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치고 좌골신경통까지
증언자 : 김연성(남)
생년월일 : 1953. 3. 10(당시 나이 27세)
직 업 : 운전기사(현재 무직)
조사일시 : 1989. 1
개 요
화물차를 운전하셨던 김연성 씨는 5월 19일 금남로 중앙교회 앞에서 공수부대의 잔인한 진압 모습을 보고 시위에 참여했다가 붙잡혀 부상을 당했다.
현재 5·18 민중항쟁 민주기사 동지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기절할 때까지 두들겨맞아
나는 여섯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릴 때부터 어머님과 따로 살아 부모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모르고 자랐다. 화순에서 조부모님과 형 그리고 4명이나 되는 동생들이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어렵게 중학교를 졸업한 나는 이서우체국에서 1년 정도 임시직 집배원 생활을 했다. 그 뒤 기술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광주로 올라왔다. 목공기술을 조금 배우다가 경찰국에서 차 세차하는 일을 하면서 1974년 운전면허증을 땄다.
1979년에 군대를 제대하고 12월까지 고려화물에서 근무하다가 양성화물로 옮겼다.
1980년 5월 15일 화물차를 몰고 서울에 갔다가 18일 오후에 광주에 도착해 보니 동료 기사들이 공수부대가 투입돼 젊은 사람들을 무조건 곤봉으로 때리고 대검으로 찌르고, 차에 싣고 어디론가 간다고 했다. 심지어는 여자들까지도 발가벗겨 구타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19일 아침 8시 경, 광주역 앞에 있는 전국 화물알선소에 갔다가 12시경에 과거에 근무했던 고려화물로 가기 위해 금남로 쪽으로 걸어갔다. 금남로 중앙교회 앞에서 시민들이 공수부대와 대치하고 있었다. 전날 들었던 이야기도 있고 해서 나도 젊은 혈기에 시민들과 합세하여 공수부대에게 돌을 던졌다. 갑자기 공수부대가 쫓아오자 조흥은행 옆 골목으로 도망가는데 뒤쫓아온 공수부대가 '저놈 저기 있다'고 소리지르면서 달려들었다. 나는 다급한 김에 바로 옆에 있는 병원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뒤쫓아 들어온 공수부대에게 걸려 무지막지하게 얻어터졌다. 공수부대원 세 명이 이유 불문하고 막무가내로 두들겨 팼다. 나는 두 팔로 머리를 감싸고 학생이 아니라고 소리쳤다 "나는 학생이 아닙니다. 운전기사입니다."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는 너무 고통스러워 엉겁결에 옆에 있는 고무 쓰레기통 뚜껑을 집어서 뒤집어썼다. 속된 표현으로 '개창자 나오게' 얻어터지고 정신을 잃어버렸다.
내가 정신이 들었을 때에는 병원 침대에 누워 있었다. 간호원들이 하는 말이 내가 의식을 잃고 쭉 뻗어버리자 그제야 공수부대가 돌아갔다는 것이다. 간호원의 부축으로 간신히 택시를 잡아 집으로 가는데 어지러워 어디가 어딘지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내가 세들어 살던 집은 여덟 가구가 살고 있었는데 흉칙한 몰골로 들어서는 나를 보고 사람들이 다들 놀랐다. 온몸이 피투성이인 채 머리가 네 군데나 터졌고 손가락은 하나도 움직이지 못했다. 왼쪽 팔이 부어오르자 약을 사 먹고 판자를 대고 붕대로 팔을 감았다. 한숨 자고 일어나서 TV를 켰는데 나오지 않아 나는 전쟁이 일어난나 보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영락없이 죽었구나.' 전쟁이 났으면 피난을 가야 하는데 꼼짝달짝 못하고 누워 있으려니 죽게 되는 것만 같아 눈물이 다 나왔다. 시내가 난리가 났다는 소문을 들으면서 나는 오직 죽을 날만 기다리는 심정이었다.
21일, 총소리가 들리고 헬리콥터에서 방송을 하는데 몸이 아파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시내에 나갔다가 온 사람들이 불탄 차량에 대해 보고 들은 얘기를 전해 주었다. 며칠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집사람이 밖에 나갔다가 오더니 동네 입구 담벼락에 총알 구멍이 많이 나 있더라고 했다.
아마 27일 새벽이었을 것이다. 느닷없이 들려오는 요란한 총소리에 잠이 깼는데 놀란 가슴이 도무지 진정되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총알이 어디선가 날아 들어 올 것만 같았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떨고만 있었다.
