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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수중(羅漢睡中)-1통권 98
라혼은 생(生)과 사(死)의 중간에 자리한 무의식의 공간에서 하릴없이 부유했다. 이미 몸의 모든 감각 기관은 정지되어 있어 고통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 라혼에게 두 반려자(伴侶者)가 말을 걸었다. 바로 영룡(永龍) 이터너디 드래곤(Eternity dragon)과 세계수(世界樹) 이그드라실(Yggdrasil), 라혼이 죽는 그 순간까지 진정 함께할 존재들….
―후후후, 어이가 없군. 신의 힘을 가진 네가 인간의 손에 만신창이가 되다니….
―나도 어이없다. 하지만 지금 나는 고무되어 있어.
―뭐? 인간의 의지와 능력 말인가?
―그래.
―그래봐야, 별반 큰 도움 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건 그렇지. 하지만 마지막 순간의 위협적인 공격은 내게 영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후, 심검(心劍) 말인가?
―그래. 절대자라 칭송받는 소수의 인간은 그것을 사용한다. 그렇다는 것은 나는 혼자 싸울 필요가 없다는 뜻이지….
―확실히 심검은 대단했다. 내가 느끼는 것은 우리도 느끼니까. 하지만 아무래도 넌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
―뭘?
―그것은 가르쳐줄 순 없다. 하지만 한 가지 충고를 해두지. 지금 이 세계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라 용이다. 네가 이 세계의 모든 용과 싸워서 이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가?
―…?
라혼은 생각했다. 자신의 힘으로 전 세계의 모든 드래곤들을 죽일 수 있을까?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지금 자신의 힘은 드래곤 한두 마리쯤은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드래곤은 지극히 독선적이며 독자적이라 하나씩 찾아가 각개격파(各個擊破)한다면 어렵지 않게 멸종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을 모두 한꺼번에 상대한다면? 마나 동결 결계가 드래곤에게 먹힌다면 질 이유가 없다. 그러나 결론은 해봐야 안다는 것이다.
―그보다 너는 이만 쉬는 것이 어때? 네 영혼이 타격받았으니 한 1백년 정도 잠들어 있는 것이?
―싫어, 시간이 지난다고 영혼에 타격받은 것이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이미 알고 있어.
―뭐, 할 수 없지. 몸의 주인은 바로 너니까!
라혼은 영룡과 세계수의 목소리 속에 어떤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죽는 순간까지 같은 영혼인 그들에게 몸의 소유는 의미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라혼은 생사의 중간 무의식의 세계에서 다시금 깊은 사색에 들어갔다.
***
주군이 시체나 다름없는 상태로 있은 지 사흘이다. 고학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며 주군이 없는 앞으로의 일을 생각했다. 그러나 주군이 없는 앞일은 도저히 예측할 수가 없었다. 주군의 목적은 그저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힘을 가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백호인 주모의 신분을 당당히 밝히는 것이 바로 주군이 목적한 바였다. 그러나 그것을 대의(大義)로 삼기엔 문제가 있었다. 지금까지는 그저 주군이기에 주군의 등을 보고 따랐던 것뿐이었다. 그러니 주군이 없는 상황에서의 일은 상상조차 할 수가 없는 지경에 빠진 것이다.
‘허허, 이거 참! 백호영은 그 출신이 자유로운 강호인들. 주군이 없어지면 태반이 떨어져 나갈 할 것이고, 토금전장 또한 주군과 손을 잡고 있는 듯하나 주군이 없는 상황에서라면 어떻게 할지 알 수가 없다. 열지족 추장을 비롯한 남례성의 진토인들은 당장 떨어져 나갈 것이고, 남례성은 다시 봉기가 일어난다. 이젠 손에 질 좋은 무기가 들려 있고 병법을 알았으니 더욱 조직적인 반란을 할 것인데….’
고학은 하나부터 열까지 따져봐도 이렇다 할 해결책이 서질 않자 답답한 마음에 방을 나섰다.
‘이렇게 된 이상 믿을 것은 오직 주모(主母)뿐인데….’
