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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코스트와 미국 노예제
워싱턴의 홀로코스트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 있는 홀로코스트 기념박물관(United States Halocaust Memorial Meseum)은 이스라엘의 야드 바솀에 버금가는 규모를 자랑한다. 유럽 대륙에서 일어난 홀로코스트와 직접 관련이 없는 미국에 왜 그처럼 커다란 박물관이 있어야 하는지 조금 의아할 정도다. 아마도 유대계 이민자들에 대한 고려가 가장 컸을 것이다. 그 외에도 여러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우선 박물관의 위치가 여러모로 시사적이다. 홀로코스트 기념박물관은 내셔널 몰(National Mall)과 대화하듯이 마주하고 있다. 미국사 박물관, 자연사 박물관, 국립 미술관, 항공우주박물관이 모인 박물관 복합공간이라 할 수 있는 내셔널 몰은 워싱턴 기념탑과 미국 국회의사당 사이 엄청나게 넓은 공간에 자리 잡은, 미국 민주주의와 물적 진보를 기념하는 거대한 공간이다. 그러니까 박물관의 공간적 배치는 홀로코스트가 미국의 민주주의에 혹은 미국의 민주주의가 홀로코스트에 말을 거는 형국이다. 그 메시지는 단순명료하다. 홀로코스트 같은 비극을 겪지 않으려면 미국식 민주주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2018년 6월 17일부터 24일간까지 나는 홀로코스트 기념박물관에서 열린 홀로코스트와 종교적 윤리에 관한 세미나에 참석했다. 주로 미국 캐나다 등 미 대륙에서 홀로코스트를 가르치는 교수들을 대상으로 한 세미나였는데, 이른 아침부터 저녁까지 전시 공간에 딸린 세미나실에서 일주일 정도 살다 보니 보고 싶지 않아도 자꾸 보이는 게 있었다. 박물관 곳곳에서, 특히 '미국인과 홀로코스트'라는 제목의 특별전에서 미국인 단체 관람객과 마주칠 때마다 곤혹스러운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라는 문구가 박힌 도널드 트럼프 야구모자를 눌러쓴 단체 관람객과 만났을 때는 더욱 그랬다. 한편으로는 이들이 홀로코스트 기념박물관의 메시지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했다. 세미나실 바로 옆에서 열리는 '미국인과 홀로코스트' 특별전은 미국이 왜 유럽 유대인의 운명에 그토록 무심하고 홀로코스트라는 반인도적 범죄를 방조했는가 하는 자기 비판적 물음에서 출발한다. 미국의 고립주의와 이민자 수를 엄격하게 제한하는 폐쇄적인 이민법이 '타자'에 대한 무관심을 낳고, 그것이 다시 제노사이드를 방조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메시지였다. 1939년 유대인 난민 937명을 태우고 미국으로 왔다가 입국을 거부당해 다시 유럽으로 키를 돌려야 했던 세인트루이스호 승객 대부분이 홀로코스트의 희생자가 된 사건에 대해 다른 해석이 가능할 것 같지 않다.
마침 세미나 기간 중에 트럼프 행정부가 국경에서 체포된 불법 이민자들에게서 어린 자식들을 강제로 떼어놓는 사건이 벌어졌다. 졸지에 부모와 떨어진 아이들이 울부짖는 수용소의 참상이 알려지면서 공화당 의원들마저 크게 반발했다. 가족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공화당의 가치체계에 정면으로 반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진보적 일간지 <하아레츠(Haaretz)>는 트럼프의 격리수용 조치와 히틀러의 반유대주의 정책을 비교할 수 있는지를 놓고 벌어진 찬반논쟁을 싣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미국의 폐쇄적 자기중심주의가 홀로코스트를 방조했다는 특별전의 비판적 메시지는 큰 시의성을 지닌게 아니었나 싶다.
