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여행기
(이 글은 인천의 신현수 시인이 쓴 것입니다. 저는 사진만 몇 장 따로붙였습니다. 신선생의 바지런함에 놀랄 뿐입니다. 컴퓨터에 용량 제한으로 아홉차례 나눠 싣습니다.)
이번 여름에 중국에 다녀왔다. 주로 만주지역을 다녔다. 다녀온 일정은 다음과 같다.
8월 3일(일) 대구출발, 심양 도착, 심양서탑, 중산광장, 야간열차로 연길로 이동
8월 4일(월) 연길 도착, 홍범도봉오동전투전적지(수남촌), 훈춘-방천 조․러․중 국경, 도문
8월 5일(화) 용정, 용정중학교, 윤동주묘, 3.13 반일의사릉, 탈취15만원사건비, 주덕해집옛터, 명동교회, 윤동주생가 (명동촌)․ 문익환 고향(장재촌), 일송정, 혁명열사능원, 주덕해 기념탑
8월 6일(수) 화룡촌-나철묘지, 청산리대첩비, 백운평, 권하촌,
8월 7일(목) 량수교, 도문, 용정
8월 8일(금) 연길감옥, 야간열차로 하얼빈으로 이동
8월 9일(토) 하얼빈도착, 731부대, 조린 공원, 조선족 문화관, 성소피아성당
8월 10일(일) 송화강, 야간열차로 만주리시로 이동
8월 11일(월) 만주리 도착(9시 15분), 몽골국경, 러시아 국경
8월 12일(화) 새벽 열차로 목단강으로 이동
8월 13일(수) 발해진, 해림, 산시, 목단강
8월 14일(목) 열차로 하얼빈으로 이동
8월 15일(금) 하얼빈 태양도, 밤열차로 심양으로 이동
8월 16일(토) 심양 도착, 심양고궁, 북릉공원,
8월 17일(일) 심양출발, 대구도착
2008년 봄 어느 날, 만주기행을 결의하다
박두규시인이 섬진강가에 한옥을 지었다. 무지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2008년 봄 어느 날, 친하게 지내는 몇몇 문인들이 집 구경을 갔다. 휘황한 보름달을 조명 삼아, 섬진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배경음악 삼아, 친한 벗들과 나누는 한잔 술은 참 황홀했다. 그 자리에서 박영희시인의 ‘만주기행’ 책이 여름에 나온다는 얘기가 나왔고, 그럼 박영희 시인을 가이드 삼아 다시 한 번 만주기행을 가자는 얘기에 의기투합했으며, 그 자리에서 일사천리로 여행날짜와 대충의 일정을 잡았으나, 무릇 모든 술 먹으며 하는 결정이 그렇듯, 결국 박영희시인과 조재도시인 그리고 나, 셋이 단출하게 만주기행을 떠나게 되었던 것이었다.
▲섬진강 가 박두규네 한옥
2008년 8. 2 (토) - 우리가 대구에 모인 이유
일기예보에 의하면 강풍을 동반한 비가 온다더니 다행히 날이 맑았다. 서울역 한 노숙자가 다쳤는지 피를 흘리고 있는데, 난 커다란 가방에 짐을 잔뜩 꾸려 긴 여행을 떠나려 하고 있다. 기차 안에서 가방을 선반에 얹으려 하는데 가방이 너무 무겁고 크다. 어느 낯선 이가 도와준다. 참 고맙다. 1시간 반만에 동대구역에 내렸다. 케이티엑스, 빠른 만큼 비싸다. 시간을 돈으로 바꿨다.
영희가 역에 나와 반갑게 맞아준다. 왜 케이티엑스가 서는 역이 대구역이 아니고 동대구역인가 물으니 박정희 정권 때 박정희가 편하게 고향 가기 위해서 만든 역이라고 한다. 그래서 대구역이 묻혀 버렸다. 차라리 대구역을 서대구역으로 바꾸고, 동대구역을 대구역으로 하는 게 나을 듯싶다.
영희의 만주기행 책은 ‘삶이 보이는 창’ 출판사에서 만들었다. 여행 떠나기 전에 나올 수 있을까 걱정이었는데 책이 나와 다행이었다. 막 나온 책을 엄기수씨가 직접 대구로 가지고 내려왔다.
인천 사는 내가 중국을 가는데 대구로 돌아간 이유는 따로 있었다. 영희는 지난 90년 초부터 국보법 위반으로 약 8년간 감옥에 있었는데, 그 8년 세월을 마음 변치 않고 딸을 키우며 옥바라지 한 제수씨 얼굴을 몇 년 전부터 한 번 보고 싶었다. 이제 고등학교 2학년이 된 딸 서로(딸의 이름이다)의 얼굴도 물론 보고 싶었다. 그래서 핑계 김에, 겸사겸사 대구로 모이게 된 것이었다.
영희 식구, 조재도 시인, 엄기수씨 등이 함께 저녁도 먹고, 먼 길 떠나기 전날 긴 여행의 무사 귀환을 기원하는 장도주도 한 잔 했다. 남자들끼리 두류산 공원 이상화 시비 앞에 가서 맥주 한 잔 더 했다. 두류산 공원에 너구리가 있다. 환경이 좋은 건가? 영희의 서재에서 잠을 청했다.