주군인 백호나한의 부재라는 가정하에 세력의 절반 이상이 떨어져 나갈 것이고, 남은 것은 주모가 직접 맡아 건설하는 북지성의 태회진(泰回陣)과 이익이 보장된 이상 토금전장이 남을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주모인 설화는 정체가 백호인 까닭에 아무래도 그것이 버거웠다.
“고 대인, 주모가 왔어요.”
“흑사께서 연락했다는 말은 들었는데 벌써 도착하신 모양이군.”
어떻게 수십만 리 밖 북지성 태회진에서 단 사흘 만에 멀고 먼 남례성까지 올 수 있었는지 모르나 이미 흑사에게 수삼 일 내에 도착할 것이라는 언질을 받은 터라 일단 그 궁금함을 접어두었다. 남례성 한구석에 처박혀 원주 중경의 토금전장은 물론 북지성 태회진의 사람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정도인 만큼 멀고 먼 거리를 한달음에 달려올 수도 있겠거니 생각했다.
***
사흘 전 백호나한의 목숨을 노린 사건으로 인하여 금영월의 명에 따라 봉수성의 모든 성문을 걸어 잠그고 서해수군 소속이 된 군사들이 잔당을 수색한다는 명분으로 봉수성 내의 모든 통행을 통제했다. 또한 감곡에서 조련되어 이번 열병식 때 선보일 예정이었던 노예 부대가 성문을 장악해 만약의 사태에 대비했다. 외부와 출입이 철저히 통제되는 봉수성에 홍의홍발의 미녀와 백의소녀가 도착했다.
“문을 열어라!”
그리고 노예 부대를 지휘하며 주모가 온다는 소식을 미리 들은 백호영 십장(什長) 오언(吳彦)은 문을 열게 했다. 원주 상경 백호문과 가까이 살던 주모는 한때 백호영들 사이에서 누구나 남몰래 연심을 품은 적이 있었기에 금세 알아볼 수 있었다.
“주모, 절 따라오십시오. 제가 주군이 있는 곳까지 안내하겠습니다.”
“부탁해요.”
설화는 흑사 할아버지의 연락을 받았을 때 가슴이 차갑게 굳으며 내려앉았다. 불안이 현실로 다가오자 숨이 막히며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즉시 할머니가 있는 귀왕곡으로 서방님이 만들어둔 타운 포탈을 했다. 그리고 할머니와 함께 이틀간 쉬지 않고 달려 봉수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장승과 같이 서 있는 대부(大斧)를 든 무장이 지키는 방 안으로 조심스런 발걸음으로 내디뎠다.
“서방님.”
“….”
방 안에는 묘령의 여인 셋(?)이 서방님을 간호하고 있었고, 흑사의 모습도 보였다.
“왔느냐?”
“소녀 설화, 흑사 할아버지 뵈어요.”
한포포는 방 안으로 라혼 대가의 아내라는 천하제일미 천상천화가 들어오는 순간 방 안의 공기가 바뀌는 듯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상황에 맞지 않게 남례성 특유의 하얀 아오자이가 무척이나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라혼 대가가 누운 침상 곁의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세우고 인사말을 건넸다.
“만나니 반갑습니다. 저는 라혼 대가… 아니, 해노야의 제자 되는 사람입니다. 다시 인사드립니다.”
“반갑습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포포 낭자시지요.”
“처음 뵙겠습니다. 주인님의 시비 초초입니다.”
“지심입니다.”
환자가 있는 방이라 조용하고 간결하게 인사를 나눈 그녀들은 제각기 자리에서 일어나 방 밖으로 나섰다.
“놀라지 말거라. 지금 주공의 상태는 심각하다. 하지만 주공은 쉽게 죽지 않을 것이니 너무 큰 심려는 하지 마라!”
“아니요. 걱정 안 해요. 서방님이 죽지 않느니 걱정 말라고, 슬퍼하지 말라고 했거든요.”
그러나 흑산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설화의 투명한 눈동자를 계속 지켜보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흑사, 이곳은 설화와 제가 지킬 테니 그만 쉬십시오.”
“부탁합니다, 가니아!”
흑사까지 방을 나서자 방 안엔 시체나 다름없는 몸으로 침상을 차지한 라혼과 설화, 그리고 가니아만이 남았다. 가니아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설화에게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아이야, 네가 그렇게 우니까 라혼이 당황해하잖니?”
