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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비전 인생 (5) / 하나님의 사명으로 살라!"
+ 본 문 : 사도행전 20장 22절 - 24절 (신약성경 223쪽)
22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23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아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 있습니다.
사명은 건물로 말하면 기초요, 나무로 말하면 뿌리입니다. 추운 겨울에 나뭇잎도 다 떨어지고,
다 얼어 죽은 것 같은 나무들이 봄이 오면 다시 새 잎이 나오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뿌리가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리빙스턴은 “사명이 있는 자는 결코 죽지 않는다.” 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 땅에서 사명을 다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이 부르시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우리 모두는 사명을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사명을 위해 살며 사명이 다 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래서 우리 사람은, 항상 새로운 목표를 향해 움직여야 합니다.
이러한 지혜를 가르치기 위해 유태인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이런 말을 자주 들려주곤 합니다.
“산은 다 오르지 말고 절반만 올라라!” - 한 가지 목표에 도달했다는 이유로 나태해지지 않고,
계속 노력할 수 있도록 가르치기 위해서, 유대인 부모들이 사용하던 지혜로운 교훈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은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한마디로 사명에 매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많은 핍박과 환난을 받아왔고, 또 그가 가려고 하는 예루살렘에도 핍박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는 그래도 갔습니다. 그 이유는 그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명이라면, 그 길이 죽음의 길이라도 기꺼이 가기를 원했습니다.
오늘 본문 24절 말씀입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아멘!
이 말씀에서 보면,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명을 위한 삶을 “나의 달려갈 길” 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명을 위해서 달려갔습니다. 이왕에 자신의 사명을 발견한 이상 그것을,
잘 이루기 위해 달려갔습니다. 마치 마라톤 선수가 종착지점까지, 최선을 다해 달리듯 말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나의 사명을 위해 달려가고 있습니까? 한 번 점검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사명을 위해 달려가려면, 가장 먼저 내가 누구인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사도 바울은 자신이 누구인지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의 편지 서두에서,
늘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였습니다. 로마서 1장 1절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여기서 보면, 종과 사도라는 직분이 같이 쓰이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라는 것은 높이는 이름이요. 영광된 직책입니다. 종은 낮추는 이름으로 노예란 뜻입니다.
바울은 이 두 직책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습니다. 사도인 동시에 노예요, 노예인 동시에 사도입니다.
바울은 이방인 사도로서의 사명이 있었고, 주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노예가 됨도 알았습니다.
또 성경에서 바울은 자기의 신분에 대하여, 두 가지로 우리에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4장 1절 말씀입니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여기 "일꾼" 이라는 말은 특별한 의미를 가진 말입니다. “휘페레타스” 라는,
이 헬라말의 뜻은 "노를 젓는 자" 라는 뜻입니다. 그것도 배 밑창에서 노를 젓는 자란 뜻입니다.
여수 앞 바다에 가면, 모형 거북선을 만들어 놓고, 관광객들에게 그 거북선을 타보도록 합니다.
거북선의 맨 아래층으로 내려가면, 양쪽에 열 개씩의 긴 노가 있습니다. 선장이 명령을 내리면,
그 노를 젓는 사람들이 일제히 노를 젓습니다. 빨리 저으라면 빨리 젓고, 멎으라면 멎습니다.
배 맨 밑창에서 노를 젓는 사람은, 자신들이 노 젓는 배가 어디로 가는지를 전혀 모릅니다.
그들은 다만 선장이 저으라면 젓고, 빨리 저으라면 빨리 젓고, 멈추라 하면 멎으면 그만입니다.
물론 "이 배의 노를 저어서 내게 주어진 보상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을 권리도 전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누구입니까? 우리는 우리의 선장이 되신 그리스도의 일꾼입니다.
우리의 사명은 배의 노를 젓는 사람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무조건 순종만 해야 합니다.
그런데 배 밑창에는 일부러 노의 구멍 외에는 다른 창을 만들지 않는다고 합니다.
괜히 바다 경치를 보면, 노를 젖지 않게 되고, 딴 생각하느라 열심히 젖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유혹이 우리의 달려갈 사명의 길에 많이 있습니다. 유혹에 빠지면, 일꾼의 생명은 끝이 납니다.
남아메리카 밀림 속에는 ‘부쉬마스터’ 라는 독을 가득 품은 뱀이 있답니다.