▲ 두류산의 너구리
2008년 8. 3 (일) - 드디어 만주를 향하여 출발
아침에 영희가 차가버섯을 타왔다. 차가버섯? 상황버섯은 들어봤지만 차가버섯은 또 처음이다. 다른 사람들은 다 아는 눈치다. 난 왜 이렇게 이 세상에 모르는 게 많을까? 잽싸게 인터넷을 뒤져보니 자작나무에 기생하는 버섯이다.
영희의 부인이 아침상을 차려주었다. 남의 집에서 아침을 얻어먹는 일, 이미 예전에 모두 잃어버린 문화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남의 집에서 잘 생각도, 자기 집에서 남을 재울 생각도 하지 않는다. 제수씨와 서로의 따뜻한 환대 속에 택시를 타고 대구공항으로 갔다. 주로 인천공항에서 출발해온 내게 대구공항은 마치 시골 차부처럼 여유롭고 한적했다.
남방항공을 탔다. 남방항공은 매주 일요일 새벽 심양에서 탑승객을 싣고 대구에 도착한 후, 승객을 싣고 다시 심양으로 돌아간다. 시계를 한 시간 뒤로 돌렸다. 11시 25분 출발하여 중국시간으로 12시 55분쯤 내렸으니 한 시간 반쯤 걸렸다. 대구와 심양은 아주 가까운 거리다. 꼭 서울에서 대구 가는 시간이다.
심양공항에 내리니 생각만큼 덥지는 않았으나 공안과 군인이 쫙 깔렸다. 눈을 부릅뜨고 쳐다본다. 검색도 아주 심하다. 결국 조재도시인이 짐 뒤짐을 당했다. 생각해보니 심양은 올림픽 축구 경기가 열리는 곳이다.
택시를 타고 심양시 조선족문학회 사무실로 갔다. 영희가 만주여행을 다닐 때 조선족 리문호 시인을 만나 친한 사이가 되었는데, 그 일을 기화로 대구 작가회의와의 교류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사무실이 꽤 좋다. 조선족 실업가가 도와주는 사무실이다.
▲ 심양의 조선족 작가들
논의를 마치고 서탑가에 있는 조선족 식당 향토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중국에서는 고기값이 무척 헐하다. 몇 년 만에 청도맥주도 한잔 마셨다. 음식에 사람에 글씨에 전혀 외국에 온 것 같지 않다. 리문호시인의 안내로 서탑과 신화서점, 중산광장 등을 구경했다.
서탑은 ‘청나라 태종(太宗) 때인 1640년 착공되어 순치제(順治帝) 때인 1645년 완공되었다. 당시 심양은 성징(盛京)이라 불렸으며, 청나라의 수도였다. 청나라 왕조는 수도의 동서남북의 네 방위에 각각 탑을 하나씩 세웠는데, 이를 심양4탑[瀋陽四塔] 또는 청초4탑(淸初四塔)이라고 부른다. 4탑은 사찰과 함께 건립되었다. 서탑은 건립 이후 수백 년을 내려오는 동안 보수되지 않은 채 심하게 훼손되어 1968년 철거되었다가 1998년 심양시에서 옌서우사와 더불어 재건사업을 전개하여 같은 해 11월 준공되었다. 복원된 서탑은 티베트식 라마탑으로 높이는 26.33m이다.’
이 서탑 주위를 서탑가라고 하는데 여기가 소위 조선족거리다. 맨 처음 이 거리에 독립운동 하는 분들의 부인들이 자금 마련을 위하여 국밥집을 열었고, 자연스럽게 조선족들이 모여 살았다. 지금은 한국의 어느 유흥가 못지않다.
택시를 타고 중산 광장으로 갔다. 지금은 모택동 동상이 서 있는데 병자호란 후 끌려온 김상헌 윤집 오달제 등 삼학사가 여기서 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일제 때 우리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하던 봉천결찰서는 아직도 그대로 심양시공안국 건물로 사용하고 있었다.
이날 저녁 연길로 떠날 예정이었기 때문에, 점심 먹은 식당에 맡겼던 짐을 찾은 후 기차를 타기 위하여 심양 역으로 갔다. 중국 여름여행은 기차표 구하는 일이 만만치 않다. 그쪽 분들 표현으로는 여름에 열차표 구하는 일은 대단히 ‘긴장 되는’일이라고 한다. 다행히 조선족 문학회 분들이 도와주어서 연길 가는 표를 끊을 수 있었다. 밤새 열차를 타야 하니까 슈퍼 가서 라면에 과일에 맥주에 나름대로 준비를 했다. 리문호시인이 바리바리 싸주었다. 사람을 진심으로 대하는 따뜻한 정, 그동안 내가 잊고 있었던 정서다.
심양 역에서 6시 45분 기차를 탔다. 우리 자리는 6인실의 상중하 였다. 상중하는 각각 천지 차이다. 하가 천국이면 중은 연옥, 상은 지옥이다. 당연히 가격도 다르다. 상과 중은 앉아 있을 수도 없다. 차장이 승차권을 거두어 가고 대신 카드를 새로 나누어 준다. 내릴 때가 되면 차장이 깨워서 승차권을 다시 내준다. 중국에서 차장은 검표도 하고, 청소도 하는 멀티 플레이어다. 중국 열차는 밤 10시가 넘으면 소등이다. 졸리지 않더라도 무조건 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