“당황해하라죠. 누가 이렇게 몸을 함부로 굴리래요? 설화는 그냥 서방님이 옆에 있으면 그것으로 족한데 뭘 하러 일을 크게 벌인 거냐고요. 다 필요 없어요. 아무도 모르는 곳, 아니 귀왕곡에 은거한 채 살아도 괜찮아요. 난 그게 더 좋다고요.”
설화는 방 안으로 들어선 순간 라혼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가니아도 그 목소리를 들었다. 무녀로서의 재능이 있는 설화와 이미 무녀인 가니아는 생과 사의 경계 속에 있는 라혼의 영혼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라혼의 상태를 라혼 자신을 제외한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난, 시체와 다름없는 라혼의 육신은 설화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언제까지 계속 속상한 모습으로 있을 순 없었다.
“크으응~ 킁!”
야무지게 코를 풀고 눈물을 닦아낸 설화는 서방님의 몸을 덮고 있는 이불을 걷어냈다. 그러자 드러난 참혹하기 그지없는 서방님의 모습에 다시금 눈물이 쏟아지려는 것을 쿡 눌러 참으며 중얼거렸다.
“치! 누가 울 줄 알고.”
상태가 너무 엄중한 나머지 섣불리 건드리지 않아 피가 엉겨 붙은 그대로 방치해두고 있었다. 그럼에도 썩지 않고 있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휴우~! 이거 안 되겠는걸. 이봐요. 밖에 서 계시는 분.”
설화는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자 방 밖으로 나가 어깨를 건드리며 다시 불렀다.
“이봐요!”
“안 돼!”
잔폭광마는 이제 자신의 몸을 밀치며 방 안으로 들어서려는 저승사자의 머리통을 대부로 내리찍으며 소리쳤다. 그러나 눈앞에는 검은 옷의 저승사자가 아닌, 백의의 아름답기 그지없는 소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
설화는 어깨만 살짝 건드렸는데 괴성을 지르며 커다란 도끼를 휘두르다가 제 힘에 못 이겨 중심을 잃고 쓰러진 덩치 큰 사내를 황당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땅바닥에 대자로 누운 채 잠시 멍한 표정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던 사내는 화들짝 놀라는 시늉을 하더니 다급한 표정으로 물었다.
“주공, 주공은 아직 살아 계십니까?”
“서방님은 괜찮아요. 하지만 아저씨는 쉬어야겠는데요?”
“아닙니다. 그런데 서방님이라면….”
“서해수군통제사 라혼 대장군의 내자 되는 사람입니다.”
“주, 주모이십니까?”
“예!”
잔폭광마는 눈앞의 선녀가 다름 아닌 주군의 아내인 천하제일미 천상천화라는 사실에 내심 안도했다. 저승사자가 물러난 것까지는 좋은데 우화등선하는 신선을 안내한다는 선녀(?)가 모습을 보이자 막을 수도 안 막을 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설화는 아직도 꿈속에서 깨어나지 않은 듯한 무장에게 본래 하고자 했던 부탁을 했다.
“깨끗한 침상보와 따뜻한 물을 준비해줘요. 수건도 같이요.”
“예?”
“어서요!”
“예!”
잔폭광마는 주군이 정신이 들 때까지 자리를 떠나지 않겠다는 맹세를 까맣게 잊은 채 허둥지둥 주모가 부탁한 것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東奔西走)했다. 그리고 라혼의 거처에 비로소 안방마님이 생기자 침울하게 가라앉았던 집안 분위기는 확 달라졌다. 허둥대는 잔폭광마의 모습을 보고 달려온 흑산자가 준비해준 약물로 설화가 손수 라혼의 몸을 닦아내고 선혈로 얼룩져 있던 침상을 깨끗한 것으로 바꾸는 것을 시작으로 집안 분위기를 밝게 바꾸었다. 이미 장동의 화상 환자들을 손수 간호한 경험이 있는 설화는 그 모든 일을 야무지게 해냈고, 집안의 대소사를 직접 챙기기 시작했다. 라혼은 집을 그냥 머무는 장소로만 생각해 가솔들의 식사나 그 밖의 일은 거의 신경쓰지 않았다. 그 모든 일은 초초가 나름대로 맡아 했지만 그녀는 아랫사람을 직접 부리는 일에는 익숙지 못했다. 남례절도사 영양공의 딸이라는 신분은 항상 곁에 머물던 시비에게 모든 것을 맡겨 처리했고, 지금은 그저 그 시비의 흉내를 내는 정도였기에 집 안의 하인들은 스스로 알아서 자신의 몫을 챙기며 움직였을 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설화라는 이 집안의 정식 안주인이 나서서 직접 집안일을 챙기자 집이 확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식객으로 저택에 머물던 모원과 메이 부부, 고학, 흑사, 그리고 금영월에게 라혼이 멀쩡하게 있을 때보다 훨씬 편안해졌다는 생각을 들게 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것을 피부로 느끼며 은은히 감탄하는 여인들이 있었으니 바로 한포포와 초초였다.
