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너희의 이른 곳은 만질 만한 불 붙는 산과 흑운과 흑암과 폭풍과
19 나팔소리와 말하는 소리가 아니라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기를 구하였으니
20 이는 짐승이라도 산에 이르거든 돌로 침을 당하리라 하신 명을 저희가 견디지 못함이라
21 그 보이는 바가 이렇듯이 무섭기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하였으나
22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23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24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본문의 말씀은 18절에서 21절까지, 그리고 22절부터 24절까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8절의 ‘너희의 이른 곳’은 22절의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과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18절에서 21절까지는 ‘너희는 ~곳에 이르지 않았다’라는 의미이며, 22절에서 24절까지는 ‘너희는 ~곳에 이르렀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들이 이르지 않은 곳은 첫째, ‘만질 만한 불 붙는 산’입니다(18절). 둘째, ‘흑운’입니다(18절). ‘흑운’은 헬라어로 「γνόφος그노포스」인데, 이 단어는 ‘어둠’이라는 명사 「δνόφος드노포스」에서 유래했으며, ‘암흑’, ‘어둠’이라는 의미로서 신약성경에서는 이곳에만 등장합니다. 셋째, ‘흑암’입니다(18절). ‘흑암’은 헬라어로 「ζόφος조포스」인데, 이 단어는 ‘흑암’(유6,13), ‘어두움’(벧후2:4,17)이라는 의미입니다. 넷째, ‘폭풍’입니다(18절). ‘폭풍’은 헬라어로 「θύελλα쒸엘라」인데, 이 단어는 ‘끓어오르다’, ‘분노하다’, ‘사납게 날뛰다’라는 의미의 동사 「θύω쒸오」에서 유래했으며, ‘갑작스런 강풍’이라는 의미로서, 역시 신약성경에서 이곳에만 사용되었습니다. 다섯째, ‘나팔소리’입니다(19절). 여섯째, ‘말하는 소리’입니다(19절).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 마침내 시내산 기슭에 다다랐습니다. 하나님은 그 산에 오르는 자는 사람과 짐승을 무론하고 돌이나 화살이 날아와 죽임을 당할 것임을 경고하셨습니다(출19:12~13,21~24). 단 한사람 모세는 예외였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준비기간 2일이 지나고 제 3일 아침이 되자 산에 불이 붙어 화염이 충천했으며 유암과 빽빽한 구름과 흑암이 덮였고 우뢰와 번개가 쳤습니다. 게다가 심히 큰 나팔 소리까지 났습니다. 하나님께서 화염 가운데서 시내 산꼭대기에 강림하심으로 산에는 용광로에서 뿜어나오는 것같은 연기가 자욱했으며 온 산이 크게 진동했습니다(출19:16~20; 20:18. 신4:11; 5:22~23). 이토록 무섭고 두려운 광경을 목격한 모든 백성은 다 떨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출19:16下). 하나님께서 음성으로 말씀을 하시자 그들은 더 이상 말씀하지 아니하시기를 구하여(히12:20) 모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출20:21)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영광과 위엄을 우리에게 보이시매 불 가운데서 나오는 음성을 우리가 들었고 하나님이 사람과 말씀하시되 그 사람이 생존하는 것을 오늘날 우리가 보았나이다 이제 우리가 죽을 까닭이 무엇이니이까 이 큰 불이 우리를 삼킬 것이요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다시 들으면 죽을 것이라 무릇 육신을 가진 자가 우리처럼 사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불 가운데서 발함을 듣고 생존한 자가 누구니이까 당신은 가까이 나아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하시는 말씀을 다 듣고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당신에게 이르시는 것을 다 우리에게 전하소서 우리가 듣고 행하겠나이다”(신5:23-27)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토록 무서운 광경에 이르렀던 것과는 달리, 신약의 성도들은 찬란하고 아름답고 은혜로운 곳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이 이른 곳은 첫째, ‘시온 산’입니다(22절). 둘째, ‘하늘의 예루살렘’입니다(22절).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 산’에 이르렀으나 신약의 성도들이 이른 산은 ‘시온 산’입니다. ‘시온 산’은 예루살렘에 있는 한 언덕을 가리키는데. 이는 지리적인 위치를 말하기 보다는 ‘하늘의 예루살렘’을 가리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늘의 예루살렘’은 요한계시록 21장 9절이하에 온갖 보석으로 치장된 어린양의 신부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셋째, ‘천만 천사의 총회’입니다(22,23절). 넷째, ‘장자들의 교회’입니다(23절). 한글개역성경에서는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라고 표기되었으나, 원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천만 천사의 총회’와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교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총회’란 헬라어로 「πανήγυρις파네귀리스」인데, 이는 ‘전체의’, ‘모든’이라는 의미의 형용사 「πᾶς파스」와 ‘회합’, ‘집회’, ‘모임’이라는 의미의 명사 「ἀγορά아고라」에서 파생된 합성어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공적인 경기나 의식을 축하하기 위한 회집’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 역시 신약성경에서 이곳에만 등장합니다. 