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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은 기쁨 비유
누가복음 15장 1-7절 / 1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2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3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4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5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6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7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누가복음 15장은 세 가지 비유가 예수님에 의해서 말씀되고 있습니다. (1)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은 기쁨 비유 또는 양 일백 마리 비유(1-7절) (2)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찾은 기쁨 비유 또는 열 드라크마 비유(8- 10절) (3) 잃었던 한 아들을 찾은 기쁨 비유 또는 두 아들 비유(11-32절)입니다. 이 세 비유 중에서 첫 번째 비유인‘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은 기쁨 비유 또는 양 일백 마리 비유’는 마태복음 18장 12-14절에서도 기록되고 있습니다만, 두 번째 비유인‘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찾은 기쁨 비유 또는 열 드라크마 비유’와 세 번째 비유인‘잃었던 한 아들을 찾은 기쁨 비유 또는 두 아들 비유’는 다른 복음서에는 기록되지 않은 오직 누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은 가까이는 앞서의 14장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어느 한 안식일에 한 바리새인의 식사 초대를 받아 그 집에 들어가셨을 때 마침 그 자리에 있던 수종병을 앓아 고생하는 자를 고치실 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안식일에 사단의 매임에서 풀어 생명을 구원하며 그 생명을 보전해 나가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일을 이야기 해주시면서, 또한 그 자리에 식사 초대를 받아 참석한 사람들에게는 잔치의 윗자리에 앉지 말고 아랫자리에 앉을 것과 주인에게는 식사 초대를 할 때는 그에 대한 아무런 갚을 힘이 없는 사람들을 초대할 것을 통하여 각각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도리를 가르치시는 말씀을 주셨었습니다.
그리고 예수와 함께 식탁에 앉아 있던 한 사람이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듣고는“하나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이 있겠습니다.”라고 말할 때‘큰 잔칫집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의 청함을 받음에 있으나 이보다 자기들이 소유한 밭과 소와 가정이 더 큰 기쁨으로 있어 하나님의 나라 잔치의 떡을 먹는 것이 거부에 있는 자들은 한 사람도 하나님의 나라 잔치 떡을 먹는 기쁨에 있지 못할 것이며, 하나님 나라 잔치에로의 부르심을 받을 때 이것보다 더 우선하여 내세울 기쁨이 되는 것이 없는, 그래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 따름으로써 오직 이 기쁨에 있는 자들이 하나님 나라 잔치의 떡을 먹을 것임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들이 어떤 자들인지를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름에서 자기 부모나 처자식이나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이며, 자기 목숨보다도 더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그것은 자기들이 소유한 그 모두를 사랑하는 것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 것이 상위 개념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밭과 소, 그리고 자기 부모나 처자식이나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그 가치는 그 모두를 아무리 소중히 여기며 존귀히 여겨도 그것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얻기 위해서는 부인[부정]에 있어야 할 것에 있습니다.‘망대 비유’와‘한 임금이 치르는 전쟁 비유’에서 말씀되고 있듯이 모든 비용을 들여서라도 건축해야 할 성읍이요 이를 지키는 망대에서 보며, 한 나라의 임금은 1만의 군사로 2만의 적군을 상대하는 것에서 보듯이 자기의 목숨까지도 버리는 자기 부인에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는 밭이나 소, 그리고 자기 부모나 처자식이나 형제자매가 지니지 못한, 이것으로서는 비교할 수 없는 더욱 더 큰 가치를 지니고 있는 존귀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밭이나 소, 그리고 자기 부모나 처자식이나 형제자매가 지니지 못한 더 큰 가치인 영원함과 그 영원함에 있는 생명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지 않고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할 수 있다면 밭과 소와 그리고 부모와 처자식과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것에 머무는 것으로도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는 그 모두에서는 결코 볼 수가 없습니다. 그것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모두를 팔고 거기에서 떠나서라도 소유해야 할 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유대와 인근 지역 온 땅을 다니며 구속 사역을 활동하던 당시에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나라를 보는 자는“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을 따라 나서기 위하여서는 자기가 소유한 모든 것에서 떠나야만 했습니다. 그렇지 않는 한에는 자기가 소유한 것이 주는 기쁨에 머물고 있지, 하나님 나라 잔치의 떡을 먹는 기쁨은 결코 맛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맛을 잃은(지니지 않은) 소금 비유’를 들어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지 못하는 자가 겪을 운명을 말씀하십니다. 맛을 지니지 않은 소금은 흙으로도 거름으로도 쓰지를 못해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으므로 집 밖의 사람들이 다니는 길에로 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힐 뿐이듯이 그렇게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음에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서 예수께서는 자신을 찾아 나와 예수님이 전하시는 말씀을 들으려고 하는 당시 멸시를 받는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자리를 하고 식사를 하시곤 하셨는데, 이러한 예수님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비난하며 빈정거렸습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당시 유대인들이 일상생활에서 사용하고 있는 친숙한 것인 세 가지를 비유로 들어서 잃었던 것을 찾은 기쁨을 말씀하심으로 자신이 무엇 때문에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하는지에 대하여 알게 해 주십니다. 