람들에게 주십니다.
만일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는 신을 찬양하면 그건 우상 숭배가 됩니다.
신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종교는 오직 기독교밖에 없습니다. 아들이신 그리스도가
우리 주가 되시므로 그 생명을 얻어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십니다. 아버지는
생명을 주시는 분입니다. 육신의 생명을 주시면 육신의 아버지이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의 생명을 주시니 하나님은 우리의 영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복 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겁니다.
잘못하면 별별 수식어를 붙여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아버지로 부르라고
허용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놀라운 복입니다. 행17:29절엔 하나님의
소생이라 하고, 약1:18절에는 진리의 말씀으로 낳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요일3:9절에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씨라고 말씀하십니다.
김씨 사람의 씨가 김씨가 되듯 하나님의 씨가 우리 속에 임하시므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게 되는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믿음 자체가 바로 복입니다.
성경에서 하찮은 말씀이 크게 보여야 합니다. 히브리인들에게는 그렇게
어렵고 무겁게 들리던 여호와를 우리가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겁니다(파테르)
마15장의 상 밑에 엎드려 있는 개 같은 수로보니게 여인에게도 생명의 양식을
은혜로 주시는 하나님이 아니신가요? 그 분이 바로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복 되신 하나님(유로게토스 호 데오스)을 믿고 고백하는 것 자체가 바로 찬송입니다.
우리에게 복 주시되(호 유로게사스 헤마스) 우리에게 복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에베소서는 교회에 관한 책인데 그 교회는 이미 복을 받았습니다.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입니다(엔 로기아 프뉴마티케) 다시 말하면 하늘적인 복입니다.
영계의 복이며 하늘에 속한 자들의 복입니다. 일부 사람들과 같이 복을 받아
잘 살자 하고 이렇게 나오면 벌써 해 아래의 복을 은근히 비치는 말이 됩니다.
어떤 이가 솔로몬이 전도서를 통해 헛되고 헛되다고 말한 내용을 반복하면서
자신은 복을 받아 행복하다고 말하는데 잠언적인 복이 아니라 해 아래의
것을 가지고 복을 받아 행복하고 잘 산다고 말하는 걸 봅니다. 복의 개념이
모호하여 듣는 이로 하여금 성경이 말씀하는 복을 왜곡하고 있는 겁니다.
성경에서 하늘은 공간의 개념이 아니라 차원의 개념입니다. 땅(세속)과
대칭되는 것이 바로 하늘입니다. 그래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로부터
오신다고 합니다. 지구는 둥근데 어느 하늘로 오실까요? 한국 쪽의 하늘일까,
저 반대편의 남미의 하늘일까 또 밤에 오신다고 하는데 지구의 한 쪽은 밤이지만
다른 한 쪽은 낮입니다. 그러므로 영이냐 육이냐의 말씀이지 육신의 세계가 아닙니다.
복의 경로는 말씀을 통해서 오는데 이 말씀은 글자나 소리만 아니라
그 말씀(호 로고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존재 자체이십니다.
말씀을 따라 성령을 통해 하늘이 우리에게 임하십니다. 천국으로 오십니다.
성령은 한 분이시지만 각 사람에게 오시는데 영적인 복이며 풍성한 복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하나와 둘이 같고, 하나와 억이 같습니다. 작게 오시든
크게 오시든 그 분은 언제나 무한대의 하나님이십니다.
4절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이제부터 신령한 복이 무엇인가를 설명합니다.
창세전(프로 카타보레스 코스무)이란 에덴동산 이전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창세전이라는 말은 창 1장 안에 들어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택하사는 불러내셨다는 뜻으로 에클레시아(교회)와 어근이 같습니다
4절의 말씀은 예정론의 핵심입니다.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택하셨습니다.
불러내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먼저 그리스도를 택하시고
그 다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자기 이름이 생명책에 있나 없나 궁금해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된 성도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우리 개인의 이름은 필요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 있으면 됩니다.
우리는 그 안에 참예만 하면 됩니다. 전체 그리스도인들의 집합체이신
그리스도만 우리에게 있으면 됩니다. 그리스도 자체가 바로 생명책입니다.
만물을 하나 되게 하심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들에 관한 말씀입니다.
