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대완열전 1
▶️ 실크로드 개척자 장건 (張騫-이지러질 건)
(? - 기원전 114)
🔸️비단길 실크로드를 개척한 장건
오랜 세월에 걸쳐서 동양과 서양의 문화와 문물 교역이 이뤄진 육상 이동로
둔황
🔸️서역으로 통하는 육로길과 관문 둔황
ㅡ둔황을 거점으로 연결되는 서역길
ㆍ천산북로, 천산남로, 서역남로
🔸️중국 3대 석굴의 최고봉ㅡ돈황 막고굴
🔸️서역으로 통하는 육로길 (실크로드 길)
ㅡ실크로드는 단순히 교역로의 의미를 넘어서 동서간의 문화가 교류된 통로였다.
혜초(慧超 또는 惠超, 704년~787년)👇
🔸️장건의 서역 이동 경로와 행적
ㅡ장건은 기원전 2세기 한나라 황제 무제때 활약했던 외교 사신이자 흉노 정벌에 참전한 장수다
한무제 명령을 받고 기원전 139년 서역을 향해 떠난 장건은 13년 뒤인 기원전 127년 아무런 외교적 성과없이 초취한 모습으로 귀국한다
장건은 서역과 동맹이라는 외교적 성과는 달성하지 못했지만 동아시아에서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교역로와 그 지역들에 대한 정보를 한나라에 알리는 큰 성과를 세우게 된다.
통일진나라 말기 장성해진 북방 흉노인들은 한나라가 세워지자 더욱 강성해져서 한나라를 지속적으로 위협했고 더 이상 참을수 없었던 한무제는 북방 월지국과 동맹을 통해 흉노를 치기로 구상한다.
한고조 유방부터 여태후, 문제, 경제, 무제까지 흉노에게 조공을 바친다
🔸️월지국과 흉노와의 관계
ㅡ월지국은 흉노의 침탈로 결국 정착지역을 포기하고 둘로 갈라져 이동하게 된다.
서역으로 여러차례 이동하여 최종 정착한 대월지국과 흉노를 피해 남동향을 택한 소월지국이다
🔸️한무제가 장건을 서역으로 파견한 이유
ㅡ월지와 흉노의 적대적 관계를 이용해 월지와의 동ㅇ생을 계획했고 이를 위해서 파견한 인물을 공개 모집했는데 이때 당시 낭관이었던 장건이 지원했고 최종선발 되었다
🔸️장건의 서역 여정과 그의 일생
ㅡ동맹을 위한 사신으로 월지국에 파견된 장건, 하지만 중간에 흉노에 생포되고 만다.
ㅡ흉노에 억류된 지 10년 만에 탈출한 장건은 서역을 향해 나아가 마침내 월지국에 다다른다.
ㅡ동맹 대상국 대월지는 이제 흉노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안정된 상태가 되어 동맹의 필요성이 없어지고 장건의 임무는 실패하게 된다.
ㅡ다행히 장건은 서역의 여러가지 정보를 조사하고 답사하며 기록한 다음 한나라로 귀환길에 오르지만 또다시 흉노족에 생포된다.
ㅡ13년 이라는 긴 여정을 마치고 기원전 126년 감보(당읍보)와 처 자식을 이끌고 한나라로 복귀한 장건은 서역국 정보에 관한 보고서를 황제에게 올리고 태중대부의 자리에 임명된다.
ㅡ서역을 다녀온 3년뒤 장건은 위청 장군과 함께 흉노와의 전쟁에 참전하고 박망후라는 제후에 오르지만 그뒤 2년후 이광장군과 2차 흉노 정벌을 나갔다가 실패해 겨우 참수형을 모면한다.
ㅡ장건은 다시한번 흉노와 맞설 대안으로 오손과의 동맹을 제안하고 황제는 장건을 두번째로 동맹을 위해 사신 자격으로 서역에 파견된다.
ㅡ반면 오손왕 곤막은 내적문제로 한나라와 직접적인 동맹관계는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장건을 도왔고 훗날 한나라와 사신을 통한 교역과 동맹 관계를 이어가게 된다.
ㅡ오손에서 돌아온 장건은 대행령에 부임했다가 1년뒤 기원전 114년 생을 마감한다.
🔸️장건 사후 서역과 한나라의 관계
ㅡ두번의 장건이 실행한 동맹은 실패하였지만 이후 서역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이광리 장군이 대완을 정복하고 한나라의 영역은 더욱 넓어지게 되었다
🔸️한혈마
하루에 천리(약 400km) 달리는 명마 한혈보마, 천마 대완마라 불림. 원산지는 투르크메니스탄으로 국제적으로 공인된 이름은 아칼테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