그러나 모든 관람객이 전시 의도를 그대로 수용할 거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MAGA 야구모자를 쓴 이들에게 홀로코스트 기념박물관의 전시는 여전히 미국 민주주의의 위대함을 깨닫게 해주는 내셔널 몰의 부속 장치일 뿐이다. 우리 세미나 참석자 중 한 명이 특별전을 관람하다가 히틀러와 트럼프의 비교 가능성을 놓고 트럼프 모자를 쓴 관람객과 날카롭게 대립했다는 얘기도 들린다. 그런 논쟁은 늘 팽팽하게 마련이다. 또 다른 관람객도 있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다. 홀로코스트 기념박물관을 방문한 미국의 흑인 민권운동가 한 명이 "저기 게토에도 우리 니그로들이 있었네"라고 술회했다는 일화는 널리 알려져 있다. 트럼프 야구모자를 쓴 관람객과 달리,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홀로코스트 전시에서 미국 민주주의의 위대함이 아니라 미국의 백인 우월주의와 흑인 노예의 고통을 떠 올린다.
흑인과 유대인, 그 눈물의 연대
미국의 백인 우월주의와 반유대주의, 노예제와 홀로코스트가 기억 공간에서 만나는 경험은, 실은 오래전에 이미 시작되었다. 하버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첫 번째 흑인이자 미국 사회가 계급 모순과 인종 모순이 중첩된 사회임을 예리하게 간파한 급진적 사회학자 윌림엄 듀보이스(William E. B. Du Bois)의 <니그로와 바르샤바 게토(The Negro and the Warsaw Ghetto)>란 짧은 에세이가 그 좋은 증거이다. 듀보이스의 이 짧은 에세이가 실린 잡지도 재미있다. <유대인의 삶(Jewish Life)>이라는 급진적인 유대계 잡지인데, 에세이는 1952년 듀보이스가 그 잡지의 편집자에게 원고를 청탁받고 쓴 글이다. 청탁 편지가 아직도 남아 있어 당시 유대인과 흑인이 연대하던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듀보이스는 이 에세이에서 1890년대 초 베를린에서 대학원 과정을 밟을 당시 인종주의에 대해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된 이야기를 들려준다. 하나는 방학을 맞아 스위스, 헝가리,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등지를 여행하던 중 폴란드령 갈리치아의 한 작은 마을에 도착했을 때의 일이다. 숙소를 찾기 위해 마차를 잡아탔는데, 마부가 한참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유대인들 사이(Unter den Juden)에서 자겠냐?"라고 묻더라는 것이다. 조금 의아하기는 했지만 그러자고 했더니, 마부는 마을의 경계의 외진 곳에 자리 잡은 작은 유대인 호텔로 듀보이스를 데려다주었다. 생전 처음 흑인을 본 슬라브인 마부가 듀보이스를 유대인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또 하나는 독일의 작은 마을에서 사교 모임에 참석했을 때의 일이다. 어느 순간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음을 느끼고는, 미국에서처럼 흑인이란 자신의 존재가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드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옆에 앉은 독일 친구가 "그들이 불편해하는 건 네가 아니라 나야. 내가 유대인일지 모른다고 생각하나 봐"라고 속삭이더라는 것이다.
듀보이스는 이렇게 중동부 유럽에서 자신이 겪은 유대인에 얽힌 두 가지 일화를 소개하면서 인종주의가 비단 피부색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점을 역설했다. 중부 유럽에서 유대인의 지위가 흑인의 지위보다 더 불안하다는 사실이 이 점을 깨닫게 해준 것이다. 듀보이스의 경험은 1960년대에 맬컴 엑스(Malcolm X)가 하지(Haji) 순례 중 만난 '하얀' 이슬람교도들과 연대감을 느낀 경험과 다르면서도 비슷하다. 맬컴 엑스는 '하얀' 이슬람교도들이 자신에게 보여준 연대를 통해, '우리'와 '그들'이 반드시 피부색으로만 나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깨달았다. 암살당하기 직전 맬컴 엑스가 피부색에 기초한 흑인 민족주의에서 벗어나 흑인-유대인 연대를 심각하게 고려했던 흔적은 여기저기서 발견된다.
