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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8월(제5차) 대구박물관대학총동문회 군산 일원 답사
일시 : 2013년 8월23일(금)
장소 : 금산사. 군산
★ 김제 금산사 일원(金堤 金山寺 일원. 사적 제496호)
조선 성종 23년(1492)에 작성된 "금산사 5층석탑 중창기"에 의하면, 금산사는 이미 석가모니 부처님 이전의 가섭불 때에 있었던 옛 절터를 다시 중창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금산사의 터전이 오래 전부터 부처님과 인연이 깊었던 것임을 알 수 있게 한다.
흔히 통일신라 시기 진표율사에 의하여 창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엄밀히 따지면 그는 중창자이지 창건주는 아니다.
왜냐하면 "삼국유사"를 비롯한 기록에 의하면, 진표율사는 금산사의 순제법사에게 출가한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진표율사 이전에 이미 금산사가 창건되었음을 알게 한다.
남아있는 "금산사사적"의 기록에 의하여 금산사가 백제 법왕 1년인 599년에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금산사의 모습이 크게 부각된 것은 통일신라 시기 경덕왕 때 진표율사에 의한 중창 때문이다.
금산사에서 숭제법사의 가르침을 받아 수행을 하던 진표율사는 27세 때에 변산 부사의암(不思議庵)에서 철저한 수행에 전념하였다. 17년간을 몸을 돌보지 않는 망신참의 고행을 통하여 마침내 미륵보살과 지장보살로부터 간자와 계본을 전해 받게 된다.
이후 진표율사는 금산사로 다시 돌아와 금산사의 중창불사를 발원하고, 경덕왕과 왕실의 후원을 받아 6년에 걸쳐 가람을 대규모로 일으켜 세웠다. 이때가 경덕왕 21년인 762년부터 혜공왕 2년인 766년에 이르는 기간이었다.
금산사의 창건과 관련하여 "금산사사적"의 내용을 근거로 불 때 599년 백제 법왕의 자복사찰로 창건되었으며, 이 후 진표율사에 의한 6년여의 중창으로 사찰다운 모습을 갖추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금산사가 미륵신앙의 성지로 자리 메김 한 것은 진표율사 때부터이다.
한국의 명찰 금산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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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8월 23일(대구박물관대학총동문회)에 답사 할 금산사 입니다. 위의 동영상 보시고 오신다면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화면이 나타나면 200% 혹은 Full로 보시면 좋습니다)
★ 김제 금산사 오층석탑(金堤 金山寺 五層石塔. 보물 제25호)
전설에 따르면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금산사를 창건하면서 이 석탑을 건립하였을 것이라 하나 이는 잘못된 것이고, 고려시대에 조성되었다는 확실한 기록이 전한다. 즉 1971년 11월에 석탑을 해체 수리하는 과정에서 〈모악산금산사오층석탑중창기〉가 발견되었는데, 그 내용 가운데 979년(경종 4)에 시작하여 981년에 완성했다는 사실이 보인다. 한편 탑 속에서는 중창기와 함께 금동관음상을 비롯한 여러 소불상이 발견되었는데, 이 탑의 복장품은 현재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다.
★ 김제 금산사 금강계단(金堤 金山寺 金剛戒壇. 보물 제26호)
송대(松臺)라고 부르는 미륵전의 북쪽 높은 대지에 방등계단(方等戒壇)이 있다. 또한 이 계단의 중앙에 보물 제26호인 부도가 1기 있어 그 형태에 따라 석종형(石鐘形) 부도라고 부른다.
방등계단의 수계법회(受戒法會)를 거행할 때 수계단을 중앙에 마련하고, 그 주위에 삼사(三師)와 칠증(七證)이 둘러앉아서 계법을 전수하는데 사용했던 일종의 의식법회 장소이다. 이러한 예는 경상남도 양산의 통도사 와 개성의 불일사(佛日寺) 등지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한국 불교의 독특한 유산이다. 불교의 정신을 대표하는 계(戒).정(定).혜(慧) 삼학(三學) 가운데 계는 으뜸으로서 계를 지킴은 불교의 기본 토대가 된다. 이 계의 정신이 일체에 평등하게 미친다는 의미에서 방등계단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한편 방등계단의 성격을 도솔천(兜率天)의 세계를 표현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즉 미륵신앙의 근본도량인 금산사에는 미륵의 하생처로서 미륵전을 조성하고, 그 위에 도솔천을 구현하여 미륵상생신앙을 나타냈다는 말이다. 결국 금산사는 미륵상생신앙과 하생신앙을 조화롭게 겸비하였다는 신앙적 성격을 지녔다는 뜻이 된다.
조선조 생육신의 한 사람이었던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이 절을 찾아 이곳 방등계단에서 남긴 시가 한 수 전한다.
구름 기운 아물아물, 골 안은 널찍한데,
엉킨 수풀이 깔린 돌에는 여울소리 들려오네.