“우리 서방님은요, 식사를 따로 챙겨주기 전까진 차 말고는 아무것도 먹지 않아요.”
“맞아. 정말 그러네요. 일은 모두 모원이나 고학에게 미뤄놓고는 뭐가 그렇게 바쁜지 스스로 뭘 찾아 먹는 것을 보지 못했다니까요. 그래서 처음엔 지심이 멋도 모르고 같이 굶는 경우가 종종 있었어요.”
“하지만 제가 먹을 것을 챙겨드려도 중요한 생각을 정리해야 한다며 거절하시니…. 그땐 정말 지심까지 같이 굶고 있을 줄을 생각하지 못했어요.”
“먹는 것은 그렇다 치고, 잠은요. 저는 이때까지 서방님이 자고 있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을 정도라니까요. 잠을 자는지 마는지 언제나 먼저 깨어 있으니…. 그런데 이번엔 정말 자는 모습을 원 없이 구경하니 그것 하나는 좋더라고요.”
천상천화가 저택에 온 지 사흘째, 집의 분위기는 그전과는 매우 달라져 있었다. 단지 집 안에 안주인이 있어 활기차게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침울했던 분위기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라혼의 상태에 관해 물으면 언제나 미소를 지으며 점점 나아지고 있다는 말로 답하는 그녀를 보면서 사람들은 모든 근심과 걱정을 잊었다. 그 심각했던 상태가 천상천화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한마디에 그저 흔한 감기 정도로 생각되었다. 그래서인지 집 안에 있는 여인들이 모여 차를 나누어 마시며 수다를 떨 만큼 집안은 안정되어 있었다.
“빙과요?”
“그래요. 사부님이 손수 만드시는 것인데….”
설화는 한포포가 설명하는 것을 듣고 빙과를 직접 만들어보기로 했다. 라혼과 같이 옥녀진기로 물을 얼리고 작은 소도(小刀)로 그것을 깎아 그 위에 석밀에 절여놓은 과일을 얹어 내왔다.
“어머나…!”
자리에 모인 여인들은 여인천궁의 소궁주인 설화가 보인 신위에 놀라고, 또 빙과를 척척 만들어내는 것에 놀라며 설화가 만든 빙과를 맛보았다. 그러나 입속에 넣자마자 사르르 녹는 라혼의 빙과와 달리 얼음 알갱이가 그대로 씹히는 식감에 약간 실망한 기색을 보였다. 그것을 영감 예민한 설화가 놓칠 리 없었다.
“저는 이거 처음 만들어보는 거라고요. 그렇게 대놓고 실망하면 어떡해요.”
“사실 주인님이 처음 만든 빙과도 이것과 같았습니다.”
“얼마나 다른지 나중에 꼭 만들어달래야지.”
***
“과연, 주모시다.”
고학은 지난 사흘간 보여준 주모 설화의 행보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사건 이후 닷새 만에 장이 서자 설화는 기다렸다는 듯이 장바구니를 들고 시장으로 나섰다. 그리고 설화의 신분이 단숨에 알려지며 사람들의 시선을 모았고, 설화는 여유로운 미소를 입가에 띤 채 때론 싸게 달라고 조르기도 하고 새로운 먹을거리를 보면 어떻게 요리하는지 요리법을 묻기도 했다. 그리고 얼마 전 이미 설화가 라혼과 나란히 걷는 모습을 본 사람들이 있어 그때의 인연으로 라혼의 건강을 묻는 물음에 그때마다 설화의 대답은 얼마 안 있으면 쾌차할 거라고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렇게 하루. 단 하루 만에 봉수성에서만큼은 백호나한만큼이나 유명해진 설화의 행보는 민심을 안정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아직 나이 어린 소녀라고만 생각했는데 미소만으로 봉수성의 백성과 서해수군 군사들의 마음을 사로잡다니….”