미 대륙에서 흑인과 유대인이 연대할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후반의 일이다. 1868년 <톰 아저씨의 오두막(Uncle Tom's Cabin)>이 중동부 유럽의 유대인이 주로 사용하는 이디시어(Yiddish)로 번안되어 '노예제(Di Shklaferay)'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이디시어 번안자 아이직 마이어 딕(Ayzik-Meyer Dik)은 주인공 톰 아저씨의 주인을 유대인으로 바꾸고, 그의 호의로 톰 아저씨가 자유를 찾아 캐나다의 유대인 정착지로 이주하는 과정을 해피엔딩으로 그렸다. 책은 발매되자마자 하루에 수천 부씩 팔리면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거의 모든 유대인 가정에 <톰 아저씨의 오두막> 이디시어 버전이 있다"는 말이 돌 정도였다. 미국으로 대거 이주한 동유럽 유대인들이 미국 남부로 행상을 다니며 흑인 고객들의 집에 기식하면서 흑인과 유대인의 관계는 더 긴밀해졌다.
제노사이드와 노예제
그러나 양자의 연대는 괄호 안에 묶인 연대였다. 노예제의 잔재가 완강하게 남아 있는 미국 남부에서 유대인은 백인이면서도 유색인이었다. 특히 1915년 백인 여성을 살해한 혐의로 재판을 받던 유대인 레오 프랑크(Leo Frank)에게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퍼부은 폭력은 남부의 유대인들이 자신의 '백인성'을 의심하는 계기가 됐다. 동유럽의 유대인들은 미국으로 이주하기 전부터 이미 타자와 더불어 사는 문화를 지향했다. 동유럽에서는 유대인 사회주의자들의 조직인 분트(General Jewish Labour Bund, The Bund)나 좌파 시온주의 그룹의 영향이 컸기 때문이다. 그들이 미국에서 만든 이디시어 신문과 잡지는 이른바 '니그로 문제'에 깊은 공감을 보이고, 유대인과 니그로의 연대를 거리낌없이 지향했다. 1927년 <톰 아저씨의 오두막>이 영화로 제작되어 뉴욕에서 처음 상영되었을 때는 급진적 이디시어 신문인 <전진(forverts)>이 적극적으로 독자들에게 영화 관람을 권하기도 했다. 모세의 인솔 아래 이집트를 탈출한 유대인의 경험에 비추어 해방 노예의 처지를 이해했기 때문이다. 이 급진적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자녀를 흑인 아이들이 함께하는 여름 캠프에 보내는 등 흑백 분리를 거부하고 흑인 동지들과 일상을 공유했다. 유대인이자 작가인 이지도어 센추리(Isidore Century)는 여섯 살 때인 1932년에 "스코츠버러 소년들을 석방하라"고 쓰인 피켓을 들고 메이데이 시위 행렬에 참가했던 일을 전한다. '스코츠버러 소년들'이란 1931년 앨라배마의 기차 화물칸에서 백인 여성을 강간했다는 죄목으로 사형에 직면해 있던 9명의 흑인 소년을 말하는데, 이들의 혐의는 조작된 정황이 짙었다. 메이데이 행사에서 유대인들이 스코츠버러 흑인 소년들을 석방하라는 피켓을 들고 시위하는 광경은 여러모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1949년 듀보이스는 다시 폴란드 바르샤바를 찾았다. 모스크바에서 열린 마르크시스트 사회학자 대회에 참석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당시 그는 폐허가 된 바르샤바 게토를 보며 애틀랜타 인종 폭동 당시의 비명과 총소리, KKK단의 행진을 연상했지만, 몇 년 뒤 앞의 에세이에서는 미국 남부의 어떤 비극보다 홀로코스트의 상처가 더 크고 깊었다고 썼다. 그러나 당시 그가 얻은 결론은 "유대인 문제에 대한 더 분명한 이해보다는 니그로 문제에 대한 진정하면서도 완전한 이해"였다. 듀보이스는 바르샤바를 방문한 덕에 인종주의가 피부색의 문제라는 '사회학적 고루함'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했다. 유대인과 흑인은 이처럼 상대방의 고통을 이해함으로써 자신의 고통과 처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폴란드령 갈리치아 출신 라파엘 렘킨의 발의로 1948년 신생 UN 총회에서 '제노사이드 협약(Convention on the Prevention and Punishment of the Crime of Genocide)'이 채택되었을 때 이에 가장 열렬히 호응한 집단이 바로 급진적인 아프리카계 미국인 지식인들이었다. 이들은 1951년 UN에 <우리는 제노사이드를 기소한다(We Charge Genocide)>라는 청원서를 제출하여 나차의 홀로코스트와 미국의 인종주의적 박해가 지닌 공통점을 지적했다. 이 청원서는 미국 정부가 흑인 노예를 대상으로 제노사이드를 저질렀다며 미국 정부를 기소하기 위한 문서였다. 그것이 주장하는 핵심 내용은 결국 제노사이드 협약에 의거해 미국의 노예제를 제노사이드로 인정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들은 렘킨에게도 자신들의 주장을 지지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렘킨은 거절했다.