중천에 별들은 금찰(金刹, 금산사)을 밝히는데,
밤중에 바람과 우레가 석단(石壇, 방등계단)을 감싸 도는구나.
낡은 짐대「幢」엔 이끼 끼어 글자가 희미한데,
마른 나무에 바람 스치니 저녁 추위가 생기누나.
초제(招提, 객실)에서 하룻밤 자고 가니,
연기 속 먼 종소리에 여운이 한가롭지 않다.
★ 김제 금산사 육각 다층석탑(金堤 金山寺 六角 多層石塔. 보물 제27호)
대적광전 오른쪽 앞마당에 위치하며 보물 제27호이다. 탑의 재질이 흑색의 점판암으로 된 특이한 경우인데, 완전한 모습은 아니지만 정교하면서도 우아한 공예적 석탑이다. 본래의 자리는 봉천원구가 있던 대웅대광명전의 앞마당에 있었다. 봉천원구는 혜덕왕사가 1079년(문종 33)에 절의 주지로 있으면서 창건했으므로 탑도 이 무렵에 조성된 것이라 생각된다. 그 뒤 조선시대에 들어와 정유재란으로 봉천원구가 모두 소실되자 수문대사가 대사구, 곧 지금의 금산사를 중창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탑을 옮겨왔다.
이 탑은 신라시대의 일반적 석탑에서 고려시대의 화력하고 장식적 공예탑으로 넘어가는 초기의 작품이다. 완전한 모습은 아니지만 각 층의 체감비례가 적절하고, 옥개석의 조각이 섬세한 점 등이 이후 고려시대의 공예탑이 지니는 초기적 수법을 간직하고 있다.
★ 김제 금산사 노주(金堤 金山寺 露柱. 보물 제22호)
대적광전 오른쪽에는 독특한 형태의 노주(露柱)가 있다.
노주란 ‘노반지주(露盤之柱)’의 줄임말로서 처음에는 전각의 정면 귀퉁이에 세우는 두 개의 장대였다가 나중에 탑의 상륜부를 구성하는 부재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는 탑의 일부인 이 노주가 왜 별도의 조성물로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가 없다.
사중기록에 보면 ‘노주’는 잘못 된 명칭이고, ‘광명대(光明臺)’로서 미륵전 앞에서 미륵불에게 광명을 공양하던 석등이었다고 한다. 이 말이 맞는다고 한다면 지금의 모습은 불을 밝히는 곳인 화사석(火舍石)이 없어진 상태가 된다.
고려시대의 조성 기법을 간직하고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어 보물 제22호로 지정되었다.
★ 김제 금산사 석등(金堤 金山寺 石燈. 보물 제828호)
대장전 앞에 보물 제828호인 고려시대의 팔각석등이 있다. 지대석에서 보주까지 거의 완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고 전체 높이는 3.9m이다. 사각형의 지대석위에 하대석을 얹고 그 위에 간주석(竿柱石), 연화석(蓮華石), 화사석(火舍石), 옥개석, 보개, 보주의 순서로 조성되었다.
이 석등은 화창에 시설했던 창문만을 제외하면 현재 거의 완벽한 모습을 남기고 있다.
더욱이 오랜 가람의 변천에도 불구하고 제자리를 잃지 않고 은은한 법등을 밝혀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금산사의 귀중한 성보문화재라 하겠다.
★ 김제 금산사 혜덕왕사탑비(金堤 金山寺 慧德王師塔碑. 보물 제24호)
이 부도군의 3번 부도비가 보물 제24호로 지정된 혜덕왕사진응탑비(慧德王師眞應塔碑)이다. 고려 예종 6년(1111년)에 세운 것이다.
현재 탑비는 귀부와 비신만이 남아 있고 비의 머리 부분은 결실되었다. 대리석의 비신은 높이 2.78m, 너비 1.5m로서 심하게 손상되어 비문은 판독하기 어렵다. 그러나 다행히 『해동금석원』등에 그 내용이 전한다. 비문의 글씨는 약 2cm의 크기로 구양순의 해서체인데 활달하고 쾌적한 멋을 지녔다. 비의 앞면에 43행 77자씩으로 스님의 출생과 교화활동, 입적 등을 적었으며 그 둘레는 당초문으로 장엄했다.
서자(書者)와 찬자(纂者)의 이름은 판독할 수 없고 각자(刻者)의 이름은 밝히지 않았다. 『해동금석원』에 의하면 이오가 짓고 정윤(鄭允)이 썼으며 비음(碑陰)은 채추탄(菜推誕)이 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조선금속고』에서는 비음을 채추탄이 쓴 것으로 밝히고 있다.
귀부는 방형의 지대석위에 놓였는데 신체는 장대하나 머리는 작은 편이다.