고학은 활기 넘치는 주모의 행보덕분에 최소한 봉수성의 군사력과 민심을 안정시키는 데 성공하자 내심 안도했다. 다만 사건 일어난 직후 누구도 봉수성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였는데 남례성 전역에 백호나한이 자객의 손에 참살되었다는 소문이 돌아 다시금 고민에 빠졌다. 이 일을 계획한 세력이 작심하고 일을 벌이는 이상 가장 좋은 방법은 건재한 주군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러기는 힘들 것이니 하남대원수 상장군 금영월이 발 빠르게 나서야 했지만 사실 가장 중요한 곳은 바로 여기 봉수성이었다. 문제는 남례성에 도는 소문에 흔들리는 진토인 출신 하남천원군 군사들을 남례성 전역에 흩어져 있는 백호영들이 얼마나 확실하게 장악, 통제할 수 있는가였다.
“흐흐흐흠~!”
머리를 싸맨 채 고민하는 고학과 달리 모원은 콧노래를 달고 집무실에 들어왔다.
“뭐가 그렇게 좋은가?”
“아! 고 대인, 죄송합니다. 제가 늦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자네나 내가 더욱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네.”
“예.”
사실 고학이나 모원이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란 거의 없었다. 전환으로 남례성 전역에 퍼져 있는 백호영들과 연락하여 그들의 상태를 확인하고 만일의 사태에 발 빠르게 대응하는 것뿐이었다. 긴장감이 무척 높은 때이지만 실제로 할 수 있는 일은 수집된 정보를 분석하는 것 이외엔 특별한 일이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리고 최근에 와서야 신혼의 재미를 본 모원을 고학은 크게 탓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정략결혼인 주인공인 모원과 메이는 혼인 후에도 별반 진전이 없다가 주모인 설화가 집안일을 챙긴 후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바로 어젯밤에 첫날밤을 치렀던 것이다. 그리고 이미 그 사실은 알 만한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어 답답함 속의 한줄기 청량함이 되어주었다.
***
잔폭광마는 보름째 주군이 누워 있는 방 밖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선녀 같은 주모가 온 후로 주군을 지키겠다며 서서 잠든 채 꿈꾸는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진 않았다. 이젠 쉴 땐 쉬고 주모가 챙겨주는 음식을 먹는 여유마저 생겼다. 그러나 주모가 자신이 주군의 심장에 칼을 꽂은 저주받을 인물이라는 사실을 안 주모의 실망한 얼굴을 볼까 봐 무척이나 가슴 졸였다. 그러나 지심을 통해 주모가 자신이 범한 씻을 수 없는 죄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 말을 듣고 주모 앞에 무릎 꿇고 사죄했다. 그리고 스스로 가슴을 갈라 심장을 꺼내줄 생각으로 칼을 꺼내 가슴을 찌르려 할 때 주모가 말했다.
“그대의 목숨은 이미 당신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서방님의 명을 그렇게 어기고 싶은 겁니까?”
그리고 잔폭광마는 소리내어 울며 다시금 주모 앞에서 충성을 맹세했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주군과 함께하겠노라고….
“육 소령!”
잔폭광마는 자신을 부르는 깨끗하고 맑은 목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또, 서서 꿈꿨죠? 멍하니 서서 뭐 하는 거예요?”
“아, 아닙니다. 단지 생각에 잠겨 있었을 뿐입니다.”
“자요!”
잔폭광마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주모가 직접 챙겨주는 저녁 식사를 받아들었다.
“또, 저번처럼 궁상맞게 서서 먹지 말고 편하게 앉아서 먹어요. 알았죠!”
“예.”
설화는 잔폭광마에게 식사를 챙겨주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보름이나 지났건만 서방님의 상태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그러나 설화는 실망하지 않고 라혼이 누운 침상 머리맡에 앉아 오늘 있었던 일들을 속삭이기 시작했다.