투병과 운전기사 생활
그날 이후 시내는 조용했다.
6월 11일, 병원에서 무료로 치료해 준다고 해서 전남대 병원으로 갔다. X-ray를 찍었는데 왼쪽팔이 골절되어 있었다. 깁스를 하고 집에 오다가 동네 입구 첫 집 담벼락에 총구멍이 나 있는 것을 봤다. 그 집 식구가 총에 맞아 죽었다는 소리도 있었는데 내가 보지 않았기 때문에 확실히는 모르겠다.
집에 있는데 깁스 한 팔이 몹시 가려워 깁스를 풀어버렸더니 얼마 안 있어 팔이 몹시 아프기 시작했다. 며칠이 지나도 통증이 가라앉지 않아 할수없이 전남대 병원에 가서 다시 깁스를 했다. 그런데 계산서에 후불이라고 적혀 있는 것을 보고 혹시 깁스 풀러갈 때 돈을 달라고 할까봐 그 뒤로는 병원에 가지 않고 집에서 깁스를 풀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온몸 구석구석이 쑤시고 저려왔다. 그때는 집사람과 동거를 하던 중이라 아내가 대신 돈을 벌러 다녔다. 모아둔 돈도 없이 좋다는 약은 이것저것 구해서 먹는 통에 빚이 70여만 원이 돼 버렸다. 할 수 없이 형님에게 얘기해 빚을 갚고 1982년에 화순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아픈 몸으로는 도저히 농삿일을 할 수 없어 6개월 만에 다시 광주로 올라왔다. 그 뒤로는 이곳저곳 택시회사를 기웃거렸지만 몸이 아파 제대로 한 달을 근무한 적이 없었다. 운전은 하루 종일 앉아서 하는 것이라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번에는 좌골신경통까지 걸렸다.
약을 먹으면 운전을 하다가도 잠이 와 길가에 차를 세워놓고 잠을 자야 했다. 그래서 간신히 사납금을 채우거나 아니면 채우지 못할 때가 많아 가불도 많이 했다. 좌골신경통은 약이나 파스로는 도저히 치료가 되지 않아 한번에 15만 원이나 하는 금침을 사정사정해 5만 원에 맞았다. 금침을 맞고 나면 20여 일은 괜찮다가 침 기운이 떨어지면 다시 통증이 왔다. 영신택시에서 8개월을 끝으로 택시운전은 도저히 못하고, 화물차나 자가용 대모(일일 고용기사)를 했다. 그러나 일이 별로 없어 생계유지가 어려웠다.
집사람이 식당에 일을 나가면서 벌어오는 돈으로 겨우 먹고살기는 하지만 생활이 말아니었다. 나이도 젊은 놈이 아프다는 이유로 마누라가 벌어오는 돈으로 먹고사는 것이 여러 모로 죄책감이 들어 1987년에 금성식품 차를 5개월 정도 운전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무릎이 아프기 시작했다. 신경통인지 관절인지 병원에 가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침을 맞으며 치료했지만 별 차도가 없었다.
지금도 조금만 구부리고 있으면 무릎이 쑤시고 결리며 무거운 것을 들면 어깨가 빠질 듯이 아파 힘든 일은 하나도 못 한다.
시골에 사시는 형님에게 들으면 지서에서 경찰들이 가끔씩 나와 내가 어디에 있는지 확인하고 간다고 한다.
5·18 광주의거부상자동지회에는 올 3월에 가입했다. 전에 얼굴만 아는 사이였던 사람이 이야기를 해 그때야 그런 곳이 있는지 알았다. 올 6월에 부상자동지회에서 그 당시 기사였던 사람들의 독자적인 모임이 필요하다고 하여 5·18 민주기사동지회가 창립되어 민주기사동지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보상금이랍시고 3백만 원을 받았는데 그동안 진 빚 갚고 나니 남은 것이 하나도 없다.
요즘 광주특위 청문회를 보면 울화통이 치밀어 TV를 부숴버리고 싶은 충동을 자주 느낀다. 모른다, 기억이 안 난다고 오리발만 내미는 청문회지만 거짓말을 얼마나 잘하는지 두고 보려고 꼭 보고 있다.
나는 의식이나 신념이 투철하지는 않지만 1980년 5·18 민중항쟁은 반드시 진상 규명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보상은 진상규명 그 다음 문제가 아닐는지.......
(조사정리 이현주) [5.18연구소]