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간 할머니
김명규
진자언니에게서 그 얘긴 열 번도 더 들었을 것이다. 우린 문우로 사귀어 온 지 십 육 년도 넘어 친자매처럼 가깝고 서로 흉허물이 없는 사이다. 언니는 중등교사로 퇴직하였는데, 당시 전라남도 어느 면소재지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던 삼십대 초반의 일이었다. 그는 연년생으로 형제를 낳았다. 지금은 그들이 훌륭히 장성하여 사회의 중요한 일원이 되었지만.
며느리가 맞벌이를 하고 있으니 언니의 시어머니가 두 손자를 돌볼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을 할머니가 길러주니 미덥고 편안히 직장생활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오후 마지막 수업을 막 들어가려던 참이었다. 동네 이장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박진자 선생을 급히 찾는다며 사환이 수화기를 넘겨주었다. 생소한 이장의 전화인즉 지금 박 선생 집에서 아이들 우는 소리가 몇 시간째 들려 옆집 아주머니가 가보니 방안에 갇힌 채 아이들만 둘이 울고 있다는 전갈이었다. 할머니가 안 계시고 어린것들이 울고 있다니 보강을 부탁하고 정신 없이 집으로 달음질쳤다. 그 순간 평소에 어미 노릇을 제대로 못해주었던 미안함이 이것저것 살아나 와르르 목울대가 뜨겁더란다.
학교에서 집까지 도보로 십여 분 거리였지만 천리나 된 듯 멀고 다리가 팍팍해서 걸음이 앞으로 나가질 않더라고 하였다. 집까지 백여 미터쯤 다가오자 마음이 점점 조여와 “현수야 현기야”하고 아이들 이름을 소리질러 불렀다. 청보리가 물결치는 오월의 들녘을 돌아 메아리치는 자신의 처량한 목소리에 그만 북받쳐 울었단다.
눈이 퉁퉁 부어오른 아이들을 옆집에서 데려다 씻기고 오랜만에 어미 손으로 밥을 지어 먹이니 안쓰럽기 짝이 없었다며, 그 일을 상기할 적마다 언니는 눈시울을 붉혔다. 장을 보러 가셨거나 읍내에 볼일이라도 생겨 잠시 외출하셨을 거라고 생각하였던 시어머니는 그날 밤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걱정이 되어 사립문 소리가 삐거덕거릴 때마다 방문을 열어보았지만 어머니의 기척은 들을 수 없었다. 그때에 시누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엄마가 집으로 오셨으니 걱정하지 말라며 간단명료하게 전화를 끊더란다. 두 손자를 방에 가두고 문고리를 잠근 채 그 길로 집을 떠난 시어머니였다. 어머니의 옷장을 열어보니 텅 빈 것이 마치 내장이 다 빠져나간 것만큼이나 허전하였다고 말하였다. 원 세상에, 눈 초롱초롱 뜨고있는 어린것들을 가둬놓고 할머니의 발걸음이 어떻게 떨어졌었을까 하는 것이, 두고두고 시어머니에 대한 언니의 섭섭함이었다.
대전으로 발령을 받아 나가있던 남편에게 전화하여 그 날의 사건을 구구절절이 말하였을 테지만, 언니에게 직장을 그만두든지 도우미를 두든지 하라며 아들은 어머니에 대한 섭섭한 감정을 전혀 엿볼 수 없었다며 삐쭉거렸다. 더 이상은 어머니에게 손자를 맡겨 고생시키지 말라는 것이 남편의 뜻이었다. 도우미 손에서 두 손자가 중학생까지 자랐지만 할머니는 딸네 집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주말에 어쩌다가 시어머니를 뵈러 가면 시누이집 살림을 도맡아 거두느라 짠지 조마니가 되어있더라고 질투 어린 속내를 드러내었다.
진자언니에게도 이젠 그 두 아들에게서 손자가 생겼다. 큰아들 내외가 독일 유학을 떠나면서 돌 지난 손자녀석을 안겨주고 간 것이다. 나와 자주 만나왔던 언니는 언감생심 외출은 생각지도 못해 좀처럼 얼굴 보기가 어려웠다. 아이 보느라 실랑이를 하고 있을 언니에게 전화를 거는 일도 조심스러웠다. 아이가 잠든 뒤에야 어쩌다 걸려온 언니의 목소리는 들릴락말락 잦아들었다. 그러면서 “어 어이! 동생, 이제야 우리 시어머니 생각이 간절하구만, 손자새끼 환장하게 이쁜 것이 내 몸에는 독이네 그려” 하며 그 고달픔을 호소하였다. “그런데 나는 딸도 없어서 도망갈 데도 없으니 어쩌면 쓰것는가 ” 흐흐흐, 힘없이 웃어대었다. “언니! 딸네 집으로 도망쳐서 짠지 조마니 되고 싶소?” 하고 나도 맞장구를 쳐대었다.
세상도, 먹고사는 것도 우리 때와는 너무도 달라졌다. 요즈음 태어나는 아이들은 잘 먹는 탓인지 지능 발달이 빠를 뿐더러 드세어서 그런 손자들을 할머니들이 감당하기가 너무 벅차다. 사위가 일찍 세상을 떠나 형편이 어려운 딸집에서 팔순이 넘도록 온갖 일을 다하는 시어머니가 가여워 진자언니는 이제 그만 집으로 모셔왔다고 한다.
딸집으로 가 사시는 동안에 한 달도 거르지 않고 언니는 시누이네 생활비까지 대준 모양이었다. 이제 아기처럼 되어버린 시어머니를 언니는 극진히 모셨다. 밖에 나와 일을 보고 들어갈 적이면 노인이 좋아하시는 떡이며 과자를 한 보따리씩 사들곤 하였다. 두 손자를 그만큼이라도 키워주신 어머니가 너무도 고맙고 고생을 시켜드린 것이 짠하다며 육십 중반을 넘어선 진자언니의 눈시울은 붉었다.
나에게도 딸이 있고 외손자가 있지만 딸이 맞벌이를 하고 있어 친할머니 댁에서 손자를 보시는 실정이다. 딸을 볼 때마다 시부모님께 잘해야 복을 받는다고 귀에다 조왕경 읽듯 하지만 딸의 대답이 언제나 석연치 않다. 건성으로, 잘하고 있으니 걱정 말라는 식이다. 내 딸도 언제쯤이나 시부모님께 대한 감동의 눈물을 적실까, 그 날이 멀게만 느껴진다.
( 2010. 7. 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