등에는 육각의 갑문(甲文)을 새기고 등위에 비신을 얹는 삽입부를 마련했다. 역동적인 발과 비늘의 표현이 마치 살아 있는 듯하다. 고려시대의 탑비 가운데 우수한 작품임을 알게 한다.
★ 김제 금산사 당간지주(金堤 金山寺 幢竿支柱. 보물 제28호)
금강문에서 동북쪽으로 50m쯤 떨어진 곳에 보물 제28호로 지정된 당간지주가 있다. 절에 중요한 행사나 법회가 있을 때 깃발을 걸어서 이를 알리는 일종의 안내판이 당간(幢竿)이고, 이를 지탱하는 것이 지주(支柱)이다.
그래서 당간지주는 반드시 절의 입구에 놓이게 마련이다. 장방형의 계단식 3층 기단과 그 위에 당간을 받치고 있던 간대(竿臺), 지주를 놓던 기단석 등이 잘 남아 있다.
정연한 기단부와 지주의 다양한 조각 등이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당간지주 가운데서 가장 완성된 격식을 갖춘 작품이다. 지주에 세 곳의 홈을 마련한 예는 익산의 미륵사지와 경주 보문리 당간지주에서도 볼 수 있어 같은 조성연대, 곧 8세기의 조성으로 추정된다. 한편 진표율사가 절을 중창한 것이 766년(혜공왕 2)의 일이므로 당간지주의 조성시기를 이 무렵으로 보아도 틀리지 않을 것 같다.
★ 김제 금산사 석련대(金堤 金山寺 石蓮臺. 보물 제23호)
석련대는 석조연화대좌의 준말로 불상을 올려놓는 돌로 만든 받침대이다. 연화대좌는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지만 이것은 형태가 희귀하고 크기도 매우 거대하다. 금산사 대적광전에서 동남쪽으로 10m쯤 되는 돌단 밑에 있는데, 이곳이 원래 위치인지는 알 수 없다.
한 돌로 조각한 것이지만 여러 개의 돌을 사용한 것처럼 상·중·하의 구성이 정연하다. 상대는 윗면이 평평하며 중앙에 불상의 양발을 세워 놓았던 것으로 보이는 네모난 구멍이 두 개 있다. 밑면에는 윗면을 떠받치는 연꽃이 에워싸고 있으며, 꽃잎 사이에도 작은 잎들이 틈틈이 새겨져 있어 더욱 화려하다. 중대는 육각형으로 꽃무늬를 돋을새김하였다. 하대는 엎어놓은 연꽃모양이 출렁이는 물결무늬처럼 전면을 채우고 있다.
이 작품은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사치스러운 조각 및 장식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에서 고려로 넘어가는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 김제 금산사 미륵전(金堤 金山寺 彌勒殿. 국보 제62호)
모악산에 자리한 금산사는 백제 법왕 2년(600)에 지은 절로 신라 혜공왕 2년(766)에 진표율사가 다시 지었다.
미륵전은 정유재란 때 불탄 것을 조선 인조 13년(1635)에 다시 지은 뒤 여러 차례의 수리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거대한 미륵존불을 모신 법당으로 용화전·산호전·장륙전이라고도 한다. 1층에는 ‘대자보전(大慈寶殿)’, 2층에는 ‘용화지회(龍華之會)’, 3층에는 ‘미륵전(彌勒殿)’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1층과 2층은 앞면 5칸·옆면 4칸이고, 3층은 앞면 3칸·옆면 2칸 크기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한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지붕 네 모서리 끝에는 층마다 모두 얇은 기둥(활주)이 지붕 무게를 받치고 있다.
건물 안쪽은 3층 전체가 하나로 터진 통층이며, 제일 높은 기둥을 하나의 통나무가 아닌 몇 개를 이어서 사용한 것이 특이하다. 전체적으로 규모가 웅대하고 안정된 느낌을 준다.
★ 김제 금산사 대장전(金堤 金山寺 大藏殿. 보물 제827호)
미륵전의 정면 서쪽에 앞면과 옆면 각 3칸씩의 다포식 팔작지붕인 대장전(大藏殿)이 자리한다. 이 전각은 보물 제827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장전은 본래 진표율사가 절을 중창하면서 세워졌다. 미륵전을 짓고 이를 장엄하는 정중목탑(庭中木塔)으로서 가운데에서 우측부분에 위치하였으며 정팔각원당형으로 조성했던 건물이다. 당시의 양식은 탑과 같이 산개형(傘蓋形)의 층옥(層屋)으로서 맨 꼭대기 옥개에는 솥뚜껑 모양의 철개(鐵蓋)를 덮고, 다시 그 위에 불꽃 모양의 석조 보주(寶珠)를 올렸다.