렘킨이 제시한 제노사이드 협약의 초안은 이미 국제 정치의 힘의 논리에 밀려 만신창이가 된 상태였다.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식민주의의 원죄를 안고 있는 서구 여러 나라의 압력으로 토착문화 말살과 같은 문화적 제노사이드 관련 조항들이 사라졌고, 인민의 적을 학살한 소련의 반대로 정치적 제노사이드 관련 조항들도 날아갔다. 서구의 식민주의 제노사이드와 소련의 스탈린이 저지른 제노사이드를 제외하면 결국 남는 것은 홀로코스트뿐이었다. 그렇다 해도 제노사이드 협약의 비준이 절실했던 렘킨의 입장에서는 미국의 노예제가 제노사이드였다고 주장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미국의 심기를 건드리면 협약안 상정 자체가 물거품이 되 ㄹ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협약안은 결국 미국의 지지 속에 총회에 상정되었꼬, 1948년 12월 9일 총회 제 260호 결의안으로 채택되었다.
인종주의는 피부색의 문제가 아니다.
노예제의 기억과 홀로코스트의 기억이 제도적 차원에서 연대할 가능성은 그렇게 사라져버렸지만, 사회운동의 차원에서는 양자의 연대가 계속되었다. 백인 우월주의와 반유대주의의 반동적 연대가 역설적으로 노예제의 기억과 홀로코스트의 기억이 연대하도록 견인해준 측면도 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작가 제임스 볼드윈(James Baldwin)의 미완성 회고록을 각색한 다큐멘터리 영화 <나는 너의 니그로가 아니야(I'm not your negro)>(2016)는 미국 남부의 KKK단과 같은 백인 우월주의 단체들이 나치의 언어와 상징을 거리낌없이 사용하는 광경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KKK단은 흑인 혐오자뿐만 아니라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들의 집합소이기도 하다. 2006년 12월 이란에서 열린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들의 국제 대회에서 KKK단의 전 대표가 초청된 것도 우연은 아니다. 그러니 노예제와 홀로코스트의 기억 연대, 흑인 민권운동가와 유대계 지식인의 연대는 KKK단과 같은 백인 우월주의 세력에 대항하는 연대라는 점만으로도 의미가 크다. 미국의 작가 노먼 메일러(Norman Mailer)는 1957년 <하얀 검둥이(The White Negro)>라는 에세이를 통해 미국의 노예제가 미국 사회에 남긴 후유증을 홀로코스트와 원폭 희생자들이 겪은 심리적 혼란에 비유한 바 있다. 그런데 '하얀 니그로'라는 표현은 메일러가 처음 사용한 게 아니라 1860년대부터 이미 독일에서 유대인을 비하할 때 쓰던 표현이었다. 나치는 우크라이나인 등 점령지의 슬라브 '원주민' 역시 '하얀 검둥이'라고 불렀다. '대영제국'에서 아일랜드인을 부를 때도 ''하얀 검둥이'라고 부를 때가 많았다. 1968년 까지도 런던 경제대학(LSE)의 술집에는 '개와 아일랜드인 출입금지'라는 팻말이 버젓이 붙어 있기도 했다. 1920년대 미국에서 일본인 이민자들은 '태평양의 검둥이'였다. 반면,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일본인은 '명예 백인'이었다. 