본문은 이 세 가지 비유 중에서 첫 번째 비유인‘일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은 기쁨 비유’입니다. 이 비유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은‘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은 기쁨 비유’라고도 할 수 있고‘양 일백 마리 비유’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가지고 비유로 들고 있는 것과 똑같은 내용의 글을 마태복음 18장 10-14절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이 두 곳에 비유되고 있는 내용의 전개는 서로 같지만, 그러나 각각의 비유는 서로 다른 배경에서 말씀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의 경우는 앞에서 설명하였듯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자리를 같이하고 식사 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며 이를 빈정거리는 것을 예수께서 보시고는 그들에게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와 함께 함으로 하나님께로 돌아왔을 때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는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아흔 아홉보다 더 기뻐하신다는 이야기를 해 주시는 것을 통해서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며 회개할 필요를 갖지 않는 바리새인 및 서기관과 대조시킴으로써 하나님이 보내신 구주이신 예수님을 대하면서도 하나님께로 돌아옴에 있지 않은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부끄러움을 당함에 있게 하십니다.
반면에 마태복음의 경우는 마태복음 18장 1-9절에서 하시고 있는 말씀에 이어지고 있는 것인데, 제자들이 예수께 와서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자 - 위대한 사람 - 일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어린아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고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어린아이와 같을 것이라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죄에서 돌아서서 하나님께로 돌아온 사람은, 그래서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가장 큰 자라고 하는 사실을 말씀해 주시면서“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뵘에 있을 것”(마 18:10)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누가 더 크고 또한 누가 더 낮은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모두 다 같이 큰 동일한 자라고 하는 것을 알게 해 주십니다. 그러한 것에서 예수님은 그 누구도 작은 자(소자)라고 하여서 업신여기지 말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예수님의 곁에 있는 소자, 그러니까 예수님을 따르는 믿음에 있는 제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제자들 간에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누가 더 큰 자가 될 것인가 하는 일로 비방하고 멸시하여 실족하게 하는 악한 죄에 있어서는 안 될 것임을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죄로 지옥에 들어가게 될 것이니, 차라리 그들의 손이나 발 등 신체의 일부를 잘라내어 한 손이나 한 발로 있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 훨씬 더 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에 대한 이해를 시켜주기 위해서 양 일백 마리를 가지고‘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은 기쁨 비유’를 말씀하시는 것에서 예수께 나아옴에 의하여 하나님의 찾으심에 있는 그 누구도 업신여기지 말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들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항상 뵘에 있을 자들입니다.“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마 18:10)에서 보게 되는 대로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주님의 아버지를 항상 뵙고 있으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이 그렇다면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겨 따르는 제자들은 어떻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수종드는 천사가 하나님의 얼굴을 항상 뵙는다면 주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과 함께 항상 사는 예수님의 제자들은 항상 하나님 아버지를 뵘에 있을 것이 강조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에서 각각 같은 내용으로 비유가 되고 있을지라도, 그 각각의 비유들을 말씀해 주시고 있는 배경이 다른 서로 다른 비유인 것을 이해하고, 각각의 비유에서 말씀해 주시고 있는 예수님의 의도를 파악하고 이를 알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서로 다른 의미를 지닌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둘을 같은 것으로 보고서 각각의 본문이 지닌 의도와는 다른 의미에서 해석하고 설명함으로써 예수님이 전하고자 하신 의도와는 다른 의미를 전하는 잘못을 하게 되어서, 성도들로 하여금 본문에서 전해주시는 것과는 다르게 이해하고 알게 함으로써 본문을 오해하는 잘못에 있게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누가복음에서 예수께서 말씀해 주시고 있는‘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은 기쁨’을 말씀해 주시고 있는 비유의 내용을 보겠습니다. 일반적으로는‘양 일백마리 비유’로 말해지고 있는 이 비유를 가지고 대체적으로는‘구령 전도 사업’으로 설명해 나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구원하러 오셨다며, 양 일백 마리 중에서 한 마리의 양이 길을 잃고 헤맬 때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들에 놔둔 채 한 마리의 잃은 양을 외면하지 않고 끝까지 찾으신 것처럼 하신다는 것으로 말입니다.