그 뒤 조선시대에 들어와 1635년(인조 13)에 가람을 중창하면서 본래 목탑이었던 것을 지금과 같은 전각의 형태로 변형하면서 대장전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지금의 위치로 이전된 것은 1922의 일이다. 이렇듯 여러 차례 변화가 있었지만 전각 꼭대기에는 복발과 보주 등이 아직 남아 지금도 신라 때의 목탑 양식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삼면의 벽은 모두 10폭의 벽화로 장엄하였는데, 흔히 볼 수 있는 십우도나 극락세계의 장엄 등이 아니라 구체적 인물과 사건이 등장하는 모습이다. 몇 개만 열거하면 ‘오달국사인명창’, ‘저지화상도담’, ‘치계전생담(雉鷄前生譚)’, ‘부설거사도술담(浮雪居士道術譚)’, ‘용파수상행(龍波水上行)’, ‘희운선사행적기(喜運禪師行迹記)’ 등이다. 또한 외벽에도 좌우로 벽화가 그려져 있다. 한편 대장전의 내부 출입문 위에는 1974년 건물을 중수할 때 참여한 사람들의 인명과 불상의 개금불사에 시주한 사람들 이름을 적은 현판이 걸려 있다.
★ 발산초등학교의 비밀(개정면 발산리)
발산리 석조 유물은 개정면 발산리에 자리한 현 발산초등학교 자리에 있다. 이곳은 1903년 12월 야마구찌현(山口) 구카군 출신의 시마다니 야소야 라는 자에 의해서 만들어진 시마다니 농장이 있던 곳이다. 시마다니는 일본에서 주조업으로 돈을 번 후 술의 원료인 쌀을 찾아 군산에 들어온 자로서 당시로서는 거금인 칠만 원의 자금으로 임피 외 2개 군에 486정보의 농장을 설립하였다. 그런데 이 자의 이름이 다른 농장들과는 달리 지금도 잊히지 않고 불리는 이유는 발산리에 있는 그의 저택 정원에 장식용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우리 민족의 문화재를 많이 수집 약탈하였고 현재도 그 유물들이 발산 초등학교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현재 군산의 근대 유물로 보호받고 있는 발산리 석조 유물은 식민지 시대 이 자리에 일본인 거대 농장주 시마따니에 의해서 충청남도와 전라남·북도에서 옮겨진 석조 유물들이다. 총 31기의 이 유물 중에는 보물 제234호인 용무늬 간주석이 특징인 석등과 보물 276호인 고려시대 5층 석탑 그리고 6각 정자형 부도라는 특이한 형태의 부도 등 다양한 우리 조상들의 유물들이 나라가 망하면 문화재조차 제자리를 빼앗기게 된다는 교훈을 말해주며 오늘도 초등학교 후원에 서 있다.
이곳 발산초등학교에는 석조 유물 말고도 관심을 끄는 건물이 있는데 그것은 그 용도가 금고로 이용된 3층 금고형 건물이다. 이른바 구라(倉)이라고 불리는 이 건물은 지하 1층에 지상 2층의 3층 건물인데 외벽은 벽돌을 사용하지 않고 콘크리트 몰탈의 거푸집 공법으로 만든 후 내부의 각 층을 구분하는 나무 마룻바닥을 만들었다. 외부로 난 창은 쇠창살을 대고 철문으로 2중 방범 장치를 하였다. 또한 출입문은 거대한 미국제 금고문을 달아 놓아 건물 자체를 금고로 만든 특이한 형태의 건물이다. 이러한 모습의 건물은 군산에는 장미동의 十八은행에 한 곳이 아직 남아 있어 비교해 볼 수가 있다.
이 금고 건물에는 농장의 중요 서류와 현금 그리고 시마다니가 수집한 한국의 고미술품이 다수 소장되어 있었는데 고미술품은 해방 후 미군정청에서 모두 가져갔다고 한다. 해방 후 혼란기에 시마다니 농장의 주인이었던 시마다니 야소야는 한국민으로 귀화를 요구하며 농장을 지키려고 하는 땅에 대한 애착을 보였으나 결국 그 또한 가방 두 개만을 지닌 채 부산에서 마지막 귀국선에 몸을 실어야만 했다.
이곳 발산초등학교는 한때 군산의 주인이었던 일본인 지주들이 이 땅을 자신들의 영지로 생각하고 이곳에 자신들의 작은 왕국을 꾸며 왕처럼 살았던 흔적으로 지금도 남아 있다.
★ 군산 발산리 석등(群山 鉢山里 石燈. 보물 제234호. 전북 군산시 개정면 바르메길 43 (발산리) 발산초등학교)
이 석등은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 석등으로 현재 높이는 2.5m이다.
원래는 완주지역에 세워져 있던 석등으로, 일제강점기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웠다. 불을 켜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로는 이를 받쳐주는 3단의 받침돌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은 모습이다.