단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복수의 성도들이 바로 하늘들 곧 천국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한 사람씩 불러내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포함 된
우리 전부를 불러내셨습니다. 롬8:1절은 바로 이 상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택하시고 그 다음에 창조하셨습니다. 바로 창세전입니다.
따라서 한 생명이 천하보다 더 귀한 것입니다. 천하보다 먼저 택하셨기 때문입니다.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하는 말씀은 그렇게 되게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신령한 복은 반드시 성령을 통해서 주어집니다. 곧 진리의 성령이십니다.
성령님은 거룩하시고 흠이 없습니다. 언제나 구원은 현재 진행 수동으로 되어 집니다.
불완전함에서 완전함으로 되게 하시려고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택하셨습니다.
종국적인 구원은 주님의 책임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지이십니다(빌1:6)
그 분 앞에, 사랑 안에서라는 이 말씀이 바로 우리의 가능성입니다.
에베소 안에 있는 성도와 믿음의 사람들이란 객관적인 판단에 의한 존재들입니다.
교회에서 흔하게 성도라고 부르듯이 말입니다. 예컨대 노아는 당대에 흠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는 다른 사람들의 평가입니다.
그러나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는 완성적인 차원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 일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보장은 먼저는 사랑 안에서입니다. 그 다음엔
그 앞에 곧 그 분의 눈앞에서, 여호와 이레로 그 분의 뜻을 이루십니다.
따라서 감히 마귀가 손을 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신령한 복은 일부 기독교가 말하듯 여기 있다 가져가서 알아서
먹으라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자기의 형상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존재의 변화입니다. 만약 이 복이 없는 사람이 무엇을 잔뜩 소유 하고 있다가
그걸 다 쓰고 나면 쫄딱 망한 거지가 됩니다. 그야말로 헛되고 헛됩니다.
그러나 복이 있는 사람은 어디서나 야곱과 요셉처럼 형통합니다. 야곱이
거지꼴이면서 바로 왕을 축복했고 요셉은 애굽의 궁중 감옥에서도 형통했습니다.
5절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예정은 한정의 의미입니다. 아들이 되어 상속자의 특권이 있는 양자를
삼기 위한 예정입니다. 요즘 같은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을 상속한다는 말이
실감이 나지 않을 수도 있으나 이건 대단한 일입니다. 로마서 8장을 잘 보세요.
자기의 아들들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함께 포함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동선과 그의 상속권이 다 내 것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다는 말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믿음을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그 분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 되어 그 분을 상속을 받는데 까지 이르게 된다고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 안에서 그 분과 하나가 되어 그 분의 수준에 이르게 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에 관한 이 말씀을 그냥 받아들여야 합니다(롬10:17)
만약 우리가 그 분과 분리되면 우리는 심판의 대상입니다(요15장)
몸이 하나라는 것은 우리의 몸의 세포가 60조가 넘는데 폭탄으로
산산히 다 흩어져도 조직검사를 해 보면 다 같은 하나입니다.
우리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 분의 아들들이 되게 하여 그 분을 상속 받는데
이르도록 하시는 일을 그 분의 기쁘신 뜻, 곧 가장 좋은 뜻을 따라 예정하셨습니다.
6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찬양(에이스 에파이논)은 구원의 결과로 하나님께 드려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찬양은 쥐어 짜내는 것이 아니라 구원 받은 결과로 나타납니다.
그의 은혜와 영광을 찬양하는데, 사랑하시는 다시 말해서 사랑을 받으신 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저 주시는 바 그 은혜와 영광입니다.
만약 자기의 아버지를 돈 벌이만 하는 분으로 생각하면 아버지는 언제나
별 가치가 없어 보일 겁니다. 잘못하면 기독교가 하나님을 이렇게 만들고 맙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무엇을 받아서 고마운 것이 아니라
그 분이 우리에게 계시는 그 자체로 감사하고 고마운 분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그 분을 찬양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따라서 구원받은 증거는 바로 찬송으로 나타나는 겁니다(계7,14장)
계7장, 14장, 21장은 우리가 들어가려고 노력하는 게 아니라 말씀을 듣고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로서 성령으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하나님 아버지를 찬양하게 되면 그 안에 내가 있는 것이 보이는 겁니다.
첫댓글 아멘! 아멘!!
그리스도 안에서 거저 주시는 은혜와 영광을 할렐루야!
아멘!
은혜와 평강이 충만하시길 할렐루야!
아멘~~~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