듀보이스가 간파했듯이, 인종주의는 피부색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스라엘에 대한 첨예한 비판자이자 홀로코스트 산업(The Holocaust Industry)>(2000)의 저자 노먼 핀켈슈타인(Norman Finkelstein)은 부모가 모두 폴란드 출신 유대인들이다.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그의 어머니는 어린 핀켈슈타인에게 유대인뿐만 아니라 미국의 흑인, 베트남인, 팔레스타인들이 전부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라고 말하곤 했다. 핀켈슈타인의 이런 기억은 1960년대 미국의 유대계 지식인들이 흑인 민권운동에 어떤 입장이었는지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실제로 듀보이스가 설립을 주도한 '전미유색인지위향상협회(National 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Colored People, NAACP)'에는 전국 차원이든 지방 차원이든 유대계 지식인들이 대거 참여했다. 이들은 민권운동의 가장 든든한 지지자였다. 흑인 민권운동과 베트남전 반대운동이 미국 전역을 뒤흔든 1960년대에 이처럼 유대인과 흑인 활동가들은 백인 우월주의에 맞서 연대했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1930년대에 이미 나치의 억압으로 고통받는 유대인과 연대한 사례가 있다. 오스트레일리아 선주민 운동의 선구자 윌리엄 쿠퍼(William Cooper)가 그렇다. 그는 오스트레일리아 요르타 요르타(Yorta Yorta) 부족의 지도자로 , 1938년 12월 6일 멜버른의 나치 독일 영사관 앞에서 '수정의 밤(Kristallnacht)'에 항의하는 선주민 인권운동가들의 시위를 조직했다. '수정의 밤'은 파리에서 유대인이 독일 외교관을 저격한 사건을 빌미로 1938년 11월 9일 나치가 대대적으로 독일의 유대인 상점과 예배당 등을 약탈하고 훼손한 사건을 말한다. 쿠퍼는 선주민 운동가들을 이끌고 항의 시위를 마친 뒤 "나치 독일 정부의 유대인에 대한 끔찍한 박해"에 항의하는 서한을 독일 영사관에 전달하려고 했다. 그러나 독일 영사관은 문을 열어주지 않았고 쿠퍼 일행은 서한을 들고 귀가해야 했다. 나치의 유대인 박해에 항의하는 이 서한은 이로부터 74년이 지난 후에야 독일에 전해졌다. 2012년 12월 6일 맬버른에서 쿠퍼의 항의 시위가 '재연' 되었는데 여기서 쿠퍼 역을 맡은 쿠퍼의 손자 알프레드 터너(Alfred Turner)가 둘러선 유대인들과 선주민 운동가들의 박수 속에서 할아버지의 항의 서한을 공손하게 서 있던 독일 영사에게 전달한 것이다.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는 1901년부터 거의 80년간 백호주의를 이민 정책의 원칙으로 견지했다. 그래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의 이민을 받아들일 때도,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는 하얀 피부의 아슈케나지 유대인에게만 입국 비자를 발급하고 짙은 피부의 중동출신 세파르디 유대인들에게는 비자 발급을 거부했다. 이를 감안하면 1938년 윌리엄 쿠퍼의 항위 시위는 놀랄 정도로 선구적이다. 그런데도 야드 바솀 홀로코스트 기념관이 쿠퍼를 유대인을 돕거나 구한 '정의로운 비유대인들'에 선정한 것은 21세기 들어서의 일이니, 어떤 불편함을 감추기 어렵다.