“닷새 만에 지심이 돌아왔어요. 어디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글쎄, 엉망이 되어서 왔지 뭐예요. 흑사가 지심을 치료하면서 ‘그런 무식한 방법으로 강해지려면 목숨이 열 개라도 부족해!’라고 했어요. 어디 심산유곡, 아니지… 밀림의 깊은 곳에서 수련이라도 하나 봐요. 그런데 지심이가 여자가 아니라면서요? 정말 예쁘게 생겼는데 여자가 아니라니 나는 지금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가요. 그렇다고 확인(?)해볼 수도 없고….”
오늘도 설화는 의식이 없는 라혼의 귀에 이 이야기 저 이야기를 홀로 늘어놓다 잠이 들었다.
***
라혼은 생사지간(生死之間)에서 부활을 위한 노력에 노력을 거듭했다. 하지만 생각대로 잘되지는 않았다. 육신은 이미 살지도 죽지도 않은 상태에서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다만 상당한 시간이 흘렀을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남례일족 대야의 마지막 깨달음인 심검은 라혼이 깨어나지 못하게 하는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다. 영력(靈力)이 약해질 대로 약해져 영혼을 매개로 한 에텔 스페이스의 두 브라마의 신성력을 끌어올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약해진 영력은 몸이 없이는 회복할 수 없는 것이기에 어쩌면 영원히 이처럼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될 수도 있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을 헛되이 보냈을까. 대야의 심검(心劍)에 투영된 의지를 하릴없이 관조하던 중, 라혼은 그것이 살의(殺意)나 적의(敵意)뿐만 아니라 아닌 호의(好意)도 포함되어 있음을 알았다.
‘천지(天地)와 우주(宇宙)의 모든 것은 하나다. 내가 너와 어울려 조화로우니 그것이 곧 생(生)이로다. 그러니 나는 너를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니 그것이 곧 생이다.’
대야의 마지막 심득(心得)에 의한 영혼 속에 깊숙이 박힌 심검을 영혼으로 감싸 흡수하고 그 도리에 따라 라혼은 천지만물(天地萬物)의 기운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이것이 내 몸의 형상을 유지한 기(氣)인가? 생명의 기운은 불완전하지만 계속 움직이는 것이니 너 또한 살아 움직여라!’
라혼은 일단 굳어버린 몸의 기운을 풀어 천지와 소통(疏通)하게 했다. 그러자 이미 죽은 피와 살이 몸 밖으로 배출되면서 새로운 피와 살이 계속 돋아나기 시작했다.
‘뇌는 느끼고, 생각하며, 폐는 숨을 쉰다. 심장은 생명을 나르는 피를 사지백해(四肢百骸)로 보낸다.’
뇌를 통해 통증과 더불어 향기롭고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냄새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는 숨을 쉬고 심장이 뛰는 것을 뇌가 느끼기 시작했다는 증거였다.
‘근육은 부드러워지고, 뼈는 강건해진다. 오감(五感)이 새로워지고 영규(領揆)가 타통되니 육신은 천지를 닮는다.’
근골이 제 기능을 회복하자 라혼은 비로소 눈을 뜰 수 있었다. 그리고 어두운 방 안이 속속들이 보여 새삼 눈으로 보고, 이름 모를 풀벌레 소리가 들려오고, 향기로운 냄새와 입 안의 비릿하게 남아 있는 비릿한 피맛, 살갗에 느껴지는 따뜻하고 포근한 무게감…. 그리고 눈물을 흘린 자국이 선명한 설화의 모습이 가슴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다시 태어난 라혼은 그 순간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을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곤히 잠든 설화의 얼굴에 눈물 자국을 닦아내고 잠에서 깬 설화의 양 볼을 들어 길고 긴 입맞춤을 나누었다. 그리고 설화의 옷을 조심스럽게 벗기고는 가녀린 목덜미를 애무했다. 라혼의 입술은 설화의 하얀 목덜미를 지나 앙증맞은 귀를 거쳐 눈꺼풀을 살짝 물고는 짭조름한 눈물을 핥았다. 그리고 코끝에 살짝 입을 맞추고 다시 입술에 잠시 머물다 이내 떨어졌다. 라혼은 설화를 겨드랑이 사이로 보듬어 안고는 따뜻한 체온과 심장의 두근거림을 피부로 느끼며 그 순간 살아 있음에, 설화를 깊이 느낄 수 있음에 감동(感動)했다.