말은 맞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택한 백성 모두를 다 찾으십니다. 단 한 사람도 잃어버림이 되지 않게 말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충만수를 채우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하심에 있는 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하나님이 주신 복음인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여 온 세상에 있는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을 찾아 하나님의 구원에로 부르는 전도 사역에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본문의 비유를 가지고서 하나님께서 그처럼 단 한 사람도 잃어버림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 모두 다 찾으시는 일을 하시니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모두 영혼을 구원하는 전도를 하는 구령사업에 열심히 해야 한다는 것을 설명해 나가기 위해 적용하는 것으로 삼을 수 있기는 합니다만, 마태복음의 경우에서와 같이 본문의 내용의 의도 또한 그러한 것에서가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한 사람의 영혼을 귀중히 보고 소홀히 하지 말라며 그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전도하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될 것이니 더욱 열심을 내어 구령사업을 해나가자 라고 하는 것을 촉구하시는 것에서 이 비유의 말씀을 하시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촉구를 하는 의도를 이해하며, 그 의중을 좋게 봅니다만, 우리가 본문을 대하면서 갖는 자세는 본문이 지닌 의미를 제대로 올바르게 이해하고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의 의미를 잘 알고 있는 것에서 한 사람의 영혼을 소중히 여기며 그 영혼을 찾는 전도에 힘을 쏟자고 해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본문에서 해주시고 있는 비유의 내용을 보도록 합니다.
예수께서 가시는 길에는 큰 군중이 따랐으며(14:25), 이들 중에는 종종 세리들과 죄인들이 있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예수께 나온 것은 예수님이 전하시는 말씀을 듣고자 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세리들과 죄인들이 오면 이들과도 함께 하며 자리를 같이 하여 음식을 같이 드시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두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서로 수군거리며 말하기를, "이 사람이 죄인들을 맞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그들이 어떤 생각에 있는지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다음의 한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가운데서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는데, 그 가운데서 한 마리를 잃으면 어찌하겠느냐?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을 때까지 온 들판을 찾아다니지 않겠느냐? 그러다가 마침내 잃어버린 양을 찾으면, 기뻐하면서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친구들과 이웃 사람을 불러 모으고“여러분 모두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하고 말할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하나님께로 돌아온 죄인 한 사람을 두고 기뻐할 것이다.”이 비유에서 예수께서 말씀해 주시고 있는 초점이 되는 핵심은 하나님께서는 회개한 죄인 한 사람, 곧 하나님께로 돌아온 죄인 한 사람을 크게 기뻐한다는 것에 있습니다.