받침의 가운데기둥은 사각의 네 모서리를 둥글게 깍은 모습으로, 표면에 구름 속을 요동치는 용의 모습을 새겼는데, 이러한 형태는 우리나라에서는 하나밖에 없는 독특한 모습이다. 화사석은 4각의 네 모서리를 둥글게 깎아 8각을 이루게 하였으며, 각 면에는 4개의 창과 사천왕상(四天王像)을 번갈아 두었다. 사천왕은 불교의 법을 지키는 신으로, 화사석에 새겨 놓아 등불을 보호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지붕돌은 8각으로 각 모서리선이 뚜렷하며, 곡선을 그리는 처마는 여덟 귀퉁이에서 추켜올림이 시원하다. 꼭대기에는 연꽃무늬가 조각된 머리장식 받침대를 마련해 놓았으나, 머리장식은 남아있지 않다.
화사석의 사천왕상과 지붕돌의 양식 등을 통해 볼 때 통일신라시대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듯하다, 받침부분의 기둥이 4각으로 변하고 화사석 역시 4각을 닮은 8각으로 이루어져 있어, 8각에서 4각으로 변해가는 과도기적인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다. 석등을 만든 시기도 고려 전기인 10세기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 군산 발산리 오층석탑(群山 鉢山里 五層石塔. 보물 제276호. 전북 군산시 개정면 바르메길 43 (발산리) 발산초등학교)
원래는 완주(完州) 봉림사터에 있던 것을 지금의 위치로 옮겨 세웠다. 2단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였으나 지금은 탑신의 한 층이 없어지고 4층까지만 남아있다.
아래·위 기단 모두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으며, 기단 위로 4층의 탑신에는 각 층의 몸돌마다 네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다. 지붕돌은 경사가 급하고 추녀 끝이 약간 들려 곡선을 이루고 있으며, 밑에는 3단의 받침을 두어 고려시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탑머리 부분에는 머리 장식이 일부 남아 있으나 훗날 보충한 것으로 보인다.
이 탑은 전체적으로 균형미가 있으며, 고려 탑의 간결한 아름다움이 잘 나타나 있다
★ 발산리육각부도(鉢山里六角浮屠. 전북 문화재자료 제185호. 전북 군산시 개정면 발산리 45-1 발산초등학교)
이 부도는 1903년 군산에 농장을 개설한 일본인 시마따니 야소야라는 사람이 위치를 알 수 없는 절터에서 가져온 것으로 전한다.
육각의 지대석 위에 2단의 하대석이 있는데 하단은 안상이 새겨져 있고 상단은 복련과 함께 중대받침이 높게 각출되어 있다. 육각의 중대석에는 우주를 모각하고 있으며 앙련의 상대석 위에는 낮은 탑신받침이 있다.
육각의 탑신석은 2개소에 문비를 모각하였으며, 4면에는 희미하여 확실하지는 않지만 사천왕상이 각출된 것으로 보이며, 옥개석 아래에는 3단의 옥개받침과 함께 연자와 부연을 모각하였으며 상면은 기왓골을 선명하게 조각하였다.
오각부에 귀꽃장식이 있었으나 모두 결실되었으며 상륜부도 결실되었다. 전체높이는 175㎝ 내외이다.
이 부도는 전체적인 구도와 조각수법이 뛰어나며 6각이라는 형태가 특이한 부도이다. 이 부도의 본디 위치와 주인공에 대한 것을 알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부도는 일반적인 탑형 부도 양식을 따르면서 그 평면이 6각이라는 점에서 대단히 드문 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우리나라 불교 조형물에서 6각이 등장하는 것이 고려시대에 들어 중국 송나라의 영향에 의한 것이라 하여 그 연대를 어림할 수가 있다. 또 전북 김제에 있는 6각 평면 구도를 가진 금산사육각다층석탑(보물 제27호)과 같은 맥락에 속하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평면형의 특이함과 희소가치만이 아니라 비교적 높은 조각수법과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 군산 개정면 구 일본인농장 창고(구. 시마타니 금고. 국가등록문화재 제182호. 전북 군산시 개정면 발산리 45-1 발산초등학교)
2005년 국가등록문화재 제182호로 지정된 시마타니금고는 일제 강점기 군산 지역의 대표 농장주였던 시마타니 야소야가 1920년대에 지은 금고용 건물이다.
시마타니는 우리 민족의 문화재 수집에 관심을 가지고 발산리 석등과 오층석탑을 비롯한 수많은 예술품을 불법 수집하였던 인물이다. 이 건물은 시마티니가 수집한 골동품을 보관하던 장소였다.
건물은 3층의 콘크리트 건물로 입구에는 철제 금고문이 달려 있고, 창문은 쇠창살과 철판으로 이중 장금 장치가 되어 있다.