***
“벌써 보름이 다 되어가오.”
“흐음~!”
“이쯤에서 우리가 전면에 나서는 것이 좋지 않겠소?”
“아직, 조금만 더 두고 봅시다. 봉수성에서 이렇다 할 연락이 없는 것을 보면 백호나한의 의식이 돌아오진 않은 모양이나, 사실상 하남천원군의 등뼈라 할 수 있는 하급 군관들이 대부분 과거 백호금군 출신인지라 섣불리 나섰다가는 낭패를 보기 십상일 것이오.”
작도인은 상초가 너무 신중하다고 생각했다. 사실상 남례성을 한 손에 장악한 백호나한이 자객들의 공격을 받았다. 뭐 들리는 소식에 따르자면 ‘중한 상처는 입었으나 생명에는 지장 없다’였다. 그러나 이미 보름이나 흐른 후였다. 백호나한이 의식을 회복하고 정신이 있다면 남례성이 이토록 조용할 리 없었다. 남례성의 모든 병권을 장악하고 있는 그가 자신의 목숨을 노린 일을 가만히 넘길 리 없었다. 그러나 지금 돌아가는 모양새를 보면 봉수성에 있는 백호나한의 심복 고학이 시시때때로 연락을 하며 자신들의 행보를 감시하고 있었다. 또한 비록 출입이 엄격히 통제된 봉수성이었지만 일이 벌어진 곳치고 무척 안정적이란 소문을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역으로 하남대원수 금영월 상장군이 그만큼 손을 썼다는 말이 되며, 백호나한의 상세가 위중하다는 반증이었다.
“이미 현무금군 출신 군사들과 주작금군 출신 군사들이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요. 작금의 사태는 매우 심각하오. 하남천원군의 장군은 다섯인데 백호문의 소장 모석은 원주로 가 있고, 상장군과 대장군은 봉수성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소. 그러니 장군과 내가 나름대로 움직이는 것은 오히려 그 소임을 다하는 것이오.”
“그렇긴 하나….”
상초는 작도인의 말에 일리가 있다 생각했지만 실상 백호나한이 그 일을 당하기 전부터 무리하게 현무와 주작 금군 출신 군사들을 빼내온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또 누구나 앞뒤 정황을 따져보더라도 의심 갈 만한 구석이 너무 많았다. 직급이 소장에 제수되어 장군의 반열에 들었으므로 독자적인 군사력을 가지는 것은 관례상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전면에 나서면 일을 사전에 알고 움직였다는 시선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설사 백호나한이 이대로 비명에 가도 흉수의 배후로 지목되면 목숨을 보전키 어려울 것은 너무나 자명했다. 지금에 와서 느끼는 것이지만, 작도인과 자신의 목숨을 노리고 온 그 존재가 자신들을 위해 백호나한을 도모하지 않았을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었다. 그러나 상초의 그런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장군, 수천부에서 진토인들의 반란이 발생했습니다.”
“뭐야? 어느 부족이냐?”
“바리족과 나의족 그리고 시다족이 주축이 되어 중주인 출신 군사들을 참살해 그 목을 장대에 꽂고 기세를 드높이고 있습니다.”
“지금 즉시 그 사실을 봉수성의 금 상장군께 알리고, 호도의 성문을 굳게 걸어 잠그라!”
“충!”
시다, 나의, 바리는 각기 1만에서 5천까지의 전사들을 가진 대부족이었다. 이들이 반란을 일으켰다면 아마도 2만 5천명 수준의 병력이 반란에 동참했다는 계산이 섰다. 이는 남례성을 장악하기 위해 얼마 전 수집한 정보에 따른 계산이라 틀리지 않으리라.
“차라리 잘되었소. 이것을 빌미로 남례성 전역에 흩어져 있는 하남천원군을 모읍시다. 백호나한의 백호영은 어차피 분리되어 있는 존재들이고, 상급 군교는 대부분 우리의 입김이 작용하고 있소. 반란이 발생한 수천부에 그들을 모두 밀어 넣고 서서히 지배력을 확대해 나간다면 하남천원군이 우리의 수중에 떨어지는 것은 시간문제요.”
