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인물에 대한 재평가는 어느 정도의 왜곡과 과장이 불가피해 보이긴 하다. 시간적 간격이 크고, 자료도 부족하다. 인물의 어느 한 면이 전체인 양 묘사되기도 한다. 특정 이미지를 가지고 책을 읽다 인물의 실제를 접했을 때 느끼는 간극은 그래서 생긴다.
사극은 인물이 가지는 일반화된 왜곡과 과장을 대개 수용한다. 대중의 입맛이 되어 버려 거슬리기 힘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끔 새롭거나 왜곡과 과장을 걷어 낸 실체에 가까운 인물을 보여주는 경우가 있다. KBS의 대하드라마 <대왕 세종> 속 황희와 최만리에 대한 묘사가 그렇지 않나 싶다.
청백리는 황희를 대표하는 이미지다. ‘너희들 말이 모두 맞다’고 한 일화에서 보인 두루뭉술한 처세도 황희하면 떠오른다. 하지만 이런 이미지는 황희의 실체와는 꽤 거리가 있다.
황희는 우리가 존경해마지 않을 수 없는 곧고 깨끗한 관리였을까.
이런 일이 있었다. 황희의 사위인 서달이 인사를 제대로 않는 아전을 혼내주고 있었다. 그런데 이를 항의하는 아전의 동료를 때려서 죽이게 된다. 죽은 이의 가족이 문제를 제기한 건 당연지사. 시끄러워지자 황희는 맹사성을 통해 사건무마를 부탁했고, 뜻대로 되는 듯했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재조사가 이뤄졌고 사건의 실체가 드러난다. 황희와 맹사성은 1주일 만에 복직되긴 하지만 일단 파직된다.
황희는 말 천여 두를 죽인 태석균이란 자를 옹호하다 구설에 오르기도 하고, 개간 작업을 추진한 공을 내세워 개간지의 상당 부분을 차지해 눈총을 받기도 했다.
<세종실록> 세종 10년 6월 25일자에 사관은 황희를 이렇게 평가했다.
“황희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도 별로 없고 장인으로부터도 노비 셋을 물려받았을 뿐인데, 집 안팎에 부리는 노비가 많은 것은 매관매직하고 형옥을 팔아서 마련한 것이다.”
이어지는 문장은 더 충격적이다.
“또 황희는 박포의 아내와 간통을 하였는 데….”
자식들도 가관이다. 서자 황중생은 세자궁의 금띠, 금잔 등을 훔치다 발각됐다. 이 사건을 수사하다 적자 황보신이 더 많은 궁궐 패물을 빼돌린 게 드러나다. 황보신은 이 일로 과전을 반납하기로 했다. 그런데 형인 황치신이 자신의 돌밭과 반납하려던 기름진 땅을 바꾸려 했다고 한다.
청백리와는 전혀 상관없는 인물이었다.
최만리는 격렬한 한글반대 상소로 유명하다. 사실 우리가 최만리에 대해 아는 건 이 상소밖에 없지 싶다. 내용을 살펴보자.
“조선은 지성을 다해 대국을 섬기어 한결같이 중화의 제도를 따라왔는 데….언문을 창작하신 것을 보고 듣기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어찌 대국을 섬기고 중화를 사하는 데에 부끄러움이 없사오리까.”
미국이 없으면 나라가 곧 망하기라도 할 것처럼 난리를 치는 요즘 꼴통 수구의 사대주의의 원조를 보는 듯 해 민망하다.
“몽고, 서하, 여진, 일본, 서번이 각기 자기 글자가 있으되 오랑캐의 일이므로 언급할 가치도 없사옵니다…이제 언문을 따로 만드는 것은 중국을 버리고 스스로 오랑캐와 같아지려는 것입니다.”
“(이두를) 사용한 지 수천 년 동안 장애가 없었사온데 어째서 상스럽고 무익한 글자를 만드십니까.”