현재 발산초교 자리에 농장을 만들었던 시마타니 야소야는 일본의 야마구찌현 구카군 출신으로 일본에서 주조업으로 재산을 모은 후 일본 청주의 원료인 값싼 쌀을 찾아 군산에 온 자인데 그는 1903년 12월 당시 돈 7만원으로 발산리 인근의 토지를 매입하면서 농장을 만들기 시작하여 1909년이 되자 임피 외에도 2개면에 486정보의 농지를 소유한 농장주가 된다.
땅에 대한 집착이 강했던 시마타니 독은 해방 후 자신의 농장을 지키기 위해서 미군정청에 한국인으로 귀화를 신청했고 다른 일본인이 떠난 후에도 끝까지 귀국을 거부했고 그 덕분에 그는 군산의 마지막 일본인 농장주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지만 결국 그도 미군정청의 강제적 권유로 손가방 두 개만을 지닌 채 부산항에서 마지막 귀국선에 몸을 실어야 했다.
이 건물은 반지하인 1층과 지상 2층으로 이어진 3층까지 하나의 구조물인 일체형으로 만들고 내부의 각층은 나무마루로 구분된 건물이다.
외부로 통하는 창문에는 쇠창살을 치고 그 바깥쪽으로 철문을 달아놓아 2중의 방범장치가 되어 있다.
출입문은 USA마크가 선명한 문을 달아 놓았는데 2차 세계대전 이전 미국에서 수입한 수입품임을 알 수 있다.
금고의 반지하에는 옷감과 음식류가 있었으며, 2층에는 농장의 중요서류와 현금이 있었고, 3층에는 한국의 고 미술품이 다수 소장되어 있었다고 한다.
★ 이영춘가옥(李永春家屋. 전북 유형문화재 제200호. 전북 군산시 개정동 413-11)
이 집은 구 개정병원 본관 동쪽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는데 1920년경 일본인 대지주 구마모토가 지은 개인별장으로 외부형태에 있어서는 유럽의 주거형식을 따르며 평면의 구조는 일식의 중복도형 평면을 바탕으로 양식의 응접실과 한식 온돌방이 결합된 절충적 구조를 보여준다.
이영춘 박사가 사용하면서 일식의 다다미방을 온돌방으로 개조하였으며, 외관의 구조를 포함한 전체적인 주거의 틀은 그대로 유지되어 있다.
가옥내의 기초와 벽난로는 호박돌을 허튼층쌓기 하였고 외벽의 하부는 통나무를 절반으로 켜서 걸침턱맞춤으로 짠 귀틀집의 구조이며 외벽의 상부는 회반죽 뿜칠로 마감하여 색채와 질감이 목재와 좋은 조화를 이룬다. 지붕은 요철이 있는 평면구조에 맞추어 박공과 모임지붕이 결합된 형태 위에 판석으로 마감하였다.
이 집의 바닥은 티그목 쪽매널이 정교하게 짜여 있으며 샹들리에 및 가구들은 외국에서 수입한 것들로 당시 건축비가 조선총독부의 관저와 비슷하게 소요되었다고 할 만큼 고급 자재를 사용하였다.
중복도를 중심으로 남쪽에 커다란 다다미방이 있고 북쪽에는 현재 식당으로 사용하는 온돌방이 있으며 복도 끝에 작은 홀이 있어 부엌과 다용도실, 화장실이 연결된다.
외부와 연결되는 북쪽 창은 유리를 낀 세살창과 미닫이 방충망, 완자창 등 3중의 창을 만들었으며 부엌은 현재 북쪽에 개수대를 설치하여 서서 행동하도록 된 부엌으로 개조하였다.
이 건물은 근대의 새로운 주거문화의 이입과 양상을 보여주는 건축물로서 평면과 외관의 구성을 볼 때 뛰어난 건축적 구성을 하고 있다. 서구식·일식·한옥의 양식이 결합된 이와 같은 사례는 도내의 주거 건축에서 그 사례를 볼 수 없으며 다른 도에서도 흔치않은 사례로 파악된다.
또한 이 건물은 일제의 토지수탈의 역사를 보여주는 사료적 가치가 있으며 해방 후 주인이었던 이영춘 박사의 지역 의료 활동에 끼친 역사적 비중을 볼 때 가치가 있다.
★구 군산세관본관(舊 群山稅關本館. 전북 기념물 제87호. 전북 군산시 장미동 49-38)
대한제국(1908년/순종 2년 6월)에 만들어졌으며 당시 전하는 말에 따르면 불란서 사람 혹은 독일 사람이 설계하고 벨기에에서 붉은 벽돌과 건축자재를 수입하여 건축했다는 설이 있다.
