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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살 현우의 염불삼매
굉진(박은진, 포항 창포중학교)
1) 편안한 큰스님
“중국에서 극락을 다녀오신 관정 대법사님께서 지금 압곡사에 와 계시니 뵈러가자.”
1997년 2월 말쯤 친정어머님이 연락을 하셨다. 나는 어려서부터 어머니를 따라 절에 많이 다녔기 때문에 절에 가는 것은 일상이 되었지만 극락을 다녀오신 스님을 직접 뵙는다는 것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다. 관정 큰스님에 대해서는 어머니를 통해 이미 몇 차례 들은 바가 있었지만 그저 상상만 할 수 있는 대단하신 분이라는 생각만 했지 이런 일이 현실이 될 줄은 몰랐다. 그리고 제일 먼저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극락에 다녀오신 스님은 과연 어떤 분이실까?’
가는 동안 관정큰스님에 대해 여러 가지 상상을 했다. 그리고 압곡사에 이르러 큰스님을 처음 뵙는 순간 초인적인 대선사로 우리는 쳐다볼 수도 없고 범접하기조차 어려운 분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상상은 완전히 비껴갔다. 막상 뵈니 인자하시고 자비로웠으며 편안하고 권위적이지 않아 마치 동네 할아버지 같았다. 아주 단출한 옷을 입으시고 살며시 웃으시는 모습이 마치 순수한 아이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날은 단순히 관정 큰스님을 친견하는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큰스님께서 극락에서 배워 오신 염불도 가르쳐 주셨다. 어머님이 회장으로 이끄시는 ‘미타회’의 회원은 모두 48명인데 그날은 23명쯤 함께 가신 것으로 기억된다. 관정 큰스님이 법당 한 가운데 앉으시고 우리는 두 편으로 나누어 양쪽에 앉았다. 관정 큰스님은 ‘나모아미따불, 나모아미따불’ 이렇게 두 번을 하시고 우리에게 따라서 하도록 하셨다. 이렇게 5분쯤 따라하면서 모두가 이 염불가락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큰스님께서는 두 쪽으로 나누어 한 그룹이 먼저 염불하면 다른 그룹은 염불을 하지 않고 상대편의 염불 소리를 주의 깊게 들은 후 이어서 염불을 하도록 하셨고, 그렇게 번갈아 가며 염불에만 집중하도록 지도하셨다.
우리는 큰스님 말씀대로 모두 열심히 염불에 집중했다. 이 염불법은 극락에서 하는 수행법이고 극락으로 가는 염불이라 잠시라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비록 몇 시간 안 되지만 높고 깊은 산속에 울려 퍼지는 극락의 염불 소리는 우리 마음속에 조그맣게 자리 잡기 시작했다.
우리는 군위에서 포항까지 돌아오는 차안에서도 좌우 반을 나눠 3시간 동안 끊이지 않고 정토선 염불을 계속했다. 3시간을 계속해서 큰소리로 염불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한 번하고 한 번은 쉬기 때문에 그렇게 힘든 줄 모르고 계속할 수 있었다. 그런데 한 번도 쉬지 않고 양쪽 모두를 따라하며 끊임없이 염불하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바로 3살 먹은 아들 현우였다. 현우는 1995년생이고 절에 갔던 해가 1997년이니 우리 나이로는 3살이다. 3살이라고 하지만 아직 태어난 지 2년밖에 되지 않은 아이가 3시간을 쉬지 않고 염불하는 것을 보고 모두 깜짝 놀랐다. 당시 날이 저물고 늦어 아이가 배고파 할까봐 우유를 타서 먹이려고 하자 손으로 우유병을 탁 뿌리치며 염불에만 열중하는 모습은 정말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그 뒤 현우는 이 “나무아미타불”이 지정곡이 되어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정토선 염불을 하였다. 얼마 안 되어 부산 용궁사를 갔는데 산문에 들어가면서부터 큰소리로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하고 염불을 하면서 걸어갔다. 3살 어린 아이가 큰소리로 염불하며 절로 들어가자 오가는 사람들이 모두 신기해하며 귀여워했고 너도나도 한마디씩 하며 안아주었다. 그때 내가 어머니께 농담 삼아 말씀드렸다.
“어머니, 현우에게 승복 한 벌 맞춰 입힐까요?”
그러자 어머니께서는 “승복은 아무나 입는 것이 아니다. 다 과정을 거친 후 입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사실 현우는 부처님께 기도를 올려서 낳은 아이다. 결혼한 뒤 나는 예쁜 딸을 먼저 낳고 싶었다. 그래서 딸 원피스를 미리 사서 걸어놓고 딸을 기다렸다. 그러나 시어머님 생각은 달랐다. 시어머니의 손자 바람이 너무 강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내가 생각을 바꾸어 아들을 낳기로 하고 절에 가서 부처님에게 간절히 빌었다.