써놓고 보니 요즘의 영어광풍을 떠올리게 된다. 요즘 한글 대접이 딱 요 정도 아닌가. 제 나라 문자를 만들었다고 오랑캐라고 하다니, 분하다.
“언문은 ‘새롭고 기이한 기예’에 지나지 못한 것으로 학문에 방해되고 정치에 무익하며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옳은 것을 볼 수 없습니다.”
도가 지나친 한글 비판에 한 줄 한 줄 읽을 때마다 분이 치민다.
하지만 최만리를 이쁘게 본다고 생각하고 ‘상소를 올린 것’를 해석해보자. 상소 내용이 아니다.
최만리의 상소에 분이 치미는 것은 우리가 오늘날의 기준을 적용하기 때문이다.
‘독보적인 우수성’, ‘최고의 편리함’, ‘우리 문화의 근간’ 등 한글에 대한 상찬은 역사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당시 지식인들에게 유일한 문자는 한자였다. 한글의 창제는 아마도 그들에게 경천동지할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최만리의 반대는 당시는 너무나 상식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수백 년간 한글이 당한 취급을 생각하면 쉽게 알 수 있다. 수백 년 후의 효용을 예상하지 못하고 극히 상식적인 행동을 했다고 해서 비난을 받는 건 좀 과하지 않은가.
최만리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직접적인 대답이 될 만 지식을 있지는 않다. 다만 그가 상당히 능력있는, 그것도 세종의 신임이 상당한 관리가 아니었나하는 짐작은 해본다. 반대 상소를 올릴 무렵 그의 직책을 통한 짐작이다.
최만리의 직위는 집현전 부제학. 정3품 당상관으로 제학-대제학-영사의 상사가 있었지만 비상근직이었고 부제학이 상근직으로 집현전의 실질적인 수장이었다.
이를 염두에 두고 세종 시대 집현전의 위상을 살펴보자.
세종은 형 양녕대군에 이어 세자에 오른 지 1년여 만에 왕이 된다. 당시 조정은 아버지 태종의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태종은 왕에서 물러났지만 상왕으로 엄청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왕이 바뀌었지만 실질적으로 조정이 바뀐 건 없었다. 집권 초기 세종은 어떤 결정을 할 때 태종의 뜻임을 빌리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런 세종이 자기의 사람을 키운 곳이 집현전이다. 똑똑한 유생들을 모아놓고 공부를 시키고 정책을 가다듬도록 했다. 혜택도 많았다고 한다. 사가독서제가 대표적이다. 월급은 그대로 주면서 집에서 마음 편하게 공부만 할 수 있게 한 제도였다. 한 곳에 모아놓고 일을 시켰으니 조직력이 좋았을 것이고 좋은 대접을 받았으니 ‘보스’에 대한 충성심도 깊지 않았을까. 세종은 집현전에서 자신의 수족을 키웠다.
그렇다면 집현전의 수장은 능력이나 충성도 등을 따져 최고의 인재에게 맡겼을 거란 분석 또한 가능하다. 세종에게 최만리는 그런 인물이었던 셈이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은 최만리를 “직언을 잘 하는 인물”이었다고 평한다.
<대왕 세종>에서 황희와 최만리에 대한 묘사는 지금까진 두드러지지 않는다. 그래도 지금까지를 보면 황희는 ‘능력있는 정치인’으로, 최만리는 ‘피끓는 젊은 유생’이다. 대표적인 이미지인 청백리보다는 능력에 초점을 맞춰 황희를 그린다는 건 실제에 부합한다고 생각한다. 잡음이 적지는 않았지만 24년간 재상을 하면서 19년은 영의정에서 있었다는 건 그가 출중한 능력의 관리임은 분명하다는 말이다. 청백리가 아니었다고 말하지는 않겠지만 청백리의 이미지를 강조하지 않음으로써 실제 황희에 좀 더 다가갔다고 생각할 수 있다.
최만리 또한 한글 창제에 반대한 한 가지 사실만으로 꼴통 수구로 전락시키지 않았다는 점에서 좀 더 공정하게 다가갔다고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