오늘날 많은 교단들은 저마다 ‘총회’라는 조직을 두고 지휘감독권을 ‘총회’에 위임하며, ‘성직자’를 관료화하여 통제할 뿐만 아니라, 총회의 결정 사항은 곧 ‘하나님의 뜻’이므로 이를 무조건 순종할 것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성경적이라기보다는 다분히 정치적, 행정적인 제도에 불과한 것입니다. 사도시대에 ‘총회’라는 조직은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도행전 11장의 기록을 두고 ‘예루살렘 총회’라고 얘기하고 있으나, 이는 억측입니다. ‘총회’, 곧 ‘파네귀리스’라는 단어는 한글성경이나 헬라어성경이나 모두 히브리서 12장 23절에만 유일하게 사용되었습니다. 그것도 이 세상에 속한 인위적인 총회가 아니라 ‘천만 천사의 총회’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기록한’(23절)은 헬라어로 ‘등록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ἀπογράφω아포그라포」입니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4회 나타나는데, 모두 ‘호적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참고 눅2:1,3,5). 따라서 ‘하늘에 기록한’은 ‘하늘에 호적이 등록된’이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고 했습니다(빌3:20). ‘하늘에 호적이 등록’되어있다는 것은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이 ‘하늘의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계21:27). ‘교회’는 헬라어로 「ἐκκλησία에클레시아」입니다. 이 단어는 ‘불러냄’, ‘집회’라는 의미로서 ‘집에서 공공장소로 불려나온 시민들의 모임’을 의미합니다. 사실, ‘에클레시아’ 즉, ‘민회’는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가장 핵심적인 권력기구로서 전쟁, 타국과의 동맹과 조약, 입법과 사법, 관리의 선출과 감사, 세금 부과 등의 국가의 중대적 사안을 의결했습니다. ‘에클레시아’는 6,000명의 시민으로 구성되는데, 여기서 시민이란 양친이 모두 아테네의 자유 시민으로서 20세 이상의 남자를 의미합니다. 이 세속적 명칭을 신약성경이 그대로 차용했는데 모두 118회 사용되었으며, ‘무리’(행19:32), ‘민회’(행19:39), ‘모임’(행19:41)외에 모두 ‘교회’라고 번역되었습니다. 어의(語義)적인 면뿐만 아니라 그 성격으로 볼 때, ‘교회(敎會)’보다는 ‘소회(召會)’라는 명칭이 더 원뜻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마태복음 16장 18절에 처음 등장합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능력이 음부의 권세를 이기는 데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적인 교회는 하늘에 호적이 등록된 장자들, 즉 그리스도의 보혈로 거듭나서 거룩하심을 받아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며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의 모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섯째,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입니다(23절). 여섯째,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입니다(23절). 일곱째,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님’입니다(23절). 여덟째,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뿌린 피’입니다(23절). ‘아벨’은 히브리서 11장 서두에서 ‘믿음’을 논할 때 처음으로 등장하는 인물입니다(히11:4). 아벨은 온전케 된 의인들(히12:23) 가운데 있는 ‘의인’으로서(마23:35) 그가 흘린 피는 ‘의인의 피’였습니다. 예수님 역시 ‘의인’입니다(행3:13~14; 7:52; 22:14. 벧전3:18. 참고 눅23:47). 의인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를 깨끗하게 하는 피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은 새 언약의 중보가 되신 것입니다(참고 히9:14-15). 예수께서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으며(히9:12. 계1:5), 우리는 그의 피로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아 깨끗하게 됩니다(엡1:7). 따라서 그의 피로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롬5:9). 베드로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구속을 받았다고 했습니다(벧전1:18~19). 그것은 보혈의 은혜가 역사하는 ‘침례’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세례를 ‘중생의 씻음’이라고 한 것입니다(딛3:5). 따라서 예수님의 피는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피인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라본 하나님은 두렵고 무서운 광경에 임하신 하나님이었으나, 신약의 성도들이 볼 수 있었던 하나님은 아름답고 거룩한 무리 가운데 계시는 은혜로운 하나님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성도들도 신약의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입니다. 우리는 그들과 같은 곳을 바라보며, 동일한 곳에 이른 사람들입니다. 이 은혜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이신 예수님을 통해서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주님의 이러한 놀라운 은혜를 값없이 받은 우리 성도는 항상 감사의 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며 약속의 그곳에 가기까지 자신을 믿음에서 굳게 지켜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