“좋소! 그렇게 합시다.”
상초는 작도인의 말에 동조하면서도 깊은 수렁 속으로 끌려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을 도저히 지워버릴 수가 없었다.
***
부슬부슬 내리는 빗소리가 귀를 간질이고 하늘에 떠 있는 비구름(雲雨)에 아침해가 가려 있었으나, 그럼에도 사위에 깔려 있던 밤의 어둠은 아침의 밝음에 맥을 못 추고 물러났다. 눈이 부시지 않아 좋은, 비 오는 날 아침에 밝음은 침방에까지 스며들었다.
“음.”
라혼은 콧속에 스며드는 익숙한 향기를 맡으며 눈을 떴다. 그리고 바로 섶단같이 고운 머릿결의 주인이 알몸으로 자신에게 폭 안겨 고른 숨소리를 내는 것을 보았다.
‘설화가 어째서…?’
그 순간 지난밤 꿈결 같은 일들이 하나하나 생생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꿀꺽!’
라혼은 마른침을 삼키며 다소 복잡한 심경으로 설화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체향과 살갗으로 전해오는 부드럽기 그지없는 느낌을 음미했다. 단순하고 간단명료(簡單明瞭)한 것을 최선이라 여기는 라혼이었지만 설화에 관해서만큼은 아니었다. 설화를 직접 받아 아내로 삼았지만 지난 18년 간의 세월은 부부라기보다 후견인과 피후견인의 관계였다. 설화가 각성하면서 갑자기 커진 후, 때론 가끔 보이는 의외의 모습에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하고 치기 어린 모습에 고개를 설래, 설래 젓기도 했었다. 세상의 부조리한 모습에 가슴 아파하는 모습에 걱정이 되기도 했으며 그것을 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맞서가는 모습엔 대견스럽기까지 했다. 그러나 잠자리만은 되도록 천천히 하려고 했다. 설화가 가끔 지나가는 투로 그것에 대해 언급했지만 그것은 그 나이 특유의 호기심 정도로만 생각했기에 진정 준비가 될 때까지 뒤로 미루려 애썼던 것이다. 그러나 일은 벌어진 것이고, 라혼은 설화의 얼굴을 어떻게 쳐다보아야 할지부터 걱정스러웠다.
‘이것 참…!’
못할 짓 한 것은 아니었지만 시쳇말로 최후 심판을 기다리는 사형수의 심정으로 가만히 누워 라혼은 자꾸만 떠오르는 복잡한 상념을 지우고 설화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향기를 맡으며 심판의 때를 조용히 기다렸다.
“으응.”
설화는 부끄럽지만 황홀하기 이를 데 없는 꿈속에서 깨어나기 싫다는 듯 몸을 뒤척여 돌아누우며 서방님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
그리고 너무나 실감나는 서방님 냄새와 피부로 전해오는 감촉에 화들짝 놀라 눈을 뜬 설화는 간밤의 그것이 꿈이 아님을 비로소 깨달았다.
‘몰라! 꿈이 아니었나 봐!’
그러다 문득 서방님의 상태를 기억해내고 손으로 여기저기를 더듬기 시작했다. 하루에 한두 번 전신을 닦아주던 설화는 등으로부터 관통한 군도(軍刀)와 복부와 가슴에 난 상처들을 보고 가슴 아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자신을 안고 있는 사내에겐 그것이 없었다.
“누구?”
“….”
라혼은 잠에서 깬 설화가 몸 여기저기를 더듬자, 그런 행동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일순 당황했다. 그러나 라혼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설화가 몸을 벌떡 일으켜 세우더니 놀란 표정으로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자 어색한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서방님! 엉엉엉엉….”
“서, 설화야!”
그리고 설화가 서러웠다는 듯 눈물을 펑펑 흘리며 울기 시작하자 지은 죄가 있는 라혼은 안절부절못하며 어쩔 줄 몰라했다. 다만 라혼이 해줄 수 있는 것은 부드럽게 안고 입맞춤을 해주는 것밖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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