“부처님, 꼭 아들 하나 점지해 주십시오. 만일 아들 낳게 해주시면 부처님께 드릴게요.”
그렇게 낳은 아이가 바로 현우다. 그런데 그때 당시 현우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나이에 극락에 다녀오신 큰스님을 친견하고, 또 세 살 아이가 극락에서 하는 염불을 지치지 않고 어른보다 두 배씩 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래서 그런지 그 뒤 크면서도 많은 사람들에게 유독 사랑을 받으며 아무 문제없이 잘 커 주었고, 그 세 살 아이가 지금은 대학 2학년을 휴학하고 군대에 갔다. 군대 가기 전에도 부산의 한 선원에서 일주일 간 참선을 했고 군대에 가서도 불교와의 인연이 이어져 일요일마다 종교 활동으로 절에 다녔다. 그러나 군대에 있는 절 법사님에 의해 군종병으로 차출되어 현재는 군대 절에서 복무중이다. 부처님이 주신 아들이 틀림없는 모양이다.
2) 영주 약수암의 천도재
압곡사를 다녀오고 일주일쯤 지난 3월 4일, 다시 어머니를 모시고 영주 약수암 천도재에 참석하였다. 그날은 음력으로는 정월 대보름날이었다. 어머님은 관정 큰스님을 만나러 가실 때마다 늘 잊지 않고 감주를 직접 만드셔서 가지고 가 공양하셨다. 이날도 감주를 만들어 가느라 조금 늦게 영주에 도착해서 보니 크지 않은 약수암에 이미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다. 약수암은 관정 큰스님을 초청한 타공 스님이 주지로 계신 절이라 어머니를 비롯해 미리 소식을 듣고 알고 있던 많은 신도들이 천도재를 신청하였다.
약수암에서 도착하여 어머니께서 감주를 공양간에 드리고 나자 미리 가 계시던 자해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공양간에서 검은 비닐봉투 좀 하나 얻어 오시오.”
그렇게 말하고 나서는 ‘아니, 내가 가서 가져오는 것이 빠르겠다.’라고 하시며 스님이 직접 공양간에 가셔서 검은 비닐봉지를 얻어가지고 와서 따라오라고 하셨다. 그리고 절 뒤 굴뚝 사이에 관정 큰스님이 신고 다니시던 신발 한 켤레를 꺼내더니 비닐 봉투에 넣어주시며 말씀하셨다.
“관정 큰스님이 3년간 신으시던 신발이니 보살님과 한 짝씩 잘 보관하십시오.”
불과 보름도 안 되는 동안 어머니를 비롯한 미타회 회원들은 관정 큰스님의 정토선에 완전히 매료되어 열심히 염불하고 있었기 때문에 관정 큰스님을 기릴 수 있는 징표를 하나쯤 갖고 싶어 했다. 그래서 그 전에 자해 스님에게 큰스님 머리카락이나 신발이라도 하나 간직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던 일이 있었다.
자해스님은 “큰스님이 언제 삭발을 하시는지는 알 수가 없고, 한국 오실 때 신고 오셨던 헌신발도 3년이나 신었지만 큰스님께서는 신던 신발이 완전히 다 떨어질 때까지 절대로 새 신발을 사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번에 타공 스님이 억지로 새 신발을 사서 올리고 이 헌 신발을 굴뚝 뒤에 놓아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큰 종이에 쓰인 글은 큰스님이 강의하실 때 보고 하신 강의안이니 간직하시면 좋은 기념이 될 것입니다.”라고 하시며 어머니께 신발과 종이를 건네셨다.
신발을 보니 앞뒤가 다 닳아 구멍이 뚫리기 직전이었다. 그리고 제법 큰 종이에 쓴 글은 평소 강의하실 때 정토선을 공부하면서 생기는 경계를 육안, 천안, 혜안, 법안, 불안으로 나누어 설명하신 것이었다. 아주 귀중한 기념물이었다. 이 신발은 내가 지금까지도 아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으며 강의안은 어머님이 간직하고 계신다.
