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관 쓰시는 그리스도 (1772)
조반니 도메니코 티에폴로
조반니 도메니코 티에폴로(Giovanni Domenico Tiepolo, 1727-1804)는
1727년에 18세기 이탈리아 로코코의 대가인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Giovanni Battista Tiepolo)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762년에 아버지와 동생 로렌초(Lorenzo Tiepolo, 1736–1776)와 함께
스페인 마드리드에 도착해 카를 3세의 새 왕궁의 천장 프레스코를 장식했다.
도메니코는 1770년에 아버지가 마드리드에서 선종하자 베네치아로 돌아갔지만,
동생 로렌초가 그곳에 머물렀기에 동생을 통해 작품을 계속 주문받을 수 있었다.
그가 1772년에 그린 <가시관 쓰시는 그리스도>는
마드리드에 있는 성 필립보 네리 재속형제회인 오라토리오회의 주문을 받아 그린
8개의 십자가의 길 연작 중 한 장면으로,
왼쪽 벽에는 <겟세마니 동산에서의 고뇌>, <가시관 쓰시는 그리스도>,
<매 맞으시는 그리스도>, <십자가 지시는 그리스도>가 있고,
오른쪽 벽에는 <옷 벗김 당하시는 그리스도>,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그리스도>,
<십자가에서 내려지시는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매장>이 달려 있었다.
8개의 작품은 1772년 8월 31일에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 광장에서
공개적으로 발표했는데, 이는 작품이 도시를 떠나야 할 때 거행하는 관행이었다.
도메니코는 사람들이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면서
이 그림들을 보는 시선의 각도를 고려해서
사선 원근법을 적용하기 위해 인물의 비율을 약간 왜곡했다.
지금은 프라도 미술관에 있는 이 작품은 마르코복음 15장 16-20절이 그 배경이다.
군사들은 예수님을 뜰 안으로 끌고 갔다.
그곳은 총독 관저였다.
그들은 온 부대를 집합시킨 다음,
그분께 자주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머리에 씌우고서는,
‘유다인들의 임금님, 만세!’ 하며 인사하기 시작하였다.
또 갈대로 그분의 머리를 때리고 침을 뱉고서는,
무릎을 꿇고 엎드려 예수님께 절하였다.
그렇게 예수님을 조롱하고 나서 자주색 옷을 벗기고 그분의 겉옷을 입혔다.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러 끌고 나갔다.(마르 15,16-20)
예수님께서 가시관 쓰는 곳은 총독 관저 뜰 안이다.
배경에 아치형 문과 대리석으로 장식된 옥상이 있고,
오른쪽 벽에는 티베리우스 황제의 흉상이 있으며,
그 앞에 S.P.라고 쓰인 노란색 로마군단 깃발이 있다.
예수님의 공생활 시기가 티베리우스 황제의 재위 시기였기 때문이고,
S.P.Q.R.은 라틴어 문구 ‘로마 원로원과 시민들’(Senātus Populusque Rōmānus)
의 줄임말로 고대 로마 시대 로마 공화국 정부를 일컫는 표현인데,
그 당시 유다인들은 로마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이다.
티에폴로의 역사적 고증 능력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 한가운데 앉아있고,
어깨에는 진홍색 외투를 두르고 있으며, 손에는 갈대를 들고 있다.
쇠로 된 장갑을 낀 군사는 예수님의 머리에 가시관을 씌우고 있는데,
예수님의 머리에서는 선혈이 하염없이 흐르고 있다.
다른 군사는 갈대로 그분의 머리를 때리려 하고,
푸른 옷을 입은 군사는 손가락질하며 예수님을 조롱하고 있다.
예수님 주변에는 군사들이 고문하고 조롱하는 것을 지켜보는 로마 장교와
예수님을 고발한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와 유다인들이
이 광경을 구경꾼처럼 바라보고 있다.
도메니코의 의도는 각 표현을 하나의 상징으로 변환하여
하느님의 아들에게 부과된 희생을 강조해서 묘사했다.
그래서 그가 묘사하는 거의 모든 인물은 서정적인 몸짓을 피하면서
폭력적이고 극적인 움직임으로 예수님의 육체적 고통을 깊이 묵상하게 하고 있다.
그렇기에 이 작품을 보면 예수님의 육체적 고통뿐만 아니라
그분께서 고통을 견디기 위해 체념한 듯한 느낌을 받게 한다.
이런 극적인 분위기를 완성하기 위해
도메니코는 모든 기술과 표현 재료를 결합했는데,
예수님의 몸을 창백한 대리석처럼 묘사한 것도 한 가지 방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