이 뱀은 무서운 독을 가지고 있고, 몸집이 크고 매우 공격적이어서, 한 번 물리면 20분 이상은,
살아 있지 못 한답니다. 한 번 물리면 독이 전 혈액에 퍼져, 해독제를 써도 소용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독사는 빛깔이 너무 아름다워, 기어가는 모습이 마치 무지개의 영롱함처럼 황홀하기,
때문에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는 사람에게, 순간적으로 달려들어 물어서 생명을 잃게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위해 달려가다가, 인생사에 얽메이면 마귀의 공격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사명자인 우리는 아무 것이나 먹지 말고, 붙잡지 말고, 정신 팔리지 말고, 전진해야 합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그토록 이루기를 원했던 사명은, 과연 어떤 사명이었습니까?
사도 바울이 받은 사명은,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24절 말씀에서 보면,
“...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언하는 일...” 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사명은 자신이 세운 사명이 아니었습니다. 위로부터의 받은 하늘 사명이었습니다.
곧 주 예수께로부터 받은 사명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주 사명을 위해 전력질주 하였습니다.
스웨덴의 종교가요, 교육자였던 칼 힐티는 “인간 생애의 최대의 날은 자기의 역사적 사명,
즉 하나님께서 지상에서 자기를 어떤 목적에 쓰려고 하는지를 자각하는 날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내 생애의 최고의 날이 언제냐고 물으면, 사람마다 대답이 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내가 원하는,
대학에 합격한 날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고시에 합격한 날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고,
선거에 승리해서 권세를 잡은 날, 또는 원하던 사람과 결혼한 날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까지 살아오신 여러분의 생애에 최대의 날은 언제라고 생각하십니까?
힐티의 말처럼 인생의 최고의 날은, 하나님께서 나를 무슨 목적에 쓰려고 이 세상에 보냈는가를,
깨닫는 날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자기 사명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사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바울 사도의 사명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이었습니다.
아직도 그의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지 못했기에, 그의 사명이 아직 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인 저와 여러분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우리교회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여러분! 바울이 받은 사명이 곧 우리의 사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명은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증인의 사명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일을 해 주십니다.
우리가 우리 일을 하는 것이 잘하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해주시는 것이 더 잘되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모든 일을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이 우리 일을 대신 해주십니다.
사도 바울이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은, 내 생명을 드리기까지 감당해야 할 사명입니다.
오늘 본문 24절 말씀에서 보면 “...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한다.“ 고, 사도 바울은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생명을 드리기까지 감당해야 할 사명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언하는 일입니다.
내 생명을 다 드리기까지 감당해야 할,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언하는 사명은 자신의 희생이,
따라야만 합니다. 사도 바울도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까지도 기꺼이 내드렸던 순교자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명자였던 사도 바울은,
자신의 생명보다도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사명을, 더 귀히 여겼던 사람이었습니다.
영국의 수도 런던에서 열린 군축회의 때, 조지 5세의 메시지가 방송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콜롬비아 방송회사의 전선이 잘리는 바람에, 조지 5세의 방송이 갑자기 중단되었습니다.
그러자 수리 기사는 맨손으로 즉시 떨어진 전선을 연결하여 20분간이나 잡고 서 있었습니다.
기사의 양손은 화상을 입었지만, 그를 통하여 국왕의 소리는 수백만의 청취자들에게 전해졌습니다.
자신의 사명을 다하고자 하는 그의 용기가 없었다면, 국왕의 메시지는 전해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전하실 구원의 복음은, 인간이라는 전선을 통해 전달하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충실한 선교사님들과 충실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전하는,
인간 전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왕이신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이 전해지기 때문입니다.
내 생명을 드리기까지 감당해야 할 사명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는 일입니다.
미국의 지미 카터 대통령은 정치가로서는 훌륭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평가를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갈수록 그 사람의 인격의 무게가, 그 사람의 삶의 모습이 더 아름답게 되고,
더 빛이 나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으로 다가오는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한 기자가 지미 카터 대통령의 퇴임 후 모든 삶을 추적하면서, 이런 인상 깊은 기사를 썼습니다.
“지미 카터 대통령은 아마도 백악관이 목표가 아니었었던 유일한 대통령이다.” 라고 썼습니다.
백악관이 목표가 아니었던 유일한 카터 대통령은 그래서 퇴임 후, 미국민의 존경을 받습니다.
정치하는 사람들의 최고의 목표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다 대통령이지, 퇴임 후가 아닙니다.
지미 카터 대통령의 목표는 하나님을 잘 믿고 섬기며, 사람들을 잘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그 섬김의 한 과정에서 백악관이라는 대통령 자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졌을 따름입니다.
그래서 그는 대통령 재선에 실패하여 백악관에서 나와도 괜찮았던 이유가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렇게 백악관에서 나온 후에 그는 여전히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으로 섬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의 고향 조지아로 돌아왔고, 작은 고향교회에서 옛날처럼 주일학교 교사를 합니다.
한 달에 한 번씩, 그는 자원 봉사자로서 로잘린 여사와 함께 정성스럽게 교회 청소를 했습니다.