천도재가 시작되기 전에 도착했지만 이미 사람들은 법당을 다 차지해 우리는 법당에 참배도 못하고 봉투에 넣어 올리고 밖에서 재에 참가하였다. 시간이 많이 지나가자 연로하신 어머님과 도반 두 분은 요사채에 들어가 잠시 쉬셨다. 그리고 30분쯤 지났는데, 타공 스님이 노잣돈 봉투 5장을 가지고 나와 보여주시면서 오늘 천도된 영가가 가서 태어난 하늘나라의 이름과 그림이 신도들이 올린 봉투에 나타났다며 보여주셨다. 그 노잣돈 봉투는 모두 오늘 참석한 신도들이 그날 가져다 올려놓은 것이다. 게다가 관정 큰스님은 한글을 모르시는 데다 또 그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릴 시간조차도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관정 큰스님이 말씀하신 하늘나라 이름이 봉투에 쓰였고 그 하늘나라 그림이 나타났는지 모르지만 이런 이적은 실제로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참석자들이 모두 감동하였고 한쪽에서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마침 함께 가신 아버지께서 카메라를 가지고 가셔서 자해 스님에게 사진을 좀 찍어달라고 부탁드렸지만 자해 스님은 지금껏 사진을 한 번도 찍어본 적이 없다고 하시며 다른 분께 부탁하여 간신히 사진을 찍을 수 있었는데 밖에서 찍은 것은 사진기 조작을 잘 못해서인지 사진이 잘 나오지 않았고 법당 안에서 찍은 사진은 그나마 상황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나왔다. 사진은 모두 5장이었다. 그런데 너도 나도 한 장씩 달라고 해서 4장은 나눠주고 한 장만 간직하고 있었다. 18년이나 지난 뒤 보정 거사님이 관정 큰스님 일대기를 쓰기 위해 자료를 수집하러 오신다기에 그 사진을 찾아보았으나 어디 있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다행히 보정 거사님이 관련 사진을 이미 입수하여 가지고 계셔서 오히려 내가 그 자료를 빌려 이곳에 싣는다.
3) 꿈같은 순간의 자성염불
그 뒤로 어머니께서 정토선 염불을 항상 틀어놓고 들으라고 하셔서 나는 늘 틀어놓았다. 그날도 테이프를 틀어놓고 들으면서 현우를 재우다가 나도 모르게 잠이 들어버렸다. 깨어나서 보니 염불 소리가 계속 났다. 그런데 카세트 플레이어는 이미 끝이 나서 꺼져 있는 상태였다.
“이거 내가 잘못 들은 것 아닌가?”
다시 확인해도 카세트 플레이어는 분명히 끝이나 정지되어 돌아가지 않고 있었다. 꿈이 아닌가 생각하여 다시 정신을 차려 보아도 귓속에서는 계속 “나모아미따불, 나모아미따불”(관정 스님 염불을 자세히 들어보면 이렇게 들린다) 정토선 염불소리가 뚜렷하게 들리는 것이다. 너무 신기하여 어머님에게 전화하여 이것이 어떻게 된 것이냐고 여쭈어 보았다.
“자성염불이 되는 모양이다. 관정 큰스님이 정토선 염불을 계속하면 몸속에서 염불소리가 난다고 하셨는데 그것을 자성염불이라고 한다.”
나는 이것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별로 수행도 하지 않은 내게 이런 상서로운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이 너무 기뻤다. 귓속에서 나는 염불 소리는 그 뒤로 1~2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18년 뒤 보정 거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참 좋은 기회를 놓치셨습니다. 그때 조금만 더 열심히 염불했더라면 그 자성염불이 뚜렷하게 들리고 그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일찍 자성염불이 된 것은 근기가 높다는 것이기 때문에 앞으로 다시 염불을 해가면 틀림없이 좋은 결과를 얻게 될 것입니다.”
나는 그동안 불교를 믿는다고 해도 어머니를 따라 절에 다니는 데만 열심이었지 내 자신이 수행을 해야겠다고 발심을 내지 않은 것 같다. 나이 40살부터 39년간을 적극적으로 수행을 하신 어머니를 따라가지는 못하더라도 이제부터 나도 수행의 끈을 놓지 않고 열심히 염불 공부를 해야겠다. 법등명 자등명이라고 했으니 어머니 수행이 내 수행은 아니기 때문이다. 내 등은 내가 밝혀야 한다.
그럼, 어떻게 수행해야 할 것인가?
바로 그 수행법을 18년 전에 관정 큰스님으로부터 받지 않았는가?
지금까지 ‘바쁘다’, ‘힘들다’며 변명하고 지냈지만 알고 보면 어찌 하루 얼마동안 염불할 시간이 없겠는가? 꼭 시간을 내서 하지 않아도 염불이란 행주좌와 못할 것이 없지 않는가? 마침 보정 거사님이 관정 큰스님 육성염불 CD를 주셔서 집에서는 그것을 24시간 틀어놓고 직장에서는 따로 보내주신 digital로 만든 파일로 컴퓨터를 통해 때때로 듣고 있다.
저뿐만 아니라 많은 중생들을 위해 관정 큰스님의 법 전파에 노력을 아끼시지 않는 보정 거사님께 이 글을 빌려서 큰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
“나모아미따불, 나모아미따불”
잠자던 자성염불이여 어서 다시 이루어지이다!
<2015년 8월 13일>
나모아미따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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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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