군산세관은 많은 부속건물이 있었으나 현재는 모두 헐리고 본관건물만이 남아 있으며, 국내에 현존하는 서양고전주의 3대 건축물 중의 하나로 현재는 호남관세전시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1905년 기울어가던 대한제국의 자금으로 시작된 제1차 군산항 축항공사기간 (1905~1910) 중인 1908년(순종2년) 6월에 만들어졌다. 서양식 단층 건물로 건평은 약 69평 이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불란서 또는 독일 사람이 설계하고 벨기에에서 붉은 벽돌과 건축자재를 수입하여 건축했다고 한다. 건물의 지붕은 고딕양식이고 창문은 로마네스크 양식이며 현관의 처마를 끄집어 낸 것은 영국의 건축양식으로 전체적으로 유럽의 건축양식을 융합한 근세 일본 건축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국내 현존하는 서양고전주의 3대 건축물
1) 구)군산세관 본관 2) 한국은행 본점 3) 서울역사
★ 구 일본 제18은행 군산지점(舊 日本 第十八銀行 群山支店. 등록문화재 제372호. 전북 군산시 해망로 230(장미동))
일본 나가사키에 본사를 두고 있던 은행으로 군산에는 1907년에 설립되어 조선에서 일곱 번째 지점이 되었으며, 일본으로 미곡을 반출하고 토지를 강매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된 금융기관이었다.
초기에는 대부업을 통해 일본인들에게 싼이자로 대출을 주고 이 돈으로 일본인들은 조선인에게 토지를 담보로 한 고리대금업으로 우리 농민들의 농토갈취가 많았다고 한다.
본관 뒤쪽으로 우측에는 2층 조적조의 금고 및 창고로 사용되는 건물이 있고 좌측으로는 2층의 일식 목조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18은행은 일본 나가사키(長崎)에 본사를 두고 있던 은행으로, 숫자18은 은행 설립인가 순서를 의미한다. 군산지점은 조선에서 7번째 지점으로 1907년에 설립되었다. 군산의 18은행은 주 업무가 무역에 따른 대부업이 주종을 이루었다. 광복 후 대한통운 지점 건물로 사용되었으며 2008년 2월 28일 등록문화재 지정 이후 보수·복원을 통하여 군산 근대미술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 구 조선은행 군산지점(舊 朝鮮銀行 群山支店. 등록문화재 제374호. 전북 군산시 해망로 214(장미동))
일제강점기 식민지 지배를 위한 대표적인 금융시설로 1923년 건립되었으며 일제 강점기 군산을 배경으로 한 채만식의 소설 탁류에 등장하기도 한 이 건물은 군산의 근대사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건물이다. 1909년 대한제국 국책은행으로 설립된 한국은행에 기원을 두고 이으며 한일합방이 되자 총독부에 의해 조선은행으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조선총독부의 직속금융기관 역할을 하기도 했던 건물이다.
이 건물은 한국에서 활동했던 대표적인 일본인 건축가 나카무라 요시헤이(中村資平)가 설계하여 1922년에 신축한 은행 건물로 채만식의 소설 '탁류'에서 고태수가 다니던 은행으로 묘사되기도 하였다. 당시 일본상인들에게 특혜를 제공하면서 군산과 강경의 상권을 장악하는데 초석을 쌓아, 일제강점기 침탈적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은행이었다. 2008년 보수·복원 과정을 거쳐 군산 근대건축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 미즈카페(Miz Cafe. 전북 군산시 장미동 33-1)
1930년대 건립되어 무역회사 사용되었던 건축물이었으나 2012년도에 근대역사박물관 정면에서 이곳으로 이전, 개축하였다.
이 일대는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쌀 수탈의 거점이 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일본인들의 무역회사와 상업시설이 독점하는 거리가 되었다.
1930년대 무역회사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이 건축물을 이전, 개축하면서 카페테리아, 근대문학 소통공간으로 개보수하였다
★ 부잔교(浮棧橋 전북 군산시 장미동)
군산내항은 금강하구와 중부 서해안에 자리한 지리적 특징으로 고려시대는 진성창이 자리하였고 조선시대에는 칠읍해창이 운영되던 물류유통의 중심지였다.
이러한 해상교통로의 역할을 염두 둔 일본은 1899년 군산이 각국 조계지역으로 개항된 후 군산항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1905년 제1차 축항공사를 시작으로 1921년까지 많은 공사를 통해 연 80만 톤에 달하는 수출입화물 하역이 이루어졌다고 하며 부잔교는 물 수위에 따라 다리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여 뜬다리부두라고도 하며 1918년~1921년, 1933년 준공되었다고 한다.
★ 진포해양테마공원(전북 군산시 장미동 1-4)
군산 내항의 진포해양테마공원은 고려 말 최무선장군이 최초로 화포를 이용하여 왜구를 물리친 진포대첩을 기념하며 미래의 주역인 어린이들의 체험학습의 장으로 활용, 올바른 역사의식 확립과 자긍심 고취를 위해 당시 전투현장이었던 내항일대에 육․해․공군의 퇴역장비 13종 16대를 전시하여 공원을 조성하였습니다.