예수께서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게 된 시작은 예수께서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하며 그들과 음식을 드시는 것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문제 삼는 것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하며 그들과 음식을 먹는 것이 어떤 것이기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이것을 문제 삼으며 예수님을 비난하는 것인지요. 여기서의‘모든 세리와 죄인들’을 개역성경(또는 개역개정성경)처럼 다른 한글번역성경들도 동일한 번역의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현대어성경은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붙여‘부정직한 세리들과 소문난 죄인들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이 이들과 자리를 함께 하며 음식을 같이 먹는 것을 비난하며 빈정거리는 투로 멸시하는지를 보다 잘 알 수 있게 해 주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예수께 나온‘모든 세리’, 곧‘세리들’은 백성이 내는 세금을 다루는 세무원을 이르는 것인데, 이들을 부정직한 세리라고 표현한 것은 정당한 세금 징수를 벗어나서 백성의 원망을 사는 일을 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리가 부정직했다는 것은 적정 수준을 벗어나 그 이상의 과도한 세금을 징수했다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금 징수하는 것을 통해서 세리가 자신의 배를 불리는 부정축재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이러한 세리를 좋지 않은 나쁜 자로 보았는데, 곧 부정한 자로 인식했습니다. 그리고‘죄인들’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비롯해서 온 유대인들에게 비난을 살만한 악한 행동을 하는 것에 있어 이를 비난하는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있는 사람들을 말합니다.‘모든 세리들과 죄인들’이 이러한 자들이지만, 이들이 예수님에게 나와 예수님이 전하시는 말씀을 들으려고 할 때 이들을 받아 함께 하며 음식을 같이 드시곤 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두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세리들과 죄인들의 친구라고 하면서 좋지 않게 보고 비난하였습니다(참조. 눅 7:34).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과는 달리 세리들과 죄인들을 가까이 하지 않고 그들과는 음식을 같이 먹지 않는 것은 모세의 율법 아래 있어온 조상 때부터 오랫동안 정결과 불결의 규례를 따라온 삶의 방식 때문입니다. 부정한 것에 함께 하는 자는 그 또한 부정하며, 따라서 불결하게 될 것에 있을 것이었기 때문입니다(레 11-15장). 그러나 이 규례는 속죄제물 규례(레위 10:16-20)를 통해서 그 모든 허물을 가리시고 거룩하게 하실 하나님의 용서를 받게 하실 것에서 약속으로 주시고 있는 속죄주에 대한 약속에 있게 하시는 것(레 16-27장)에 의해서“내가 깨끗하게 하였다.”(행 10:15) 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하시는 것으로 그동안 가져오고 지켜오게 하신 목적을 온전히 이룰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부정한 것을 정결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유대인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이방인에게로 확대되고 확장되어서 이방인에게서 말해져왔던 부정의 이미지를 벗겨내십니다. 그래서 더 이상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의 구분이 없게 하십니다.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의 더러움이 말해질 수 없도록 이방인의 더러움을 볼 수 없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를 율법의 언약을 통해서 예언해 주셨으며, 그 예언하신 대로 속죄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셔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성취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러한 속죄주이신 그리스도이시기에 예수님은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하며 그들과 음식도 같이 드셨습니다. 세리들과 죄인들도 예수님을 따름에 있을 때 이들은 더 이상 부정한 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한 이들은 예수님에게 있는 하나님의 의를 입음에 있음으로 인해서 정한 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신이 함께 하는 이 세리들과 죄인들이 어떠한 자일 것인지를 알게 해주시기 위해서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부정한 자로 취급하는 율법의 규정에 매여 있어 이들이 하는 일과 행동에서 그대로 나타내 보인 대로 악한 죄에 의하여 율법이 정한 그 댓가를 하나님의 심판으로 받을 것에 있지만, 이런 자들일지라도 이들이 그리스도이신 예수께로 나옴에 의해서 하나님이 찾으신 자가 되었을 때 이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심판에 있는 죄인들이 아니라 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는 회개에 있는 자들로서, 자신들을‘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아흔 아홉’으로 여기고 있는 자들인 바리새인이나 서기관과 놓고 볼 때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누구를 더 기뻐하시겠느냐는 것을 알게 해주십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해 주셨습니다.“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 15:7))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이러한 말씀을 하시는 것을 통해서 자신들을 의로운 자라고 여기며 세리들과 죄인들을 멸시하고 또한 이들과 가까이 하는 예수님을 비방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부끄러움에 있게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오는‘하나님의 의’를 거부하고 사람들의 손으로 만든 계명을 지키는 장로들의 전통을 따름에서‘사람의 의’를 좇는 이들이야말로‘맛을 잃은 소금 비유’에서 알려주시고 있는 사람들이 다니는 밖에 버려져 사람들의 발에 밟힐 뿐일 것이며(14:34-35), 뒤에 말씀하실‘한 부자와 병든 거지 나사로 비유’에서 알려주시고 있듯이 아브라함과 함께 주의 나라에 있지 못하고 음부에서 불 가운데서 고통 중에 있을 것(16:19-31)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자신들이 당할 부끄러움조차도 전혀 느끼지도 알지도 못하는 완악한 마음에로 버려져 있었습니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은 기쁨 비유’에서 말씀해 주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쁨은“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에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에게서 떠나 있는 죄에 있는 자기 백성을 하나님께로 돌아옴에 있게 하는 회개에 있게 하십니다. 