지금도 대통령까지 한 카터가 어떻게 청소하나, 주일학교에서 어떻게 아이들을 가르치나 해서,
구경 오는 사람들이 많답니다. 어떤 때는 그 교회는 교인보다 구경꾼들이 더 많을 때가 있답니다.
그리고 그는 지금도 한 달에 한 번씩 “헤비타트” 라는 집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집을 지어 주는,
집 짓기 사랑의 봉사사역을 위해서, 톱과 망치를 들고 가서 집 지어 주는 일을 하기도 합니다.
또한 그가 세운 카터 연구소에 가서 연구도 하고, 지금은 노령이라 하지 못하고 있지만, 한 때는,
국제적인 크고 작은 분쟁이 일어나면, 지미 카터 대통령을 화해 조정자로 보내달라고 한답니다.
왜냐하면 믿을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북한의 독재자들도 믿어주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그 사람의 인생관은 어떤 자리가 아닙니다. 벼슬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물질도 아닙니다. 그의 존재, 곧 그가 어떤 사람이 되느냐? 어떤 신앙과 성품과 인격을 가진,
사람이 되느냐가 인생관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여러분의 삶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사명자 - 곧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 고 유명한 고백을 했습니다.
그리고 내 생명을 드리기까지 감당해야 할 사명은, 작은 일에도 충성하는 것입니다.
뉴욕의 큰 백화점에 엘리베이터를 맡아보는 서비스 보이 한 명이 돈께나 있어 보이는,
점잖은 손님을 발견하고는, 잘 하면 많은 팁을 받을 수 있겠다 생각해 친절하게 그를 모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손님은 세상 사람들이 '자동차 왕' 이라 부르는 포드회사 사장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포드는 동전 한 개를 꺼내더니, 서비스 보이에게 주는 것이었습니다.
화가 난 서비스 보이는 "감사합니다. 이만한 돈은 제게도 있으니 도로 가져가십시오!" 하고는,
동전을 다시 돌려줍니다. 포드는 동전을 다시 받으면서 하는 말이 "음 그래, 그러면 그만 둬라.
그러나 너는 반드시 이 동전하나 때문에 눈물 흘려야 할 날이 올 것이다." 하고 가버렸습니다.
그 후 소년은 자라서 위대한 사업가가 되었는데, 그가 이처럼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을 묻자,
그는 그날의 일을 떠올리며, 포드에게서 배운 교훈으로 분발했기 때문이라고 답변했습니다.
그것은 작은 것이라고 소홀히 하는 자는, 크게 될 수가 없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미국의 시인인 쥴리아 플래처라는 사람은, 사람의 자그마한 행위가 다른 사람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준다는 것을 '조그마한 것들' 이라는 짧은 시를 통해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조그마한 물방울들 / 조그마한 모래알들이 / 엄청난 바다와 헌칠한 땅을 이루네.
인정도 마찬가지 / 아무리 조그마한 일이라 할지라도 / 영원한 자국을 우리 인생에 남기네!“
우리 예수님도 지극히 작은 일에 대한 충성을, 크게 칭찬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6장 10절 말씀입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느니라.” / 그리고 누가복음 19장 17절입니다.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을 위해서 사는 삶은 절대로 후회하지 않는 삶이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을 위해서 사는 삶은,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유명한 설교가이신 성 크리소스톰의 일화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가 당시 국가에서 법으로 금한 기독교 복음을 전한다고 체포당하여 감옥에 갔을 때입니다.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감옥에 죄수들을 복음화 하라고 저를 파송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는 감옥에서도 쉬지 않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결국 그는 사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때의 기도가 무엇이겠습니까? “주님, 감사합니다. 성도의 가장 아름다운 죽음이 순교라고 했는데,
저 같은 사람을 순교의 반열에 동참케 하시니 감사합니다.“ 크리소스톰은 사형장으로 끌려갑니다.
그러나 성자 크리소스톰에게 교수형이 집행되려고 할 때에, 갑자기 사형 중지령이 내렸습니다.
그때도 크리소스톰은 눈물로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아직도 종에게 할 일이,
더 남았다는 것입니까? 죽도록 충성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이것이 성도가 감사해야 할 이유입니다.
살아도, 옥에 갇혀도, 죽게 되어도, 감사하는 마음,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명을 다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주신 사명이 있습니다.
내 생명을 드리기까지 감당해야 할 사명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입니다.
내 생명을 드리기까지 감당해야 할 사명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는 일입니다.
내 생명을 드리기까지 감당해야 할 사명은, 비록 작은 일에도 죽도록 충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사나 죽으나 주님 주시는 사명을 잘 감당해서,
잘했다 칭찬받고, 생명의 금 면류관 다 쓰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