4200t급 위봉함 3,288㎡(지하2층, 지상4층)에 병영생활상의 모형 및 용품을 전시 재현하는 등 체험 위주의 전시공간을 구축하고자 흥미를 자아낼 수 있는 4D 영상관(시뮬레이터 입체영상관), 위봉함을 비롯한 해경정, 수륙양용장갑차, 자주포, F-86 전투기 등 총 16대의 육․해․공군의 퇴역 군장비를 활용한 체험형 복합테마공간입니다.
군산 내항(위의 사진 클릭하시면 원본 크기의 사진이 보입니다)
★ 진포대첩(鎭浦大捷)
진포대첩(鎭浦大捷)은 지금으로부터 626년 전 금강 하구의 진포(鎭浦)에 침입해 온 왜구(倭寇)들을 고려의 수군(水軍)이 격퇴한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이곳 군산(群山)의 현장에서 있었던 해전(海戰)에서의 빛나는 승리로 그토록 오랫동안 고려를 괴롭혀 왔던 해적집단 왜구의 기세는 마침내 꺾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실 그 뒤의 이성계(李成桂)의 황산대첩(荒山大捷)과 정지(鄭地)의 남해대첩(南海大捷)도 이 진포대첩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진포의 전투는 1380년(우왕 6년) 8월 왜구들이 5백척의 대선단(大船團)을 이끌고 진포에 침입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1만 명 이상의 정예 병력으로 추정되는 그들은 큰 밧줄로 배들을 서로 연결하여 묶어 놓고 군사를 나누어 이를 지키게 한 다음, 대부대를 거느리고 연안에 상륙하여 주변의 고을들을 무자비하게 약탈했습니다. 이들 왜구의 야만적인 약탈로 인하여 우리 백성들의 시체가 산과 들을 덮었으며, 약탈한 곡식을 배로 실어 나르면서 흘린 쌀이 한 자 두께가 넘게 땅에 수북이 흘렸을 만큼 그 피해가 매우 컸다고 [고려사(高麗史)]는 당시의 치열했던 상황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들 왜구를 진압하기 위하여 나선 고려의 지휘사령부는 해도원수(海道元帥) 나세(羅世)와 심덕부(沈德符), 그리고 최무선(崔茂宣)이었습니다. 이들은 전함 1백 척을 거느리고 진포로 달려와 왜구를 공략하였습니다. 이 때 최무선은 자신이 만든 화포(火砲)를 사용하여 함포사격을 통해 왜구의 배들을 불태워 싸움을 승리로 이끄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진포해전은 세계 해전사에 처음으로 화포를 사용한 전투였으며, 화력 기동 전술과 해상 포격전의 시초를 열어놓은 역사적인 해전이었습니다.
★ 기벌포(군산) 전투
663년 동아시아 4개국인 나당연합군과 백제·왜연합군이 참가한 기벌포(군산) 전투에서 백제·왜연합군이 패배함으로서 백제는 완전히 역사에서 사라지고 만다. 나당연합군의 기벌포 상륙작전 후 백제는 실로 어이없게 도성을 함락 당한다. 그러나 의자왕과 대신들의 항복으로 백제가 역사에서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곧바로 전국적인 부흥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나당연합군의 기습에 의한 도성의 함락과 백제 왕족의 몰락은 모든 백제인들을 놀라게 하였고 무력감에 빠지게 하였으나 사비성(부여)과 웅진성(공주)에서의 나당연합군의 살육과 약탈의 만행에 놀라 정신을 차린 백제인들은 각 지방의 토호인 성주들을 중심으로 부흥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오래지않아 백제의 전 국토는 부흥군의 세력 안에 들어가게 되어 도리어 나당연합군이 웅진과 사비성에 포위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백제부흥운동이 이렇듯 쉽게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요인은 나당연합군의 기습작전으로 사비성과 웅진성 지역 일부는 함락되었지만 이들 지역을 제외한 거의 모든 백제 성곽들이 건재한 상태였다는 것이 그 원인으로 보인다. 백제가 망하기 전 전체 성곽이 200여 성인 것에 비추어 볼 때 부흥군에 가담한 성이 200개 성이라 한다면 웅진사비의 도성지역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지역이 부흥군의 세력 하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와중에 부흥군의 지도부에 분열이 일어나 부흥군의 양대 우두머리 이었던 복신장군이 도침장군을 죽이고 병권을 장악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후 복신마저 일본에서 귀국한 부여풍왕에게 죽음을 당하는데. 이러한 혼란의 와중에 기벌포(군산)는 안타깝게도 다시 한 번 전쟁의 현장으로 역사에 등장한다.
* 참고자료 : 문화재청. 군산시청
대구박물관대학총동문회 카페 : http://cafe.daum.net/dbdd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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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답사 설명회(실크로드 천산북로)
일시 : 2013년 8월 28일(수) 오후 2시
장소 : 대구박물관 1층 시청각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