하나님에게서 마음이 멀어져 있어 하나님을 공경함이 없는 자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옴에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회개에 있게 하실 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기쁘신 뜻이기에 그 뜻대로 죄인한 사람이 회개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런데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아흔 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아흔 아홉에 대해 가지고 계신 기쁨보다 더 클 것이라는 것에서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여기에서‘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이란 표현은‘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이란 것으로 자칭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면서 회개할 필요를 갖지 않는 사람들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지칭합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을 회개케 하기 위하여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구주이신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며 가르치며 이적을 행함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아보지 못하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회개할 것이 없다며 의인인양 여기는 자들을 예수님은 아흔 아홉 마리의 양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과 대조하여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고 있는 것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는‘~보다~에 관한 기쁨’또는‘~보다~에 관한 더한 기쁨’을 뜻합니다. 이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사람들의 손으로 만든 계명인 장로들의 유전을 좇는 것에서 의로움을 갖는 것보다 하나님의 계명을 좇아 여기에 계시하신 메사야를 통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예수께서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하는 것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목적인 죄인이 하나님께로 돌아옴에 있는 회개에 있게 하시는 것이란 사실을 알게 해 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함에서 하나님이 가지시는 기쁨은 세 번째 비유인‘잃었던 아들을 찾은 기쁨 비유’에서 보게 되는 것인“잃었던 내 아들을 찾았다.”는 것이요“죽은 줄 알았던 네 동생이 살아서 돌아왔다.”는 것입니다(15:32).
이것에 의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이 내 아들은 잃었다가 다시 찾았다.”하는 하나님의 기쁨이며,“죽은 줄 알았던 네 동생이 살아서 돌아왔다.”며 벗과 이웃들을 불러 잔치를 벌이는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쁨의 이유로는 오직 이것 외에는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가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받아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생하기에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이렇게 되는 것이 하나님이 창세 전에 정하신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가지신 뜻대로 이루심에 하나님은 큰 기쁨에 계십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이유가 이것 외에 또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가지신 이 기쁘신 뜻에 의해서“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에 있는‘잃어버림에 있던 한 마리의 양’이 하나님이 정하신 구원의 충만수로 채움에 있는‘하나님의 양떼 우리’속에 들어와 있어 하나님이 생명을 보호하고 살피시는 크신 자비를 입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찾으신, 잃었던 한 사람 한 사람을 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죽었다가 다시 살림을 받은, 그렇게 하나님이 찾으신, 한 사람 한 사람을 대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모여진 것이 주님의 교회입니다. 우리는 이를 날마다 겪으며, 또한 매주 겪고 있습니다. 우리가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사는 옛사람의 특성에 의해서 늘상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의 소욕을 거역함으로 찬송가의 가사처럼“멀리 멀리 갔더니 처량하고 곤하며”(387장. 통 440)에 있으며,“목자 없는 양 같이”(마 9:36)있음을 인하여 불쌍함에 있는데, 하나님의 찾으심에 있는 성령의 권능이 그 마음을 돌이키게 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옴에 있게 하십니다. 그 마음을 육체의 소욕이 요동치는 속에서도 지속해 나가며, 또한 이런 자들인 우리가 만남의 광장을 매주 가져 나감은 하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에서 있습니다. 이 만남에 있는 자들이 할 말이 많은 이야기를 들으십시오. 이들이 한결같이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을 들으십시오. 그리고 그 모든 이야기에 있는 결론은 한결같이 하나의 사실에 있는 것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자신은 자기 마음대로 살았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신을 다시 이 자리로 되돌려 놓았다며, 그래서 오늘도 주님의 몸인 교회를 통해서 그리스도이신 주 예수님을 바라봄에 있는 믿음의 형제자매들과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