더 많은 손을 내밀기 위하여
유대인과 흑인의 연대가 항상 아름다웠던 것은 아니다. 미국이라는 인종주의 사회에서 유색인이면서 백인인 유대인과 흑인의 연대는 아슬아슬하기도 했다. 1961년 앨라배마주에서 버스 좌석의 흑백 분리에 반대하는 프리덤 라이드(Freedon Ride) 운동을 정점으로 양자의 연대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더구나 미국 사회의 주류로 편입되는 유대인의 비율이 높아지고 유대인을 흑인 노동자를 착취하는 백인 자본가와 동일시하는 흑인 민족주의의 프로파간다 문건들이 속출하면서 양자 사이의 긴장이 더 높아졌다. '제3세계'라고 표시된 흑인의 팔이 '해방운동'이라는 칼을 휘두르며 미국의 달러와 다비드의 별로 둘러싸인 탐욕스러운 유대인의 코를 베는 반유대주의 만화가 나온 뒤로는 유대계 공산주의자들마저 흑인들에게 등을 돌렸다. 맬컴 엑스도 한때 몸담았던 흑인 이슬람 운동은 물론, 가장 급진적인 흑인운동조직있던 블랙 팬서(Black Panthers)마저 반유대주의를 강령에 명시한 것은 흑인-유대인 연대가 얼마나 파국으로 흘렀는가를 잘 보여준다. 듀보이스가 폴란드 여행을 통해서 그랬듯이 맬컴 엑스도 하지의 성지 순례 때 피부색의 차이를 넘어서는 연대의 짜릿함을 맛보았지만, 파국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것이었다.
여러 세기 동안 노예제의 억압을 경험한 미국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 역사문화박물관(National Museum of African American History and Culture, NMAAHC)'이 홀로코스트 기념박물관보다 훨씬 늦게 문을 열었다는 사실도 여러모로 상징적이다. 그래도 한 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미국의 기억 연구자들이나 활동가들 사이에서 홀로코스트와 미국 노예제의 기억 연대를 향한 움직임이 뚜렷하게 감지된다는 점이다. 홀로코스트 기념박물관에서 세미나 참가자들에게 아프리카계 미국인 역사박물관 특별 관람을 알선해준 데서도 단적으로 알 수 있다. 또 참석자의 반 이상이 홀로코스트를 연구하고 가르치는 유대계 학자였다는 점을 감안하며, 일주일 동안 이어진 토론에서 홀로코스트의 비교 가능성을 부정하고, 지구적 기억 공간에서 홀로코스트가 특권적 지위를 갖는다고 강조하는 주장이 없었다는 사실에 나름 큰 의미를 부여해도 괜찮지 않을까 한다. 앞으로 불어나갈 과제는 노예제와 홀로코스트의 기억 연대를 넘어 식민주의적 약탈과 학살, 선주민 제노사이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고통과 억압의 기억들이 어떻게 그야말로 지구적 차원의 연대를 이루어낼 것인가 하는 점일 것이다.
이런 고민을 하던 차에 우연히 접한 중국계 미국 시인 프랜스스 청(Frances Chung)의 시편들이 가슴을 파고든다. 뇌종양으로 요절한 프랜시스 청은 뉴욕의 차이나타운에서 나고 자랐다. 차이나타운의 꿈틀거리는 생명력을 묘사한 시 <차이나타운의 생기(Yo vivo en el barrio chino)>는 치카노(Chicano), 곧 멕시코계 미국인들의 거친 에스파냐어로 제목을 달았다. 시가 들려주는 뉴욕 차이나타운의 일상은 그 자체만으로 이미 미국 주류 사회의 오리엔탈리즘을 통렬히 비판한다. '동양'이라 고정된 문화적 경계를 넘어 펼쳐지는 일상의 풍경은 그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상상만으로도 즐겁다. 프랜시스 청의 시집을 처음 펼쳤을 때 내 눈길은 첫 머리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나는 뉴욕 차이나타운에 산다. 어떤 이는 게토라 부르고, 어떤 이는 슬럼이라 부르고, 어떤 이는 집이라고 부르지." 차이나타운과 게토와 슬럼이 어깨동무하고 함께 가는 정경은 '지구적 기억의 연대와 소통' 프로젝트가 바라는 미래의 소박한 그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